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투브 - 브뤼셀에서 거행된 푸치니의 장례식 기록영상물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oFtF2Unj6qg
뉴욕에서
행한 푸치니의 육성 녹음
http://youtu.be/QFWukGoWTQ4
푸치니의 집안은 바흐(Bach)의 가문과 비교될
만큼 대대로 음악을 가업으로
전승시킨 음악의 명가였다.(푸치니家 5대, 바흐家 7代).
푸치니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수도인 루카에서 성 마르티노 성당의 오르가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났다. 푸치니가 다섯 살 때, 그의 아버지는 5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푸치니가는
루카의 성 마르티노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4대에 걸쳐서 활약했으므로 푸치니는 이 가문의 제5대로 태어났던 것이다. 푸치니는 상당한 미남에 속했고
적당한 키와 알맞은 체격, 그리고 세련된 화술과 몸가짐 때문에 친구들 사이엔 총독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실제로 푸치니는 대단히 귀족적인 풍모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푸치니의 아버지가 죽자 남편보다 18세 아래인 푸치니의 어머니 아비나는 혼자 일곱 아이를 키워야 했다. 당시 그의 일가족은
치타데로라고 하는 오래된 지역에 자리 잡은 치타데로관의 초라한 3층집 2층에서 살았는데 이 건물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돼 있고 다음과 같은 푸치니
기념 헌문이 붙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빛나는 음악의 가장 오랜 전통을 이룬 가계로부터 1858년 12월22일, 지아코모 푸치니 여기에서
태어나다. 그는 새로운 생명의 소리를 진실과 우의에 넘치는 음악과 융화시켜 명랑 기민한 악풍을 가지고 형이상학적인 높은 차원의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우리들의 예술적 국민성을 높이 입증했다.”
푸치니의 아버지가 별세하자 성 마르티니노 성당은 그 후임 오르가니스트로 푸치니의
외삼촌을 임명했는데 거기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지아코모 푸치니가 성장하면 그의 아버지가 맡았었던 합창장과 오르가니스트 자리를 계승시키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루카엔 집안의 직업을 자식이 꼭 이어받는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이 예술적인 특기나 재질을 요하는 분야일 때는 특히 더
했다. 푸치니도 장남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 받아야 했을뿐 아니라 성 마르티노 성당은 그만큼 푸치니 가문의 음악적 전통과 재능을 신뢰
했던 것이다. 외삼촌이 푸치니의 교육을 전적으로 맡았으나 어린 푸치니는 음악의 대가가 되기는 글렀다고 포기한 상태였으나 그의 어머니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남편의 제자인 마지에게 아들을 맡겨 음악 공부를 계속 시키게 된다. 마지는 푸치니가 틀리거나 악보를 잘못 읽을 때는 그의 무릎을
두들겨 패는 버릇이 있었는데 물론 이런 벌은 어린 푸치니의 음악교육에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이런 벌의 후유증은 그가 어른이 된
뒤에도 나타나 음악을 듣다가 소리가 틀리거나 또는 가수의 음정이 틀릴 때는 반드시 무릎을 움칫 당기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푸치니의 어머니는 선생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카를로 안젤로니라는 음악원 교수에게 아들을 맡기게 됐다. 안젤로니 역시 푸치니 아버지의 제자 였는데
그는 스승의 아들을 기필코 훌륭한 음악가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푸치니의 개성을 파악해 기초부터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한 첫 성과로 10살
때 푸치니는 성당의 어린이 합창단원으로 뽑혀 노래를 부르게 됐고 잇달아서 안젤로니에게서 오르간과 피아노도 배웠다. 14살때 부터는 피아노를 꽤
잘 연주할 수 있어서 홀 어머니를 위해 집안 살림을 도우기 시작했다. 푸치니는 싸구려 술집이나 온천장의 피아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때 담배를
좋아하게 돼 나중엔 니코틴 중독자가 됐고 그 때문에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
다.
