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인 1999년
박도진은 대학시절부터 신방과 정규과목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의 관심분야에만 집중하여 군 제대 후 임에도 졸업도 못하고 휴학생으로 남아서 방황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물론 간혹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의 용돈을 벌고는 했지만 그는 매일 같이 신문에서 발행하는 기사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는데 열정을 다하곤 했다. 그리고 그가 간만에 수업에 들어간 날 교수가 언론에 대한 강의를 할 때 분위기를 썰렁하게 찬물을 끼얹는 행동을 하곤 했는데, 그때문에 교수들의 눈밖에 난 그는 학점이 그리 높지 못했다.
어느 날 그의 독특한 행동에 관심을 보이고 있던 1학년 여학생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선배님. 오늘 또 한번 사고치셨네요. 하지만 저는 선배님 말씀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첫눈에 반할 만한 미모의 여인은 도진의 마음을 처음으로 설래게 만들었다. 도진은 그의 감정을 감추는 듯 시치미를 뚝 떼며 대꾸했다.
"사고라니, 머리가 틘 교수는 내가 하는 얘기에 공감하시는 분들이 꽤 있다고."
"네, 그럼요. 생각없고 고리타분한 교수들이나 언론이나 매스컴 속에 숨겨진 진실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언론을 이야기하죠. 그들은 단순한 지식만 외우고 있을 뿐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사회정세에는 관심이 없죠."
"그럼 앞으로 수업이 끝나면 내 얘기좀 한번 들어보지 않을래?"
"좋습니다. 언제든지요."
박도진은 그녀와의 만남이후로 착실하게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날 마지막 수업만 말이다. 마지막 수업을 마친 뒤 그는 민지와 휴게실에서 커피와 빵을 사들고 진지하게 시사에 대한 토론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느날 그는 민지에게 또다른 제안을 했다.
"내가 한 4년간 내 친구와 동아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번주 일요일에 모이기로 했거든 한번 같이 나가보지 않겠어?"
민지는 혼쾌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박도진은 매일같이 발생하는 뉴스의 사건사고들을 기록하여 그의 의견을 사설로 작성한 뒤 일요일 마다 혜화동의 민들레영토카페에서 모이는 '작은 언론인'이라는 모임에 참석해서 그의 사설을 발표 자료로 쓰곤 했다.
민들레 영토는 주말마다 모임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카페였다. 녹차나 커피를 시키면 셀프로 가져와야 하지만 커피 값만 내면 장소는 무료로 제공되고 적절한 시간동안 클럽, 스터디, 모임을 가질 수 있었다. 넓은 테이블에 녹차는 무한 리필이 가능했던 그 카페는 근 4년간 그들의 모임을 꾸준히 지속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박도진은 그날역시 새로운 게스트를 모셨다. 오랜 만에 회원이 세 명이 모인 것이었다.
"너는 강의도 안 듣고 수업도 매일 빼먹으면서 매일 학교 주변 얼쩡거리며 뭐하냐? 니 후배들한테 너의 그 독특한 세계관을 세뇌교육 시키냐?"
그의 친구 호경이 농담반 진담반 섞어서 인사를 대신하자 박도진이 실실 웃으며 그의 질문에 맞섰다.
"얌마! 4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모여서 나한테 세뇌를 당했던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 거냐?"
"내가 무슨 세뇌를 당했다고?"
그때 약속시간에 약간 늦은 새로운 멤버가 나타났다.
갸름한 얼굴에 둥그런 눈망울을 가졌고, 키는 한 170미터 정도 되는 여학생이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호경은 웨이브 머릿결이 출렁이며 인사를 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안녕하세요? 전 99학번 신방과 이민지라고 합니다."
호경은 가슴에 심장이 벌렁거리자 태연한 척하기 위해 그의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이민지가 당차게 자리에 서서 두 사람에게 뚜렷한 그녀의 가치관을 발표했다.
"선배님의 모임의 목적이 언론 까뒤집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선배님의 의견에 동의하며 오늘부터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제가 오늘 정한 주제가 며칠 전 신문에 대우그룹이 완전 해체되었다는 소식에 대한 것이며 왜 대우그룹이 해체가 됐는지에 대한 집중탐구를 하려고 합니다."
박도진이 겨우 자세를 가다듬고 그녀의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그날 저녁 모임을 끝마친 세 명은 저녁에 혜화동 먹거리 호프집에서 다시 뭉쳐 뒷풀이를 위해 시원한 맥주를 시켰다. 토요일이라서 호프집은 만원장사에 왁자지껄 북새통이었다.
한참 골뱅이무침 안주와 함께 맥주를 마시던 그들은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그들이 몰입하던 언론 문제에 대한 이어달리기를 했다.
