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men Melville의 'Bartleby the Scriverner'
1. 멜빌의 생애(1819.08.01~1891.09.28)
뉴욕 출생으로 부유한 무역상 집안의 8남매중 3째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부유했으나 13세 때 부친의 파산과 죽음으로 생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은행, 상점의 잔심부름, 농장일, 학교 교사등을 전전하다가 20세에 이르러 상선의 선원이 되었고 영국 리버풀을 항해했으며 22세에 포경선의 선원이 되어 남태평양을 갔으며 1844년에 군함의 수병이 되어 귀국 하였다. 1846년에 포경선에서 탈출하여 남태평양의 식인 마을 키르키즈제도의 식인마을에 살았던 경험을 토대로 <타이피족>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남태평양의 평안한 방랑생활을 엮은<오무>(1847), 가공의 남해 모험담<마디>, 리버풀을 왕복하는 선상생활을 엮은<레드번>(1849), 군함생활을 그린 <하얀 재킷>(1850)을 발표 하였다. 이어서 멜빌을 미국의 대표적 작가의 위치로 굳힌 <백경>(1852)을 발표 하였고 1852년도에 지금까지의 해양소설에서 탈피하여 <피에르>를 발표 하였다.초기의 두 작품이 대중성에 힘입어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나 계속된 그의 작품은 이렇다할 독자층을 확보하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했다. 그의 주요 작품<백경>을 비롯하여 <피에르>등은 캘비니즘적 기독교 사상에 의지하면서도 때론 그 범주를 넘은 견해를 제시하여 인간 심리의 착잡함을 비유적 상징적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독자들에겐 충분한 이해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근대적 합리성을 거부하는 철학적 사고 풍부한 상징성이야말로 그의 본질 이었으나 금세기에 와서야 그가 단순한 해양 모험작가가 아닌 나다니엘 호오손과 함께 인생에 비극적 통찰을 한 상징주의 철학적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 밖에도 마지막 장편<사기꾼>(1857), 단편<서기 버틀비>,<베니토세레노선장>(1856),유작이된중편<빌리버드>가있으며,시집으로
그의 생활고와 삶에 대한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시도는 멜빌을 바다로 나아가도록 이끌었으며 그의 해양 생활과 모험에 가까운 경험은 그를 해양소설 작가의 반열에 들게 하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 견주어 해양 모험담의 흥미로 일부 소설은 대중적 인기를 얻기도 하였으나 생존시 그는 작가로서 충분한 인기와 인정은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12년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에 발표된 논문을 통하여 멜빌은 19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로 미국민의 사랑을 받는 작가로 또한 모옴이 <모비딕>을 세계 10대 소설중의 하나로 꼽는 정도의 반열에 들면서 문학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2. 시대적 배경과 낭만주의
1) 신대륙 발견이후 미국은 도피와 기회의 땅으로 유럽인들에게 다가왔다. 영국의 식민시대를 거쳐 독립한 미국의 시민사회는 금욕, 성실, 근면과 절제를 바탕으로한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하고 상업과 산업의 발달로 신흥 시민사회계급의 등장은 정치에 대한 자유를 주창하였고 칼뱅파들은 자본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뒷받침 시켜주었다. 이에 새로 열리는 신대륙의 칼뱅교 교리는 자본주의의 합리화에 바탕을 제공 하였다.
캐톨릭은 노동에 의한 이윤 추구가 아니면 죄악으로 취급하였으나 개신교는 부의 축척이 선이라 주장하였다. 따라서 산업혁명을 거치며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미국사회는 상인계급이라는 신흥세력이 등장하게 되고 이들 신흥세력들은 기존 유럽사회의 중세장원이라고하는 공동체에서 가족중심의 가부장제로 중세의 공창을 인정하던 성개방의 것들로 부터 엄격한 성 윤리를 바탕으로 한질서가 확립되었고, 2차대전이후 여성의 사회진출은 불평등에서 남녀평등으로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형성되게 되었다.이러한 변화의 물결은 농업에 뿌리를 둔 미국의 노예주 11개주와 상업의 발달로 새롭게 형성된 상인계급을 중심으로한 자유주 11개주의 균형이 깨어짐으로써 남북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농장제(Plantation)의 유지를 위하여 노예제를 주장하는 남부의 세력과 북부를 중심으로 산업화 공업화된 신흥세력과의 마찰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었다.
