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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전경 스크랩 『六·二五 의 始作』
고향의봄 뜨락 추천 0 조회 167 17.06.29 10: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六·二五 의 始作』
“아 ! 우리가 어찌 이날을 잊을 수 있는가?”
벌써 半 世紀를 넘어 66年의 歲月이 흘렀건만 아직도 韓半島는 두 동강이 인체로 北韓은 아직도 挑發의 根性을 三代쩨 버리지 못하고 있다

1950年 6月25日(日曜日) 午前 4時 김일성의 붉은 군대가 가랑비 내리는 韓半島의 허리 38度線을 소리 없이 南侵 한지 66年의 歲月이 흘렀지만 아직도 戰爭 傷處의 아픔을 간직 한 체 國土와 民族의 分斷이 進行되고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戰爭 『六二五 戰爭』은 왜 일어났는지 다시 한번 뒤돌아 본다.

(1)2次大戰 終戰 直前에 滿洲쪽戰爭에 뛰어든 蘇聯으로 말미암아 大戰이 終了되면 日本을 분활 占領統治한다는 計劃 作成됨

(2)日本 本土 분활 占領 統治 案 地圖(美,英,中 蘇)

(3)一部人들은 포츠담 回議에서 이미 38線을 分割 線으로 決定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2次大戰 막바지에 뛰어든 蘇聯에 의해 38線은 永久 分斷으로 굳어졌다

(4)蘇聯은 北韓을 共産化 하고 自身들의 不凍港 및 太平洋 進出을 위한 橋頭堡確保를 위해 말잘 듣는 젊은 김일성을 앞세워 政權을 樹立할 緻密한 計劃을 進行했다.
 
(5)*土地개혁법,重要산업 國有化 等 共産化 作業 着手
*48年 2月 8日 人民軍 創設 4月29日 『朝鮮 民主主義 人民 共和國 憲法』 確定했다.

 
(6)김일성은 UN의 承認과 監視하에 實施되는 選擧를 不法 無效化 하기 위해 工作 테러 團을 大量 投入 選擧 妨害를 自行했다.

(7)김일성은 이때 스탈린을 맞나 南韓 侵掠 許諾을 받으려 했지만 스탈린은 美國의 介入을 憂慮하여 만류했으나 中共의 毛澤東의 勸誘로 훗날 承認하게 된다.

(8)1949年 6月 29日 駐韓 美軍의 撤收를 契機로 一年간의 徹底한 準備와 計劃에 의해 "暴風”이라는 攻擊 命令과 함께 戰爭은 始作 됐다.

(9)이렇게 南侵을 始作한 戰爭을,김일성,아들,孫子 및 전교조를 비롯한 남한내의 종북 주의자들은 북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6月 28日 서울 陷落 된 以後 서울 거리는 “스탈린 대원수 萬歲! 김일성 元帥 萬歲!”라는 壁報로 가득 찼었다.
(10)전쟁 시작 전 북한군 38선으로 전진 배치 완료(동부, 중부)

(11)북한 김일성은 전쟁 시작전 모든 전투 부대 를 38선에 전진 배치 (서부)
☞ 특히 西部에 서울 早期 陷落을 위해 戰車部隊 集中 配置

(12)김일성의 南侵을 證明하는 文件
[參考]蘇聯 共産黨 書記長 흐루시초프도 回顧錄에서 김일성이 南侵 許諾과 支援을 要請한 事實을 暴露

(13)戰爭 開戰 當時 南北 軍事力 총괄적 比較 해보면 전혀 相對가 되지 않는 狀態로 이미 戰爭의 勝敗는 結定 나있었다.

(14)1948年 이미 戰爭을 遂行 할 수 있는 軍隊로 모습을 갖추었다.

(15)當時 北韓이 所有한 T-34 탱크는 最高 水準 級 武器였다.