"아이엠에프가 터진 건 그게 다국적 기업이 우리나라의 기업을 송두리째 거머쥐려고 한거라고. 이제 점점 한국인의 기업이 몰락하고 외국기업이 기승을 부리며 언젠간 우리나라를 송두리 째 집어 삼키려할 거라고... 이런 세상에 대학을 졸업해서 뭐하고, 직장을 다녀서 뭐하냐? 암울하기만 한데...""
약간 취기가 섞인 도진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이어지자 이호경은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그의 말을 되받아쳤다.
"얌마,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우리나라가 망할 나라냐? 한국인의 근성을 생각하고 그 놈들이 쳐들어와도 우리가 반드시 다시 내몰아 버리면 된단 말이야. 걱정하지 말고 대학이나 졸업해서 실력을 기를 생각을 좀 해봐. 우리 같은 사람들이 실력을 길러놓아서 그들에게 맞서면 되잖아."
"호경 선배 말이 맞아요. 우리가 놈들을 이용하면 되요. 우리나라에 와도 결국 한민족화 시켜버리면 되잖아요. 그들이 나쁜 의도로 들어와서 대우 같은 좋은 기업을 몰살시켰다 해도, 삼성은 건재하잖아요."
"그래, 삼성은 D램 반도체를 최초로 개발해서 한국 반도체 사업을 육성시켰어. 이제 한국이 세계의 중심에 서는 초석을 마련한 셈이라고."
도진은 약간 기분 나쁜 듯 호경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니들이 기업이 얼마나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면 당장 회사 때려 치고 대학교 그만둬야 할 거다. 우리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세상에 살고 있는지 말면 말이다. 내가 말을 다 안 해서 그렇지 나도 다 생각하는 게 있는 사람이야. 너희들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그것 말이다."
호경은 수년 동안 모임을 가지며 박도진에게 듣지 못한 어떤 비밀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술만 마시면 말하는 무서운 세상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왜 그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그 이야기가 무엇일까, 그를 만날 때마다 던지는 화두 같은 말들이 그의 궁금증을 증폭시키곤 했다.
술과 이야기가 흐르는 동한 벌써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 사람은 4호선 전철에 몸을 실었다. 이민지는 한성대입구에서 내리며 도진과 호경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1996년
막 군대를 제대한 박도진은 주요기사들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1996년도에 가장 굵직한 사건과 그가 관심가지는 일련의 현상들을 연구하여 음모론 계몽소설을 쓰기 위함이었다. 박도진이 음모론에 관심을 가지게 된 단초를 제시한 사건은 인터넷에 떠도는 어떤 루머로 인식되는 기사성 글귀들 때문이었다. 그가 군대를 제대한 1996년 어느 날 복학 후 쓸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가 우연히 접하게 된 사실은 정부 위에 또 다른 숨은 정부가 있다는 것이었다.
'숨은 정부라니.'
이종사촌 누나인 유수인이 음모론자라고 한심한 시선을 보내던 그였는데, 누나가 빠진 모든 일들이 사실일 것이라는 심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외삼촌댁에 들러 유수인을 찾았다.
유수인은 심각한 얼굴로 나타난 도진 앞에 그녀가 수년간 준비해온 자료들을 펼쳐보였다.
'미국은 자유석공조합이 세운 나라. 자유석공조합이라는 조직의 일원인 조지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이 되어 미국을 이끌었다. 그리고 현재 광명회와 자유석공조합의 융합적 조직이 유럽연합을 세우고, 바티칸을 접수한 뒤 종교적 색채를 띄우기 시작한다. 미국의 모든 대통령은 그들의 조직과 연관되지 않은 자가 없다. 링컨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은 자본을 뒤흔들며 세계를 지배하려는 그 조직을 섬멸하려는 노력을 하다가 의문의 총격에 죽음을 맞이한다. 미국의 중앙은행은 결국 국가소유에서 개인소유로 전환되고 미국 국가 자체가 아닌 새로운 조직이 미국을 이끌기 시작했다. 흔히 그림자 정부라는 별명이 지어진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력은 유대인이라는 민족으로부터 연유한다. 유대인 출신의 수많은 과학자, 예술가, 기술자, 금융가들이 전 세계로 퍼져서 많은 고위층을 섭렵한 뒤 1948년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을 재건했다. 미국 1달러 뒷면의 피라미드와 전시안은 그들을 상징하는 표식이며, 수많은 영화, 미디어에 전시안, 외눈이 등장한다. 또한 피라미드 종교의 색채가 강하며 전 세계의 종교통합을 준비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 러시아 대혁명,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발발, 그리고 공산진영과 자본진영의 양립을 조장한 장본인이 바로 그들이다.
고종의 대한제국을 일본의 식민지화 시키는 데 그들의 허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으며, 일본역시 삼변회와 삼각위원회의 회원국가로서 활약하고 있다. 한국은 해방이 되면서도 친일파들이 일본인들과 거대 자본가들과 내통하여 한국 대통령들을 손아귀에 놓고 통제하고 있다.