2) 유럽사회는 18세기에 걸쳐 풍미되었던 고전주의의 반작용으로 사회적 전통과 문화적전통의 사조로서 낭만주의가 발생을 야기시키게 되었으며 고전주의가 그리스·로마 시대의 덕목이었던 합리성, 명확성, 절제, 균형, 조화, 질서 등의 개념을 중시한데 반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고전주의적 요소들은 예술가들을 구속하는 족쇄가 되다시피 했다. 그래서 18세기 말부터 이성의 힘만 갖고서는 복잡하고 신비한 삶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생각이 문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고전주의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낭만주의는 무엇보다도 상상력과 직관 그리고 감정을 중시하게 되었다.. 유럽의 낭만주의는 대서양을 건너 19세기가 되어서야 미대륙에 전달되었다. 그런데 19세기 미국 낭만주의는 비록 유럽의 낭만주의에서 자양분을 받고 성장하였지만, 유럽의 그것과는 조금 차이가 난다. 유럽의 낭만주의와는 달리 미국의 낭만주의는 낙관주의의 밝은 햇살에 못지않게 비관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의 낭만주의는 두 가지의 흐름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Emerson과 Thoreau 그리고 Whitman으로 이어지는 낙관주의적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Hawthorne, Melville 그리고 Poe로 대변되는 비관주의적 전통이다. 여기에서 비관주의적 전통을 대표하는 작가들은 인간의 인성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악에 대한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작품에서 기울이고 있다.기존 전통에 대한 반기를 들고 자유와 개인주의를 선호하면서 반항적인 기질을 보이고 있다. 자연적인 요소를 도입하고 현실을 벗어난 형이상학적인 유토피아를 동경하고 외부세계를 이상화 하려는 경향이 있다.낭만주의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아름다움과 이상적 대상에 대한 추구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신념과 희망 그리고 두려움이나 의심 또는 불안감 모두가 낭만주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낭만주의의 가장 핵심이 되는 특성은 독창성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이 현실에 우선하고 상상이 지성에 우선하며 주체적인 생각이 객관적인 생각에 우선되는 그야말로 현실이 이상에 종속되는 그런 상황이 낭만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3. 줄거리구성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가장 활발한 꽃을 피우고 있는 미국의 심장부(뉴욕 월스트리트의 고층 숲) 법률사무실과 바틀비가 죽음을 맞는 감옥을 무대로, 극히 안정적이고 공리적인 삶을 평온하게 추구하는 화자(18세기 산업혁명을 거쳐 고도화 된 산업사회와 자본주의)를 통하여 철저하게 현실세계와 분리되고 물리적, 공간적인 벽에 갇혀 있는 바틀비(물질문명의 거대한 물결에 합류하지 못하고 최소한의 방어밖에 할 수 없는 철저하게 격리되고 고립된, 왜소한 한 인간)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우리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을 노출 시키고 있다..
전개방식은 화자가 바틀비를 객관적으로 서술해 가는 것이 아니고 바틀비와 관련된 사건을 겪으면서 화자의 내부 심경변화에 대한 기술이다. 화자가 의식하고 인식하고 행동하는 내부의 변화에 대하여 대처해 가는 것을 그린 것이다.
등장인물은 앞에서 언급한 화자와 바틀비 이외에 Turkey, Nippers, Gingger Nut이 화자의 고용원(서기와 사환)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현실세계에 대한 다양한 삶의 형태로 나타나 있으나 벽과 빛에 대한 인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이것이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름이 보여주듯 다양한 미국사회의 현실적인 한 표상이고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지적사고의 부족함등을 인식하고 있을 뿐 삶의 이유에 대해서 번민하고 고통스러워 할 여유는 없는 것 같다. 이들은 술에 취해 살거나 책상 같은 것에 집착하고 비스킷에 관심을 쏟는등의 이러한 일들이 자신들에게 중요한 부분으로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1) 바틀비가 갇혀 있는 벽과 주제와의 관계
작품의 주무대가 되는 차단되고 격리된 2층 변호사 사무실과 바틀비가 수감된 감옥의 벽은 바틀비에게는 격리되고 분리된 공간이고, 인생의 막막함과 한계상황으로 인식되어진다. /사무실은 빌딩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채광을 위해 넓게 뚫어놓은 하얀 수직 공간 안쪽의 하얀 벽에 면해 있었다./,감옥은 곧 /돌로 만든 이집트식 벽이 그 어둠으로 나를 압도했다. 그러나 발밑에서는 부드러운 잔디가 자라나고 있었다. 불멸의 피라미드 속에 어떤 불가사의한 마법에 의해서 돌들의 틈새로, 새들이 떨어뜨리고 간 잔디의 씨앗이 싹을 틔운 것처럼 보였다./바틀비에게는 차단되고 격리된 공간으로 다가서지만 화자에게는 보호되고 방어해주는 공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분에 따라서 나는 그 문들을 열어놓기도 하고 닫아 놓기도 했었다....중략... 이 조용한 사나이를 손쉽게 불러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건물의 증축 탓으로 지금은, 얼마간의 밝은 빛이 비쳐들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곳은 보통 죄수들은 접근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놀랄 만큼 두꺼운 주위의 벽들은 그 너머의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있었다./ 의 예문에서 느끼는것처럼 벽을 통하여 보여주고 싶은 것은 무엇 이었을까?
