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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야누쉬 코르착’은 누구이며 그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코르착 읽기》서평
이정아_방정환연구소 연구위원
잔물결공부모임에서 만난 코르착
‘야누쉬 코르착’을 처음 안 것은 지난해 2월 14일
우리 부부와 친분이 깊은 분도출판사의 강창헌
편집장님을 통해서다.‘방정환의 어린이문화운동과
교육사상 연구’라는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는 필자에게
꼭 추천해 주고 싶은 인물이라 소개해 주었다.
몇 달 뒤 필자는 방정환한울학교 잔물결공부모임에
이 인물을 소개하였다.
잔물결공부모임은 2016년 11월 3일 방정환한울학교 연구위원으로 추천된 분들과 준비모임을 가진 이후, 그 인연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잔물결공부모임에서는 ‘방정환어린이운동사’(이주영), ‘방정환연구사’(염희경), ‘방정환 교육철학’(안경식),‘방정환 문학’(장정희) 등의 강연이 이어졌고, 이후《어린이찬미》,《숲속나라》,《김기전 전집》,《우리들의 하느님》,《빌뱅이언덕》, 김용휘의《방정환평전》,《사랑의 선물》,《어린이독본》,《진보주의 교육의 세계적 동향》등의 책을 한 달에 한 두 번씩 모여 읽어 왔다. 지금은 방정환어린이도서관에서 잔물결공부모임을 한 달에 한 번씩 하고 있다.
그럼 왜 이 시점에 ‘야누쉬 코르착 읽기’를 시작하였는가? 이는 그의 삶과 행보가 방정환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코르착 읽기》는 잔물결공부모임에서 3회에 걸쳐 강독되었고, 지난해 10월 17일, 11월 21일, 12월 12일 모임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코르착 읽기》는 감리교신학대학교 송순재교수가 2017년에 번역하였다. 코르착의 마지막은‘유대인 게토’에서 같이 살았던 아이들과 함께 죽음의 용광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것으로 기억된다. 《코르착 읽기》역자는“교사는 단지 지식을 제공하는 직업인이 아니며, 사회적으로 신분이 보장된, 어떤 그럴듯한 직함을 가진 교사도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교사는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하고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르착의 생애와 업적 : ‘의사로서 글을 쓰는 교육자’
코르착은 1878년 바르샤바의 한 유대계 폴란드인 가정에서 변호사 아버지 유제프 골드슈미트, 어머니 케칠리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저명한 의사였다. 코르착은 필명이며, 본래 이름은 헨릭 골드슈미트였다. 아버지는 헨릭이 열한 살 때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정신질환을 일으켜, 7년 뒤에 돌아가셨다. 이런 이유로 코르착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식구들도 책임져야 했다. 이 시기 그는 아이들이 스스로 살아가고 결정할 권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그들의 해방된 삶을 위해 소아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98년 그는 바르샤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나타났던 ‘문학적 천분’으로 대학을 입학한 이듬해 ‘야누쉬 코르착’이란 필명으로 《길은 어디에》라는 4막짜리 극작품을 바르샤바 쿠리어라는 문학경연대회에 출품하여 수상한다. 이는 방정환이 소설 《우유배달부》를 쓰고, 1918년 한용운 발행의 『유심』지에 《고학생》소설 당선 등 본격 소설가로 데뷔하였던 점과도 비슷하다. 방정환과 코르착의 문학적 소양은 이후 활동에도 큰 자양분이 된다.
청년 시절 그는‘유랑대학’일원으로 활동하였는데, 당시 열악하고 비참했던 폴란드의 대학 분위기를 해외 다른 대학으로 가서 극복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코르착은 폴란드 안에 있는 국민들을 서로 아끼고 자랑할 만한 비밀스런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 모임은 저명하고 다양한 분야(사회학, 지리학, 철학, 교육학, 동양학 등)의 학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으며, 1898년에서 1900년 사이 이 비밀스런 대학모임은 절정에 달했다. 이때가 공인되지 않은 초등학교서 비밀수업을 통해 새로운 교육의 방향을 모색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코르착은 이 모임에도 관여하였는데, 방정환이 어린이문제연구소로 시작하였던“색동회”를 떠올리게 한다. 급진적인 지식인 운동의 중심 속에서 삶의 동지를 찾았고, 이 때 맺어진 우정은 평생 계속되었다.
1901년 그는 최초의 소설 《거리의 아이들》을 펴내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뛰어 들었는데, 이 소설은 바르샤바 빈민가에서 나락에 떨어진 삶의 현장을 목격한 후 분노에 차서 쓴 소설이었다. 이런 글 쓰는 일로 생계를 꾸려 나가면서, 코르착은 억압받고 권리가 박탈당한 계층의 아이들에게 몰두하였다. 1904년 그는 의학 공부를 마치고 바르샤바의 바우만-베르송-어린이병원(유대인 아이들을 위한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게 된다. 의사로서 일하며, 의술과 어린이를 대하는 방법에 관하여 라디오 방송이나 강연 활동을 시작했고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소논문, 교육이야기, 동화, 희곡들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교육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널리 알렸다. 그는 이 시기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의사로서 글을 쓰는 교육자’로 삼았다. 그는 아버지의 정신병이 유전될까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아이도 없었다. 그 대신 수백 명의 아이들을 돌보며 평생을 살았다.
