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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이제 그 법계도, 법성게 마지막 강의를 이제 오늘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제 공부할 부분은요
시고행자환본제 是故行者還本際
파식망상필부득 叵息妄想必不得
무연선교착여의 無緣善巧捉如意
귀가수분득자량 歸家隨分得資糧
하는 부분입니다.
어~ 그는 고로 ‘행자환본제’, 수행자가 본제로 되돌아가면
이게 뭐 ‘본제’ 이러면 ‘본래자리’, ‘본래성품’, ‘우리가 본래 처음부터 나왔던 그 자리’
뭐 이게 ‘제’ 자가 이렇게 사이 ‘제’ 이러는데 어~ 어찌 보면 그 두 개 중간 정도 이 말인데
중도의 자리, 본래의 자리, 중도의 자리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행자가, 수행자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단 말이죠.
되돌아가면 ‘파식망상필부득’ 이 우리가 이렇게 수행을 하고 공부하는 이유는
본래 나온 자리, 본제로 되돌아가기 위한 겁니다.
그니까 우리는 지금 왜 본래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느냐?
이거는 바로 망상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
망상분별을 일으킴으로서 본래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런데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려면,
수행자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면 ‘파식망상필부득’이다.
망상을 쉬지 않고서는 그게 가능하지가 않다. 얻을 수가 없다.
그니까 다시 말하면 이 망상을 쉬었을 때만이
본래자리로 완전하게 우리가 되돌아 갈 수가 있다. 그런 이야깁니다.
그니까 뭐 누차, 누차 끊임없이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괴롭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것 또한 사실은
괴로움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판단일 뿐이지
실제 그것 자체가 괴로움인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괴로움의 상황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죠.
그 상황에 대한 나의 해석만이 언제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이제 내가 이건 괴롭고 저건 즐겁고 이렇게 하면 좋고 저렇게 하면 싫고
이렇게 하면 좋겠고 저렇게 하면 싫고 하면서 끊임없이 내 인생을 틀을 맞춰놓고서
그리로 자꾸 맞춰가려고 하는, 노력하는 마음, 그게 인제 망상입니다.
2.
보통 이것을 그 ‘무승자박’ 이라고 표현을 하는데요,
이 포승줄이 없는데, ‘무승’ 포승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박’ 스스로 이걸 묶고 있다.
그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스스로 나를 꽁꽁 동여매서 묶어놓은 다음에
이것 때문에 괴롭다라고 스스로 막 이것 좀 풀어달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것은 내가 묶었으니까 내 스스로가 아니면 풀 수가 없는데
누구한테 풀어달라고 하는 이런 허망한 일들을 우리가 지금까지 벌이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행복지고자 하신다면 딱 하나입니다.
이미 사실은 행복 할 수 있는데 내 생각과 망상이 나를 불행하게 자꾸 가둬 놓는 역할을 하니까,
이 생각만 바꾸면, 마음만 바꾸면, 이 자리에서, 이 자리에서 행복해질 수가 있고
이 자리에서 공부를 끝낼 수가 있다.
어~ 인제 제가 법회 때 설법을 하고 법문을 할 때에
여러분들이 인제 고개를 끄덕이면서 잘 들으시거든요
근데 인제 이 사적으로 또 이런저런 뭐 차를 마신다거나 밥을 먹는다거나 할 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아 분명히 저 얘기는 법회 때 했던 이야기라서
저것을 탁 연결해가지고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아 저기 또 빠지고 계시구나
이런 걸 보면서 이, 이~ 제가 이만큼 말씀을 드릴까말까 하고 올라오다가, 쯧
뭐 이 법문 할 때 한 시간이나 얘기를 하는데, 쯧 밥 먹고 차 마시는 시간까지
법문을 하면 되겠나 싶어서 그냥 얘기를 안 하는데
어~ 그때마다 제가 이렇게 올라온다는 것이 뭐냐면,
아 이분들께서 고민하고 계시는 많은 부분들이 어찌 보면 간단하게 끝나는 문제입니다.
내가 내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쉽게 맘을 탁 돌이키지 못하니까 우리는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래서요 관할 때도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라고 하잖습니까?
그럼 객관이 되어서 나를 볼 수 있거든요. 그럼 지혜로운 답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힘든 일이 생기거나 괴로운 일이 생길 때에 친구들한테 막 얘기하잖아요.
야 이게 힘들고 저게 힘들고 막 이것 때문에 죽겠고 얘기하잖습니까?
그 얘기하는 것을 자신이 가만히 한 번 한 발짝 떨어져서 한 번 지켜보면 답이 나와요
내가 그 안에 빠져있을 땐 답이 안 나오지만 떨어졌을 땐 답이 나옵니다.
마치 그 길거리에서 어른 두 분이서 막 남들이 쳐다보는 것도 신경도 안 쓰고
막 자존심이 상해서 막 욕을, 욕을 하면서 막 길거리에서 엄청 싸우는 분들 가끔 계시잖아요.
