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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 15 강 메시지_아산UBF
뭇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 / 마가복음 9 : 30 - 50
요절 / 마가복음 9 :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의 갈등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관계로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도 갈등관계여서 가족들이 예수님을 정신 나간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들과도 갈등관계에 놓입니다. 결국 유다 백성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예수님을 버립니다. 오늘 말씀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길이 다르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이 다른 것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에 대하여 마음이 없었고 관심이 없었으며 근본적으로 무슨 길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이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근본 마음과 인격 더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길과 다른 것이 없는지 돌아보고 예수님의 길을 영접하고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1. 첫째가 되는 길
30,31절을 보십시오.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갈릴리에서 많은 백성들을 도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주시고 기적을 보여주셨던 가버나움, 가나, 디베랴, 벳새다, 고라신 이 곳들은 모두 갈릴리에 있는 동네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능력을 행하시며 백성들을 도우셨던 이 동네들을 그냥 지나가십니다. 제자들에게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예루살렘 도상에서 제자들에게 제자의 길을 집중해서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야의 길을 영접하도록 도우시고 제자들도 예수님의 길을 따를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갈릴리의 모든 동네를 그냥 지나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집중하시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전에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거나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말씀이 있으면 제자들은 조용히 따로 예수님께 여쭈었지만,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따로 물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길은 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본능적으로 따르기 싫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심지어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길에서 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의 내용은 ‘누가 크냐’ ‘누구의 서열이 더 위냐?’ 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길은 고난을 영접하고 인류대속의 십자가를 지고자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었습니다. 그에 비하여 제자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길은 예루살렘에 가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높은 서열이 왜 제자들에게 논쟁 주제가 된 것입니까? 제자들의 추구하는 바가 권력이었습니다. 더 높은 서열이 주는 더 큰 권력, 더 큰 권력이 주는 더 큰 영향력! 이것이 제자들이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삶이 이것을 지향하였습니다. 더 큰 권력, 더 큰 영향력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 것입니까? 인간이 모두 그러합니다.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 자주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문제냐고 물으면 ‘(다른 사람이 무엇을 불쾌해 하는지)잘 몰라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내가 잘 몰라~’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본질을 피하는 대답입니다. 무례한 사람,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사람이 스스로 문제 되는 점을 ‘내가 그런 사람간의 일을 잘 모르는 것’이라 변명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도 본질을 비틀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추구하는 바가 잘못된 입니다. 근본적인 것은 다른 사람을 통제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존중받아 결국 얻고자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면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 받은 것 자체가 종착점이 아니라 그런 인정과 존중을 받으면 이어서 많은 사람들을 내 뜻대로 이래라 저래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추어진 원초적 욕망입니다. 대체로 남자들의 욕망입니다. 주변 사람들, 많은 사람들 궁극적으로 온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욕심입니다. 사람간의 매너를 왜 모르겠습니까? 이 욕심에 집착해 있을수록 그런 매너는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욕망을 따라 살아 생활 자체가 욕망을 추구하고 욕망을 향하기 때문에 나의 어떤 말이 문제가 되는지, 나의 어떤 표정, 어떤 의도가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지 인지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기분 나빠하는 것을 내가 잘 몰라’ 하는 것은 사람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추구하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겠다는 교묘한 회피, 회개하지 않으려는 고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정치이슈에 편향적으로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도 그 바닥에는 내 뜻대로 안된다면 내가 지지하는 사람에 의해서 국민들이 지배되고 내가 지지하여 찍은 사람의 이념과 신념대로 세상이 움직이기를 열망하는 욕망의 표출입니다. 여자들에게는 무엇이냐구요? 여자들에게는 (안 그런 사람도 많겠지만), 사람들의 모든 관심이 나를 향하기를 원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우리센터는 안 그렇습니다. 주변사람들로부터 ‘정말 예쁘구나’ ‘참 곱구나’ 끊임없이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관심과 사랑을 독점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센터는 안 그렇습니다. ‘예쁘다’ ‘곱다’는 말이 아니어도 주변 사람들이 내게 집중하고 내게 관심을 늘 유지하기며 나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우리센터 자매목자님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서열 1위는 권력이 있습니다. 권력은 많은 사람들이 내 말대로 복종하고 움직이는 힘입니다. 이 권력은 세상과 사람들의 행동을 바꿀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내 영향력아래 둘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큰 영향력이 어디서 나올 수 있는지 알려주십니다. 