푸치니의 천재성은 16,7세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성 마르티노 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는데, 오르간곡으로 세속적인 가락을 연주하기도 해서 그의 신앙이 심판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때부터 푸치니의 음악재능 속엔 드라마틱한 오페라의 재능이 다소 엿보이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차츰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푸치니에게
결정적으로 오페라에 접근할 기회를 준 것은 그의 스승 안젤로니였다. 안젤로니는 제자에게 베르디의 리골레토나 라 트라비아타, 일 트로바토레 등을
소개해서 들려주는 등 베르디의 오페라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해 주었다. 당시의 음악도나 청년 작곡가들에겐 배르디라는 대가는 우상적 존재였다. 이
무렵 푸치니에게 결정적으로 오페라에 매혹되는 한 계기가 마련되는데 그것은 그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베르디의 아이다 공연을 관람했던 일이었다. 이
일은 푸치니의 생애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의 피를 끓게 했다. 1876년 3월, 피사에서 아이다 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푸치니는 친구 둘과 함께 32Km나 되는 먼 거리를 걸어서 가기로 한다. 돈도 부족했지만 아이다를 여러번 보기 위해서 였다. 공연을 보고난 그의
마음엔 오페라에 대한 열정이 가득 차게 됐다. 이로서 그는 자기 집안의 음악적 전통을 무시하고 오페라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게 됐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음악과 오페라의 중심지인 밀라노로 가는 것이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밀라노엔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이 있고 왕립음악원과 베르디 음악원, 밀라노 음악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학비조달 방법이었다. 푸치니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밀라노로 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게 되는데 먼저 독신으로 살고 있는 자기의
오빠에게 상의했다. 그녀의 오빠는 푸치니 학비의 일부를 책임지겠다고 쾌히 승낙했고 이어서 어머니는 궁정의 육영 장학금을 얻기 위해 가라타
공작부인의 도움으로 여왕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고 그 결과 왕실은 한 달에 백 리라의 장학금을 1년간 하사하기로 승낙 한다. 한편, 루카시의
보조금은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 했으나 성 마르티노 성당 관계자들은 푸치니가 교회음악을 외면하고 오페라를 공부하기 위해 밀라노로 간다는 사실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보이고 보조금 지급을 거절 했다. 우여곡절 끝에 푸치니는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하고 음악공부에 누구보다도 열심을 냈다. 이때
그를 가르친 교수는 안토니오 밧치니와 그에게 오페라 작곡에 큰 영향을 준 아미르 가데 폰키엘리 였다. 이러한 훌륭한 스승에게서 배우게 된 것도
푸치니에게 큰 행운 이었다. 특히 폰키엘리는 푸치니를 크게 아끼고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푸치니의 밀라노 시절은 그야말로
일생에 가장 중요한 청년시절이었고 또한 그의 고투시대의 전조였지만 그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페라에 대한 집념만은 버리지 않고 계속 불태우고
있었다. 1년이 지나 여왕으로부터 받은 장학금도 끊어지고 두카 시에 신청했던 장학금도 거절돼 푸치니는 가난한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 당시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먹는 이야기가 많이 쓰여진 것을 보면 돈 없는 가난한 그 시절의 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때로는 330리라나 되는
스칼라 극장의 예매권이 연일 매진되는 것을 보고 “어머니 밀라노 사람들은 굉장히 부자들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부 부자들뿐인 것 같습니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밀라노 생활이 2년째 되던 해 그는 동생 미켈레와 사촌동생을 데리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더욱 가난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가 하면 친구들도 자주 와서 그의 초라한 하숙방에 며칠씩 묵고 갔는데 그런 친구들 중엔 마스카니도 있었다. 그는 푸치니보다 다섯 살
아래 였는데 역시 가난한집 아들이었다. 마스카니와 푸치니는 경쟁상대가 될 정도로 모두 재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들이 가난한 하숙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서로 빚쟁이를 피하게 해주고 음식 만들어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기숙사에서 한 사람이 음식을 만드는 동안 푸치니가 피아노에 앉아서
폭풍같은 불협화음의 즉흥 연주를 하다가 음식이 다 되면 허겁지겁 먹는 참으로 딱한 나날을 보냈다. 이러한 생활이 나중에 오페라 <라
보엠>에서 큰 보탬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럭저럭 푸치니는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하게 됐는데 이때 작곡한 졸업작품 <교향적
카프리치오>가 학생 오케스트라에 의해서 연주되어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이 작품 때문에 당시 25세의 푸치니는 일약 밀라노의 스타로 떠
올랐다.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비평가들이 신문에 이 작품을 칭찬하는 평론을 다투어 싣고 당시 스칼라 가극장의 지휘자도 자기들의 정기 음악회에
교향적 카프리치오를 넣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푸치니 자신은 이 작품이 그리 신통한 곡이 못된다고 생각해서 가급적이면 연주되는 것을 막는
형편이었다. 한때는
그 악보를 아예 없애 버릴 생각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음악원을 졸업할 무렵 그는 또 하나의 시련에
부딪치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경제적 고통이었다. 물론 그는 우수한 졸업생이었기 때문에 장차 음악원의 교수로 눌러 앉기 위해 음악원에 남아
