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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지도사 수업에 참여 하시는 선생님들은 제주에 참으로 애정이 많으시다.
교수님의 시연 팁을 주신다면
1. 시연은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을 대상으로 즐겁게 알려줘야 한다.
2. 6분의 시간
3. 기본예의
1. 시연주제 - 3多의 섬 제주 : 돌, 바람, 여자
2. 장소 : 제주성읍마을(무료관람)
3. 시연순서 및 주제
가. 최창락-제주 전통가옥
나. 허애선-거상 김만덕
다. 원숙종-제주돌챙이와 돌담
라. 배성호-제주의 전통축산업과 돌담
마. 김정은-제주의 창조여신 설문대할망
바. 정명환-제주농업의 여신 자청비
사. 고기석-제주의4.3항쟁
아. 강병희-제주 돌문화의 상징 돌하루방
최창락선생님의 성읍민속마을 소개 :
성읍 민속마을은 조선 세종 5년(1423년) 현재의 성산읍 고산리에 있었던 정의현청이 이전하며 형성된 민속마을로서 6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읍성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어 국가 민속문화재 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1200M이고 성안에 100여호의 민가에 주민이 실거주하고 있고 시설로서는 동헌 객사 향교를 비롯한 주요건물과 연못 방앗간 대장간 노거수 안할망당 그리고 국가지정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전통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고성리에서 표선면 성읍리로의 이동이유로 공간상 중앙적 위치이고 왜구의 침입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중산간 자리하고 있어 농경과 생활에 편리한 지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영주산을 진산으로 하고 좌우에 오름의 능선이 연결되어 마을앞에 안산으로서의 남산봉과 명단수인 천미천이 흐르고 있어 풍수적인 길지에 해당되기에 이또한 현청 이전의 한 요소로 생각된다.
가. 최창락-제주 전통가옥
제주의 전통가옥(민가)으로서 그 내용은 크게 제주민가의 재료와 공간구조 그리고 가옥의 내부구조를 중심으로 설명 하였다.
가옥의 재료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새(억새)로 지붕을 덥고 축담은 돌과 나무 흙을 조합하여 벽체를 쌓았고 울담 역시 돌로 쌓아 경계를 이루고 방풍의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가옥의 공간구조는 올레 대문 안거리 밖거리 모커리 마당 눌왓 안티 통시 우엉팟 등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가옥의 내부구조는 정지(부엌) 구들 상방(거실) 고팡(곡식창고) 쳇방(식사공간) 풍채(풍대 달개지붕)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종합적으로 제주의 전통가옥은 자연에 대한 순응과 개조 그리고 주변지역의 문화적 영향으로 형성된 복합적 문화의 결정체라고 말하였다.
나. 허애선-거상 김만덕
김만덕(1739~1812)의 장사원칙은 세가지이다. 첫째, "싸게 그러나 많이 판다" 하나하나의 이익은 적게 보는 대신 많이 팔아서 이익을 남기는 것이다. 두번째, "알맞은 가격으로 사고판다" 큰이익이나 눈앞의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닌 합리적인 적정가격으로 변함없이 거래는 하는 것이다. 세번째 " 정직한 믿음을 판다" 인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거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제주에서 흔한 말총, 양태, 전복, 미역, 귤을 사들여 육지에 팔고, 제주에서 귀한 소금, 쌀, 광목, 비단들을 팔게 되면서 많은 부와 재산을 이룬다.
김만덕은 1975년(정조19) 57세 제주도의 4년간의 흉년으로 제주백성들이 굶어 죽는 것을 보고 전재산을 내놓아 구휼곡을 구입하여 백성을 구하였다. 이에 정조가 크게 칭찬하고 김만덕의 소원을 다 들어 주도록 했다.
그녀의 소원은 임금을 뵙는 것이요, 살아생전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남성중심의 사회이며 신분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 기녀출신의 여자로써 제주도를 벗어나 한양에 도착하여 "의녀반수" 벼슬을 받고 임금을 만난 김만덕. 그리고 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구경하고 제주도로 돌아와 74세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가진 재물을 잘 쓰는 자는 밥 한그릇으로도 굶주린 사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재물은 썩은 흙과 같은 것이다. 재물이란 몸 밖의 물건이라 벌 때와 쓸때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 항시 감사하고 검소하게 살아야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살아 갈 수 있다."
갖은 욕심이란 욕심을 다 부리는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다. 원숙종-제주돌챙이와 돌담
마당에도 돌이 있고 산에도 돌이 있고 제주에서는 흔하게 돌을 볼수가 있다. 밭에서 나는 돌들은 농사를 짓기 유용하게 한쪽으로 치우면서 돌담을 쌓기 시작했다. 돌담발전과정에서 돌챙이를 빼놓을 수 없다. 돌챙이는 석공으로 제주 역사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돌문화연구 심포지엄에 다녀오신 말씀을 해 주셨다.
