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으로 올라오고 열 달 가량 지날 무렵 사행성 오락게임인 “바다 이야기”가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문을 닫으면서 신종 오락문화 실내낚시터(낚시방)가 전국 대도시 곳곳에 생겨난다.
부산, 대구, 경남, 경주, 포항 등지에도 순식간에 번져 나가면서 예전에 전화방 등을 운영했던
사람들과 그들로부터 소개를 받은 사람 그리고 실내낚시터를 시설할 업자로부터 당구장컴퓨터
(Timmer)의 설치 문의가 들어오지만 퇴폐성 오락은 짧은 기간 성행을 하다가 문을 닫기 때문에
설치를 하고 나면 즉시 수금 하는 것을 원칙으로 업주들의 확인을 받고 일을 한다.
퇴근 후에는 부산, 대구, 경남 등지의 시설 중인 실내 낚시터를 향해 달려야 하고 하루 2~5건의
시설을 하려면 작업자 2개조(2명 1조)를 오전부터 작업을 시켜놓고 작업이 끝날 무렵에는 조퇴
또는 퇴근을 하여 현장으로 가서 마무리 작업과 수금을 해서 집에 오면 새벽 1~3시, 사전예약으로
주문이 들어온 시계의 물량 100~200개를 새벽시간에 만들려면 시간이 너무 부족하고 회사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 사직서를 제출하고 귀향을 시도하려 했지만 반려되고 당분간 출근을 해서 현장관리
및 작업에 관한 확인만 해놓고 조퇴하여 개인업무를 하라는 배려로 몇 달간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시간과의 싸움 속에서 무지하게 바쁜 세상을 살아보기도 했다.
낚시방의 구조는 70~100평 공간에 수조를 만들어 손님이 낚시를 할 수 있도록 20~50개소의 낚시공간을
만들어 살아있는 물고기의 등지느러미에 경품권(금액)을 부착 시켜 수조 속에 넣고 경품금액은 500만원,
300만원, 100만원, 50만원, 10만원, 5만원, 1만원 그리고 5,000원 순으로 정해놓고 손님이 낚시대로
물고기를 잡으면 지느러미에 꽂혀있는 경품권을 현찰로 교환해주는 일종의 도박이 전국 번화가에 반짝
성행을 한적이 있다.
낚시방의 입장료는 지역에 따라 약간 차이가 있지만 기본1시간에 5~7만원으로 낚시를 담그면 1시간
동안 거의 5만원, 1만원, 5천원의 경품에 해당되는 생선만 가끔 올라오고 재수가 좋은 손님은 고가의
경품금액이 올라오는 곳도 있지만 일부 업소의 경우는 500, 300, 100만원등 고가의 경품권을 등에 업고
있는 물고기는 살아서 움직이지만 놈들의 입안에는 철사, 핀 등을 이용해서 미끼를 줘도 먹을 수 없도록
해놓았기 때문에 놈들은 입질을 할 수가 없고 재수(업주 측에서 봤을 때)가 없는 날은 고가의 경품이
물고기의 지느러미나 몸통 등에 바늘이 꽂혀서 올라오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짧은 15일간의 휴가(치료)를 마치고 사단헌병대에 도착해서 조금 있으니 통신대장이 데리러 와서는
본인이 원한다면 다른 곳으로 전출을 하고 복귀를 하면 고참으로부터 구타가 없도록 특별히 관리를
해주겠다고 한다.
나도 전출은 가기 싫었다, 전출을 가면 새로운 곳에서 적응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부대에 복귀를 하니 힘들지 않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와 CW병으로 내무반에서 생활을
하지 말고 근무차량에서 생활을 하라는 통신대장의 지시와 함께 특과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간부들이 출근하면 팬티 차림으로 밤사이 기압과 구타가 없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온몸 구석 구석을 점검 당하면서 생활을 하던 중 1976. 8.18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하면서
全軍에 데브콘 하나(?) 비상이 걸리면서 전시상황 속의 긴급전문을 숫자5자 5묶음(?)을 수신하여
대기중인 암호병에게 전문을 수신하는 즉시 넘겨주면 암호병은 해독을 하고 통신대장은 계속적으로
지휘본부에 상황을 알려줘야 한다
全軍이 완전 무장상태로 전투준비를 마친 다음날 새벽에는 M1 소총을 반납하고 긴급으로 M16 소총을
지급받고 총기 결합연습, 영점조정과 CW 비상대기를 하면서 긴장한 나날을 보낸다.
그 사이 친구는 필기시험을 대리접수 시키고 시험일자는 9월 중순경으로 다가오면서 24시간 대기
상태에서 눈은 책으로 귀는 GRC-87 무전기를 향하여 씨름을 하면서 보름 가량 지나니 상황은
한 단계 낮아지면서 종료가 되고 시험일자가 다가올 날을 기다린다.
서울에서 필기시험을 치르기 위해 과목마다 문제지를 받아 들고 하나 둘 정답을 적어 내려 가지만
무선기기 시험지를 받아 들고는 25문제 중 확실하게 적을 수 있는 정답은 5문제, 남아있는 문제
에서 5문제를 맞추어야 과락은 면하는데, 응시생들은 시험장을 빠져 나가고 혼자서 자리를
지키는 사이 시간은 되어가고 시험관이 다가와서 종료 5분전 임을 알려준다.
5문제의 정답 속에는 4번이 보이지 않아 남은 문제 정답을 4번에 표시하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시험장 바깥으로 나오니 응시생 끼리 정답을 맞추어 보고는 무선기기 시험의 점수가 44점으로
과락은 면했다는 안도감과 초조함으로 발표 날만 기다린다.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 아버님은 아침 일찍 범일동에 있는 부산체신청앞 게시판의 필기합격자 명단
속에 응시번호와 이름을 확인하고 합격사실을 부대에 전보로 알려왔다.
그 해 10월 중순경에 있을 실기시험을 친구가 대신 접수를 했다.
송신은 별도의 연습이 필요 없었고 수시로 GUAM에서 미 해군과 일본기상청 JJC 에서 전송하는 영문
기상방송을 수시로 청취하고 수신연습을 하면서 시험을 일주일 가량 남겨두고 있던 어느 날,
1977년도 1월경 매4년 마다 실시하는 사단기동훈련(FTX)에 대비해서 육본, 군단, 사단 및
예하부대가 참여하는 6박7일간의 통신 COMEX 훈련 명령이 육본에서 갑자기 내려와 실기시험을
내년으로 미루고 COMEX훈련에 참가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첫댓글 저도 왕지균박사가 지필한 무선공학(빨간색표지로 기억함)책으로 열심히 공부 했었네요 당시 기능사는 지금의 산업기사이상의 수준으로 공부를 안하면 합격하기 힘들었습니다 ^^
ㅎㅎ 군 생활 ...
어짜던동 얼심히 해서 군생활 맞쳤으리라 짐작되고...
도끼만행때..제대 막차특명(76년8월) 받아 연대(70연대) 대기하던 시절,,ㅎㅎ
사단장 제대 신고 안받고(부사단장 대리신고..) 예비사 부산8보충대 내려 오던때가 새삼 생각이 남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