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삼분론과 이분론의 전쟁
1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알 것이다. 그들은 내가 대립 (conflict)을 주러 온 줄 모른다: 불, 칼, 전쟁.
왜냐하면 한 집에 다섯식구가 있되, 셋이 둘을 둘이 셋을 , 애비가 자식을, 자식이 애비를 대적하며 각각 홀로 서리라."
예수님은 유대인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유대인과 그들의 율법인 구약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교를 넘어서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은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탐욕과 분노 이기심을 승화한 자비와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옥 같은 1~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배트남 전쟁 걸프전쟁에 이제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익한 인명의 살상을 내고 있습니다.
서로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자유와 해방을 위해 더 많은 피와 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는 대규모 징병을 통해 러시아의 아버지들, 아들들을 전쟁터로 내 몰고 있습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의 백지 1인 시위도 탄압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이제 부족한 군인들을 증원하고자 50만 국민 징병제를 실시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요즘 젊은 배우들이 나오는 ‘마이 데몬’을 보면 극단적으로 위기에 몰린 인간들, 말하자면 상대편 조직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보스나, 백혈병이 걸린 엄마, 사업부도 위기에 몰린 가장들에게 ‘데몬’ 즉 악마는 나타납니다. 그리고 10년의 기한을 계약으로 원하는 소원을 들어 주기로 합니다.하지만 댓가는 계약자의 ‘영혼’이며 계약파기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이 죽음의 위기에 몰리거나 사회적 위기에 몰리면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위기를 통해 더 높은 시험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악마을 찾게 됩니다. 부정과 부패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의 도피와 같은 것들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저 또한 그런 시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릴 때는 종교적이란 게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병도 안 걸리고 무언가 세상과는 다른 두 발이 공중에 떠있는 상태가 종교의 이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대나, 가정이나, 사회생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마치 목욕을 깨끗하게 하고 나와서 번개같이 먼지가 묻는 것과 같습니다.인간은 신과 동물 사이에 있는 다리와 같습니다.
우리의 걸어 온 곳은 동물이라면 우리가 건너가야 할 곳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입니다.
1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알 것이다. 그들은 내가 대립 (conflict)을 주러 온 줄 모른다: 불, 칼, 전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도덕적으로 깨끗해지고 다시는 죄를 안 지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상이죠. 현실은 삶의 곳곳에서 이상이 무너지고 현실이 승리합니다.그래서 더 이상 인간 이하의 짓을 안 저지르거나 저지르더라도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안전벨트인 것입니다.저 또한 이것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우리는 죄를 저지르고 회개하고 기도할 수 있을 뿐입니다,많은
개혁이 결국 실패하는 이유도 인간 자체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희망에 차게 하고 좋은 세상만 펼쳐질 것 같고, 누구든지 하나님만 믿으면 불행에서 구원받을 텐데 왜 안 믿나 ?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원해 그렇습니다. 인간은 행복과 불행을 선택할 수 있을 듯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상황에 대해 나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의미치료’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린 박사는 나치 수용소에서 그의 가족들이 가스실에 끌려가 몰살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필생의 역작인 논문도 불태워졌습니다. 나치 군인들은 그을 벌거벗겨 개처럼 굴리고 조롱했습니다. 빅터 프랭클린 박사는 인간이하의 취급과 박해속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대로 자살하든지, 사실 수용소에서 자살은 빈번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이후로 자살이 많았다고 합니다. 프랭클린 박사는 결심했다고 합니다,’나는 자살하지 않겠다. 인간이 극한에 몰려 환경을 선택할 수 없어도 삶에 대한 태도는 결정할 수 있다.’
그의 믿음은 나치가 패배하고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많은 유대인들이 기아와 비참한 환경에 노출되어 마음의 병이 극심한 사회에서 ‘의미치료’로 보다 나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을 극복하는 전례를 남겼습니다.