영국의 로스차일드 가문, 그리고 석유로 일확천금을 벌어들인 록펠러 회장이 그들의 중심적 인물이며, 대한민국 금융부도 사태를 일으켜 대한민국을 송두리 째 뒤 흔들고, 천문학적인 자본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오양조 회장이 세 번째 반열에 올랐다.'
모든 진실들을 접한 도진은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는 공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성균관 대학교를 자퇴할 결심을 하게됐다.
초저녁 하늘을 물들인 붉은 노을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산 뒤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눈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후폭풍이 밀려오자 박도진은 급하게 집 앞 도로 위에 있던 버스 위로 올라탔다. 무시무시한 후폭풍이 밀려오며 온 사방을 삼켰다. 박도진은 버스의 시동을 걸고 전속력으로 후폭풍을 피해 달렸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검은 연기와 불기둥이 삽시간에 버스를 덮쳤다.
도진은 이불을 걷어내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간밤의 꿈을 되새겼다. 그는 꿈꾸는 순간만은 정말 당장에 죽는 느낌이었다.
1999년
여전히 주말마다 이민지와 함께 이호경은 개근상이라도 탈 기세로 민들레 영토에 출석했다. 특히 호경은 민지를 보기위해서라도 반드시 모임에 참석해야만 했다. 이미 호경의 첫눈에 민지는 그의 가슴속에 들어찼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호경을 바라보는 도진은 오직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야, 이호경, 넌 이제 이모임이 지겹지도 않냐?"
"왜? 뭐가 불만인데? 넌 지겨우면서 왜 계속 출석하냐?"
순간 어떤 말을 하다가 실언을 한 듯 박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호경아, 미안하다. 오늘부터 이 모임 그만두자."
갑작스런 도진의 발언에 놀란 호경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민지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에요? 오빠! 그만둔다니요?"
도진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희들끼리 해. 나는 오늘부터 빠질게. 나 오늘 자퇴서 내고 왔거든. 이제 볼일이 없을 것 같아. 그동안 즐거웠다."
"오빠가 뭐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세상은 쉽게 오지 않아."
도진은 의아한 듯 민지에게 되물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어떻게 안다고?"
"오빠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빠가 음모론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어. 나 역시 음모론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은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럴 듯한 음모론에도 반드시 문제점이 있다고 봐야해. 그리고 내가 봤을 때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성행하는 괴담의 예측대로 세상이 변하지는 않을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난 알아, 알 수 있어."
도진은 두말하면 우스워질 것 같아 곧장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당돌한 언변에 더 이상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았다. 멍한 표정의 호경은 떠나는 도진의 등을 향해 무슨 말이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민지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곧바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언젠가 다시 도진과 만날 것을 예상했다.
도진은 민지를 모임에 끌어들인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가 좋아하는 민지를 자신의 둘도 없는 절친이 사랑하게 될 줄은 꿈에서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겐 사랑도 사치였다. 그는 앞으로 공부대신 언제 닥칠 위급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체력을 기르 기위해 유슈, 합기도, 킥복싱과 더불어 외삼춘으로부터 궁중무술을 배울 것이고, 이산인 원장으로부터 침술을 배울 계획을 세웠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속절없다 할만 했다. 벌써 세계는 첨단 과학의 혜택을 받아 휴대폰, 컴퓨터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폰이 성행하여 손가락만 까딱하면 원하는 어떠한 정보도 모두 얻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2011년
어두운 밤 백사장의 방파제 위에 놓인 십층 남짓한 U자 모양의 호텔은 성난 파도가 거칠게 넘실거리는 포항의 동해 앞 바다를 마주보고 서 있었다. 새벽 3시경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서 야간 업무를 보고 있던 이민지는 프론트 현관 밖으로 번쩍이는 거대한 섬광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밖의 상황에 대한 호기심에 잠시 프론트를 벗어나 현관 밖으로 나갔다. 추적추적 떨어지고 있는 빗물 앞에서 민지는 기분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주위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더니 검은 하늘 위에서 천장에 금이 가듯 번개가 대각선 모양으로 바다를 향해 길게 뻗쳐 내렸다.
"어멋!"