있거나 음악교사 자리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푸치니는 좀더 자유롭게 창작에만 몰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스승 폰케엘리가 푸치니의 재능을 믿고
유능한 출판업자였던 리코르디를 소개해 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푸치니가 <마농 레스코>로 성공하기 까지 그의 도움을 크게 얻었고
그와의 관계는 마치 부자지간 같았다고 한다. 또한 이 무렵에
푸치니에게 또 하나의 행운이 찾아오게 되는데, 폰키엘리와 함께 폰타나라는
저명한 대본 작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여기서 폰키엘리는 푸치니가 재능 있는 신진 작곡가라고 적극 추천하면서 그를 위해 대본을 써줄 것을 수차에
걸쳐서 간곡하게 부탁하게 된다. 결국 폰타나는 만일 오페라가 당선되면 원고료를 받기로 하고 대본을 푸치니에게 주게 되며 이에 작곡을 서둘러서
<손쪼노 오페라 콩쿠르>에 악보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 콩쿠르에서 그의 작품은 낙선됐다. 그러나 폰키엘리와 폰타나는 어떻게 해서든
푸치니의 작품을 상연하기로 작정하고 많은 살롱을 돌면서 후원자들을 찾는다. 그러던 중 베르디의 오텔로 대본을 집필 중이던 보이토의 강력한 후원을
얻게 되고 오페라 극장이 모금을 하는데 앞장서서 그의 오페라 <빌리>는 드디어 막을 올렸고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때의 광고문,
“오늘밤 다르 베르메 극장에서는 극장화보사 주최로 열렸던 1막 오페라 콩쿠르에서 상도 평도 받지 못했던 한 작품이 상연 됩니다.” 이 오페라가
끝난 뒤 한 신문은 “우리는 푸치니가 언젠가는 이탈리아 국민이 바라고 있는 대작곡가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아무런 비평도 할 수가
없다. 그를 한 조각의 천조각 처럼 취급한 손쪼노 콩쿠르의 심사위원들을 경멸한다.”고 썼다.
훗날 푸치니가 많은 돈을 벌수 있는
대가가 됐을 때 빌리 때의 일을 추억으로 회상하면서 “그때 나의 호주머니는 40첸테지모 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전 재산이었고 나는
처음으로 적갈색의 옷을 입고 박수갈채가 드높은 가운데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무대로 나갔다. 그러나 나흘 뒤에는 리코드디씨가 그 작품을 사
주어서 몇천 리라라는 거금을 손에 쥘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로써 리코르디는 푸치니의 평생을 통한 후원자와 충고자가 됐고 빌리는
그의 권유로 2막으로 개작 됐다. 그러나 빌리는 그 후엔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고 단지 이탈리아 이외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뉴욕,
함부르크, 만하임에서는 여러 번 상연됐다.
푸치니는 빌리 이후 다음 작품이 나오기까지 5년동안 또 다시 고생스러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1884년 7월엔 푸치니에게 유일한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가 별세하게 된다. 어머니가 별세한 뒤 그의 사생활엔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오게 됐는데 그것은 파격적이고 대담한 연애사건 이었다. 학생 때 알게 되었던 친구의 부인과 열애에 빠져 한밤중에 도망을 친 것이다. 친구
제미니아니의 부인인 엘비라는 그녀가 결혼하기 전부터 푸치니와 알고 있었던 사이였고 대단한 미인에다 또한 풍만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이들이 사랑에
빠져 있을 때 푸치니는 26세였고 엘비라는 24세 였다. 그러나 둘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는 못했다. 고차원적인 정신세계를 지니고 있는 푸치니와
평범한 육체파 미인의 연애가 오래 가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앨비라는 전남편 제미니아니와 남매를 낳고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던 중 푸치니에게 성악과
피아노를 배우게 된 것이 인연이 돼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그들이 살림을 차린지 얼마 안 되어 아들 안토니오가 태어났다. 이 사건으로 푸치니는
보수적인 루카 사람들에게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제미니아니는 그가 죽기까지 이혼에 동의를 하지 않아 안토니오는 18세까지 사생아로서 입적을 하지
못했었다. 이 사건으로 그에게 돈을 대주었던 백부 첼루는 그동안 대주었던 학자금을 이자까지 계산해서 당장 갚으라고 호통을 쳤고 푸치니의 고심은
말이 아니었고 창작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폰타나는 제멋대로 에드가 라는 대본을 선택하고 푸치니에게 작곡 하기를
권했다. 에드가는 카르멘과 비슷한 내용의 작품이었는데, 한 야성녀가 에드가라는 마음 약한 남자를 유혹해서 그의 연인인 청순한 여자에게서 그를
떼어 버린다는 내용이었다. 리코르디는 폰타나가 대본을 골라 주자 푸치니가 보기도 전에 곧 출판인가를 해 버렸고 나중에 푸치니가 이런 내용으로는
극적 진전의 방법이 어렵겠다고 반대 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결국은 대작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푸치니는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노력한 끝에 4년이나 끌다가 그 어려운 작업을 끝 마쳤다. 그동안에도 리코르디는 푸치니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드디어
<에드가>는 스칼라 가극장에서 상연됐지만 결과는 성공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리코르디는 푸치니에게 격려를 하면서 미래의 작품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충고했고 이일이 계기가 돼 리코르디와 폰타나의 관계는 끊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에드가 초연 직후 리코르디
출판사의 주주 총회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푸치니의 원조를 끊자는 의견들이 나왔으나, 만일 푸치니가 또 실패하면 지금까지 투자한 모든 돈을
리코르디가 변상하는 것을 조건으로 푸치니의 원조에 주주들이 동의 했는데 다행히도 푸치니는 그 이후 다시는 실패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푸치니는 리코르디라는 출판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재기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리코르디가 푸치니를 반드시 성공 시킬 것이라는
확신과 애정이 없었다면 오페라의 거장 푸치니는 존재할수 없었을 것이다.