찬송가에 나오는 축복과 이상향의 세게는 현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내가 대립 (conflict)을 주러 온 줄 모른다: 불, 칼, 전쟁.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 쉽게 포기하고 그만둡니다. 하지만 수많은 성인들과 현인들의 가르침은 정확하게 반대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도박에 중독되면 극복 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포기합니다. 병원 입원시에는 제 시간에 자고 식사도 제대로 하니 점점 사람이 되어갑니다.예민하던 성격도 돈에 쪼들리던 강박적인 사고도 사라지고 다른 환자들과 게임도 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점점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시험은 퇴원하고 난 후에 옵니다. 입원 기간 항 갈망제와 진정제로 뇌의 활동을 둔화 시켜 놓았기 때문에 언어나 연산 같은 부분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의 복용을 줄이고 점점 약 복용을 거르다 보면 어떤 지점이 있습니다. 다시 ‘좀비’처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구미
호’가 가장 무서웠습니다. 호랑이도 무서웠죠. 이제는 이런 동물류의 괴수는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외래 괴물인 ‘좀비’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 전통적인 귀신은 사라지고 뱀파이어나 좀비 같은 외래 귀신이나 괴물들이 우리 아이들의 무의식속에 자리잡아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융이 말했던 ‘집단 무의식’이 바뀌는 시대가 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온갖 악마와 귀신이 나타나서 우리의 영혼을 갈아먹고 난도질해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가면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하나님의 권위가 로마제국의 발 아래에 짓밟힌 사건으로 해석하는 역사가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두 번 있었습니다.
1. 솔로몬의 성전 파괴 (기원전 586년): 이 사건은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솔로몬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바빌로니아 포로기라고 불리는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바빌로니아로 끌려갔고, 이 기간 동안 유대교의 많은 중요한 종교적,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2. 둘째 성전 파괴 (서기 70년): 이 사건은 로마 제국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서기 66년에 시작된 유대인 대항쟁의 결과로,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결국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으로, 이후 유대교의 중심이 제사와 성전 중심에서 랍비와 토라 학습 중심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념하여 유대인들은 매년 타이샤베아브(9th of Av)라는 날에 금식하고 애도합니다.
이 두 성전 파괴 사건은 유대인의 역사뿐만 아니라, 서양 문명의 역사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사건들은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으며, 유대교와 기독교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은 주로 유대교 및 기독교의 성서적 맥락에서 사용되며, 다양한 역사적 사건이나 성서 내용에 관련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1. 성서적 맥락: 성서, 특히 기독교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쫓아내는 장면이 나옵니다(예를 들어, 요한복음 2장).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성전이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성전에서의 상업적 활동을 '성전의 타락'으로 비판합니다. 이 사건은 종종 예루살렘 성전의 도덕적, 영적 타락을 상징하는 사례로 해석됩니다.
2. 역사적 맥락: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는 다양한 시대에 걸쳐 여러 번의 변화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성전은 여러 번 재건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정치적, 종교적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둘째 성전 시대에는 성전 제사장단의 부패나 로마 제국의 정치적 간섭 등으로 인한 '타락'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은 성전이 그 본래의 영적, 종교적 목적에서 벗어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비판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이는 당시 유대 사회 내부의 도덕적, 영적 갈등을 반영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들은 내가 대립 (conflict)을 주러 온 줄 모른다: 불, 칼, 전쟁.
하나님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로마군의 식민 지배는 돈과 장사에 미쳐 있던 유대인들의 가슴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불꽃을 밝혔습니다. 역사상 박해와 고난속에서도 신앙의 불꽃은 더욱 피어났고 가라지와 쭉정이를 가려내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밝히셨습니다. 성전을 불지르고 칼로 유대인을 학살 하고 전쟁을 치루는 와중에 인간의 위선과 기만은 민 낮을 드러냅니다. 최후의 심판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본능이 만천하에 드러날 때 옵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길만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택속에 로마군에게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이 무언인지 모릅니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금세기 최대의 정치적 학살인 ‘킬링필드’는 크메르 루주의 공산정권이 그들의 종교인’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공산국가’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지식인들과 전문인들을 학살하고 대다수의 도시민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시킨 미친 정치의 살아있는 기록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크메르 루주’의 잔악한 인간 학살의 고발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하나님의 창조적인 계획입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이 쫓겨나고 다시 캄보디아에는 왕정이 시작됩니다.