놀란 민지는 가슴 한쪽에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천둥소리가 하늘을 울리자 프론트 사무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박용식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사무실 문밖으로 나갔다. 프론트 데스크 안에 민지가 보이지 않자 의아해진 영식은 문득 어두운 현관 밖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뿔테 안경을 고쳐 잡으며 현관 밖을 응시했다. 갑자기 번개 불빛으로 인하여 밖이 수차례 환한 섬광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현관 밖으로 누군가가 공중에 매달린 것 같았다. 박용식은 숨을 죽이며 천천히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한 3초간 번개의 섬광이 연타로 번쩍이자 공중에 떠있는 여인의 모습이 훤히 비춰졌다. 그녀가 이민지라는 것을 알게 된 박용식은 그만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민지의 몸은 마치 새의 날개를 단 듯 가볍게 허공에 떠있었다. 그녀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서 눈가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야간 업무가 끝난 민지는 숙소로 돌아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날 이민지는 본사에서 오양조 회장의 비서로 승진됐다는 통보를 받게 됐다. 정확히 프론트 최고참인 박용식 팀장을 통해 받은 공문이었다. 갑작스러운 민지의 승진에 의아해 하지 않을 호텔 직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갸름한 얼굴에 예쁜 눈과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출중한 미모의 소유자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전날밤 비바람과 번개가 몰아치는 컴컴한 밤 현관 앞에서 이상한 술수를 부리던 이민지가 간계를 벌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모든 상황이 이상하고 특이할 따름이었다. 오회장은 그 이상한 여인을 왜 그의 최측근 비서로 데리고 갔는지 통 이해할 길이 없었다.
엘지 트윈타워 33층의 거대한 개인 사무실은 홀처럼 길게 펼쳐져 있었고, 앞뒤로 서울 여의도의 전경과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창밖 멀리서 제트기 한 대가 지나가며 엔진에서 뿜어 나오는 흰 연기가 길쭉한 구름 기둥을 형성했다. 구름기둥은 하늘에 길게 뻗은 채 잠시 동안 하늘에 머물러 있다가 점차 사방으로 흩어졌다. 몇 대의 제트기가 지나간 넓은 공간의 하늘에는 여러 개의 흰 구름기둥들이 정신없이 늘어져 있었다.
오양조는 함께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네가 민지냐?“
민지가 다소고니 고개를 끄덕이자 오양조가 다소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옷은 어째서 빨간 색 투성이냐? 어서 돌아가 갈아 입거라."
오양조가 갑작스럽게 의상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자 민지는 민망한 듯 다시 고개를 숙이고 국궁의 자세로 뒷걸음질 치며 넓은 홀을 벗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수행 비서들의 협조를 통해 그녀는 다시 평범한 투피스 의상으로 오양조 앞에 나타났다.
"그래, 내 앞에서 그런 자극적인 옷은 입지 말거라. 알겠냐?"
"예, 어르신."
대답을 한 민지는 처음에 자신의 의상을 챙겨준 수행 여비서의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떠올렸다. 분명 그녀는 회장님이 붉은 색을 좋아하니 옷 또한 자극적인 붉은 색 계통으로, 치마 길이는 짧게 입으라고 언지 해 주었던 것이다.
"너는 내 마음을 읽을 줄 모르냐?"
갑작스러운 엉뚱한 질문에 민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마, 마음을 읽다니요?"
"네가 아직 덜 익숙하지?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넌 그걸 알고 있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민지가 수줍게 또다시 묻자, 오양조는 흐뭇한 미소를 흘리며 알 수 없는 이유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의 힘!"
민지는 오양조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평범치 않은 정체를 알아차린 듯했다. 그리고 그 책상 위에 놓인 '대강령'이라는 책을 발견하더니 오양조가 무엇을 뜻하고 하는 질문인지 알 것만 같았다. 민지는 대답대신 오양조의 말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뜻으로 얼굴에 환한 미소를 채웠다.
오양조는 시계를 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비서실장인 이민지에게 일렀다.
"이제 슬슬 호텔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군."
이민지는 수행비서가 전해준 인터컨티넨탈 경영자 회의에 회장님이 참석하러 가신다는 내용과 준비사항을 숙지하고 있었다.
"네. 회장님. 이미 차가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래. 너는 좀 더 여기에 머물며 인수인계를 확실히 받아놓도록 하거라."
"네, 어르신, 분부대로 이행하겠습니다."
문밖으로 나서는 오양조의 한복차림의 걸음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오양조가 회장실 밖으로 나간 뒤 민지는 한숨을 푹 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또 다른 선배 수행비서 안나윤 실장이 다가왔다.
"회장님이 나가시면 일단 민지씨는 이곳을 정리정돈 하도록 하세요."
민지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민지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며 갑자기 오한기가 오는 것 같았다.
"저기, 죄송한데, 감기에 걸린 것 같은데 병원 좀 갔다 오면 안 될까요?"
안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관심한 표정으로 허락했다.
민지는 엘지트윈타워 내에 있는 내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차례가 되어 진찰실로 들어가자 의사는 그녀의 동공, 혀, 체온을 확인한 뒤 어떤 탐지침을 그녀의 몸에 갔다 댔다. 그러자 탐지침의 바늘이 붉은 색 표시선으로 움직였다. 의사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곧바로 피검사를 요청했다. 신종바이러스의 유행으로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서울 삼성역 인터컨티넨탈 호텔 30층 머큐리 룸 내부에서 한 사람의 육성이 마이크 없이 밖깥 홀까지 울려 퍼졌다.