이 작품의 부제는 A Story of Wall-Street이다.
월스리트가 상징하는 벽돌로 둘러싸인단조롭고 삭막한공간에서
감옥은 물리적 공간적인 벽이기도 하지만 고용인과 직원들 사이의 인식의 장벽이기도 하고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 사이의 벽이기도 하며 삶과 죽음사이의 인식의 장벽이기도 하다. 삭막함으로 차단된 벽 속에서 소외되어가는 현대인 - 바틀비는 ‘I would not prefer to'라고 절규한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거부한다. 사회적인 공리와 자신의 평안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회적 인물과 사회에서 분리되어 자신의 세계에 갇혀 현실을 거부하고 있는 개인적 인물 바틀비를 통하여 자본주의의 모순과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미국이라는 사회가 자긍심으로 느끼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앞에서 개인의 행복과 행복 추구권에 대해서 미국이라는 사회가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의 행복 추구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벽을 사이에 두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행복과 불행의 양비론적인 모습앞에 패자이며 버림받은 자의 행복 추구권은 어떻게 모색되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2) 화자가 바틀비를 통해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
이 소설은 아주 대조적이고 극단적인 두 인물(화자, 바틀비)의 등장으로 화자의 심리상태가 변화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문제의식을 인식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주인공으로 인식되는 바틀비 보다는 화자의 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통하여 심리상태가 어떻게 대처해나가는가를 보는 것이 주제의식을 파악
하는데 주안점이라고 생각된다.
화자는 작품의 전개를 화자의 입장으로 글을 전개하지만 알지 못하는 바틀비를 대변하고 싶어하고 바틀비와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주지않음으로써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시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창백한 단정함, 비참할 정도의 존경스러움,구제할 길 없는 고독의 인간 바틀비를 고용한다. 입사이래
업무에 놀랄 정도의 근면성을 보여주던 그는 사흘 째 되던 날 형평법원장의 필사본의 대조를 위한 호출에 ‘I would prefer not to'로 노동을 거부한다.
입사이래 보여준 놀라운 업무태도, 지금 키케로 석고상같은 느낌을 주는 바틀비에 대해 스스로 당황하고 스스로 적의를 가라 앉히는 모습을 보인다.
일반적인 상식과 관습으로 대변되는 Turkey, Nippers, Ginger Nuts등의 직원들의 설득과 화자의 인식의 논리앞에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화자는
바틀비에 대하여 불쌍하고 악의없고 무례한 행동을 할 의도가 전혀없는 것으로 인식하며 오히려 관대한 자세를 취한다.이는 화자가 손해볼 것이 전혀없다는
경제논리로 대치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내부의 분노에 걸맞는 그의 행동을 유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두 번째의 사건은 우체국 출장 지시의 거부로 나타나고 있다. 화자는 합리적인 업무에대한 거절에 보복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시간은 흘러갔고
그의 검소함,근면성, 조용한 태도로 화자에게는 소중한 일꾼이 된다.그러나 일요일 사무실 에 잠깐 들렀다가 바틀비가 사무실을 그의 주거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을 알게되고 파렴치한 행동에 대하여 무력한 반항심은 화자를 자극한다.
그러나 일요일이면, 사무실 퇴근이후 밤이되면 월스트리트는 폐허가 되고 공동화된 공간속에 갇혀 사는 바틀비에 대해 인간적유대감,즉 모두 아담의
후예라는 동류로서 우울한 감정에 싸인다.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약간의 융통성을 갖고 싶지 않습니다”
바틀비의 거부 - 노동의 거부와 현실의 거부 앞에서 바틀비에게 화자는 해고를 통보하게 된다. 불가해한 필경사 앞에서 화자의 허영심은 연민의 정을 몰아내고
해고에 따른 여분의 돈도 제공하지만 사무실의 비품처럼 되어있는 바틀비는 떠나지않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화자는 스스로가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중략....