당연시 외국의 언론들은 잔악한 학살 행위에 분노한 희생자들이 학살에 참가한 공산당원들의 숙청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캄보디아 국민들은 공산당원을 끌고 나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참회 시킵니다. 그리고 따귀를 때립니다.
그리고 똑 같은 인간이하의 살육 대신 용서를 택합니다. 이것은 전쟁을 통해 분노와 살인으로 인간 사회를 바꿀 수 없단 큰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과, 검과, 전쟁을 주셨지만 우리는 탐욕과 분노 대신에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그것은 주인이 주는 대로 받아 먹다가 도살되는 돼지의 운명이 아니라, 인간 이하로도 인간 이상으로 살 수 있는 기회와 하나님의 고난을 통해 성장하고 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길도,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짐승 같은 길도 선택할 수 있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십니다.
때론 사람들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질병과 전쟁과 빈부 격차를 두시냐고 불평합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창조적 계획을 무시한 인간의 어리석은 시도는 실패로 판명이 났습니다. 우리는 자유 경쟁 체제에서 부를 특정 계층이 독차지하는 현상은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를 가진 사람은 ‘사회 환원’이라는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인간은 권력과 부를 버리지 못해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걸 인류의 역사에서 많이 봅니다.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동구권의 공산주의 독재국가는 국가 원수의 암살이나 처형이라는 큰 열병을 앓았습니다. 오히려 자유 경쟁체제가 성공하면서 자유진영이 승리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크신 계획에 의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큰 실험은 자유주의의 승리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치러진 큰 시험이었고 우리는 인간성 말살의 밑바닥을 보았습니다만 그 안에서 보다 나은 인간성과 일별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집에 다섯식구가 있되, 셋이 둘을 둘이 셋을 , 애비가 자식을, 자식이 애비를 대적하며 각각 홀로 서리라."
영적인 길에서는 다채로운 이론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들은 너무도 아름다워 인간의 마음을 현혹되게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철학자도 만나고 성인도 만나고 천사도 악마도 만납니다. 이 지도는 예수님이 주신 지도입니다. 한집에 다섯 식구가 있다는 것은 인간과 신을 바라보는 대립적인 관계입니다.’인간의 영혼은 없으며 죽으면 끝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물론자들로써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이런 사고의 바탕에서 탄생하였습니다.
공산주의는 종교에 매몰된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본주의자들의 부의 독점과 프롤레타리아의 억압에 대한 반동으로 탄생했습니다만, 해방은 커녕 더 큰 재앙과 폭력만을 불러왔습니다. 게다가 파시즘이나 독재국가를 탄생시켜 지금보다 더 못한 사회를 가져왔습니다. 또 다른 반쪽에서는 인간의 육체는 무시되고 도덕적인 무오성이나 영적인 가치만이 우선시되어 빈곤을 면치 못하고 모든 정치 경제 예술이 종교에 매몰되어 ‘인간은 그저 죄악에 찬 가죽 주머니’ 라고 말하는 인간경시 사상이 생겨났습니다.
종교에 인간이 매몰되어 인간의 숨통을 조르고 종교에서 현대인들이 멀어지게 되 원인 제공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영육논쟁이 영육의 구원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神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神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외부가 아닌 내면 속에 있으며, 그것에 대한 논쟁을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인간은 신과 같다고 생각합니다.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이 인간보다 더 힘이 세고 오래 살지만 결국 싸움 끝에 사라지기도 하고 질투하고 분노하는 등 인간의 모습을 투사한 형상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과 神의 분리를 원하게 되고 우리는 神의 다른 특성 즉 신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아주 오래 되었습니다.
