梨花畵人, 그리고 황창배
송 희 경(이화여대초빙교수, 90졸업)
Ⅰ. 한국화의 현 주소와 황창배
최근 미술계에서는 ‘한국화’를 다시 논의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5년 9월부터 2016년 4월까지 <한국화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여러 전시를 마련했고, 이와 연계된 비공개 라운드테이블과 심포지엄도 개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화의 정의와 범주를 규정하기란 여전히 어려우며, 심지어 한국화를 역사 속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국화 자체를 언급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한국화의 정체성 문제가 대두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황창배(黃昌培, 1947-2001)이다. 황창배는 1978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비구상을 출품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한국화 분야에서는 최초의 입상이다. 그리고 “동양화가 침체 과정을 거쳐 화랑 가에서 거절을 받는 등 푸대접 몸살을 앓고 있던” 1987년, 선미술상 수상 개인전을 개최하여 스타 작가로 부상했다. 1990년 이후 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나 전업 작가로 활동하면서 동·서양화의 재료와 매체를 넘나들었지만, 지필묵은 끝까지 지켜낸 ‘한국화가’이다. 비평가들은 54년의 불꽃같은 생애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을 “문인화의 발상을 토대로 한 민화적이고 현대적인 한국화”, “전통의 현대화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지극히 우연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구체적인 것을 찾아내는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조만간 서양인의 시각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으로 우리 양식을 재점검하는 시기의 도래”를 기대했다.
황창배가 재직했던 이화여자대학교와 동덕여자대학교가 의기투합하여 황창배 작가와, 그의 동료, 선후배, 제자 등 ‘이화화인(梨花畵人)’ 50여명의 작품을 한 자리에 모아 기획 전시를 마련했다. 올해가 황창배 작고 15주년이지만, 이러한 숫자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단지 그의 작품과 화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후배 작가들에게 남다른 각고의 노력으로 창작에 몰두한 선배 한국화가가 존재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 학과의 꾸준한 성장 과정과 신선한 창작 현장을 소개하기 위해 준비한 행사이다. 특히 황창배 작가의 작품 11점을 선별하여 그 조형성을 시기별로 감상하도록 전시했다. 이 전시를 통해 한국화의 보이지 않는 저력과 경계 확장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새삼 확인될 것이다.
Ⅱ. 1970년대 후반, 수묵의 색다른 실험
황창배는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의사인 선친에게 한학과 고전을 배웠고, 재주가 많은 어머니에게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중고 시절 6년간 미술반에서 활동했으며,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여 제도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졸업 후 군대에서 장교로 근무하면서도 하사관들과 장교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등 항상 화구를 소지한 작가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기대에 대한 중압감, 가난의 두려움, 그림에 대한 자신감 상실로 인해 붓을 꺾기로 결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황창배는 전통적 필묵법을 완벽하게 숙지하고자 노력했다. 선친에게 배운 한학과 고전, 한학자 청명 임창순(靑溟 任昌淳, 1914-1999)의 문하생 시절 익힌 한문학, 철농 이기우(鐵農 李基雨, 1921-1993)에게 전수받은 전각과 서예,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에게 사사받은 초상화 기법은 창작의 근간이 되었다. 황창배가 전통 기법의 숙지를 중요시 한 점은 그의 강의 현장에서도 증명된다. 그는 한국화과의 교과목인 ‘기초조형’에서 노방에 아교를 덧입혀 그리는 초상화 제작, 중봉의 필법을 이용한 인물 크로키, 사군자 그리기 등 지필묵의 숙련을 위한 강의를 구체적으로 시행했다.
대학원 진학 후,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걸으며 서예와 전각, 한문학과 미술사 등 인접 학문을 폭 넓게 섭렵했다. 청년 황창배는 색다른 고민을 하게 된다. 소위 전통회화의 형식과 경계에 관한 질문이다. 지필묵 이외의 다른 재료를 쓰면 안 될까? 동양화 창작의 정석이나 다름없는 하도(下圖), 즉 밑그림은 꼭 있어야 하는 것일까? 굳이 화면에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나야 할까?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황창배는 다소 엉뚱한 행동을 개시한다. 동양화 불변의 바탕 재료인 한지를 버리고 마직이라는 질긴 천을 선택한 것이다. 낯설기 그지없는 마직에 먹과 색을 얹기 위해 잿물에 연탄재를 섞어 여러 번 삶았다. 이를 말려보니 예상치 못한 얼룩이 생겼다. 그 위에 아교를 바른 후 진한 먹과 흐린 먹을 번갈아 얹어서 풍부한 번짐을 유도했다. 이 과정에서 생긴 형상은 마치 구름, 연기, 안개와 같아 보였다. 이것이 바로 황창배가 고안한 연무(煙霧)기법. <비(秘)> 시리즈의 수묵추상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마치 Chaos에서 빅뱅이 일어나 Cosmos로 이행되는 천지창조의 법칙처럼, 황창배는 아무 것도 형성되지 않은 혼돈의 상태에서 우주의 질서가 새롭게 생성되는 단계를 마직이라는 낯선 물성 위에서 보여주었다. 얼룩이 은은하게 번진 바탕은 만물의 소생과 생명을 간직한 소색(素色)이며, 검푸른 잿물은 소색과 대비를 이루는 가시적 색채가 아닌, 자연의 속성을 함축한 현색(玄色)이다. 연무기법을 5년여 동안 실험하여 그 결과물을 국전에 출품했고, 1977년에는 <비(秘) 31>로 문공부장관상을, 1978년에는 <비(秘) 51>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특히 <비(秘) 51>은 국전 동양화부 비구상 분야에서 처음으로 최고상을 차지한 작품으로 작가로서의 지명도와 큰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1979년 작 <무제>는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농묵의 필력과 한지의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면 상단에 “나는 믿는다. 地球의 終末이 오기 前까지는 藝術의 地域性은 存在한다고”라고 기술하여, 창작에 대한 작가의 의지와 확고한 다짐을 드러내었다.