푸치니는 그의 충고로 4막짜리 에드가를 3막으로 개작했고
이후 이 오페라는 이태리 전국에서 성공리에 상연됐고 특히 고향 루카에선 굉장한 성공을 거뒀다. 이에 힘입어 푸치니는 첫 번째 해외 연주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이 연주여행엔 당시의 명 테너인 다만뇨를 비롯한 쟁쟁한 멤버들이 참여해 마드리드 공연도 성공을 볼수 있었다.
그러나
<에드가> 이후 푸치니는 자라나는 두 아이를 거느리고 늘 경제적인 불안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푸치니의 이례적인 결혼 때문에
일가친척을 비롯한 주변의 비난을 받고 있었고 게다가 백부는 푸치니의 사생활에 대한 굉장한 분노를 나타내면서 당장 빚을 갚으라고 성화 였다.
이래서 한때 푸치니는 동생 미켈레가 사는 남미에 편지를 띄우고 취직자리를 부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미켈레는 형이 남미에 오지 말기를 부탁했고
얼마 뒤엔 황열병에 걸려 이국에서 숨지게 되는데 이 때문에 푸치니는 또다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푸치니는 이 충격을 이겨내고 새로운
작품인 <마농 레스꼬>의 작곡에 전념하게 된다. 이 오페라의 대본은 리코르디의 정성어린 주선으로 일리카와 지아코사 등이 공동으로
집필했고 푸치니는 작곡을 서둘러 1892년에 드디어 완성시켰다. 작곡에 3년이 소요된 것이다. 그러나 출판에 앞서 문제가 생겼는데 하나는
마스네의 오페라 <마농>과 제목이 비숫하다는 것과 또 하나는 대본의 작가를 누구로 하느냐 하는 문제 였다. 대본 집필에 있어서 너무도
많은 사람이 협력했기 때문이다. 결국 제목은 마농 레스꼬로 결정했고 대본작가의 이름은 넣지 않기로 해 오페라 사상 최초의 대본 작가 이름이 없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마농 레스꼬는 1893년2월1일, 토리노 市의 왕립극장에서 상연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드디어 개막이
되고 극장은 초만원이었으며 비평가들도 이탈리아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반응은 열광적이어서 푸치니와 가수들은 30회이상 무대에 나와서 인사 했으나
청중은 일어설 줄 몰랐다. 평론가들은 다투어서 푸치니의 경이적 진보에 칭찬을 돌렸고 “푸치니는 이탈리아 젊은 작곡가의 최고”라고 찬사를 퍼
부었다. 결국 푸치니는 마농 레스꼬의 대성공으로 오페라 작곡가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연 후 1주일 뒤에 그를 위한
파티가 있었는데 그는 며칠 전부터 연설문을 작성해 연습을 했지만 막상 파티 석상에선 가슴이 울렁거리고 혀가 굳어져 한마디도 준비한 말을
못하고 “감사 합니다”만 연발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국가는 그에게 기사 십자장을 수여했고 밀라노 음악원은 교수로 와 달라는 청을 하기도
했다. 아울러서 그의 경제적인 고통도 면 할 수 있었다. 빚도 갚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다른 이에게 넘어 갔던 고향의 집도 되찾았다. 이제
그의 생활은 윤택해진 것이다.
생활이 다소 안정된 푸치니는 다음 작품을 위해서 루카에서 좀 떨어진 토르레 델 라르고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여기에서 30여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게 된다. 토르레는 특별히 아름다운 고장은 아니었으나 푸치니는 맛사치우코리라는 호수가
있는 이 마을을 세상의 그 어느 곳 보다도 사랑했다. 그는 특히 사냥을 즐겼기 때문에 아침이면 쪽배를 타고 나가서 사냥을 즐기곤 했다. 그 당시
이 마을엔 가옥이 12채에 약 12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푸치니는 입버릇처럼 토르레를 “나의 상아탑, 나의 에덴동산, 나의 지상의
낙원”이라고 부르며 자랑 했다고 한다. 나중에 라 보엠으로 많은 돈을 벌었을 때는 토르레에 멋진 별장을 지어서 호화롭게 집안을 꾸몄는데 지금도
이 별장은 그의 기
념관으로 잘 보존돼 있다. 원래 이 별장이 있던 자리엔 오두막이 있었는데 신기루 지오반니의 소유였다. 그가 남미로
이민을 떠난 뒤에 푸치니가 이 집을 사 들여서 자기 취향에 맞춰 집안 구조를 개조하고 살롱처럼, 이를테면 오늘날의 멤버스 클럽(Member's
Club)처럼 만들어 놓고 그 이름을 ‘라 보엠’이라고 지었다. 그 무렵 푸치니는 라 보엠을 작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본능적인
즐거움만을 추구하고 있는 이 클럽의 속성은 후일 그의 오페라 라 보엠에 등장하는 4명의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주민이래야 불과 120여명밖에 안 되는 이 한적한 시골에서 남편은 이런 식으로 친구들과 어울리고 아이들은 학교 때문에 밀라노의 기숙사에 가
있었으니 결
국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푸치니의 아내 앨비라였다.