현존하는 80대 석공 3분 고정파(대정읍, 산방산에서 나는 돌 비석에 직접 글을 쓰고 새기는 역할), 송종헌(돌하르방을 만들고 해녀군상을 만듦), 홍의백(돌창고, 돌집을 짓는 장인) 냉대받던 시절 애절한 삶과 애환을 설명 하셨다.
그 중에 송종헌님은 석공명장이라는 타이틀 이력의 소유자라고 설명 해 주셨다.
그 분들이 없으면 제주의 돌문화가 유지 될수 없을 것이다.
돌담의 종류는 4가지로 집담(경계), 밭담, 원담, 산담이다.
역사적 - 돌담은 길이가 22,000KM 지구 반바퀴를 돌 정도로 길게 형성됐다 .
제주돌은 현무암으로 검정 구멍이 뚫여 있고 길게 동그랗게 밭주변에 형성된 모습이 검정 용이 움직이는 것 같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땅을 침략하고 뺏어 가는 것 때문에 경계를 형성하는 역할을 했다.
석공들 연세가 80세로 후계자가 없고 돌담이 넘어져도 보수할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다만 돌문화예술학교에서 무너진 돌담을 보수하고 기술을 배우고 가르쳐주는 학교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고 후계자 기술전술, 외국과의 교류를 상당히 고무적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하셨다.
라. 배성호-제주의 전통축산업과 돌담
제주도 사람들은 소와 돼지 키우기를 좋아 한다. 왜 제주도 사람들은 좋아 했을 까?를 생각하면서 들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1930년대 통계에 제주도는 소 4만마리, 전국1%의 땅인데 전국33% 비중 말은 2만마리 전국의 40% 돼지는 5만마리 추정한다. 모든 집에서 돼지를 키웠다. 호수가 5만인데 전부 키운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 지형은 동서로 74KM, 남북32KM 타원형 화산섬이다. 섬 가운데 한라산이 솟아 있다. 비가 오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곶으로 흐르면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흐른다. 지형적인 특성상 수직적으로 깊어 지는 하천이면 건천이다. 우마를 방목할 때 자연적인 울타리 역할을 한다. 방목기술은 기온이 수직적으로 분포하는 것에 따라서 풀이 싹 틀 때 해안에서 상류쪽으로 풀이 시드는 것은 반대로 산간에서 해안으로 방목하는 것이다. 절기를 보면 본인 말과 소가 어디 있는지 알수 있고 이게 제주도식 방목 기술 문화이다.
제주도 토양은 자갈함량 40%, 흙 함량이 적어 액체 비료를 주게 되면 다 빠져 나가게 된다. 토양함량이 낮고 비가 자주 오기 때문에 고체 비료가 필요해서 인분을 돼지에게 먹이고 거름을 만들게 되었다. 즉 식량확보를 위해 돼지를 키운 배경이 되었다.
제주도의 통시는 돼지에게 인분을 먹이고 거름을 만드는 것이 추석에서 동지때가지 보리파종할 때 까지 거름 생산했다. 해초등을 넣어서 계속 거름을 만들어 냈다. 중산간 지역에서는 방목 말들의 농경지 피해를 막기 위해 돌담을 둘러 자연적 경계 및 말들이 한라산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을 방지했다. 제주도의 목축, 축산은 생존과 관련이 있다.
마. 김정은-제주의 창조여신 설문대할망
제주도의 한정적 지형에서 만들어진 창조신화인 설문대 할망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섬 중앙에 한라산이 솟아 있고 그 주변에 많은 오름이 있는 제주 지형은 키가 크고 몸집이 거대한 설문대 할망이 치마에 흙을 담아와 제주도를 만들고 다시 흙을 일곱번 떠놓아 한라산을 만들고 치마에서 흘러나온 흙이 360개의 오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라산 봉오리가 뽀족해서 그곳을 꺽어서 잡아 던지니 산방산이 되었고 뽑힌 부분이 백록담이고 패였다고 한다.
키가 커서 한라산을 배고 누우면 다리가 관탈섬까지 뻗었는데 관탈섬 구멍은 다리를 잘못 뻗어서 구멍이 났다는 신화적인 설명을 하셨다. 설문대할망은 관탈섬과 마라도를 밟고 우도를 빨래대 삼아 빨래를 했다.
제주사람에게 명주로 속옷을 만들어 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이어 주겠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명주를 99통까지 모으고 1통을 못 모아서 설문대 할망이 다리는 놓는 것을 못 했다는 설의 뒷받침으로 조천과 신촌사이에 뻗어 나간 엉장이 있다고 하셨다.
이러한 신화적 상상력에 제주 관광지 구석구석 설문대 할망의 손길이 닿은 장소가 된다는 말씀도 하셨다.