저~ 어디 홍문 쪽에 어디 갔더니 어떤 보살 아주머니하고 아저씨하고
뭐 아주 뭐 저 대로변에 드러누우면서 싸우시더라구요.
그 사람들이 다 구경을 하고 차가 빵빵거리고 하는데 뭐 안중에도 없어요, 그냥. 싸우느라고.
그 그분들은 이제 그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으니까 남들 시선 뭐 생각도 안하고
일단 싸우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것과 똑같단 말이죠.
제 3자가 돼서 바라보면 저 사람들 왜 저러고 있을까?
이 많은 사람들 쳐다보는데 왜 저러고 있을까? 똑같습니다!
부처님이 우리를 보면 스스로 아침부터 내~ 자기를 포승줄로 동여매고 동여맨 다음에
괴롭다고, 괴롭다고 부처님한테 풀어달라고.
그런데 부처님이 풀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은 법은 설해줄 수 있을지언정.
그건 너가 스스로 묶은 거야라고 법을 설해줄 수 있을지언정.
그러면 부처님도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을 만났던 모든 제자들이
다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닙니다. 스스로 풀어야 되니까.
3.
그니까 스스로 풀만한 인연이 되려면,
여러분들이 이렇게 계속해서 법회를 나오시고 법문을 꾸준히 듣고 그래야 됩니다.
이 가장 중요한 핵심은요, 이 공부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핵심은
법문 듣는 게 최고의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80세 열반하실 때까지 한 게 뭡니까?
다 법을 설한 거 밖에 없어요. 다 법을 설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 법문을 듣는 거 외에는 할 게 없습니다.
수행이란 걸 따로 할 필요가 없어요. 법문 듣는 게 수행이지.
그런데 너무 법문을 해도 이 잘 못하니까. 법문은 뭐냐면, 망상만 그치면 된다.
‘파식망상필부득’ 이다.
망상만 안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법이 드러난다.
그렇게 얘기했는데 사람들이 망상을 못 쉬는 거예요.
망상을 어떻게 쉬는 거예요?
전 망상을 부린 적이 없는데 왜 자꾸 망상을 부렸다고 그러죠?
그렇게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하도 답답하니까,
뭐랄까 인제, 이 자비심을 내셔서 얘기를 해준 겁니다.
근데 아무리 망상을 깨라고 해도 잘 못 깨니까,
이제 하나의 수행법인 것처럼 방편으로 설명을 한 거예요.
그 방편에다가 수행법이다라고 이름을 붙여놓고 수행이라는 걸 붙잡고 살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이 뭐냐면 딱 하나입니다.
지관(止觀)해라.
위빠사나해라
사념처(四念處)해라 이랬단 말이죠.
사념처가 곧 팔정도를 닦아가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념처에다가 유일한 수행법이라는 표현을 붙였습니다.
그니까 사념처만 하면 저절로 팔정도가 닦여진다.
부처님께서 말하신 수행법은 오직 사념처 하나거든요.
사념처는 뭐냐면 보라는 겁니다. 보라. 관하라.
근데 어떻게 보느냐? 망상을 개입시키지 말고 봐라. 이겁니다. 이게 수행법입니까?
이거는 수행법이 아니고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선사스님들도 그렇고
뭐 임제스님이며 뭐 큰스님들은 다들 하는 얘기가 수행할 필요 없다.
불교는 수행하는 종교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지금 뒤늦게 나온 그 방편에 집착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붙잡고 있는
수행법을 붙잡고 살았다보니까 수행을 해야된다고 착각을 하지만
아~ 조계종을 얘기하시는 육조 혜능스님도 수행 할, 수행하는 게 아니다, 불교는.
공부는 수행하는 게 아니다. 닦아갈 필요가 없다 했단 말이죠.
이미 완성돼있는데 수행한다고 하면 완성이 안됐고 저 완성된 자리가 있으니까
그 길로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 완전히 드러나 있는 진리를 무시하고
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진리는 완전히 무시한 채, 또 다른 진리가 있는 것처럼,
또 다른 별도의 법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그 법을 나는 아직 얻질 못해서
그 법을 얻어야 되는 것처럼 대상화 시켜놓고 법을 찾아가는 겁니다.
그럼 법이 하나의 경계가 돼버려요. 법은 그렇게 둘로 나뉘는 게 아닙니다.
이 자리에 완전히 나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그냥 드러나 있는 것이죠.
우리는 단 한 번도 깨달음을 쓰지 않고 있는 적이 없단 말이죠.
드러나 있는 모든 것이 법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이게 인제 ‘관하라’는 얘기도 이것과 인제 비슷해요.
4.
‘관하라’를 우리는 수행하라는 얘기로 듣고
‘관수행’을 한 시간 하고, 두 시간 하고, 세 시간 하면 잘 하는 사람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삽니다.
그게 수행이 아니고 ‘관하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관하라’ 는
수행법을 별도로 만들어 줄라고 한 게 아니고 언제나 우리는 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보고 있잖습니까? 눈으로 보고 있잖아요. 세상을 보고.