이 동안에 대본작가 일리카와 지아코사, 푸치니 세
사람이 <라 보엠>의 대본을 만들기 위한 끈질긴 작업 끝에 대본을 완성해서 작곡에 들어갔다. 물론 이 작업에도 리코르디의 역활은 매우
컸었다. 드디어 시작한지 3년6개월만에 라보엠은 완성 됐다. 그는 마지막 미미가 죽는 가장 어려운 장면을 완성하고 나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소리 내 울었다고 한다. 며칠 후 라 보엠의 탄생을 축하하는 파티가 토르레에서 열렸는데 모두가 얼굴을 가리는 가장무도회였다. 라 보엠은 푸치니의
요청으로 나폴리에서 초연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토리노에서 초연되고 말았다. 그것은 토리노 왕립 가극장이 푸치니의 요구대로 조명과
음향 효과를 일대 개축을 단행했기 때문이었다. 이 초연은 1895년 12월에 행해 졌는데 당시의 지휘자는 토스카니니였다. 이날 밤엔 이탈리아
왕족들과 평론가들이 많이 참석 했는데 공연 결과는 성공적 이었다. 제1막에서 ‘그대의 찬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앙콜이 터져 나오면서 청중들은
크게 흥분 했다. 모두 끝이 났을 때는 청중들의 성화로 커튼콜을 5번이나 해야 했다. 그해 2월 로마 공연 때는 전 좌석이 매진됐고 24회의
연속 공연을 가졌다. 4월의 팔레르모 공연 때는 그야말로 푸치니의 명성이 전 이탈리아에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물론 팔레르모 공연도 열광적인
환호 속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맨체스터에서 공연하여 역시 성공했다.
라 보엠의 성공이 있은 뒤 리코르디는
몇 해 전에 푸치니가 이야기했던 <토스카>의 대본 작성에 들어가기로 작정하고 원작자인 사드루를 만나 대본을 만들어도 좋다는 승락을
받아내 그 작업을 대본 작가인 일리카에게 맡겼다. 리코르디는 이 대본을 프랑켓티라는 젊은 작곡가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푸치니가 몇 년 전에
토스카를 작곡하고 싶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다시는 토스카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푸치니의 관심이 없어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리카, 사드루, 프랑켓티는 오페라에 관해 협의하기 위해 파리에 모였고 때마침 그곳에 있었던 베르디도 참가해서 일라카가 쓴
대본을 같이 읽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푸치니는 어떻게 해서든 프랑켓티의 손에서 토스카의 대본을 뺏어올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무렵 리코르디는 푸치니와 프랑켓티를 놓고 누구에게 작곡을 맡기는 것이 좋을까를 곰곰히 생각하게 되고 푸치니 쪽으로 마음이 기울자
모종의 작전을 세우게 된다. 그는 일리카와 논의한 뒤 일을 진행 시켰는데 우선 일리카와 리코르디는 프랑켓티에게 대본을 읽어보니 오페라로는 너무도
부적당하다는 말을 강조 했다. 결국 이 책략은 성공해서 프랑켓티는 완전히 토스카 작곡을 포기하고 리코르티와의 계약을 파기하게 된다. 리코르디는
바로 그 이튿날 푸치니와 토스카 작곡을 게약해 버린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디는 토스카를 쓰는 작곡가는 행운아가 될 것이라고 말해 푸치니는
더욱더 용기를 얻고 작곡에 매진해 1896년 9월말에 드디어 완성을 보게 됐다. 작곡에 약 3년이 걸린 셈이다. 공연은 로마에서 열렸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미묘했을 뿐 아니라 이 공연에 참석하게 될 국왕이 암살될 것이라는 루머까지 떠돌아 뒤숭숭한 가운데 공연이 진행돼
공연 결과는 성공도 실패도 아닌 어정쩡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연 횟수가 거듭되면서 청중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이래서 푸치니는 또 한 번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토스카가 성공을 거둔 뒤 푸치니는 또다른 오페라를 만드는 일에 열중해서 이것저것 적절한 소재를 찾는데 혈안이 됐다.