역사 이래로 많은 사람들은 사람위에 올라서야 그런 영향력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물리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권력자들은 강한 군대를 보유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세운 국가 시스템에 지배받느라 군대보유가 어려운 유대인들은 돈이 힘을 갖는다고 보고 자본을 키우는데 힘 쎴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아야 영향력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첫째가 가지는 그 권력, 첫째가 가지는 그 영향력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끝이 되는 겸손의 인격에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 다른 사람의 필요와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내면성이 실현되는 생활, 풍성한 내면성이 실천되는 삶에 첫째가 되는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사람들 위에 올라서고자 할수록 많은 사람들은 반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기초로 본다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할수록 높아지려 할수록 많은 사람들은 거부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 받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으려 애쓰면 애쓸수록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고 비호감은 더 커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해답입니다.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것은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삶이 사람을 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사람에게 높임 받으려 하고 사람에게 존중받으려 하는 것은 마음의 눈, 삶의 추구하는 방향이 사람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뭇 사람의 끝이 되는 것’ ‘뭇 사람을 섬기는 것’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과 하나님의 칭찬과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는 생활과 삶이 ‘뭇 사람의 끝’이 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뭇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을 향한 욕망을 거두고 사람을 향하는 그 욕심을 버려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의 끝이 되어 섬기는 삶을 살면 비로소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겸손과 이타적인 희생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도 결국에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성 있는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예수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다는 단어를 좀 더 찾아보았습니다. 헬라어로는 "δέχομαι" (dechomai)입니다. 물건이나 사람을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편지를 받다’ ‘손님을 맞이하다’는 뜻으로 일상생활에서는 사용하고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나 축복을 받아들이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 외에도 사상이나 의견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도 확장하여 사용합니다. 고대나 지금이나 어린아이는 어른들이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봅니다. (잘못된 습관이 들 수 있다고 보고)지시하고 가르치고 교정하여야 할 대상으로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예수님을 받아들이듯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듯이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좌지우지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영향주고 교훈주고 감화시켜 내 말대로 움직이고 나를 중심으로 생각도 하고 나를 따르게 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명백하게 나보다 지혜와 연륜이 현저하게 부족하여 반드시 나를 따르게 하고 나에게 배우게 할 대상임이 뚜렷한 어린 아이를 받아들이되 예수님을 받아들이듯 하라고 하십니다. 어린아이를 그렇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관계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답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나의 존재의 위대성이 어디로부터 말미암을 수 있는지 분명한 해답이 됩니다. 사람을 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음의 눈은 하나님을 향하고 말과 행동은 사람들에게 영향주려 하지 말고 사람을 좌지우지 하려고 하지 말고 모든 사람의 끝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생명의 열매를 주시고 가는 곳마다 있는 곳마다 사랑과 화평이 가득하게 해주십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예수님께 한 가지 보고했습니다. 12제자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기에 금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의 기준은 모임과 조직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다 할지라도 12제자 그룹의 멤버가 아니라면, 12제자 그룹의 허락과 인증을 받지 않았다면 금하여야 한다고 보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39-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사도 요한의 기준을 바꾸도록 하십니다.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인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기준은 ‘예수님 이름’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의탁하는 사람에 대해서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이름을 의지하여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하여 반대하거나 그들의 선한 일을 금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 하신 일입니다. 금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접하고 지지해주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에게 물 한 그릇 이라도 주며 지지하고 지원하면 그 사람에게 반드시 상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하는 것이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2. 소자하나를 귀하게 여길 것
42-48절을 보십시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겸손해지는 것, 섬기는 것, 영접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선량하고 관대하고 덕이 있는 좋은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42절부터는 엄한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 엄중하게 다루는 것은 소자 하나를 실족시키는 일입니다. 소자 하나가 실족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으로 소자에게 직접 괴롭게 하고 신앙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20대 청년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마음의 원하는대로 살고 세상풍조만 접하며 살아온 20대 청년들은 불안정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20대 청년들을 이해해주고 너그럽게 참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사건건 허물과 약점을 지적하고 허물과 약점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며 험담하고 비판하는 일이 있습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대가 가지는 뚜렷한 약점은 ‘정욕’입니다. 사실 ‘정욕’도 아름다운 사람, 멋진 사람, 다정함, 친절함, 친밀함, 사람을 통한 즐거움과 쾌락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욕심입니다.