설문대할망은 신이지만 죽음을 맞이 한다는 점에서 인간적인 면모을 엿볼수 있다. 죽음을 맞이하는 대표적인 설로 우선 설문대할망이 큰 키를 자랑하며 깊다는 물을 찾아 다니게 된다. 용담의 물은 발등까지 오고 서귀포시 서홍리 홍리물은 무릎까지 왔으며 한라산 중턱 물장오리에 들어 갔는데 물장오리에 밑이 뚫여 있어 빠져 죽었다는 설이다.
또하나는 할망에게 오백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사냥 나간 500아들의 먹을 죽을 끓이다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죽을 먹던 아들들이 어머니가 빠져죽은 걸 알고 슬피울다 영실기암의 500장군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자기 희생을 통한 억척스럽게 삶을 유지하는 제주여성의 강인한 삶과 연관하여 주셨다.
과연 우리들은 이 제주창조의 신을 어떻게 탄생시켜나갈지 생각해 보게 된다.
바. 정명환-제주농업의 여신 자청비
세경본풀이 제주전통 신화에 근거하여 자청비를 소개하고자 하는 정명환 선생님이시다. 목소리 만큼 이야기 풀이도 재미 있으시다. 자청비는 중경세신인데 상경세신 문도령과 하경세신 정수남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그 중심은 자청비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청비 탄생 배경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다. 은중절 스님의 저주의 말조차 " 앞으로 김대감은 아들을 낳지 못하게 될 것이다." 동굴 목소리에 빠져 들게 된다. 김국진 대감은 늦게 자식을 낳았는데 딸을 낳았고 우리가 자청해서 낳았기에 자청비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성격도 활발하고 말괄량이 아이라고 한다.
하루는 우물가에서 세수를 할 때 하늘 문곡성에서 내려온 문도령에게 반하여 바가지 물에 버들잎을 띄워 보내게 되고 이러한 인연이 되어 남장으로 변복하여 문도령을 따라 나서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3년간 한방에서 기거하며 동문했지만 문도령은 자청비가 여자인줄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문곡성 명으로 하늘나라에 올라와서 결혼을 하라고 하니 문도령은 천상으로 올라가게 되며 마지막으로 폭포로 놀러가게 되는데 3년간 여자인줄 모른 문도령이 괘씸해서 내가 자청비인지 자청도령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여 버들잎에 글을 띄우게 되어 여자임을 알게 되어 그날 역사가 시작된다. 다음날 문도령은 하늘로 올라가고 자청비는 문도령을 기다리며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문도령으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고 한다.
자청비와 같은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노비 정수남이.
뒷산에 가니 문도령이 놀고 있더라고 거짓말을 하여 자청비가 뒷산 꼭대기에 올라가 움막을 짓고 문도령을 기다리는데 자청비를 사랑한 정수남이가 겁탈을 하려고 하니 기지를 발휘하여 목침으로 찔러 죽이게 된다.
김국진 대감 부부는 농사일을 하는 노비를 찔러 죽였다고 비판하여 내쫓자 남장을 한 자청비는 문곡성을 찾기 위해 헤매이게 되는 신세가 된다. 그러던 중 서천 꽃밭에 주인인 사라수 왕이 자기 꽃밭을 해치는 올빼미를 해하는 자에게 자기딸을 주어 사위를 삼게 하겠다고 공표를 하게 되어 서천꽃밭으로 향하게 된다. 자청비는 서천꽃밭에서 올빼미가 자기가 죽였던 정수남이 변신한 것을 알고는 목침으로 다시 찔러 죽이게 된다. 자청비는 왕의 사위가 된다. 그러나 정수남을 두번 죽인게 미안해 환생 꽃으로 살려서 집으로 가게 되는데 김국진부부가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괴물같은 자식과는 살수 없다하여 다시 쫓겨나고 배회를 하게 되는 풍운의 자청비!
그러던 중 직물을 짜는 직녀를 만나서 천상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모든 옷감에다 자기 이름을 적게 되고 천상에서 문도령이 자청비의 존재를 알게 되어 문도령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후 문도령은 천상에서 적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때 자청비가 서천꽃밭에 있는 소생 꽃으로 문도령을 살리고 문도령을 죽인 적들을 멸망꽃으로 죽여서 시아버지의 신임을 얻게된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상에서 살자고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문도령과 함께 오곡씨앗을 갖고 지상으로 와서 농업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아주 재미 있게 알기 쉽게 이야기 해 주셨다.
추가적으로 오곡씨앗 중 빠뜨린 것이 메밀이어서 늦게 파종을 하는 곡식이라는 설명도 해 주신다.
