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한집(破閑集) 2 문화가 산책/jps
<1> 전람회의 그림 作者之謂聖/ 禮記
코엑스의 2012 KIAF 전시장이다. 우리 회원들 김태호 교수님 등 낯익은 작가들의
작품들이 많이 전시 되고 있다. Mr. 망치질의 작품 인간 군상, 스페인 작가가
다빈치를 훌륭하게 패로디한 작품, 김종학(설악산 작가 아님)의 철사작품 푸른 새우,
조용남의 작품 화투장 등이 눈에 띈다. 좀 안타까운 것은 표절인지 모방인지 패로딘지
영화배우 하정우의 작품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진다. 배총무가 전해준 바로는,
그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아무런 제약 없이 작업할 수 있는 미술을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영화배우가 미술세계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지식인은
오히려 미술 전시장에서 영화예술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깊은
2012년 가을. 김기덕 감독이 영화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그의 영화 피에타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는데도 국내 상영관에서 적절한 스크린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김 감독은 우리 영화계를 큰소리로 꾸짖고 있다.
우리 영화계에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불편한 진실이 있다. 즉 실험영화나
예술영화와 같이 대중성이 없는 영화는 상영관을 제대로 찾기 어려운 현실이다.
사실 영화예술은 제작비용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흥행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예술 발전을 위해서는 실험적인 작품도 상연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논리도
1964년, 또 다른 김기덕 감독은 한국영화의 걸작 “맨발의 청춘”을 발표했다.
깡패 신성일, 외교관 딸 엄앵란, 이예춘, 윤일봉 등 당시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했다. 김 감독은 이 영화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스타를 탄생시켰다. 원래
깡패 신성일과 엄앵란이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서 情死를 하면서 영화는
끝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김 감독은 자신의 재량으로 러닝 타임을 3분 연장한다.
똘마니 트위스트 金이 “형, 형!” 부르짖으며 깡패의 시신을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리어카에 싣는다…… 쓰레기 통을 뒤져 헌 구두를 찾아 낸다…… 가마니 밖으로
살며시 삐져나온 맨발에 구두를 신긴다…… 하늘을 보면서 구슬피 울다가 혼자
개봉 첫날, 단역배우 트위스트 金은 관객의 반응이 궁금해서 모자를 눌러쓰고
아카데미 극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종로 YMCA 앞에서는 관객들이 눈물을
닦으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결국 그는 그 똘마니보다 더 구슬피 우는 관객들에
얼마 후, 트위스트 金은 자신의 신분이 급상승한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지방공연을
갈 때 그것을 확실히 느꼈다. 당시에는 지역 깡패들이 공연장에 찾아와 여배우의
술시중이나 금전을 요구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런데 트위스트 김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은 경의를 표하고 조용히 물러났다고 한다. 그는 이미 깡패세계에서
우상이 되어 있었다. 의리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그들에게 그 영화의 라스트 신은
이 영화는 일본 드라마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러나 소위 종합예술인
영화에 관하여 그 스토리만으로 표절을 논하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한다. 김기덕
감독의 이 영화는 이봉조가 작곡한 최희준의 OST (주제가)와 함께 그 후로 반 세기
1960대 초반 우리 문단에서는 청년작가 두 명이 조용히 獨佛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비슷한 연배의 라이벌처럼 보이던 독문과 출신의 이청준과 불문과 출신의
김승옥이었다. 이들은 우리 문단의 거목이지만 영화예술과도 약간의 끈을 맺고 있다.
이청준은 먼 훗날 그의 작품 ‘서편제’가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고 김승옥의
작품 ‘무진기행’은 1967년 김수용 감독에 의해 영화로 재 창조 된다.
이 무진기행은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짧은 단편소설이다. 어느 자료에
의하면 한국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장편소설로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고
단편소설로는 이 무진기행이라고 한다. 김승옥의 이 소설도 훌륭하지만 그의 출세작
‘1964년 겨울’ 역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는 당시 부동의 1위를 고수하던 신성일, 지금 파리에 사는 윤정희, 그리고
전직 국회의원 이낙훈이 등장한다. 당시 청년작가 김승옥은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 되는
것이 너무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촬영장을 떠나지 않고 맴돌면서
그런데 영화개봉 3일 전, 당초 계획에 없었던 주제가의 제작이 결정되었다. 당시
업계의 부동의 1위 이봉조는 그 다음 날, 삐쩍 마르고 키가 큰 여고생을 하나를 작업실로
데리고 와서 리허셜을 시켰다. 김수용 감독은 화를 내면서 말했다. “李 선생,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데 저런 애송이에게 주제가를 맡깁니까? 중진급 가수로 바꿉시다.”
김감독이 말한 중진급 가수는 바로 이 선생하고 각별한 사이이면서 ‘밤 안개’를 부른
부동의 1위 여가수 현미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천하의 김수용 감독도
이 선생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드디어 개봉 하루 전날, 이 선생은 겨우 작곡을
마쳤는데 아직 노래 가사가 완성되지 않았다. 이 선생은 너무 급해서 작사의 미완성
부분을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로 하기로 결정했다.