‘냉정을 되찾자마자 나는 건물 주인과 세입자들의 요구에 대해서도, 그리고 바틀비를 도와주고 잔인한 박해에서 보호해 주려는 나의 욕구와 의무감에
대해서도 모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이제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 고요함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나의
양심도 그런 시도에 정당성을 인정해 주었다 ---’
전 사무실을 떠나지 않고 배회하는 바틀비,새로운 세입자와 건물주의 불법거소자 처리,그리고 화자의 동의와 관계정리, 이렇게 하여 바틀비는
감옥으로 이송된다.그리고 바틀비는 두터운 벽으로 격리된 뉴욕시의 교도소의 비교적 조금은 자유스러운 파란 풀도 자라는 자라는 곳에 수감된다.
그러나 그 조그마한 자유와 파란 풀의 희망도 죽음의 벽 너머의 것이다. 바틀비에게는 그너머의 소음들도 모두 차단된 벽의 안 뜰에서 숨을 거고
화자가 죽은 다음 방문한다
냉정을 되찾자마자 나는 건물 주인과 세입자들의 요구에 대해서도, 그리고 바틀비를 도와주고 잔인한 박해에서 보호해 주려는 나의 욕구와
의무감에 대해서도 모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이제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 고요함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나의 양심도 그런 시도에 정당성을 인정해 주었다
물질문명의 거대한 물결에 합류하지 못하고 최소한의 방어밖에 할 수 없는 왜소해진 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을다루고 있는데 세상이라는 거대한 벽에
갇혀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와 원초적 고독 그리고 비극적 상황을 다루면서도 소름끼칠정도로 고요하게 그리고 유머러스하 할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그려내고
있다.따라서 벽은 한 인간에는 자본주의의 보호막저지선이고 또 한 인간에게는 상실과 차단과 억압의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풍경화가가 말하는 '생기'가 없다기 보다는 오히려 '단조롭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3) 바틀비의 거부행위와 의미가 무엇인가?
거부라는 단어가 갖는 사전적 의미는 요구나 제의 따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치는 것을 말한다.여기에서 바틀비의 거부행위의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면
현실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갖는다. 바틀비는 법률 사무실 서기로서 마땅히 수행해야할 직무를 거부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근로자가 해야할
노동행위의 거부 - 이것은 현실에 대한 부정이요 현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바틀비라는 왜소한 인간이 사회가 요구하는
제의를 물리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본문에 ‘I prefer not to'의 표현이 25회에 걸쳐 표현되고 있다. 긍정 또는 동의의 의사표시는 2회에 거쳐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저는 이곳을 그만두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도 알고 있습니다. ’이상의 표현이 바들비가 의사표시를 하는 거의 전부 이다.
현재의 직장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바틀비로서 지키고 싶은 최후의 저항선이고 보루인 사무실에서는 물러설 뜻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뉴욕 교도소에 수감된 이후도 면회온 화자에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도 알고있다는 메시지로 바틀비는 현재의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상황인식은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바틀비 --
거대한 모습으로 자본화, 사회화 되어가는 미국 사회에 던져진 왜소한 인간의 기본적인 삶과 행복추구에 대한 권리가 중산층이라는 화자를 통하여
수용되고 베풀어 질 수 있는 배려라는 명목적이고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하여 노동을 거부하고 지시를 거부하며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소.’....‘자고 있소. 역대 왕들과 고문들과 함께 이요.’/라고 화자가 바틀비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후문에 의하여 우체국의 ‘dead letter'취급자였다는 심볼을 어렴풋하게 흘리며 말단에 이른 소외된 영혼에 대하여, 절망에 빠져 죽은 영혼에 대한
용서의 편지로--/ 창백한 얼굴의 서기는 접혀진 종이 속에서 반지를 한 개 끄집어낸다 --- 그 반지를 끼워야 할 손가락은 어쩌면 무덤 속에서 썩어 가고
있을 것이다. 인정 많은 사람이 바쁘게 보내는 지폐 한 장 --- 그것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이미 먹지도 못하고 굶지도 않는 상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절망에 빠져서 죽은 사람에 대한 용서의 편지, 희망을 잃고 죽은 사람에 대한 희망의 편지, 구원받을 길이 없는 재난에 짓눌려서 죽은 사람에 대한 좋은
소식도, 생명의 사자로서 보내어졌지만, 이 편지들은 죽음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바틀비여! 아아, 인간이라는 존재여! /라고 작품을 맺고 있다. 보편적으로
멜빌의 작품은 미국 낭만주의 문학작품에서 어둡고 침체된 분위기의 색채를 지니고 있으며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악의 본질에 대하여 그 실체와 선악
그리고 해결 방안에 대하여 ambigyous하고 symbolic한 접근으로 독자스스로 해결토록 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