사. 고기석-제주의4.3항쟁
4.3사건에 대한 주제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무겁다. 의견이 다름을 말 서두에도 언급하시면서 제주의 사랑을 힘있게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제주의 독창적인 언어에 대한 설명도 해 주신다.
과거 외세들에 의해서 제주토착민들의 자율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지키고 현재까지 투쟁과 항쟁이 일어 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셨다. 해군기지, 제2주공항, 해상로켓발사 등 투쟁항쟁이 계속 진행중이다.
투쟁 항쟁이 과거에 외세가 만들었다면 지금은 같은 민족과 국가가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각자의 생각은 다르다는 말씀을 강조하신다. 제주도민은 해방이 되고 1년 반만에 4.3사건, 항쟁, 사태가 발생하게 되고 4.3은 제주 민중의 삶을 완전하게 뒤 바뀌게 하였다. 친척이 친척을 죽이고 같은 마을 사람이 같은 마을 사람을 죽이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게 했다.
4.3은 세계 유일무이하게 전쟁이 아닌 작은 지역에서 같은 민족, 같은 종족끼리 같은 언어를 가진 사람들끼리 총과 칼 심지어 죽창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라든지 이승만정부는 제주도민은 전부 75%가 빨갱이라는 공산주의 굴레를 씌워서 죽이고 죽이는 사태가 발생했다. 4.3특별위원회에서 "1947년 3월1일 기점으로 하여 1954년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의 주민들이 희생한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제주도민은 과거나 지금이나 항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 강병희-제주 돌문화의 상징 돌하르방
돌하르방이란 말은 어린이들 사이에서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여 불리던 명칭이 1971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하였으며 돌로 만들어진 할아버지를 뜻하는 제주어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은 용어 선택이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라고 하면서 이미 대중적 검증을 거친 애정으로 붙였기 때문에 더 친숙하게 부르고 있다고 하였다.
민속자료로 지정된 돌하르방은 45기의 돌하르방이 있다. 1754년 성문앞에 세워졌다고 전해오는 것은 48기의 돌하르방중, 2기는 1960년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옮겨갔고 1기는 일제가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사라져 현재 45기의 돌하르방만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원래의 위치가 아닌 제주도 각 처로 옮겨졌지만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정의읍성에 있던 돌하르방은 예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에 세워진 돌하르방의 모양은 어떻게 다를까요?
제주목 돌하르방은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형태로 얼굴에 주름이 많아 할아버지의 모습 이다. 평균신장이 182센티미터로 제일 높고 웅장한다.
대정현 돌하르방은 평균신장이 136센티미터로 가장 작습니다. 유홍준의 나의문와유산답사기에서 대정의 돌하르방은 키도 작고 몸집도 작다 다른 지역의 돌하르방에 비해 코가 낮고 입이 작고 눈 주위가 움푹하여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라고 했습니다.
정의현의 돌하르방은 평균신장이 145센티미터입니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정의현 돌하르방은 얼굴이 공처럼 동그랗고 눈초리가 조금 올라가 있다. 전체적으로 넓적한 느낌을 주며 양손을 배위에 공손히 얹어 단아한 모습이다라고 표현했다.
관광기념품으로 가장 특색있고 인기 있는 것은 바로 돌하르방이라고 한다. 또 제주 돌하르방은 문화사절단이 되어 세계속에 제주를 알리는 국제교류 전도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독일, 일본, 스페인, 파라구아이 드에 세워져 수호신 역할을 하며 세계인의 총애를 받고 있다.
나오며
시연도 썩!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 시간이 좋은 건
준비를 하면서 하나하나 알아가고 알아져 가는 것이다.
아쉬움은 늘 있기 마련이며 부족함은 부족함 대로 놔두련다.
후기 작성이 너무 오래 걸렸음을 여러 선생님께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기억이란 기록을 이기지 못하기에..... 적어 두기는 하였으나 기억이 오류일수도 있음에 양해를 구해본다.
그리고
늘 마음속에
일십백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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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허선생님!
장문의 후기 작성하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시연준비에 최선을 다하신 선생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내일 못 뵈서 죄송해요^^
자세한 후기 읽으며 여러 선생님들의 시연 내용을 한번 더 정리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어요~~재물을 잘 쓰는자가 되고 싶은데 영~~재물이 안들어오네요 그래도 그 뜻은 꼭 기억하겠습니다~~
손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물건일 겁니다^^
한학기 애쓰셨어요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아랑곳하지않고 맡은 바를
열심으로 수행하신
여러분의 노고와 열정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훌륭한 주제와 내용으로
품격까지 갖추어 열연을 해주셨어요.
아쉬움은 또다른 성장의 초석이 될거라 확신합니다.
종합해서 후기 작성하느라 수고하셨어요~^^
비오는 날이
궂은 날이 아닌
그냥 비가 오는 날이였음을~~
교수님이 일깨워 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