한때 알퐁스 도테의 희곡 <타르타렝>을 욕심냈으나 이미 다른 작곡가의 손에 대본이 넘어 가는 바람에 포기해 버렸고 그 후 적당한
소재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 하던 중 미국의 데이빗 벨라스코가 쓴 <나비부인>에 주목하게 된다. 나비부인은 1898년에 미국의 잡지
<세기>에 실화소설로 게재되어 화제가 됐던 작품이었다. 원작자는 죠 루이스 종이었는데 한 미군 장교를 사랑한 일본의 게이샤가 애기까지
낳았지만 버림받고 만다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이 원작은 벨라스코가 1막짜리 드라마로 각색해 미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런던에서 공연을 하고
있을 무렵 때마침 푸치니도 토스카의 런던 상연을 위해 런던에 있었기 때문에 나비부인을 관람하게 됐다. 이 연극에 매료된 푸치니는 곧 무대 뒤로
가서 벨라스코에게 오페라로 만드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청원을 하자 벨라스코는 즉석에서 허락하게 됐다. 기쁨에 찬 푸치니는 정식 게약을 맺고
작곡에 착수 할려고 했으나 그때 베르디의 별세 소식이 들려오게 된다. 이래서 그는 루카의 대표로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고, 그를 위한 진혼
미사곡도 써야만 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곧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서 대본작가인 일리카와 지아코사, 푸치니 세 사람이 모여 대본 작성에 들어가게
된다. 순조롭게 대본이 완성되고 곧 작곡에 착수한 푸치니는 2막까지 거의 완성했는데 그에게 큰 참사가 온다.
이 무렵 그는
자동차에 크게 미쳐 있었는데 어느 날 호흡기 질환 때문에 가족과 함께 병원에 갔다가 친구 집에서 저녁을 든 후 집으로 돌아오다가 자동차가
미끄러운 길에서 전복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대퇴부에 골절상을 입고 기브스를 하게 됐다. 이 사고로 8개월이나 기브스를 했고 그후 3년동안
지팡이를 의지해 걸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에겐 당뇨병까지 찾아 왔다. 다소 몸이 회복되자 다시 나비부인의 완성을 서둘러 결국 3년이 걸려서
완성을 보았다. 초연은 스칼라 가극장 이었다. 연출은 리코르디의 장남인 티토가 맡았고 극장은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뒷받침 했다. 푸치니는
나비부인에 대해서 그 어떤 작품보다도 자신을 가졌기 때문에 초연 날에 이례적으로 가족 동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이
오페라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청중들은 제1막에선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지만 제2막부터는 야유와 휘파람과 함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드디어
새 소리와 동물소리를 흉내 내는 소란을 피워 마치 동물원 같은 양상이 되고 말았다. 실패 원인으로는 제1막이 너무 지루하게 길었다는 것과
푸치니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방해꾼들의 조직적인 훼방이라고 지적되고 있으나 어찌됐던 푸치니의 충격은 너무도 컸다. 물론 이후에 나비부인
재공연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는 했으나 그 자신은 나비부인에 대한 자부심은 버리지 않았다.
한편, 이때부터 푸치니는 자주 외국
여행을 하게 됐고 영국에서는 아름다운 알토가수 시빌 새리그만을 알게되어 그녀와 평생 교우 관계를 갖게 됐다. 그러면서도 그는 꾸준히 새로운
오페라의 소재를 찾던 중 나비부인 후 3년이 지나서야 겨우 찾게 된다. 그것은 벨라스코의 희곡 <서부의 아가씨>였다. 그러나 이미
그의 단짝이었던 대본작가 지오코사는 세상을 떠나 버렸고 일리카도 이 일을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치비니니라는 새로운 작가와 대본
작업을 하게 됐는데 뜻대로 되지 않아 많은 애로를 겪었을 뿐 아니라 그때 그에겐 그의 인생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 찾아오게 된다. 그는
천성적으로 내성적인 성격인데다가 그 누구보다도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에 공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늘 불면증과 우울증에 빠져 있었는데, 이를
피하는 방법으로 먹는 즐거움이 거의 유일한 것이었는데 당뇨병으로 그마져 누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빠질수 있는 곳은 젊은 女人과의
연애 였다. 그의 연애는 정신적인 위로를 찾기 보다는 단순한 성적 충동에서 비롯됐다고 보아진다. 그 결과 부인 엘비라와 다투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푸치니는 나이가 들수록 세련돼 갔으나 앨비라는 촌티를 벗지 못하는데다 설상가상으로 거만하고 고집스런 여인으로 변해 갔다. 따라서 푸치니는
점점 아내에게서 멀어졌고 다른 여인들과의 연애를 즐기게 됐다. 어느 날 앨비라는 드디어 병적인 질투심을 나타내게 된다. 극히 사무적인 일로
푸치니를 찾아온 어느 여가수가 있었다. 그녀가 남편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던 앨비라는 느닷없이 갖고있던 파라솔로 여가수의 옷을 찢고 실컷
두들겨 패 분풀이를 하게 된다. 이 사건은 어느새 유명한 화제가 됐고 둘 사이는 더욱더 냉랭한 관계가 되고 만다.