여러분들이 지금 저를 보는데 힘드십니까?
수행을 통해서 어렵게, 어렵게 저를 보고 계시나요?
그 누구나 자연스럽게 눈만 있으면 보는 거죠.
그런데 이 본다는 것이 눈, 귀, 코, 혀, 몸, 뜻이 전부다 보는 겁니다.
눈으로 본다. 귀로 들어본다. 코로 냄새맡아본다. 맛본다. 촉감을 느껴본다.
이러지 않습니까? 생각해본다. 이러잖아요?
눈, 귀, 코, 혀, 몸, 뜻이,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하는 것은 전부다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힘들여서 어렵게 보지 않아요. 소리 들리면 그냥 쉽게 듣습니다.
이 소리(죽비를 침)를 그냥 귀가 있으면 다 듣는 거예요. 들어보는 겁니다.
그니까 보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런데 부처와 중생의 차이가 뭐냐면 중생은, 그냥 보면 되는데 망상으로 보는 겁니다.
이걸(죽비를 들어 보임) 딱 보면 그냥 보면 되는데, 아 죽비구나, 긴 거고, 이 죽비는 좀 비싼 거 같네.
뭐 이런 식으로 본단 말이죠. 사람을 볼 때도 이 사람은 잘 생겼다, 못 생겼다,
호감형이다, 비호감이다, 능력이 있다, 능력이 없다, 돈이 있다, 돈이 없다, 백을 좀 비싼 걸 들었다,
차를 좀 좋은 걸 타고 왔다, 탁 보자마자 그런 분별이 일어나서 그 사람을 해석해서 본단 말이죠.
망상분별로 해석해서 보는데 익숙해있습니다. 오래된 습관이에요.
그니까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봐라. 그게 정견입니다.
바르게 봐라. 팔정도의 정견, 바르게 보면 된다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바르게 보지 못하고 망상을, 해석하고 분별해서 분별망상으로 자꾸 걸러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를 봐라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는 보고 있어요.
다만 망상을 걸러서 보는 거니까 부처님께서 관하라 하는 것은, 이게 지관 아니겠습니까?
지는 멈출 지(止)자 입니다. 멈춰라.
분별망상을 멈추고 관(觀), 봐라.
멈추고 보는 거예요.
그 혜민스님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멈추면 보인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분별망상을 쉬면, 멈추면 그냥 드러나는데,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해서 본적이 없는 겁니다.
그동안. 분별망상에 해석해서, 걸러서 보기만 했던 것이죠.
그래서 보라는 것은 따로, 별다른 수행법이 아닙니다.
위빠사나라는 특별한 수행법이 아닙니다.
그냥 언제나 우린 보고 살거든요. 언제나 보는 작용은 누구나 하고 삽니다.
근데 뭐 본다는 별도로 관수행 이래서
수행법이라고 붙일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언제나 보는데.
다만 우리는 그동안 힘들게 생각, 해석, 분별, 망상해가지고 한 사람을 봐도
그 사람이 나한테 도움이 될까, 안될까 온갖 것들을 망상을 걸러서 보니까
즉각적으로 간단하게 보는 건 단순하고 쉽잖습니까?
근데 망상으로 보는 건 힘들어요.
그 이 중생들은 쉽게 보지 않고 어렵게 보는데 익숙해있습니다.
그럼 쉽고 단순한 걸 얘기하면 되게 힘들어해요.
어렵게 꼬아서, 꼬아서 얘기해줘야 좋아한단 말이죠.
그럼 쉬운 거 쉽게 얘기하면 아주 진리가 아닌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관수행, 이것은 특별한 수행이 아닙니다.
그냥 보는데 우리가 하던 분별망상을 섞어서 보던 걸 싹 빼주기만 하면 된다.
그 그것만 하면 우리가 할 건 그것밖에 없습니다.
선에서도 초기불교 부처님말씀에서도 대승, 소승, 선 할 것 없이
오직 그냥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거예요. 그건 수행이 아닙니다.
단지 ‘파식망상필부득’ 망상만 걷어낸다면 그 자리가 바로 돌아가는 자리다.
시고행자(是故行者)가 환본제(還本際)하는 그 자리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인제 망상을 쉬지 않으면 ‘필부득’, 얻을 수가 없다
이렇게 인제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또 인제 이렇게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이 화엄의 자리는 뭐 망상을 쉬어야지만 따로 뭐 얻고 이런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망상을 내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불가능하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망상을 내는 것은 이 ‘파’를 ‘불가’ 할 수 없다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망상을 내는 것 자체가 깨달음의 자리에서는,
화엄의 자리에서는 망상을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이미 ‘환본제’ 돌아간 자리에서는 망상을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다시 그렇게 ‘환본제’ 했으면, 본래성품을 깨달았으면 더 이상 망상을 내는 게,
망상을 얻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더 이상 망상이 얻어지지 않는다.
이런 의미로 마~ 해석을 할 수도 아~ 있겠죠.