키는 185센티가량에 40십대 중반의 검은 정장의 미국인은 한국 굴지의 기업 회장들, 방송사, 신문사 등 정재계 인사들이 한 곳에 불러 모아 놓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 고요한 강연장에 그의 목소리만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 세미나실 좌석에서 일제히 기립하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회의를 마친 사람들은 머큐리 룸의 출입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노란 턱수염에 장신인 제임스 블레이드는 고급스러운 보고서 결재서류를 옆구리에 끼고서 머큐리 룸의 옆 연회장인 플루토 룸으로 발을 옮겼다. 그는 노크 후 큰 문을 열자 텅 빈 홀이 길게 펼쳐졌다. 서울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진 통유리 앞 이태리풍의 고급스러운 서재와 책상 사이에 오십대의 한복 차림의 오양조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음미하며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임스 블레이드가 발걸음을 멈추자 오양조는 고개를 창밖에 둔 채 제임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의 생각을 읊었다.
"이 영묘한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한한 축복이 아닐 수가 없네.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나약함을 드러낸 채 같은 일만 반복하고 있지, 신(神)이 주신 거대한 능력을 십분도 채 발휘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
제임스 블레이드는 오양조의 너스레에 신경 쓰지 않고 회의결과를 보고했다.
"이번에 연구하는 변종바이러스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새로운 숙주가 발견되어서 서울삼성병원에서 수술을 가장한 실험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블레이드는 한국말을 하면서 또박또박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단지 약간 혀가 말려 영어발음이 섞인 목소리가 나올 뿐이었다.
오양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쓰고 있던 안경을 살짝 코에 걸친 채 블레이드를 향해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인터넷이 성행하며 의식의 변이(變移)가 자꾸 일어나고 있네."
오양조의 말에 제임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의식의 변이라고요?"
"그래, 통제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의식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어."
제임스 블레이드는 오양조의 말뜻을 알아차린 듯 예리한 눈빛을 발산했다.
“어딘지 모르게 또 다른 의식이 발생하고 있어. 비밀을 깨닫는 존재들 말일세...”
“어느 누가 그 비밀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 위의 뜻이지 않습니까?”
“내말은 음모론을 말하는 게 아니네. 내가 말하는 비밀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숨어 있는 비밀을 말하려는 것이야. 일단 그렇게 알고 잘 생각해 보게. 왜 그러한 비밀을 깨닫는 자들이 발생하고 있는지 말일세."
제임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양조가 알았다는 듯 가보라는 손짓을 하자 제임스 는 오양조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플루토 룸을 벗어났다. 그는 곧 옥상의 헬기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오양조는 주름진 날카로운 눈으로 통유리 밖의 서울을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의 휴대전화에서 벨이 울렸다. 발신자에 안실장의 이름이 떠올랐다.
"무슨일인가?"
"회장님, 새로온 이민지 비서가 신종바이러스 중증이라 격리조치됐습니다."
"뭐라고?"
오양조는 씁쓸한 듯 체념조로 다시 물었다.
"알았다. 일단 어느 병원인데?"
"세브란스병원입니다."
"알았네. 잘 살펴주도록 하게나."
"네, 회장님."
성남 실종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민간인이나 군인의 출입까지도 통제된 오래 전에 폐쇄된 채석장 위로 거대한 기지를 감추고 있는 담벼락에는 치렁치렁한 넝쿨이 정신없이 널려 있었다. 기지는 여러 개의 봉우리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둥글둥글한 형상의 산악에 둘러싸여 있었다. 기지 담벼락의 각 사면의 모서리에는 반구형 전파 장애 안테나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었다.
사면의 안테나는 인공위성의 수신을 방해하는 강력한 전파를 내보내고 있었다. 담장이 무려 30미터인 기지 내부에는 무려 2천평이 넘는 넓은 평야 위에 비행기 활주로와 헬기 정류장 및 여섯 개 동의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외부에 미군들의 출입이 이뤄졌고, 간혹 유럽인이나 미국인으로 구성된 흰 수의를 걸친 연구원들이 건물과 건물 사이로 들락거렸다.
여섯 개 동의 건물 중 중앙의 본부로 보이는 건물 가장 위층에 해당하는 5층 넓은 통 유리 안으로 검은 양복 차림의 한 간부는 길쭉한 테이블에 군복을 입은 몇 명과 연구원들, 그리고 몇몇 양복차림의 남자들과 함께 모종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국에서 실시된 텔레포테이션 실험은 어찌 됐습니까?"
“99.9% 성공이지만 0.1%의 상용단계 실험이 남아 있소. 합당한 특수체질의 군인과 군대가 마지막 단계의 실험을 실시할 예정이오.”