한편 푸치니가
교통사고로 다쳤을 때 당시 16살 된 시골처녀 드리아라는 아가씨를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임시 고용 했었다. 드리아는 성심껏 푸치니를 돌봐 줬고
그리하여 푸치니는 그녀를 좋아했고 드리아도 푸치니를 존경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드리아가 푸치니 집에 온지 5년이 흘렀다. 이 무렵 앨비라는
푸치니와 드리아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그녀에게 몹쓸 행패를 하고 쫓아내고 말았다. 푸치니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 했지만 앨비라는 끝내
복수를 계획하고 온 동네에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견디다 못한 푸치니는 파리로 피하고 말았다. 결국 드리아는 엘비라의 지독한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세알의 독약을 먹고 닷새나 신음하다가 죽고 말았다. 드리아의 가족들이 당국에 앨비라를 고발하여 당국의 명령으로 시체가 검시되자 처녀임이
판평됐다. 결국 앨비라는 명예훼손, 증거불명에 의한 생명과 신체 박해, 모략 중상 등의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드리아 사건은
이탈리아에서 전대미문의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신문들은 연일 이 사건을 음침한 논조로 보도 했다. 푸치니의 적들도 이 기회를 신나게 이용했으니
푸치니는 그야말로 죽고 싶었을 뿐 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폭삭 늙고 말았다. 이 긴 세월 그는 작품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재기하여 1910년 8월엔 시빌에게 편지를 써서 서부의 아가씨가 완성된 것을 알리고 있다. 이 오페라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초연됐는데 엔리꼬
카루소가 출연했고 토스카니니가 지휘를 하는 등 호화로운 배역으로 이뤄졌다. 상연이 끝난 뒤 그는 생애를 통해 가장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공전에
없던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후일, 드리아의 비극은 오페라 <수녀 안젤리카>에서 가련한 노예 처녀의 모습으로 승화된다.
또한 그의 침체된 영혼은 <서부의 아가씨>로 새로운 활기를 찾게 된다. 이후 그의 오페라 창작은 지속적으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60세가 가까워지면서 앨비라와의 사이도 점차 회복되어 나갔다. 1919년엔 아내와 함께 처음으로 런던에 해외여행을
하였다.
1924년 10월, <투란도트>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푸치니의 인후암 증세는 매우 깊어지고 있었다.
그는 고통을 호소했다. 정밀진단 결과 그의 병명은 인후암이었고 치료 가능성은 전무했다. 1924년 11월 4일. 푸치니는 X선 치료를 받기 위해
브뤼셀로 떠났다. 그의 짐 속에는 투란도트의 미완성 악보가 들어있었다. 1924년 11월 24일 아침. 주치의는 푸치니의 목에 구멍을 뚫고
3시간의 수술을 시행했다. 경과는 좋았다. 의사도 낙관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그의 심장은 발작하기 시작했다. 11월 29일 새벽 4시.
푸치니의 심장은 멈췄다.
그의 사망 소식은 <라 보엠> 공연이 열리고 있던 로마에도 전해졌다. 지휘자는 즉각 오페라 공연을
멈추고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연주하며 푸치니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장례식은 12월 3일 밀라노에서 거행됐고 토스카니니는
<에드가> 가운데 진혼 미사곡을 지휘했다. 전 국민은 조기를 달았고 스칼라 극장도 이날은 문을 닫았다. 유해는 밀라노에 묻혔다가 그의
아들에 의해 푸치니의 빌라가 있는 토르레 델 라고(Torre del Lago)의 교회에 이장됐다.
1925년 4월 25일. 스칼라
오페라 하우스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투란도트'가 초연 됐다. 남성은 검은 복장, 여성은 검은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전 세계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참가했다고 한다. 무솔리니도 참석했다. 마치 푸치니의 추도 연주회처럼 되었다. 연주 도중 지휘자는 3막 1장의 ‘류’가 죽는 장면이
끝나자, "이곳에서 오페라는 끝입니다. 마에스트로께서 이 부분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Here the opera finishes,
because at this point the Maestro died"라는 짤막한 연설을 했다.(다른 기록에서는 "여기에서 마에스트로는 펜을
놓으셨습니다, Here the Maestro laid down his pen"라고 되어 있다). 오페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의
하나였다. 토스카니니는 지휘봉을 놓고 내려갔다. 그의 감정이 관객 모두에게 전해져 모두가 묵묵히 극장에서 떠났다고 한다.