근데 이건 이미 그 자리로 돌아간 사람에게 하는 법문이냐
돌아갈 사람에게 하는 법문이냐에 따라서 이제 뭐 다르게 해석을 할 수도 있겠죠.
5.
그 다음에 ‘무연선교착여의’, ‘무연선교’ 이랬는데,
‘무연’은 뭐냐면요, ‘연이 없다’ 이러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제 자비심을 무연자비 이런 표현을 씁니다.
이제 ‘연이 없다’라는 건 뭐냐면 조건이 없다, 조건 지어 진 게 없다.
그저 자비심을 낼 뿐이지 뭐 보상심리나 뭐 이렇게 하면 저렇게 도움이 되겠지 이러지 않는다.
여러분들 좀 춥지 않으십니까? 이 온풍기를 좀 틀... 조금 추우시죠?
보통 설법하는 사람은 안 춥거든요. 앉아서 들으시는 분들은 추워도. 저도 약간 춥네요. ㅎㅎ
그래서 ‘무연선교착여의’는 뭐냐면요,
‘무연’ 즉 조건 없이, 조건 없이 무한한 자비심을 가지고
‘선교’, 우리 ‘선교방편’ 이런 얘길 하잖습니까? 착한방편,
‘교’는 아주 뭐 이렇게 뭐 ‘공교하다’, ‘예쁘다’, 기교가 뛰어나다 이런 뜻인데
아주 좋은 방편을 가지고 아무 조건 없이 좋은 방편으로써, 선교방편으로써
‘착여의’, ‘착’은 ‘잡는다’ 이 소리죠. ‘여의’ 뜻대로 잡아와진다.
그니까 아무런 조건 없이 무한한 방편을 가지고 뜻대로,
뜻대로 무한한 방편을 잡아가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자리 딱 가 있는 사람들은 무한한 선교방편을
아무런 그~ 보상심리, 보답하는, 바라고 이런 것 없이 그저 언제나 받아 잡고 있기 때문에
뜻대로 법을 설하게 되는 것이고 뜻대로 방편을 펴는 것이죠.
그래서 ‘귀가수분득자량’, ‘귀가’ 집으로 돌아갈 때에
‘수분’ 자기의 분을 따라서 ‘득자량’ 자량을 얻는다.
지난 시간에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했던 것처럼
이 우주의 법계의 법비는, 진리는 언제나 드러나 있고
언제나 우리에게 그 진리의 비는 흩날리고 있고 뿌려지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망상을 피움으로써 그 법 자체를 보지 않고
망상의 세계를 보면서 인생을 사는 거죠.
생생한 현실을 살아야 되는데, 나에게 주어진
생생한 삶을 살아야 되는데 망상의 세계를 사는 겁니다.
요즘에 여러분 하늘을 보십니까? 여러분 날씨 춥다고 방에만 들어있지만
저는 이렇게, 이렇게 습관적으로 여러분들 인제 뭐 이렇게 한참 이렇게 계시다 갈 때
요렇게 배웅나간다고 나가보면 하늘을 이래 바라보면 어제도 이렇게 하늘을 보는데
정말 파~~란 하늘에 낙엽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서 탁 뻗어있는 그 모습이
서울의 하늘이 이렇게 정말 청명하게 가을, 겨울이 가져다주는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선물이거든요.
그 모습을 보면요, 정말 이건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요.
말로 표현하면 벌써 그것을 전달할 수가 없어요. 정말 아~! 엄청난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여러분이 삶을 살면서 정말 그 어떤 선물을 받고 싶다면 이 선물을 받으세요.
돈으로 만들어진 선물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돈이 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그 선물은 없어지는 거잖아요.
근데 지금 이 순간에 분별망상을 하지 않고 걷어내고
지금 이 자리를 그냥 생생한 이 자리를 보기만 할 수 있으면
아무런 시비분별을 탁 떠나서 그냥 파란하늘을 바라 볼 수만 있다면
앙상한 나뭇가지에 시선을 딱 둘 수만 있다면.
근데 파란 하늘을 이렇게 바라보더라도 그 하늘이 언제나 열려있지만
우리는 망상을 가지고 보니까 눈이 그냥 쓱 스쳐지나가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래 보면서 하아~! 내 자식은 대학 잘 갈 수 있을까, 남편이 돈을 잘 벌어올까,
이번에 진급을 할 수 있을까, 오늘 저녁은 뭘 할까
뭐 온갖 이런 시비분별, 분별망상을 가지고 보니까
이 생생한 살아있는 이 놀라운 신비 그 자체인 매 순간의 현실을 우리는 전혀 생생하지 않은,
왜냐하면 생각 속에서 재생되는 이것들은 전혀 생생하지 않거든요.
항상 깝깝하고, 번뇌망상에 시달리거든요.
그니까 진리가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생생한 진리가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진리를 보지 않습니다. 가끔 보죠, 가끔.
6.
여행을 떠나서 여행지에서 놀라운 풍경을 볼 때
와~아 하는 그 순간. 그 순간은 시비 망상 없어요.