“실험 도중에 발생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다른 조치사항은 없으신가요?”
190의 장신에 노란 수염이 덮수룩하고 턱이 약간 긴 회의를 주도하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석상 정면의 스크린을 내리며 영사기를 켰다. 그러자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얼굴이 한 화면에 반씩을 차지했다. 그리고 다음 화면에서 폐쇄회로 동영상이 재생됐다.
“이름은 임연주, 성남대학버스기사의 실험 도중 발생한 유일한 목격자입니다. 성남대로 카메라에서 그녀가 버스가 사라지는 장면을 보고 놀란 장면입니다."
동영상이 장면이 바뀌며 골목길에 숨어 있는 한 남자의 수상한 행동이 영상에 나타났다.
"저 남자는 역시 성남대학교 학생이며 김덕수 버스기사의 인체 실험을 목격한 자입니다. 잠든 김덕수를 마취 시킨 뒤 칩적응력을 테스트하기위해 실험을 실시할 때 우연찮게 김덕수의 집을 지나치고 있었죠. 그의 이름은 박도진.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같은 학과 학생이더군요. 무엇보다도 박도진이라는 남자는 이미 세계의 구조를 파악한 반정부론자에 음모론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사촌 누나인 유수인 역시 반정부론자로서 두 사람은 같은 뜻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하실 예정이십니까? 제거하실 겁니까? 아니면 지켜보실 겁니까?”
"아직 지켜보는 과정입니다. 일단 한국일은 오양조 회장의 동의도 필요하며 예전처럼 무조건 제거하는 식으로 일을 풀다가는 오히려 더 깊은 수렁을 파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니 신중을 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정원에서 의혹을 잠식시키기 위해 비밀수사를 착수했다던데, 국정원장은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할 예정이랍니까?”
“일단 일의 투명성을 위해 요원 한 명을 투입시켰습니다. 국정원 대테러팀장 강태신이 이일을 맡았죠. 전한수 정보국장은 그의 보고를 받아 바로 제게 직속으로 전달합니다. 강태신 요원은 UDT출신으로 상당히 능력 있는 친구입니다. 그의 임무는 적당히 일을 파헤친 다음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일단락 시킨 뒤 임연주와 박도진이 가지고 있는 의혹을 말끔하게 제거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강태신 요원이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것은 아니군요."
"최대한 신중을 기하기 위해 상황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강태신 그도 역시 사람이니 임무에 도덕성이 배제된 사실을 안 다면 꽤 혼란스러워 할테니까요."
주한미군 사령관인 알렉스 위락은 얼굴에 약간의 노기를 나타내며 따졌다.
“어째서 완전하게 교육받은 요원을 심지 않고 그런 자를 쓰는지 통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러다 문제라도 더 붉어지면 어쩌려고요.”
“그자는 국정원에서 아주 유능한 요원입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교육받은 요원이란게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 모인 여러분들 역시 언제 돌변할지 상황에 불안을 떨며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익과 반대되는 길은 가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잠식시켜줄 유일한 요원이 강태신이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는 위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니 너무들 걱정 말아 주십시오.”
여러 중역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위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인류통제 실험이 실시될 텐데, 우리가 서로를 믿어야지 또 누가 우리를 믿어주겠습니까? 이만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 모두들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해 주시고, 사소한 의혹은 모두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멘트와 함께 중역들이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서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연구팀장으로보이는 한 여자 교수가 한참 회의실을 떠나던 큰 키에 뚱뚱한 군복 차림의 남자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사령관님. 이번 실험의 결과입니다. 텔레포테이션 적격 체력 소유자들 명단입니다."
그는 인쇄된 명단과 내용물이 담긴 이동식 디스크를 받아들었다. 새라 캠벨은 다시 주머니에서 이동식 디스크를 꺼내 회의실에서 막 나오던 노란 턱수염의 남자에게 내밀었다.
“블레이드 국장님, 그동안의 김덕수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물론 텔레포테이션 적격 체력을 가진 명단도 함께 저장되어 있으니 보고서로 지참하셔도 될 것입니다.”
여교수의 왼쪽 가슴에는 새라 캠벨 선임연구원이라는 명찰이 달려있었다. 그녀는 제 4동에 해당하는 연구동으로 신속히 몸을 옮겼다. 그녀는 연구동으로 가기 위해 지름길인 A동 1층의 큰 격납고를 거쳐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붉은 삼파장 조명들이 넓은 격납고를 비췄다. 격납고에는 비행기는 한 대 도 없었다. 그저 두 대의 덤프트럭과 두 대의 승용차와 한 대의 승합차, 그리고 허리가 반 토막이 난 채로 억지로 붙여 놓은 버스가 검정색 위장용 그물로 덮여 있었다. 바로 3월 11일 텔레포테이션 프로젝트에 희생된 실종된 차량들이었다.