1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나를 평가 해 보거라"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당신은 의로운 전령 (messenger) 같습니다."
"마태"가 말했다 "당신은 현명한 철학자 같습니다."
"도마"가 말했다 " 선생이여, 당신이 무엇과 같은지 나의 입으로는 묘사 할 수 없나이다."
마태가 말한 지혜로운 철학자나 전령은 결국 인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베드로는 조금 낫지만 그는 神의 전령,’메신저’로 생각하지 그를 하나님으로 보지 않습니다. 도마도 갈등했습니다.자신들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웃고 떠들지만 그는 인간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셋이 둘을
인간의 영혼은 神性을 알게 됩니다. 靈의 상태, 창조주이며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절대 신성은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우리는 神性을 조우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특질을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오류가 나게 됩니다. 인상을 위주로 하나님을 볼 경우 마태처럼 그냥 지혜로운 현자나 철학자로 보게 됩니
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을 주는 神적 특성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그냥 도덕적인 삶을 이야기한 사
상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크리슈마무르티나 마하리쉬 오쇼 라즈니쉬가 이에 해당합니다. 특히 라즈니
쉬는 神으로 군림하려 다가 미국 정부의 조사로 부정과 부패 착취 혐의가 들어나 감옥에 갇힙니다.
그는 인간이었으며 한대 풍미했던 사상도 결국 합리주의에 입각한 지적 놀음에 불과 했던 것입니다.
보통 상단전 수련, 즉 제 3의 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큰 지식을 얻게 됩니다.
왜 제가 지혜라고 하지 않고 지식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실 겁니다. 저 또한 그의 사상에 매료되었고,
그의 수행을 하였기 때문입니다.1990년에 나온 책 ‘배꼽’은 저의 영적 수행의 길에 출발선이 되었던 책입니다. 그 책을 읽고 그의 사상전집을 사서 보면 인도철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상의 잔
치였습니다. 하지만 제3의 눈을 통한 인간 영혼의 탐색과 깨달음은 정신분열을 가져왔고 오랜 기간 동안 부작용에 시달렸습니다.
그것은 대책 없는 신비 경험이 일상생활에 반영되지 못하여 미쳐가는 증상을 가져옵니다. 자신 은 영적 지식을 얻었지만 아직 경험이 없어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그는 오랜 경험과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괜찮습니다.그는 어떤 영적 수행도 가르쳐주지 않으니까요, 마하리쉬도 괜찮습니다.그는 자신과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 서구에서 온 수행자들을 진정 시키고 적극적인 경청과 공감으로 치유합니다.
하지만 라즈니쉬의 명상은 사람들을 사회에 저항하게 하고 히피가 되게 합니다. 그들의 부모와 형제 자매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죠.인간이면서 신성을 가진다는 것이 어떻 것인지 잘 보여줍니다.그래서 예수님 이후에 하나님의 아들이 또 안 나오는 이유입니다. 라즈니쉬는 자신을 신격화하고 고급 승용차에 여러 미인 여제자들을 거느리고 메스컴에 노출되었습니다. 서양의 많은 젊은이들이 매료되었고 그의 메시지와 가르침에 따라 산야신의 복장을 입고 그이 가르침에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헬스와 다이어트는 이런 명상문화에 젊은이들이 빠지지 않게 하는 대체물의 하나입니다. 요즘은 유튜브나 틱톡에 자신의 일상을 업로드하여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결국 누군가 미디어를 조종하여 외면만을 바라보게 하고 경제적 성공이나 음식, 옷, 집을 공개하여 사람들에게 인인기 얻는 것 소위 ‘관종’ 행위만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유튜브에 매몰되어 많은 시간을 잠 못 이루었습니다. 유튜브의 조회수는 사람을 울게도 웃게도 하면서 미치게 합니다.