코르착은 노동자 자녀를 위한 ‘여름계절학교’에서 동료의사 엘리아스 베르크와 함께 일했다. 1903년부터 1908년까지의 이 같은 경험은 그에게 이론만이 아닌 실천적 교육학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폴란드에 있던 복지회는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되지 않은 비합법적 시설로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그나마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적어도 이론적으로나마 이런 사설단체들이 합법적 단체로 거듭날 수 있었으며 어린이구호와 교육을 위한 단체들이 많이 생겨났다. 매년 여름 코르착은 이런 복지회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보냈는데, 그 경험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그의 교육관을 바꿔버릴 정도로 값진 것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직접 생활하면서 현장의 아이들과의 일상은 의사로서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가 추구했던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신뢰, 아동심리학 지식은 현장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자기객관화를 할 수 있는 비판적 눈을 가지게 된다.
1906년 그는 바르샤바의 노동자 주거지역에 있는 소아과 병원의 소아과 과장 대리로 부임하면서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1년, 파리에서 반 년, 그리고 런던 등지에서 1개원 동안 실습 경험을 했다. 1909년 그의 인생의 결정적 계기가 찾아오는데, 그해 겨울, 유대인 어린이를 위한 한 고아원의 기념행사에 초대를 받았고, 여기서 코르착은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돌봐달라는 부탁을 수락했다. 이후 너무나 열악했던 고아원을 새롭게 짓기로 결심하고 ‘고아복지회’와 함께 모금사업을 벌여 자금을 모았으며, 1911년 ‘고아들의 집’이라는 뜻‘돔 시에로트’ 가 세워졌다.
1918년에 쓰여진《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는 ‘돔 시에로트’책임을 맡은 후, 처음 몇 년 동안 겪었던 자신의 값진 경험을 토대로 쓴 책이다. 이 책은 1914년 1차 세계대전으로 야전군 군의관으로 참전한 동안 러일전쟁 당시 쓰여진 책이다. 그는 독일군의 침공으로 고아원이 해체될 때인 1942년 까지 책임자로 일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이들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공동체 삶을 꿈꾸며‘어린이 공화국’을 만드는 시도를 했다.
그는 낮이면 아이들과 고단한 일상을 함께 하였고, 밤이면 고아원 다락방에서 교육학적 연구에 몰두하면서 이론과 실천이 일치될 수 있도록 애를 썼다. 특히 유럽 여러 나라의 선진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19세기 중엽 ‘삶을 위한 학교’를 주창했던 덴마크의 그룬트비, ‘미래’의 학교를 꿈꾸었던 《아동의 세기》의 엘렌케이, ‘가정교사학교’를 연 베르톨드 오토, 로마에서 ‘육아원’을 시작한 마리아 몬테소리, 영국의 ‘보이스카우트’ 운동, 독일의 ‘철새운동’등 개혁교육학의 흐름을 끊임없이 이론적으로 탐구하였고 현장에서 실천하였다. 코르착은 칸트와 루소, 페스탈로치를 알고 있었으며, 이런 사상적 연관 속에서 19세기 ‘계몽주의 철학’의 주체라 할 수 있는‘개인의 가치와 소중함’에 대해서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 전반에‘사회개혁’적인 요소를 품고 있었다.
키예프의 군병원에서 일하면서 폴란드 소년들을 위한 기숙사와 교류하였고 1918년 말경 바르샤바로 돌아와 폴란드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인 ‘나쉬 돔(우리 집)’을 세우게 된다. 이후 1923년 그가 쓴 가장 훌륭한 작품인 《마치우스 피에르프스키왕》이 발표된다. 이 작품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영리한 소년이 불행히도 왕으로 태어나 세상을 바꿔보려 노력하다 실패하는 비극을 다룬 동화이다. 1926년에는 어린이·청소년 잡지 《미위 프쉐글룽드》를 편집·발간한다. 1928년에는 자유폴란드대학에서 강의도 하게 되었다. 이 때《아이들이 존중받을 권리》가 출간되었다. 그는 철학에서 방법론까지, 사상에서 일상적 삶의 면면에 이르기까지 교육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하였다. 이런 이유로 코르착의 사상은 소크라테스, 페스탈로치, 마르틴 부버를 통해 읽혀질 수 있다.
코르착과 방정환의 닮은점
마지막으로 필자가 보기에, 코르착과 방정환은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루며 비슷한 점이 많다.
첫째,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 영역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가정사를 살펴볼 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가정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면서 코르착은 억압받는 아이들에게, 방정환은 식민지 아이들에게 온 정성을 쏟게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타고난 문학적 소양은 이후 교육적 문예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소설가로서 데뷔를 하였고, 이후 아동 교육관련 글과 잡지에도 관여를 하였다.
넷째, 선진 학문에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탐구하고 교류했다. 코르착은 루소, 페스탈로치, 몬테소리 등에서 교육학적 영감을 얻었고, 방정환은 일본의 도요대학에 청강생으로 있으면서 일본의 선진문물을 접했다.
다섯째, 코르착과 방정환 모두 어린이권리를 위한 사회개혁에 관심이 많았고, 그들과 함께 운동을 이끌어 갈 동지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여섯째, 코르착과 방정환의 교육실천은 종교적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방정환은 천도교를 기반으로 아이를 한울로 모셨으며, 코르착은 유대교의 ‘하시디즘’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고유한 인격체로 보았다.
1878년생인 코르착과 1899년생인 방정환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두 인물은 만난 적은 없지만 어린이를 독립적이고 주체적 존재로 보고 그들의 권리를 굳건히 하기 위해 한 평생 어린이들과 함께 하였다. 코르착은 200명의 고아들과 가스실이 있는 트레블링카로 가는 길을 함께 하였으며, 방정환은“어린이들을 부탁한다”는 말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코르착과 방정환 모두 평생토록 몰두했던 주제는 ‘어린이’였다. 《코르착 읽기》서평을 쓰면서, 두 인물에 대한 면밀한 비교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