연구동에 도착한 새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0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층수는 무려 지하 35층까지 있었다.
실내 천장과 벽이 온통 하얀 병실 가운데 김덕수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병실 문을 열며 김덕수에게 다가가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를 볼펜만한 손전등으로 확인한 뒤 체온을 재며 그에게 서투른 한국말로 다정히 물었다.
"어디를 갔다 왔나요?"
김덕수는 새라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큰 바닷가가 있는 백사장이었어요. 또 한 번은 바닷가였는데 넓은 초원 위에 있었고요. 마지막으로는 제 아내와 딸 민예가 있는 집 앞이었는데, 도저히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한 시간을 넘도록 주위를 배회했어요."
새라 캠벨은 그의 모든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상황은 카메라에 녹화되고 있었고, 새라 캠벨의 한쪽 귀에 꽂힌 무선 이어폰으로 그의 말이 정확히 영어로 통역되고 있었다.
전라남도에 변종바이러스 초토화 사건 다음 날 종로구에 있는 작은 미술관의 주인은 그날 모든 일반 고객들과 클라이언트 예약을 미루고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렸다. 잠시 후 나타난 자는 여당의 총수 안혁수 의원이었다. 그리고 5분을 터울로 한 사람씩 미술관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은 각 방송, 언론사의 대표들이었다. 잠시 후 나타난 남자는 CIA국장 제임스 블레이드였고, 그 뒤로 국정원장 정경식, 인터폴 사무국장 램버트 하슬, 그리고 정보국장 전한수, 이호경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미술관 내부에 마련되어 있던 비밀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회의실 내부의 긴 소파에 마주보며 자리에 앉자 제임스 블레이드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여러분들이 모인 이유를 잘 아실 것이라 믿습니다. 짧고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십시오. 오양조 어르신께서 분명한 답을 원하고 계십니다. 호남지역을 초토화한 변종바이러스는 북한의 소행이라고 위장해야 합니다.”
그때 갑자기 이호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의 의견을 간명하게 제시했다.
“저는 국정원 대테러팀장 이호경이라고 합니다. 제가 십년간 기른 탈북자 요원이 있습니다. 그를 북한 특수공작원으로 위장시켜서 모든 증거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제임스 블레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언론, 방송사 대표들에게 말했다.
“모든 자료는 국정원 정보국장이 제공할 것입니다. 각 방송, 언론은 지금 즉시 이 특종을 보도해주십시오.”
이호경은 각 언론사와 방송사별로 준비한 서류를 각 대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날 밤 8시, 9시 뉴스에서 목포행 열차를 탈선시키고, 호남지방을 변종바이러스로 초토화 시킨 일은 북한 특수공작원의 소행임을 긴급하게 보도했다. 전국은 그 뉴스로 인해 떠들썩했고, 테러를 저지른 북한 특수공작원 리하원 대령의 얼굴까지 방영됐다. 그는 스스로 목포행 열차에 타서 변종바이러스를 퍼뜨리며 함께 사망한 것으로 보도됐다. 전 국민들은 이번에 발생한 거대한 참사사건에 울분을 토하며 생중계되는 뉴스를 지켜보았다. 호남지역이 모두 변종바이러스로 감염되어 사망했다는 사실을 그곳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사람은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강태신은 최대한 CCTV 피해 건물 사이 길로 운전하며 훔친 차량을 국정원이 멀지 않은 외진 골목길 옆에 버렸다. 그는 가정집 근방에서 긴급한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세하게 들리는 보도내용은 북한이 변종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이야기였다. 강태신은 실소를 흘리며 국정원을 향한 걸음을 재촉했다.
변종바이러스의 테러가 북한의 소행이라는 사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들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 일인지도 몰랐다. 이러한 사실은 자신과 더불어 임무를 맡은 모든 요원들의 목숨도 위태로울 것이라는 추론을 이끌었다. 게다가 그들의 공격이 있기 전 그의 팀들은 통화가 전혀 되지 않았다. 그는 이유를 알기 위해 반드시 국정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강태신은 국정원 지하 주차장 카메라의 시선을 피해 몸을 숨겨 들어오는 차량을 계속 지켜보았다. 그때 낯익은 차 한 대가 도착했다. 그 차량은 분명 자신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갔던 임석태 요원의 차였다. 만일 그가 살아 있다면 그 역시 한통속일 것이 분명했다. 임석태가 차에 내리기도 전에 강태신은 몸을 신속하게 움직여 뒤 좌석에 몸을 실었다. 임석태는 뒤에 누가 탔는지도 눈치 채지 못했다. 강태신은 보통 요원들이 차량 뒤 좌석에 숨겨놓는 45구경 권총을 찾아서 총알을 확인 한 뒤 곧바로 임석태의 목 뒤에 들이댔다. 놀란 임석태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강태신을 확인했다.