여행을 떠나면 깨달음의 반은 성취하는 것이다 라고 밀라레빠가 얘기를 했었는데,
그 밀라레빠의 말은요 여행을 떠나면 하루하루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는
아침에는 점심을 생각하고 저녁을 생각하고 그 다음날을 생각하고
그 다음날 있을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꾸 이렇게 여행을 떠나고 싶은 이유는 그겁니다.
여행을 떠나 있으면 쳇바퀴 도는 일상을 일단 옆으로 제쳐놓게 되요.
생각이 잠시 옆으로 제쳐놓게 됩니다.
어차피 여행 끝나고 나서 다시 생각하지뭐~ 하고 딱 제쳐놓는단 말이죠.
생각과 망상이 잠시 제쳐지니까
그냥 그것을 있는 그대로 감동하기가 쉬워지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여행을 떠나야지만 가능하냐?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가 이 일상이라는 놀라운 일상의 여행지를 깨닫고 보니까
아! 여행이라는 것은 몸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구나!
마음이 언제나 여행지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망상을 쉬고 이 생생한 이 자리를 들여다봄과 동시에
풀 한 포기 속에서 여행지에서의 놀라운 히말라야의 꽃 한 송이를 볼 수 있고
이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 히말라야에서의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제가 장병들에게 이런 법문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했었을 때
제가 마지막 떠나오면서 장병들이 이렇게 줬던 인제 뭐~ 글들을 제가 읽어보면서
깜짝 놀랐던 점이 뭐냐면요,
저는 이것이 어느 정도 공부가 되고 뭐 저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생각했으니까
공부가 좀 되고 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이게 감동일까 이런 착각을 했었는데
그 장병들이 저한테 써준 편지에 상당히 많은 장병들이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강원도 고성 양구에서요, 이 친구들이 뭐라 그랬냐면 처음에 법문 들을 때는
뭐 이 양구의 이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막 찬탄을 하는데 속으론 욕했답니다.
헛! 참! 스님이나 그게 좋지 우리는 깝깝해 죽을지경인데 이게 뭐가 좋다고 그러느냐고.
근데 이 법문을 듣고, 듣고 듣다보니까
어느 날 봄에 꽃이 피는데 이게 정말 아름답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자연에 자꾸 눈이 가게 되고 귀가 가게 되고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내가 군생활 하면서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선물을 받았다.
그런 얘기를 장병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아 이것은 누구나 가능한 이 공부구나.
누구나 가능한 겁니다. 시비 망상을 잠시 망상을 쉴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언제나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진리를 볼 수 있고 정견이 가능하다.
7.
그래서 누구나 ‘귀가수분득자량’ 이래서
자기 분에 따라서 자량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법비는 단 한 번도 없을 때가 없어요. 자기 분에 따라서니까. 뭡니까?
자기가 마음만 내면 됩니다. 여러분들 뭐~ 스승이 없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스승이 있어도 마음을 내지 않으면 발심하지 않으면
그 사람 눈에는 스승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옆에 있어도 부처님의 법문 듣고 깨닫지 못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깨달음은 어디서 옵니까?
스승 앞에서 오는 게 아니고, 스승 앞에서 오는 게 물론 가장 많지만
예를 들어 어떤 스님은요 뭣, 뭐 하나 뭐 도토리 같은 게 똑 떨어져가지고
기왓장에다 딱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단 말이에요.
자연의 바람소리를 듣고 깨달을 수도 있고, 어린 아이가 깔깔거리고 웃는 모습을 통해
깨달을 수도 있고,, 누가 나를 뒤에서 누구야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깨달을 수도 있다.
깨달음은 언제나 있으니까 내가 마음이 완전히 열리는 연습이 되고
망상만 쉬어지는 연습이 되다보면 어느 순간 탁 개합을 할 수가 있는 것이란 거죠.
그러려면 딱 하나 자기가 이 자량을 무한히 받으려면 발심을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내가 한 번 이 공부 해봐야겠다.
이 진리를 내가 공부해봐야 되겠다라는 발심, 그게 전부입니다.
공부의 전부입니다. 발심을 하고 법을 찾아 듣는 것 이게 다입니다.
그니까요 이 공부를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엄청난 착각 속에 빠져왔던 게,
불교는 근기 높은 사람만 하고 삼천 배, 만 배를 매일같이 하는 사람만 하고 한 시간, 두 시간,
열 시간씩 앉아가지고 장좌불와 하는 사람에게만 빨리 오는 것이 공부다.
제가 이런 얘기하면 여러분들 안 믿어도 되는데 육조혜능스님이 이렇게 얘기 했다니까요.
앉아있는다고 부처가 되냐? 앉아있는다고 부처되는 게 아니다.
수행을 하는 게 필요가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 이랬단 말이죠.
수많은 선사스님들의 가르침에 구구절절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뭐만 하면 되는가? 발심을 하고 내가 공부 한 번 끝내 봐야 되겠다 라는 발심.
그러고 또 하나는 발심을 했으면 발심만 하고 가만있으면 안 되죠.
발심하고서 찾아, 법문을 찾아 듣는 겁니다.
