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에게 물어봐
오리인가? 기러기인가? - 허위 과장광고와의 싸움
『최고의 건강식품, 성공의 보증수표 식용기러기 양식』
『백복령 재배, 100평당 천만원 소득보장』
한때 농업전문지를 도배하던 광고의 한 구절이다.
농촌은 언제나 정보가 부족하기에 농업인은 광고에 취약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새로운 작목, 소득작목의 정보에는 누구라도 혹하게 된다.
그런데, 농촌과 농업인 대상의 광고에 대해 그 진위를 파악하고 검증하여, 허위나 과장에 대해 문제를 삼거나 시정을 요구하는 기관이 전혀 없었다.
그 때문에 허위광고, 과장광고에 현혹되어 피해를 입은 농업인이 그 광고가 실렸던 신문이나 잡지사에 피해를 호소하고 배상을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농업인의 피해가 나타날 때 쯤 에는 문제의 업자는 이미 멀리 도주하고 없거나, 업체 자체가 이미 폐업하거나 없어져 책임을 추궁할 대상마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문사 잡지사가 광고에 대해 책임을 지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결국 허위 과장광고의 피해는 물정에 어두운 우리 농업인의몫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오래 전, 우리 농촌을 들뜨게 했던 기발한 소득작목이 있었다.
칠면조, 메뚜기, 지렁이, 호로호로 새, 밍크, 은여우, 뉴트리아, 알로에, 타조, 바바코, 로얄 세븐, 엘더베리, 허브 등이 대표적인데, 분양업자의 광고에 홀려 너도 나도 뛰어 들었다가 큰 손해만 입고 끝났던 것이다.
식용기러기, 백복령의 광고 역시 옛날의 그런 작목과 대단히 유사하여 광고내용을 정밀 조사했다.
조사 결과 식용기러기라고 선전되는 머스코비(Muscovy)는 기러기(雁, a wild goose)가 아니라 오리(鴨, duck)임이 밝혀졌다.
원산지 남미에서는 머스코비 오리(Muscovy duck)로 불리고 있었고, 학명은 Cairina moschata, 분류학상으로는 기러기목, 오리과에 속하는 명백한 오리일 뿐 아니라 그 알과 병아리를 수입하는 수입서류에도 분명히 Muscovy duck, ‘머스코비 오리’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이 오리가 분양업자의 농간으로 식용기러기(a wild goose, Muscovy goose)로 농가에 분양되었다가 농가에서 사육된 다음, 판매할 때는 다시 오리(Muscovy duck) 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축산농가는 기러기 병아리를 한 마리당 6천원 대에 분양받아 4~5개월 기른 것을 한 마리당 3~4천원 대에 오리로 팔게 될 것이 뻔한데, 이 손해를 어찌할 것인가.
광고를 낸 분양업자를 불러 이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유명한 조류학자를 들먹이며 「오리가 아니라 기러기가 분명하고 그 분이 학술적 보증을 해 주었다」고 우겼다.
결국, 그 유명한 원로 조류학자를 상대로 학술토론까지 벌여야 했다.
원로 선생님은 병아리 분양업자들이 찾아와 ‘선생님의 학문과 지혜를 농가소득 증대에 활용토록 하면 좋겠다’고 하기에 별 의심 없이 그리 하라 했고, 오리를 기러기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오리과(科)와 기러기과(科)가 모두 기러기목(目)에 속하므로 크게 보면 오리도 「기러기족속」이라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원로 선생님께 '오리와 기러기는 분류학상 근연(近緣)이라 하더라도 혼동되지 않는 전혀 다른 동물'인 점, 병아리 분양이나 농장에서 관광객에게 소개할 때 잠시 한순간은 속일 수 있지만, 언제까지 속일 수 없다는 것, 외국에서도 머스코비 오리(Muscovy duck)로 표기하고 있고, 특히 기러기와 거위가 같은 종(種)이지만, 거위를 기러기로 표현해도 안 되는 것, 선생님의 이름을 팔아 분양업자들이 배를 불리는데, 그 결과는 수많은 농가의 피해로 귀결된다는 점을 설명했다.
이 토론은 아주 간략히 압축 표기한 것인데, 실제로는 거의 5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동물분류 사전 사본이 팩스로 몇 차례나 교환되고, 쟁점에 대한 논의 결과를 메모와 문서로 만들기 까지 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재승 차장의 활약은 실로 괄목할 만 하였다.
당시 갓 시작된 인터넷을 활용하여 세계조류학회의 홈페이지와 미국 예일대학교 홈페이지를 연결, 동물분류표를 검색, 라틴어로 표기된 학명을 줄줄이 인용하고 그 내용을 즉각즉각 팩스로 보내 주며 상대방 원로교수님을 학술토론으로 확실히 제압하고 설득해 낸 것이다.
토론이 거의 끝날 무렵, 원로 선생님은 자신이 너무나 순진했음을 인정하고 즉시 오리 분양업자들에게 기러기라는 표현을 쓰지 말 것과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거론하거나 팔지 못하게 하겠다고 확실히 못을 박아 주었다.
그리고 곧 오리 분양업자를 중앙회 사무실로 소환, 「식용기러기」와「고소득 보장」라는 표현을 광고에 쓰지 말 것을 요구했다.
분양업자는 펄쩍 뛰면서 그러한 요구의 근거와 농협에 그러한 권한이 있는지를 따지며, 만약 월권이라면 모두 다 목이 달아날 것이라는 말으 ㄹ서슴치 않았다.