Ⅲ. 1980년대, <숨은 그림 찾기> 시리즈
황창배는 1981년 동산방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한 후, 수많은 전시에 참여했다, 1974년 명지전문대학 부교수를 시작으로 동덕여대(1982-1984), 경희대(1984-1986), 이화여대(1986-1991)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충북 괴산군 청안면에 작업실을 열면서 전업 작가로 활동했다. 황창배는 1981년 동산방화랑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서 “연속적, 즉흥적 작업에 의존한” 수묵담채화와 전각 작품을 전시했다. 특히 1983년 작가 이철주(李鐵周, 1941-)와 함께 동산방화랑에서 <오늘의 표정>전(展)을 열면서 ‘현대풍속화’를 소개했다. 2인 초대전으로 열린 <오늘의 표정>전은 동시대 인간 군상의 갖가지 형상을 담아내기 위해 기획되었다. 황창배는 소위 ‘룸살롱’시리즈를 통해 향락에 빠진 유흥업소의 구성원을 재현했다. 실제 1980년대 초반 우후죽순처럼 생긴 룸살롱은 밤 문화를 선도하는 유흥업소로 성장했다. 황창배는 당시 성황을 이룬 향락 문화의 신 풍속을 기록한 셈이다. 이철주와 함께 소개한 시대풍정화는 1980년대 중반부터 유행하는 도시 풍경을 예고하며 후배 작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황창배는 1984년 한국 천주교의 의뢰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의 초상을 그리기도 했다. 이승훈 신부가 조선인 최초로 천주교의 영세를 받은 해인 1784년을 기점으로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신 초상화였다. 황창배는 이승훈 신부의 집안을 방문하여 복식사 전문가에게 의뢰한 도포를 후손에게 입힌 후 모델로 삼아 초상화를 완성했고, 현재 이 작품은 명동성당에서 감상할 수 있다.
황창배는 1987년 선미술상 수상 기념으로 선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일명 ‘숨은 그림 찾기’ 시리즈를 발표한 것이다. 그는 이 작업에서 회화 창작의 기초이자 틀이나 다름없는 하도(下圖), 즉 밑그림을 과감하게 버렸다. 밑그림 때문에 발생되는 경직된 이미지와 고정 관념의 틀을 깨기 위함이다. 1차 작업은 먹과 색의 바탕 선염이다. 한지를 수평으로 펼친 후 밑그림 없는 한지에 담묵과 담채를 무작위로 포수한다. 선염된 먹과 색은 한 없이 번지면서 다양한 색상 배합과 얼룩을 형성한다. 일획성과 우연성이 발생되는 순간이다.
2차 작업은 부분 묘사이다. 1차 작업이 마무리 되면 바탕색은 서서히 건조되어 예상치 못한 얼룩이 드러난다. 작가는 ‘얼룩’에 주목한다. 미처 완성되지 않은 붓질을 보면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물을 차례로 그려나간다. 즉 무형상(無形象)에서 심형상(心形象)으로 전환되는 순서이다. 그리하여 여인의 요염한 옆태가, 아름드리 고목나무가, 화사한 수풀이 서서히 가시화된다. ‘숨은 그림’을 찾는 단계인 셈이다. 마지막은 세밀한 부분 묘사이다. 농묵과 농채는 섬세하면서도 재치 있는 표현을 더해져서 완벽한 형태로 변신된다. 이렇듯 그에게 얼룩은 또 다른 밑그림이다. 당시의 작업을 황창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물체에는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신비로우면서도 숨겨져 있는 미를 화폭에 담아보고 싶은 것이 제 욕심이었죠. 그래서 에스키스 과정을 안 거치고 직접 머리에서 화면으로 상을 옮겼습니다.”「榮光의 수상- 大統領賞 黃昌培씨 “먹 붓 등 在來式자료 사용 숨겨있는 美의 표현 힘써”」, 경향신문, 1978, 09, 22
황창배의 ‘숨은 그림 찾기’는 발묵과 채색이 어우러진 시각물이다. 그는 헝클어진 사물과 채색의 번짐을 그대로 수용했고, 붓 가는 데로 창작을 감행하여 마음 속 풍부한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그의 손끝에서 형성된 그림에 예측 불허의 파격과 즉흥성이 공존한다. 황창배의 ‘숨은 그림 찾기’는 점차 색면 추상으로 전환된다. 여백은 사라지고 형태는 기하학으로 변형된, 비구상 화면이 연출되었다.