인터넷을 통해 들어도 좋고, 뭐 찾아가서 들어도 좋고, 뭐 어떤 법문이 되었든.
근데 법문을 듣다보면 내가 인제 아무 절이나 찾아가 보는 거예요.
아무 인연 닿는 곳이나 찾아가서 법을 들어보는 겁니다.
근데 자기 분에 맞는 법문이 딱 들리면 저절로 가게 돼있습니다. 가지 말라고 해도.
자기 근기에 딱 맞는, 자기 근기보다 조금 높은 법문을 해 주신다
그럼 그게 자꾸 귀가 쏠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뭐 쉽게 말해서 톡 까놓고 내 공부보다 공부 안 된 스님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신도님들보다 공부 안 된 스님도 있어요. 있을 수 있어요.
뭐 그런데 가게 됐다. 그럼 저절로 내가 다시 안 가게 되겠죠.
그냥 이것처럼 저질러서 하는 겁니다.
책도 마찬가지에요. 책도 자꾸 찾아보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제가 지금까지 가만히 보면 제가 요만큼 공부가 돼 있으면
한 요정도 수준 높은 책을 봤을 때 제가 놀랍게 이 책을 좋아하게 되고
또 이 정도 공부가 됐으면 옛날에 너무 좋았다고 생각했던 책을 읽어봐도 별로 감흥이 없는데
또 이 정도 공부되면 야~ 책이 이상하게 저와 인연이 되는 겁니다.
또 그런 스님들의 법문이 인연이 되고.
발심만 하면 저절로 우주법계가 나에게 그 인연을 가져다주게 돼 있습니다.
발심하고 법문 듣고.
그러고 굳이 수행하고 싶다 하면 이제 좌선을 하는 거죠.
근데 좌선을 하는데 뭐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이렇게 무슨 경쟁하듯이
뭐 무슨 이 세상일처럼 이거 잘하면 뭐 더 잘하는 사람처럼 이런 식으로 수행할 필요 없습니다.
그 선방에 저 정진의 고수들도 50분 참선하고 10분 쉬지 않습니까.
뭐 어떤 분은 보니까 열 시간을 해야지 된다.
뭐 이렇게 얘기한다고 하던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상만 높아져요. 내가 수행 잘 한다는 상.
8.
그 다음에 보면요,
이다라니무진보 以陀羅尼無盡寶
장엄법계실보전 莊嚴法界實寶殿
‘이다라니무진보’,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 다라니, 뭘 다라니라고 했냐하면
여러분 그 금강경에서 이 말하는 핵심이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있잖습니까?
상이 상을 아님을 보면 바로 여래를 본다.
즉 우리가 해야 되는 건 여래를 보기 위해서, 여래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되는 건
상을 상이 아님을 보는 겁니다. 유일하게 이거 하납니다.
상이 뭡니까?
망상으로 지어낸 모든 걸 상이라고 그럽니다.
분별로 지어낸 모든 걸 상이라고 그럽니다.
(죽비를 들어 보이며) 길다 짧다 이게 상입니다. 죽비다 이것도 상입니다.
제가 뭐 어떻다. 어떤 사람이 잘생겼다, 못생겼다, 능력 있다, 없다,
이 모두 다 상입니다.
근데 제상비상, 상을 상이 아니게 본다는 게 정견 한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거죠.
(죽비를 들어 보이며) 이게 뭡니까?
죽비로 보는 게 아니고 나무로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본단 말입니다. 그냥.
분별, 일체 분별을 떠나 보면은
죽비를 보나 시계를 보나 저를 보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데서 무슨 차별이 있어요.
스님을 보나 중생을 보나 아무 차별이 없죠.
제상비상을 잘하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야 되니까 방편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되니까 세상의 규칙은 지켜요. 세상의 규칙이니까 지키죠.
세상의 규칙은 지키지만 그게 완전한 진리기 때문에 지키는 게 아니라
지켜줘야 되니까 지키는 겁니다.
우리는 불자니까, 스님, 스님이니까 뭐 스님으로써 예를 지켜주는 건 당연하죠, 그냥.
세상 이치니까. 근데 그거는 그냥 우리가 만들어 놓은 룰일 뿐이지
스님이 진짜 실체적인 위대성이 있어서 스님을 우리가 존경하는 건 아닙니다.
그 이 껍데기 상을 가지고 스님을 존경한다면 진짜가 아니란 말이에요.
제상비상의 자리에서는 스님, 신도 또~옥 같습니다.
죽비를 보나 A4용지를 보나 똑같은데 사람을 보나 스님을 보나 똑같은데
제상비상의 자리에서 뭐가 차별이 될 게 있겠습니까. 아무런 차별이 될 게 없다.
그렇게 개념으로 말의 뜻을 따라가면서 해석하고 보는 것
그것은 제상비상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경전은, 경전이 가르치는 것은요,
방편의 경전들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마라. 이건 지키고 저건 지키지 말고 하면서
부처님께서 자비심을 내셔서 중생들을 위해서 하나하나 가르쳐주신 그런 법이 있어요.