(16) 6월 22일 이미 作戰命令이 下達 되어 南侵準備가 完了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7)의정부시 방면으로 남하하는 사이드카 부대

(18)開戰 時 南北 軍事 對置圖
☞북한은 수치상으로도 倍가 넘는 軍事力

(19)6月 28日 새벽에 서울에 進入한 탱크는 그 自體가 威脅的이었다.
[參考]서울 防衛를 위해 急造된 서을 防衛軍 司令部(司令官 강락원)는 형편없는 九九式 小銃에 訓練조차 받지 못한 烏合之卒로 일부는 昌德宮 안에서 이틀 정도 버티다 全滅하였고 司令官은 逮捕되어 北으로 끌려 갔다.

 

(20)서울진입 북한탱크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參考]乙支路 四街 戰車線路 위에서 破壞된 北韓 탱크 한대가6月 28日에 目擊 됐다.(뒷 부분에 구멍이 나 있었다.)

(21)그 어려운 狀況에서도 눈물겨운 勝利도 있었다.
* 6月26日 午前4時 北韓軍 撤收를 決意, 6月 28日 4時 에는 “UN軍 派兵”을 決議 했다.(너무나 迅速한 UN 對應)

(22)北韓軍은 南으로 내려 갈수록 補給路가 길어지고 UN軍 航空機의 攻擊으로 많은 物資를 잃어 南進 速度가 줄어 들고 있었다.(6월25일 ~ 9월 15일) *그 많은 戰爭物資는 어디서 얻을 수 있었나?

(23)서울이 陷落되고 漢江 防禦線 마저 무너지자 臨時政府 大田으로 이전 決定 그러나 水源 烏山이 무너져 내리자 또다시 釜山으로 移轉을 決定하게 된다

(24)直接 戰況을 確認하고자 日本에서 急遽 金浦 飛行場에 到着한 맥아더(當時 狀況으로는 매우 危險한 行步)

(25)자네는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上官이 撤收 命令을 내리지 않는한 죽는 瞬間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라는 國軍 兵士의 말에 맥아더장군은 感動 韓國을 期必코 지켜내리라고 굳은 意志를 다졌다.
[參考]맥아더는 이때 이미 仁川 上陸作戰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고 回顧

(26)UN이 誕生한 後 最初의 UN軍이 形成되는 瞬間

(27)김풍익 少領은 敵 탱크를 誘因 破壞하고 壯熱이 散華 했다.

(28) 변변한 武裝을 갖추지 못한 國軍을 물밀듯이 乘勝長驅 처 내려온 北韓軍

(29)北韓軍 T-34 蘇聯製 탱크는 2次 世界大戰에서 이미 性能의 優秀性이 認證된 武器

(30)PSH 41(따발총)個人 火器로 北韓軍 步兵 分隊 당 1정 (國軍에게는 매우 威脅的 武器

(31)大田驛에 下車한 스미스(中隊長 스미스 大尉) 步兵 中隊는 北韓軍이 重武裝으로 南下하고 있는 事實을 전혀 알지 못했다.(1950.7.2.)

(32)『죽미령 戰鬪』 비록 敗하고 많은 犧牲者을 내고 後退 했지만 UN軍 最初의 戰鬪로 여러가지 不利한 條件에서 도 敵의 南進을 多少 沮止 할 수 있었다.
[參考] UN軍은 이 戰鬪로 北韓 軍의 戰鬪力을 再評價 했다.

(33)美第 24師團 스미스 中隊의 죽미령 戰鬪

(34)스미스 부대 바주카포

(35)유엔군 참전과 북한군 남진 지연

(36)美軍 24師團長 월리엄 F 딘 少將 救出 決死隊 作戰

(37)딘 소장 구출 결사대 운송 미카3-129호 열차 기관사 들 동상

(38)딘소장 구출 기관차 미카 129호 대전 현충원 전시

(39)김재현 기관사

(40)戰爭 支援國 槪要

(41)日本으로 인하여 韓半島가 두 동강이 나고 戰爭까지 벌어져 오히려 日本은 莫大한 부를 챙길 수 있어 前後 復舊가 迅速히 이루어 졌다. 그럼에도 支援에 있어서 너무나 吝嗇했다.

 

 

 

自由는 지킬 수 있는 者 만이 누릴 수 있는 所重한 것이다. 이제 다시는 不幸한 戰爭에 휘말리는 일이 없도록 國民 모두의 鐵桶 같은 安保意識이 必要하다.


감사 합니다.
고   암   (高  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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