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출처: 鳳村文集
*고은 註
봉촌 최상룡은 입재 정종로 문하에서 수업하여 당대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다.봉촌 최상룡의 문집에는 묵암 배극소에게 보낸 편지(與:한 편은金希仲과 배극소連名) 2편과 묵암 배극소의 편지를 받고 보낸 답장(答) 3편이 실려있다.
답장 3편은 모두 안부와 함께 학문의 물음에 대한 問目이다.
최상룡의 봉촌 문집에는 묵암 배극소가 최상룡을 애도하여 지은 제문이 실려있으며 제문에 門生으로 표기되어 있고, 서신을 보내어 학문(학설)에 대에 문의한것과 연배를 고려하면 사제지간으로 추정된다.
봉촌문집의 서신으로 보아 적어도 같은 분량의 서신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묵암집에는 봉촌 최상룡에게 보낸 답장 한 편만 실려있으며 제문도 누락되었다.
봉촌 문집의 서신 내용을 번역하면 학문 교류에 대한 두 사람의 관계를 조금 더 깊이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상룡(崔象龍)
1786(정조 10)∼1849(헌종 1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 달성(達城)의 강동(江洞)에서 출생. 아버지는 최흥한(崔興漢)이며, 어머니는 영산신씨(靈山辛氏)로 신광준(辛光俊)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학문을 배우고 뒤에 정종로(鄭宗魯)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22년(순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1823년(순조 23)에 유생들이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서얼(庶蘖)의 관리 임용을 청할 때 소수단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1827년(순조 27) 서학의 교주 이경언(李景彦) 등의 처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사학이라고 천주교를 배척했다.
세상이 어지러워 분경(奔競: 엽관운동)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독암서당(讀巖書堂)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문전을 매웠다. 고을의 과거한 사람의 명부를 보관하는 사마소(司馬所)를 중수하고 향약의 세부지침을 만들어 자치제도를 확립하고 마을의 풍속을 규정했다.
당시의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유치명(柳致明)·김익동(金翊東) 등과 경전과 예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으며, 경전(經典)의 주요 내용을 도시(圖示)하여 맥락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성리학과 훈고학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사서변의(四書辨疑)」·「재이록(在邇錄)」·「소학췌의(小學贅疑)」·「계몽차의(啓蒙箚疑)」·「정주서변의(程朱書辨疑)」 등 많은 논문을 남겼으며, 저서로는 『봉촌문집(鳳村文集)』 22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