그런 자비방편의 법문이 있는데요, 공부를 조금 더 하다보면
그런 자비방편의 법문은 이제 조금 인제 관심사에서 좀 멀어집니다.
멀어지면서 진짜배기 가르쳐주려고 하는,
진짜 법 그 자체 그것에 인제 관심이 가게 돼있어요.
근데 그 법은 언제나 개념을 따라가지 않는 공부입니다.
제상비상의 공부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보더라도 거기서 개념을 따라가고 생각과 해석을 따라가서
이해하는 그런 공부가 아니란 말이에요.
이해가 됐다 하면 그것은 진짜배기 공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해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 공부는.
이해의 유무를 떠나는 겁니다. 논리를 떠나는 거예요. 개념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말이 있을 때, 법문이 있을 때 그 법문의 뜻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뜻을 따라가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채참선 법문이라고 하는 걸 화두라고 하는 것이
‘법이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다.’
‘뜰 앞에... 잣나무가... 저게 왜 법일까?’
‘아 그 소나무는 법이 아니고 잣나무가 법이면 아 저게 뭐뭐뭐...’
이렇게 생각을 따라가고 개념을 따라가면 그것은 그 말뜻을 모르는 겁니다.
진리가 뭐냐고 묻는데 죽비를 내리치거나, 활하거나, 똥막대기다라고 얘기했을 때
그 말뜻을 따라가면 벌써 이 진리와는 어긋나는 겁니다.
그 자꾸 아무리 법을 설해줘도 말뜻을 따라가니까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다라니나 진언을 설해서
다라니나 진언을 설해서 해석하지 말라고 해놓으면 그건 말뜻을 따라갈 수가 없잖아요.
옴마니반메홈.
그래서 다라니나 진언을 때로는 설한단 말이죠.
근데 그 다라니나 진언만 다라니, 진언이 아니라
부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법문 자비방편의 법문, 직지인심 해주는 법문,
그 법을 직지해서 가르치는 법문, 그것은 말뜻을 따라가는 게 아닙니다.
개념을 따라가는 게 아니에요.
개념을 따라가지 말라고 설한 법문을 한마디로 다라니라고 표현을 한 겁니다.
그니까 법문을 이 법문은 전부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지
이 손가락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저 달을 따라가야지.
근데 이 법문은 전부다 손가락일 뿐이에요. 그 이 법문을 보는 게 아닙니다.
그 이 법문이라는 것은 말뜻이잖아요, 말이잖아요. 말을 따라가면 이건 그냥 말이 되는 거고,
그런데 말을 따라가지 말고 말의 낙처를 보라고 한단 말이죠. 낙처.
그 말이 의미하는 본질이 뭘까? 저 말을 하는 곳이 뭘까. 왜 저 얘기를 하는 걸까.
그 낙처를 보려면 말뜻을 따라가면 안 되고 그 말을 다라니로 알아야 된단 말이죠.
다라니는 뜻 없는 겁니다. 해석이 되지 않는 겁니다.
해석되지 않고 그 낙처를 볼 수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손가락이 딱 가리키면 이 손가락을 보면 안 되고,
손가락이 떨어지는 자리, 달을 봐야 된단 말이죠.
그래서 이 경전은 하나의 다라니 입니다. 말뜻을 따라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말뜻은 나중에는, 나중에 던져버려야 될 거에요.
뗏목과도 같은 거라서 결국엔 버려야 될 겁니다.
그래서 그 말뜻이 아닌 다라니로써 진리를 이해해야 되죠.
그래서 이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 이 다라니의 법문이, 직지의 법문이야말로
무한한 다함없는 보배와 같습니단 말이죠.
9.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법계를 장엄해서 법계를 장엄하니까 이 다라니가 그야말로 다함없이 보배로써
법계를 장엄하고 있으니 ‘실보전’ 실로 보배궁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처해있는 이 상황, 이 조건, 내가 살고 있는 집, 직장, 법당,
이 모든 이 세계 하나하나가 그대로가 장엄된, 세계가 아니라 법계 입니다.
장엄된 법계이기 때문에 이 하나하나가 실로 보배스러운 궁전과도 같습니다.
여러분의 집이 옛날에는 40평대 아파트에 살았는데 가난해져서 20평대, 30평대로 이사 가서
우리 집은 비참해졌다. 그건 생각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넓은 집에 있으나 좁은 집에 있으나 잘 때는 어차피 한 평밖에 안 필요하고
좁은 집에 있으면 청소 조금해서 좋고.
이 내 생각이, 생각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 실제 그런 게 아닙니다.
‘정글의 법칙’ TV를 보니까 그 잘 살던 연예인들이 정글 속에서
그냥 풀로 이렇게 대충해가지고 비가 오는 날 풀로 된 지붕이 뚝뚝 떨어지겠지만
대충 빗방울만 막을 수 있어도 신나서 좋다고 하면서
집 잘 지었다고 하면서 기쁘게 잠이 들데요.