우리는 소비자보호법과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시하고, 그 법률에 근거하여 농협이 한국소비자보호원(현재는 한국소비자원)과 업무협약을 체결하여「농업인 소비자보호사업」을 하고 있음을 설명 했다.
그리고 지금 오리문제를 다지는 것은 소비자보호사업의 하나이고, 농가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이며, 우리도 목을 내놓고 투쟁하는 것이라고 맞섰다.
오후 내내 격렬한 논쟁과 치열한 설전, 신경전 끝에 결국 분양업자는 그 후부터 「식용기러기」라는 문구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고, 피해를 입을 뻔 했던 수많은 우리 농가들은 피해를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식용 기러기」라는 표현을 쓰는 곳은 그 때 오리고기 식당을 열었던 음식점들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머지않아「식용 기러기」라는 말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만약 훗날 누군가가 또다시 「식용기러기 분양」이라거나 그와 비슷한 장난을 벌인다면 이 글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쉽게 제압, 농가의 피해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백복령」의 수익보장 광고였다.
「복령」(茯笭) 은 오래된 소나무의 뿌리에 생기는 버섯으로 주로 한약재로 쓰이는데, 인공양식법이 개발되자 종균(種菌) 분양업자들이 그 내용을 한껏 부풀려 광고를 한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너무나 훌륭한 작목, 광고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농촌의 모든 문제가 복령 양식만으로 단번에 해결될 것 같았다.
「100평당 천만원 소득보장」이라는 문구에 대해 업자를 불러 「어떻게 소득을 보장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만한 소득을 장담한다는 뜻입니다.”
“그 장담을 무엇으로 보증합니까?”
“보장한다는 광고에 무슨 단서가 붙습니까?”
“소득을 보장한다면 우리 농가에서는 어떤 경우든 그 금액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영농의 결과 그 보장금액에 미달하면 업체가 그 금액을 채워 준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 정도는 저희가 보장하고 장담합니다.”
“그러면 내가 2천평을 재배 할테니 보장하는 2억원의 담보를 제게 제공해 주십시오.”
“그건 곤란합니다.”
“곤란한 내용을 광고로 표현하면 허위광고가 되지요.”
“이런 일은 다반사입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농업관련 광고는 다 그래요.”
“그래서 우리가 나섰습니다. 앞으로 농업관련광고는 아주 엄격해질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엄격해 집니까?”
“모든 표현에는 반드시 근거가 확실해야하고 문구대로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품질이나 성능을 강조하려면 반드시 「공인기관의 시험성적서」가 있어야 하고, 혜택이나 수익을 보장한다면 그 업체가 「보장금액을 공탁」하거나 「담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제일’이니 ‘최고’니 ‘유일’이니 하는 표현도 모두 사실과 부합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농협이 모든 광고를 모니터하고 그 내용을 검증하며 위법이나 허위, 과장에 대해서는 엄격히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농협이 아예 검찰 노릇을 한다는 뜻인가요?”
“허위, 과장광고 여부에 대하여는 한국소비자보호원과 공정거래 위원회가 판단을 할 것이고, 처벌은 경찰과 검찰의 수사와 기소, 법원의 판결로 형벌이 결정될 것입니다. 농협은 허위와 과장에 대한 문제제기와 판단, 의견제시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처벌의 발단은 농협에서 비롯되고, 농협이 수사나 재판 여부를 결정하는 셈이 되네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의 절차와 순서는 그렇습니다.”
“결국, 농협이 인정하지 않으면 곧 수사와 처벌이 따르고, 농협이 인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되는군요.”
업자들은 얼굴색이 굳어져 돌아가며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뱉었다.
“정부부처는 안 나서는데, 어떤 놈이 나서나 했더니 농협이군, 밤길 조심하슈.”
이 과정에서 백복령 사업자 한사람이 처음에 커다란 회칼을 탁자에 올려놓고 살벌한 분위기를 잡았기에 한동안 본부 각 부서에 ‘하나로봉사실에는 1m나 되는 회칼을 든 민원인이 설친다더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백복령 광고에서 「고소득 보장」을 비롯, 무리하거나 확인되지 않은 내용, 실현 불가능한 내용, 「최고」나 「최초」 「최우수」 같이 배타적인 내용은 모두 빠지게 되었다.
그 이후, 일간신문은 물론, 농업전문지, 월간잡지, 기술정보지를 모두 모니터하여 농업과 농촌관련 광고의 표현, 내용, 수치(數値) 등을 일일이 조회하고 문제 삼자 허위광고와 과장광고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영농자재 중 효소비료의 「30% 증수」라는 표현은 공인기관의 시험성적이 없기에 삭제토록 하였고, 「최고의 성능, 최하의 가격」이라는 표현은 기준이 없는 배타적 표현이어서 또한 삭제토록 하는 등 표시광고에 새로운 기준을 확립한 것이다.
이 일로 농협은 농업과 농촌을 침탈하려는 외부 악덕상인과 싸워 농업인을 지켜 주는 「농업 지킴이」역할도 맡게 되어 농업인에 대한 서비스의 내용과 농협의 직무영역을 더 넓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례를 정부에 보고하여 큰 칭찬을 들었고 결국 이 시스템이 정책에 반영되어 「표시·광고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로 법제화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우리가 할일이 얼마나 많은가? 또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어디 있을까?
우리 농업과 농촌, 농업인을 보호하고 살리는 일이라면 장벽도 제한도 없을 것이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나도 몇마리 키우기는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