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칸 사태를 바라보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깨달아 지향해 가야할 곳이 어디인가요?
글 : 김 강 석 목사
보편적인 많은 기독교인들은 아프칸 사태를 보면서 하나 같이 같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하면 봐라! 우리나라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리 안될려면 아프칸 사태를 반면 교사 삼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보편적인 이 세상의 가치로 보면 얼마든지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연히 반면 교사 삼아야 되죠?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그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영적으로 한 번쯤 재해석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세상은 타락한 죄의 온상지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은 이 세상의 가치들은 배설물이고 헛되고 헛되다고 하면서 이 세상 역사는 들에 피는 들꽃처럼, 안개처럼, 꿈처럼, 그렇게 이 세상 역사의 크로로스의 시간 속에 잠시 잠간 머무를 뿐임을 성경은 누누이 밝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기독교인들 다수는 모두 이 역사 속에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거기에 최상의 가치를 두고 올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자꾸 거기에서 정 때라, 거기를 떠나라고 하는 것이 믿음이다 라고 말하는데 정작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거기에 더 집착과 애증을 갖고 붙들고 있단 말입니다. 말은 하늘을 지향해 가는 나그네 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그러니까 오늘 우리는 지금 이 아프칸 사태를 바라보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관점에서, 즉 영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오늘 우리 자신들의 신앙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 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그동안 수년동안 수백조를 쏟아부으면서 우방인 아프칸 지역 방위를 위해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국 국민의 목숨까지도 헌신하면서까지 도와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결과는 허무하게 텔레반의 승리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됐을까요?
원인을 분석해 보니까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각 행정관료들과 공무원, 그리고 군 고위층과 사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 같이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 이면 속에는 자신의 나라를 지키겠다는 투철한 정신과 국가관이 헤이해 지고 무장이 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는 증거이죠? 즉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역으로, 영적으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와 교인들에게 적용해 본다면 어떻게 비춰질까요?
모두가 하나 같이 성경이라는 본질적인 무기는 갖고 있는데, 정작 보이지 않는 그 하늘의 세계,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성경이라는 무기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자신들의 유익에 따라 현실적인 풍요움을 얻기 위한 방법과 수단으로 사용되는데 혈안이 되었기에,
그 결과로 성경을 보는 관점도, 왜곡된 시각으로 각인되어 국가주의 민족주의, 정치이념, 반공이념 등을 운운하면서 오직 눈에 보이는 이 현상계에 매몰되어 있어서 아프칸 군인들과 행정관료들처럼 자신들의 삶의 유익에만 관심들이 집중되어 살아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보편적인 기독교 신자들 또한 자기들 유익이 수반되는 이 현상계의 구조의 틀에 벗어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타깝게도 그로 말미암아 오늘날 신자들이 하나 같이 성경에서 요구하고 있는 그 하늘의 본질에는, 참 진리에는, 내 존재에 대한 올바른 현실인식에는 무관심함으로 말미암아 정작 성경을 통해서 요구하고 있는 자기의 거울로 비추어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그 나의 옛 사람적 육적자아의 망함이 전제 된, 그래서 나는 날마다죽노라!(고전15:31) 라는 그 피조물서의 객체의 자리에 서기를 싫어 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나”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그“나”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는데도(마16:24)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성경의 이야기의 독자로서 당사자인“나”가 아니라 나 이외에 다른 사람 이야기로만 듣고 있으니... 그것이 곧 나의 문제라는 성경의 지적은 전혀 상관 없는 문제로 치부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 역시 자신의 주관적이며, 표면적이고, 단편적인 성경해석의 이해와 맞물려 본래의 성경기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세상의 가치 중심인 이데올레기적 이념사상으로 끌어와서 자신이 말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고 판단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결국 왜곡 된 성경해석으로 인한 본질이 아닌 비 본질적인 것들을 추구하고 지향하게 하여 주체자 되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그 주체적인 삶의 자리로 올라타고선 이 땅의 가치들에만 매몰되어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본래의 천상의 하늘의 성도라는 자신의 신분이라는 그러한 자기정체성 마저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건 아프칸 군과 행정 관료들이 미국의 원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역 이용하여 자신들의 사리사욕에만 채우는데 급급함으로 말미암아 정작 자신들이 지켜야할 나라는 적군 탈레반에게 내어주는 안타까운 결과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특히 교회 지도자 위치에 있는 분들이 성경 즉 진리의 본래의 참 가치를 찾는데는 소홀히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몸 담고 살고 있는 이 역사 속 나라, 국가주의, 민족주의, 정치이념, 반공이념 등, 이데올로기적 체계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 : 개인이나 사회집단의 사상, 행동 따위를 이끄는 관념이나 신념의 체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하늘의 본래적 가치인 참 진리를 홀대함으로 말미암아 진리가 아닌 비 진리에 함몰되어서 율법주의, 실용주의, 신비주의, 인본주의 등에 목숨을 걸고 거기에 온통 매몰되어 있으니까?
아프칸 군인, 행정관료나 & 비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는“나”나 뭐가 다르느냐 말입니다.
이러니 심지어 어떤 분은 하나님, 까불면 죽어! 라는 헛소리를 하는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그건 농담으로 했다고요? 그럼 자기 증조 할아버지 앞에서, 자기 할아버지 앞에서, 자기부모 앞에서,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까불면 죽어! 라고 한 번 해 보세요? 그럼 뭐라고 할까요? 이 호로자식아! 그럴 것입니다.