<투란도트>의 마지막 부분은 푸치니의 제자인 프란코 알파노(Franco Alfano)가 스승의 스케치를 토대로 완성했고, 그 총보에
의한 초연은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제2회 공연에서 행해졌다. 2001년, 작곡가 베리오(Luciano Berio)가 새로운 완결부를 푸치니의
스케치를 토대로 썼다. 그러나 그 스코어가 자주 채택되지는 않는 형편이다.
푸치니는 열광적인 베리즈모(사실주의) 오페라시대에
활동했으면서도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인 서정성이 풍부한 선율을 즐겨 썼고, 등장인물의 성격을 음악적으로 적절히 묘사하여 드라마틱한 효과를 무대
위에 올려놓는 데 능했던 작곡가였다. 그의 오페라의 소재는 인정미가 풍부한 것이 많고 선율은 우아한 매력에 넘쳐있다. 인물의 묘사에 있어서는
사실의 묘를 기했고, 아리아든 중창곡, 합창곡이든 한결같이 생기 있는 감정으로 충만해 있다. 관현악은 새로운 수법을 효과적으로 다루었으며
지방색을 즐겨하여 그 분위기를 교묘하게 표출하였다. 나비부인에서는 일본의 음계를, 투란도트에서는 중국의 무드를 한껏
강조했다.
** 작품목록(대본작가의 이름 및 초연 장소와 날자)
♣ operas
Le Villi(요정 빌리),
libretto by Ferdinando Fontana (in one act – premiered at the Teatro Dal Verme,
31 May 1884)
second version(in two acts–premiered at the Teatro Regio, 26
December 1884)
third version(in two acts–premiered at the Teatro alla Scala,
24 January 1885)
fourth version(in two acts–premiered at the Teatro dal
Verme, 7 November 1889)
Edgar(에드가), libretto by Ferdinando Fontana (in
four acts – premiered at the Teatro alla Scala, 21 April 1889)
second
version (in four acts – premiered at the Teatro del Giglio, 5 September 1891)
third version (in three acts – premiered at the Teatro Comunale, 28 January
1892)
fourth version (in three acts – premiered at the Teatro Colón di
Buenos Aires, 8 July 1905)
Manon Lescaut(마농 레스코), libretto by Luigi
Illica, Marco Praga and Domenico Oliva (premiered at the Teatro Regio, 1
February 1893)
second version (premiered at the Teatro Coccia, 21 December
1893)
La Bohème(라보엠), libretto by Luigi Illica and Giuseppe Giacosa
(premiered at the Teatro Regio, 1 February 1896)
Tosca(토스카),
libretto by Luigi Illica and Giuseppe Giacosa (premiered
at the Teatro
Costanzi, 14 January 1900)
Madama Butterfly(나비부인), libretto by Luigi
Illica and Giuseppe
Giacosa (in two acts – premiered at the Teatro alla
Scala, 17 February 1904)
second version (in two acts – premiered at the
Teatro Grande di Brescia, 28 May 1904)
third version (premiered at Covent
Garden, London 10 July 1905)
fourth version (premiered at the Opéra Comique
in Paris, 28 December 1906)
fifth version (premiered at the Teatro Carcano,
9 December 1920)
La fanciulla del West(서부의 아가씨), libretto by Guelfo
Civinini and Carlo
Zangarini (premiered at the Metropolitan, 10 December
1910)
second version (premiered at the Teatro alla Scala, 29 Decembre 1912)
La rondine(제비), libretto by Giuseppe Adami (premiered at the Opéra of
Monte Carlo, 27 March 1917)
second version (premiered at the Opéra of Monte
Carlo, 10 April 1920)
third version (possible premier at the Teatro Verdi,
11 April 1924)
Il trittico(외투): Il tabarro, libretto by Giuseppe Adami,
Suor Angelica, Gianni Schicchi, libretto by Giovacchino Forzano (premiered at
the Metropolitan, 14 December 1918)
Turandot(투란도트), libretto by Renato
Simoni and Giuseppe Adami
(incomplete at the time of Puccini's death,
completed by Franco Alfano: premiered at the Teatro alla Scala, 25 April 1926)
♣ 그 밖의 작품들(초연 년도 및 장소)
Messa (글로리아 미사로 알려진 곡, Mass, Lucca, 1880)
Preludio Sinfonico in A major (Milan, 1882)
Capriccio Sinfonico (Milan,
1883)
Crisantemi (String Quartet, 1890, "Alla memoria di Amadeo di Savoia
Duca d'Aosta")
Minuetto no.2 (String Quartet, published about 1892,
"All'esimio violinista prof. Augusto Michelangeli")
Minuetto no.3 (String
Quartet, published about 1892, "All'amico maestro Carlo Carignani")
출처: 곽근수의 음악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