초기에는 연예인들의 뒷이야기를 다루어 마녀 사냥하듯 유튜브 컨텐츠를 찍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저같은 ‘렉카’ 에게 소스를 주는 연예기자 출신의 유튜버는 올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그가 비난했던 사람들이 그를 고소하였고 8개월의 실형을 받자 ‘맨탈’이 붕괴되어 부산의 한 호텔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저는 그 전에 집사람의 ‘남을 헐뜯다가 자신도 공격 당한다.절대 끝이 좋을 수 없다’ 는 충고를 따라서 모든 동영상을 다 지우고 신앙에 대한 컨텐츠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조회수가 많이 나오고 사람들이 댓글이 달릴 때 사람은 취하게 됩니다. 오쇼 라즈니쉬는 전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神으로 불렸고 그가 타락하자 그의 공동체는 산산 조각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거주했던 미국 오리건주의 공동체는 지역 주민과의 마찰로 소송이 끊이지 않았고 그가 부정부패와 ‘콜레라균 살포’등 범죄에 연루되자 미국 정부는 그를 감옥에 가두고 추종자들을 공동체 밖으로 쫓아내게 됩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몸과 마음’ 사고와 감정을 거부하고 오로지 위대한 정신 그리니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로고스’, 道.’ 브라흐만’이 영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의 말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으나 생각해보면 극단적인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의 짬뽕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존재 형식이고, 국영수나 학교성적은 결코 덧없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은 영적수행이나 종교철학에 심취할 것이 아니고 학업에 충실해야 합니다.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가족이 사회가 부여하는 의무와 권리를 행사해야 합니다. 정신병원은 그런 일반적인 생활이 안되는 사람들이 입원해서 약으로 조절하여 사회에 복귀하는 곳입니다.
라즈니쉬가 죽은 지도 30년이 넘었습니다. 그는 종교철학의 수준을 높이 비상시켰습니다. 4차산업혁명이 일어나 모든 법과 제도가 다시 재편되는 지금 도마복음은 라즈니쉬가 해석했던 이성적 사고와 합리주의를 넘어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셋이 둘을 둘이 셋을 , 애비가 자식을, 자식이 애비를 대적하며 각각 홀로 서리라."
둘은 신성과 인성 논쟁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요소를 원하면서 인간을 넘어서 전지전능한 신성도 원합니다. 그것은 도 다른 질문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그것은 선택된 인간 앞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여자의 배를 통해 나셨고 먹고 마시셨습니다.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신성과 인성으로 싸 운지 얼마 안되어 하나님과 예수님의 논쟁에 빠집니다.
하나님에게서 인성을 가진 것이 예수님이 십니다. 두 분은 다른 것 같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치 태극처럼 두 가지의 기운이 빈틈없이 어울려 회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래전 제가 소람상담소에 자원봉사자 다닐 때 삼위일체가 이해가 가지 않아 소장 신부님께 영적 상담을 신청한적 있었습니다.저의 질문에 신부님은 마치 세사람이 춤을 추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애비가 자식을, 자식이 애비를 대적하며 각각 홀로 서리라.
이 구절은 오히려 쉽습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는 신약성경과 그리스도교의 아버지와 같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보다 더 높이 날아오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계약과 시험 그리고 보다 나은 공동체와 인간의 창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신에 대한 믿음이 자신과 가족과 자신의 공동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신약은 신에 대한 믿음과 고난이, 유대공동체를 넘어 이 새상 모든 이들에게 자비와 사랑이 확대됩니다. 인성과 신성, 성부,성자,성령이라는 둘 셋의 갈등과 상호 보완적인 연결고리는 오늘도 많은 이들에게 신학적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삼위일체는 물이 열을 받아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오르면 비가 되고, 추운 기운을 만나면 얼음이 되듯이 하나님은 그 형태와 성질을 바꿔 가시며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며, 승천하고 난 뒤에도 누구든지 그를 찾으면 성령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시험을 이겨낼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