농담 할 것이 따로 있지요?
하나님이 누구 개 이름처럼 개그스럽게 그렇게 쉽게 취급해도 괜찮은 분입니까?
고대 구약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발음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하나님의 이름을 읽어야 하는 필요성에 의해서 “야웨”라는 이름 대신에 여호와, 아도나이 등으로 읽었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비 성경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닫으면서도 본질이 아닌 비 본질적인 사회현상이나 정치이념에 매몰되어 본래의 하늘의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해야할 “나” 또한 성경적인 관점인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렸기에 진리가 아닌 비 본질적인 것들에 온통 관심이 가 있기 때문에 그가 진리를 말하는가? 비 진리를 말하는가? 에 대해서는 1도 관심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그들의 가치에 함께 동조하면 의로운 사람이고 반면에 동조하지 아니하면 좌익, 좌빨이 되어 버리는 이상한 기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현대 기독교인들, 특히 목사 라는 분들이 영적으로 싸워야할 성경의 본질과는 동 떨어진 비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이러쿵 저러쿵 감내와라 배 내와라 간섭들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질 그릇 안에 담고 있어야 할 진짜 추구해야할 하늘의 보화, 참 진리는 자신의 밖으로 밀려나는 홀대 당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니까 참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비 진리에 입각한 비 성경적 가치 체계의 옷을 입고 광명한 천사처럼 위장하고 포장하여(고후11:13-15) 종교적인 선동과 대립 된 정치 이념 놀음에 피리를 울려 불며 굿판을 크게 벌려 거대한 종교놀음의 사회적 이슈의 그 중심에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유독 자신의 편향 된 정치이념의 진영논리로 편을 가르면서 진짜 참 진리를 희석시키는데 일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들은 그게 옳다고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들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국가주의, 민족주의, 반공주의, 정치이념 논쟁에 매몰되어 이데올로기적인 편향된 가치체계를 갖고 오히려 올바른 성경적 가치체계를 홀대하는 경향들이 팽배해 있는 것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실상이 아닙니까? 율법주의, 합리주의, 실용주의, 인본주의적, 알미니안주의적 시각들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게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을려고 하는 작금의 기독교인의 작태는 참으로 서글퍼지며 안타까울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그 일하심의 열심의 역사는 지금도 끊임없이 진행되어진 그분의 경륜과 섭리로 이 세상 크로노스의 역사 속에 덮쳐 하나님의 그 카이로스의 구속사의 언약이 점진적으로 면면히 흐르면서 성취되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창세전 언약적 경륜에 따라 섭리적으로 간섭하시고 인도해 가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신다면서요? 나와 동행하시면서 나를 이끌고 계신다면서요?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창세전에 택한 자기 백성들이 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안착하기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금도 붙들고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 안 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아무리 날고뛰어도 이 세상은 종말론적으로 결국 그의 종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가시적인 현실의 세계는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성도의 고난 아닙니까? 그냥 하나님께서 각자 주어진 그 자리, 자신이 맡은 자리, 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백신도 맞으라고 하면 그냥 예약한 대로 정해진 날짜에 그냥 맞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한 자기백성을 눈동자처럼 간섭하고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백성을 보호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육육(666)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내주하신 성령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점이 확실하다면 말입니다. 왜 불안해 합니까?
그건 내가 믿는 하나님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더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의 가치보다 현실의 문제가 내 마음에 더 크게 와 닿아 있으니까? 불안 한 것입니다.
안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성경을 문자적으로, 표면적으로 왜곡되게 배웠고, 왜곡 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진짜 내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지 못한 결과일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고 그냥 자의적인 아닌 타의에 의하여, 국가 코로나19 방역 체계에 의해서 시행하는대로, 국가 정책대로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조금 손해와 불편함을 감수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크로로스의 역사 속에서, 이 역사 또한 하나님이 창세전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그 언약의 경륜에 따른 그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구속사의 통치가 면면히 흐르는 이 역사 속에서 간섭 받고 있다는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도인, 신자인(목사) 내가 인정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늘 우리 신자들이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가야하는지를 상징적인 성경의 인물과 실물들을 통해 시청각 교육적인 교보재로 사용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때론 선민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방나라 강대국들을 들어서 선민 이스라엘을 치는 방방이로 사용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방향으로 지향해 가도록 이끄셨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자기 나라까지 잃어버리게 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하신분이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예례미야 선지자를 통해 눈물로 호소하며 바벨론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거짓선지자 하나냐가 깨뜨려버린 나무목덜미도(렘28:10) 안 되니까, 이제 쇠목덜미까지 동원하여 예례미아 목에 채워서(렘28:13-14) 실물시청각교육적인 교부재로 보여 주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고 바벨론 군사에게 잡혀서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에게 눈물로 호소했던 예례미야 선지자말입니다.
그런데도 끝내 그들이 그 예례미야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바벨론 군사들이 직접 그들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까지 끌고 가게 됐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 하나님의 일하심의 열심의 역사는 동일합니다.
오직 자기백성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기백성 안에 소원을 두시고 자기 기뻐하신 뜻대로 이끄시면서 이 차안의 세계, 역사 속 모든 만물, 피조물들이 서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한 재료로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걸 인지하고 인정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백신을 안 맞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하심을 내가 인정하는 삶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롬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