사실은 지금 내 집이 완전히 장엄된 실보전입니다.
보배궁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내가 처해 있는 그 자리가 실로 장엄된 보배궁전 입니다.
그래서
궁좌실제중도상 窮坐實際中道床
궁극적인 자리에 앉는단 말이죠.
궁극적인 자리에서 실제, 실로 참된 진리의 중도상,
중도의 자리에 언제나 앉아 있는 겁니다.
언제나 궁극적인 자리, 참된 중도의 자리에 우리는 언제나 앉아있습니다.
깨달아야지만 그 자리에 가는 게 아니고
지금 이 자리에서 언제나 우리는 ‘궁좌실제중도상’에 있다.
언제나 궁극적인 그 자리를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 자리는 바로 중도의 자리입니다. 중도의 자리. 왜 중도의 자리라고 하느냐?
시비분별망상은 언제나 좋거나 나쁘거나 둘로 나누거든요.
맞고 틀리고, 옳고 그르고, 있고 없고, 이 둘로 나누는 자리가 아니란 말이죠.
안다, 모른다. 진리를 알겠다. 이건 중도가 아닙니다.
모르겠다. 이것도 중도가 아닙니다.
개념으로 딱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전부다 중도의 자리가 아니죠.
그 이 진리는 중도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표현을 한다면.
그 이 진리의 자리를 불이중도, 중도의 자리다 이렇게 얘길 하는 것이죠.
언제나 우리는 ‘궁좌실제중도상’에 앉아있습니다.
마침내 중도의 자리에 앉아있으니
구래부동명위불 舊來不動名爲佛
이라. 옛적부터 부동하게 한 번도 움직임 없이 그 이름하여 부처라 이름한다.
옛적부터 단 한 번도 우린 부처 아닌 적이 없었다.
옛날에는 중생이었고, 지금은 중생이다가 나중에 가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우리는 단 한 번도 부처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모든 괴롭다 라는 허망한 망상분별만 쉬면
그 이 자리가 완전히 행복한 자리입니다.
10.
그 이 화엄경 법문을 통해서 여러분들은요,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법성원융무이상 法性圓融無二相,
둘로 나뉘지 않는
분별망상 시비분별을 떠나서 살게 된다면
여러분들이 지금 이 시간 이후부터 가질 수 있는
모든 괴롭다 힘들다 답답하다 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단지 분별일 뿐이고,
단지 생각일 뿐이고,
내 허망한 망상이 만들어 놓은
무승자박으로 스스로 묶어놓은 것이라는 것을
이제 사유를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언제나 내가 묶었구나.
언제나 다른 사람이 묶고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내 스스로 나 자신을 묶으면서 살아왔구나!
이것을 푸는 것도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 자리를 이 공부에 대한 발심,
원력을 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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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댓글 입니다.
함께여서 저도 넘 좋았답니다^^
무위행 법우님 보고싶어서 벗꽃도 구경할겸 호국사를 갈려고 했는데
것도 인연이 아니었는지 못가서 많이 아쉬었습니다.
와~~이렇게 긴~글 녹취하시느라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법우님들 참 대단하십니다. 법상스님 참 복이 많으신 분입니다.
차분하게 시간내서 다시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법우님^^
어젠 정말 호국사 벚꽃길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인 듯 했는데
비바람에 거의 다 져버렸어요...
조만간 들꽃이 또 예쁘게 채워줄 것 같아요
시간되실때 언제든 놀러오세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_()_
무위행 법우님, 법우 법우님 그동안 법성게 녹취 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울러 명상강의를 녹취 해 주시는 향광심 법우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많은 분들께서 큰 공부가 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녹취가 참 힘들고 시간도 많이 드는데 그 노고에 찬탄과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잘 지내시죠? 저에게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_()_
무위행 법우님.
법우 법우님.
향광심 법우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차분히 공부해 볼께요.
이 공부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핵심은
법문 듣는 게 최고의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말하신 수행법은 오직 사념처 하나거든요.
그런데 이 본다는 것이 눈, 귀, 코, 혀, 몸, 뜻이 전부다 보는 겁니다.
눈으로 본다. 귀로 들어본다. 코로 냄새맡아본다. 맛본다. 촉감을 느껴본다.
이러지 않습니까? 생각해본다. 이러잖아요?
눈, 귀, 코, 혀, 몸, 뜻이,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하는 것은 전부다 보는 겁니다.
망상분별로 해석해서 보는데 익숙해있습니다. 오래된 습관이에요.
이것을 푸는 것도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이 자리를 이 공부에 대한 발심,
원력을 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마지막 강의... 동영상과 함께 잘보았습니다. 다시 보니 새롭네요.
그동안 수고많으셨어요. 이 인연으로 성불하시길 바랍니다.
법우님 모두께 감사드립니다 ()()()
모든분에게 감사합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매일 매일 발심하고 법문듣고 그렇게 수행하겠습니다.
법문 진심으로 감동 입니다 감사합니다 합장!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세요~
육조단경을 읽으면서 법성게를 같이 보니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