자기는 40, 50, 60이 되어서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전혀 회개하지도 않고 제어하지도 않으면서 젊은 이들의 욕심은 신랄하게 비난하는 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반드시 징계받을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허물, 특히 불안정성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20대 청년을 이해해주고 그 허물을 덮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무슨 희한하고 독특한 큰 죄인을 발견한 것처럼 떠들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과거사를 보면 굉장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다음으로 소자를 실족시키는 것은 잘못된 삶을 시정하지 않고 노출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르쳐 놓고 정작 본인은 믿음이 없습니다. 정직하라고 가르치고는 수시로 얼렁뚱땅 거짓말 합니다. 청년들에게는 깨끗하게 살고 정욕을 제어하라 하고는 본인은 불륜을 저지릅니다. 말과 물질생활에서 믿을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는 정작 본인은 자기 한 말을 끊임없이 잊어버려 말 따로 행동 따로이고 자기는 남에게 빌려서 주지 않은 사실이 있는지 조차 망각합니다. 이런 삶을 수정하지도 시정하지도 않아 노출 시킬 때 믿음이 어린 소자들이 실족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죄의 심각성을 말씀하십니다. 소자 하나를 실족시켰을 때 받을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고 물에 빠져 죽는 것이 고통이 덜 할 것이라 하십니다. 한 생명을 실족시키는 죄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범죄 하게 하는 원인이 손이라면 손 없이 사는 것이 나을 것이라 하십니다.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발이나 눈이 범죄 하게 하는 원인이라면 발이나 눈을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죄의 근원을 철저히 배제시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의 내면과 우리의 삶에 있는 죄의 소원과 죄악된 요소들을 철저히 다루어야 합니다.
49,50절을 보십시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불은 불순물을 태워 없앱니다. 소금은 부패를 막아줍니다.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정화과정을 겪게 될 것입니다. 불같은 환난을 겪음으로써 사람들은 불순물을 제거하고 소금을 친 것 같이 부패에 물들지 않는 정결함을 덧입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좋은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최고 순도를 가진 소금이 되어 세상의 부패를 막아주고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화목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의 불순물을 제거하여야합니다. 남의 위에 올라 권세를 부리고자 하는 불순한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유명해지고자 하는 인간적인 생각의 불순물을 버릴 때 소금을 사이에 둔 것 같은 부패함 없는 화목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위대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겸손의 인격을 갖고 섬김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첫째가 되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길은 근본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높아지지 않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근본적으로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실족시키지 않는 길입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문제의 핵심은 욕심에 있습니다. 마음과 눈이 욕심을 향하느라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사람에게 높임 받아 즐거움을 얻고 사람을 통제하려는 욕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눈을 가리고 그 길을 막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뭇 사람의 끝으로 우리의 마음이 향하기를 기도합니다. 뭇 사람을 섬기는 생활로 우리의 삶을 채우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진정한 첫째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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