Ⅳ. 1990년대 이후, 지필묵의 경계를 확장하다.
황창배는 전업 작가로 전향한 1991년 이후 한지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청안면 작업실에서 “녹색 숲의 아름다움과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열매, 각양각색의 들꽃에 대한 감동, 맑은 공기, 비에 젖은 흙냄새”를 관찰하여 원색의 자연물을 완성했다. 그리고 미술계가 닥친 과도기적 현상과 경계의 혼란을 기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닥뜨리면서 그 해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드디어 지필묵에 대한 고정 관념과 경계의 틀을 깨고 캔버스, 잿물, 아크릴, 연탄재 등 폭 넓은 재료를 사용하면서 과거의 계승과 신화법의 개척을 동시에 시도했다. 다소 엉뚱한 질료를 다루었지만, 그는 언제나 경영위치를 구상했고, 수류부채를 활용했으며, 골법용필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황창배가 아크릴로 표현한 소재와 주제는 매우 다양하다. 먼저 시대의 부조리와 불편한 사회상을 은유했다. <무제_哭高宅>에서는 부잣집의 마나님을 통해 인본을 무시한 물질 만능주의를 경고했고, <무제-새옹마>에서는 변방 늙은이의 말을 뜻하는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를 인용하면서 세상의 길흉화복이 변화무쌍하여 예측하기 어려움을 알려주었다. 1991년 불거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도 지나치지 않았다. <무제>에서는 수질 환경 보호법을 무시한 대기업체의 ‘폐수 무단 방류와 유독 물질 관리 소홀’을 패러디했다. 그림 속 물고기는 내장이 흉하게 썩었다. 게다가 물고기 위로 X자의 선이 교차한다. 오염된 하천에서 서식하는 생물의 처참한 죽음과 인간의 이기심이 불러일으킨 생태 파괴를 고발하는 섬뜩한 기호이다. 같은 해 그린 <무제>에서는 탐스럽고 먹음직한 붉은 사과의 속이 문드러졌다. 페놀에 오염된 물고기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되는 조형 언어이다. 이렇듯 황창배는 사회 지배층이 저지르는 부조리를 기발한 발상으로 폭로하면서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황창배는 1990년대 중반 탈춤, 상여 등 소위 한국적인 소재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 그는 향토적인 소재를 부각하기 위해 매우 큰 화폭을 선택했다. 그리고 과감한 몇 가지 원색만을 사용하거나 사물을 단순화하여 시선을 집중시켰다. 필선을 토대로 한 설명은 가급적 줄이고 모든 사물을 기하학으로 변형시켰다. <상여>도 이러한 조형요소를 토대로 완성된 대작이다. 가로 5m가 넘는 화면에 울긋불긋 장식한 꽃상여는 너울거리는 깃발을 앞세웠고, 이를 이끄는 군상은 하얀 바탕을 그대로 드러낸 채, 마치 실루엣처럼 처리되었다. 마치 여백 처리된 군상은 주인공인 꽃상여를 부각하기 위한 조연이지만 화면에 동세를 부여하는 보이지 않는 주연인 셈이다.
혹자는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뿐만 아니라 연탄재까지 바른 황창배의 작품을 한국화라 할 수 있을지 질문한다. 이 질문에 대해 황창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밀가루로 빵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제비도, 국수도 만들 수 있다.”- 황창배
위의 문장은 많은 논란과 이견을 파생할 수 있는 명제이다. 그러나 면면히 내려오는 옛 것을 계승함과 동시에 새로운 조형 언어를 창출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닌 한국화가들이 반갑게 수용할 해답일지도 모른다. 실재로 전통 필묵법의 완벽한 섭렵을 토대로 그 영역을 확장시킨 실험적 조형 방식은 동료 및 후배 작가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현재 한국의 미술계는 복합적인 시각 문화가 혼재한다. 한국화도 전통과 혁신이라는 두 명제의 변주 사이에 위치한 창조물이다. 묵의 운용과 전통적 채색 방법을 습득하고 ‘한국적’ 소재와 표현법을 탐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옛 것의 지나친 집착도, 서구 사조의 무분별한 모방도 거부한다. 과거를 소중히 하되, 현재를 직시하면서 미래를 전망하는 작업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한국화가의 남다른 노력은 황창배를 기억하고 한국화의 현주소를 목도하고자 기획된 이번 전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다양한 소재와 기법을 선보이며 한국화의 창작 가능성을 다각도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황창배를 비롯하여 이미 미술사에 편입된 한국화 거장의 작품을 재평가하여 켜켜이 쌓여진 예술의 단층을 연구한다면, 전통회화에 대한 소중함은 절대로 간과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한 울타리 안에서 밀도 있고 참신한 창작을 실험하고 사제지간의 남다른 정을 쌓으며 성장하는 ‘이화화인’이 계속 배출되는 한, 한국화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