‘무진기행’이 일반인에게 좀 생소한 것 같아 제목은 ‘안개’로 바뀌었다. 영화와 주제가는
모두 과거 흥행기록을 갱신하였고, 평론가들은 프랑스 영화 ‘남과 여’의 한국판이라는
극찬을 했다. 그 삐쩍 마른 여고생 ‘정훈희’ 역시 데뷰와 동시에 스타가 되어 버렸다.
1980년대 후반 이 선생이 급서하였다. 당시 ‘KBS 연예가 중계’ 카메라는 흰 상복을
입고 나란히 서서 그 똘마니보다 더 구슬피 우는 두 여인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고인의 가족보다 그녀들에게 훨씬 긴 시간을 할애했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바꾸어 준 李 선생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1970년대 초반, 작가 최인호가 등장한다. 1974년, 그의 ‘별들의 고향’이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된다. 문오 역은 달리 대안이 없이, 역시, 또, 그 신성일이 그리고
경아 역은 大農으로 간 안인숙이 담당했다. 이 영화는 “오래간만에 같이 누워보는군……”의
불후의 명 대사를 남기고,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한잔의 추억’ 등의 주제가로
지금 울릉도에 사는 이장희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작가 최인호에게는
부동의 1위 자리를 선사하고, 이장호 감독에게는 데뷰작을 대성공한 감독이라는
1975년, 하길종 감독은 작가의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작품을 영화화하고 송창식은
‘노래 고래사냥’, 왜불러 등의 주제가를 불렀다. 1984년, 배창호 감독이 작가의 ‘소설 고래사냥’을
영화화하여 안성기 이미숙 김수철이 열연하였다. 그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무조건 기록을
갱신하는 흥행을 기록하게 되었다. 작가 최인호의 주가는 한층 올라갔다.
참고로, ‘영화 고래사냥’에서는 ‘노래 고래사냥’이 나오지 않는다. 당시 이 노래는
방송금지 곡이었다. 그 대신 그 영화에서는 김수철의 젊은 그대가 OST로 등장한다.
‘노래 고래사냥’의 방송금지 사유로 포경수술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현실을 도피하고 동해바다로 자살하러 가는 영화장면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최인호 원작의 수많은 영화를 보고 그의 수많은 작품을 읽었겠지만,
‘노래 고래사냥’의 가사처럼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노래방이나 야구장에서 수없이 목이 터져라 이 작품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 노래가사는 최인호의 작품이다. 어쩌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봐도……”의
노래가사가 바로 최인호의 대표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약간 이야기가 빗나가는 것 같지만, 국문학계의 거목 양주동 박사의 학문적 성과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의 노랫말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음악은 다른 예술보다
더 호소력 있고 그 전파력도 더 크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 라는 명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일찍이 독일인 쇼펜하우어가 한 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인용을
공교롭게도 영국인 월터 페이터도 이와 비슷한 뜻으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모든 예술은
음악의 조건에 접근하고자 한다. 음악을 제외한 예술은 내용과 형식이 구분되고 우리의
오성은 그것을 구별할 수 있다. 따라서 음악을 제외한 예술은 그러한 경계를 지우기
독일인의 말은 너무 간단해서 어렵고, 영국인의 말은 너무 길어서 어렵다. ‘달을 가리킬 때,
다른 예술들은 손가락이 필요하지만, 음악은 손가락 없이도 바로 달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누군가의 설명은 그래도 좀 이해하기 쉽다.
음악을 제외한 모든 예술은 재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한다. 미술은
캔버스, 물감 등 수명이 있는 재료를 사용하며 그 감상에는 어느 정도 분석의 작업이
필요하다. 반면 음악은 소리를 그 재료로 사용하므로 언제나 재생이 가능하고, 분석의
작업이 없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공감할 수 있다.
문학은 어떤가? 문학은 미술처럼 유형적인 재료가 아니고 관념적인 언어를 재료로 하므로
미술처럼 재료의 수명의 문제는 없다. 그러나 문학은 일단 문맹인 사람에게는 그 감상의
기회가 닫혀져 있다. 그리고 문맹이 아니더라도 다른 언어권의 문학은 반드시 번역을 거쳐야
이렇듯 미술이나 문학이 재료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바로 ‘음악처럼 재료의 제약을
받지 않는 상태’를 동경하는 것으로 지식인은 해석한다. 그런 면에서 지식인은 미디어 아트를
주목한다. 이 분야에서라면 미술이 소위 재료에 의한 제약에서 어느 정도 벗어 날 수 있다.
모니터가 파괴되거나 도난 당해도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서 얼마든지 재생이 가능하고,
음악처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술의 재료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일찍이 미디어 아트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
허리우드의 대형 영화나 싸이의 강남 스타일 뮤직비디오가 광속으로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모습,
그리고 ‘고래사냥’이나 ‘어머님 은혜’의 노래가 전세계 한인촌에서 울려 퍼지는 모습을 우리의
조형예술이나 문학이 어떻게 흉내 낼 수 있나? 진정 음악은 다른 예술로부터 동경을 받을만한
2012. 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