“아니, 팀장님!”
강태신은 거두절미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누가 사주해서 우리 팀을 다 죽이고, 날 죽이려고 한거지? 빨리 말하지 않으면 너도 죽어야 될 거야.”
“무슨 소리입니까? 팀원들이 죽다니요.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강태신은 아무런 정보도 없이 팀원들이 죽었다고 판단을 내렸지만 그의 생각에는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어서.”
임석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강태신은 고개를 최대한 숙인 채 총구를 임석태의 옆구리에 댔다. 차가 주차장을 벗어나자 임석태가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팀장님?”
“국정원에서 최대한 멀리 간다.”
임석태는 군말 없이 계속 운전을 했다. 강태신은 임석태와 심문하기 위해 보조석 자리로 몸을 옮겼다.
“분명히 말해. 안 그러면 네 심장이 구멍이 나는 수가 있어. 신정혜, 윤중식을 누가 죽였어?”
임석태는 거두절미하고 대답했다.
“저는 모릅니다.”
임석태의 모른 다는 말에 태신은 신정혜와 윤중식이 죽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있는 힘껏 억누르며 말했다.
“박호명은 네가 죽였나?”
임석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박호명을 죽이다니요?”
“거짓말 하지 마. 네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가 있었을 거 아니야?”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호명이를 죽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유지나는?”
“모릅니다. 유지나 요원은 먼저 알고 종적을 감췄으니까요.”
임석태는 자신도 모르게 한 가지 사실을 발설하면서 자신의 실수에 대해 후회 막심한 표정을 지었다.
태신은 유지나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기쁜 심정으로 엷은 미소를 흘렸다.
“너는 분명 호명이를 살해 했어. 그리고 다른 대원 중 누군가는 신정혜와 윤중식을 살해했을 것이고. 변종바이러스가 퍼진 것을 테러로 은폐하기 위한 연막작전이 분명해. 국정원장은 우리들을 믿지 않았으니까. 이는 당연한 결과야. 우리 팀은 결코 음모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너는 달라. 너는 네 한 목숨 부지하느라 어떤 비열한 방법도 서슴치 않을 녀석이거든. 네가 살아서 버젓이 국정원을 들락거릴 수 있는 것도 다 네놈의 처세술 덕분이겠지?”
강태신은 더 이상 임석태에게 얻을 것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차를 외진 곳에 세우라고 한 뒤에 임석태를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강태신도 차에서 내려 총을 그에게 겨누며 발길질로 그의 명치를 찼다. 빠른 발길질에 피해 볼 겨를 도 없이 임석태는 컥하는 외마디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강태신은 그에게 총을 겨누며 말했다.
“말해. 아니면 황천길을 구경해야 할 거야. 네가 아는 거 지금 다 불어.”
공포에 찌든 임석태의 눈빛에서 고통으로 인한 눈물이 흘렀다.
“어차피 네 놈도 죽을 목숨이었지만 네 놈의 간사한 수법으로 살았잖아. 그러니 지금도 모든 사실을 말하고 목숨을 빌어보라고.”
끙끙대던 임석태는 입을 열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팀장님의 말씀이 90% 맞아요. 하지만 난 호명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호명이는 저격수에 의해 죽었어요. 나는 원장의 지시에 따라 유지나를 죽이려 했지만 그녀는 먼저 알고 종적을 감추었어요. 다른 것을 모릅니다. 지금 뉴스에 떠들썩한 것은 변종바이러스가 북한의 테러라는 것이며, 그 사실을 유포하기 위한 전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어요. 국정원의 대테러 팀원과 간부들을 제외하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도 몰라요. 강태신 팀장님에 대한 직위 해제는 물론이거니와 아예 기록자체를 인멸시키고, 현재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요. 대테러 팀장에는 이호경이 맡고 있고 말입니다. 원장은 반드시 팀장님을 찾아서 제거하려 들 것입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강태신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대한 참았다. 그는 그에게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옷 벗어.”
“네?”
“속옷만 빼고 다 벗어. 핸드폰도 내놓고, 현금도 좀 빌려야겠다. 이게 내가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비니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임석태는 더 이상 군말 없이 옷을 벗고 지갑에서 현금 35만원을 꺼내 주었다.
“차도 좀 빌려야겠다. 신고하면 죽는 줄 알아.”
강태신은 임석태를 속옷 바람으로 남겨 놓은 채 차를 끌고 그곳을 벗어났다. 그는 한 시간 가량 서울을 배회하다가 공원 근방에 차를 세워 놓고 임석태의 휴대폰을 땅바닥 위로 던진 뒤 시내버스를 탔다. 서울 강동구 쪽에서 내린 태신은 복잡한 시내의 건물 사이의 모텔을 찾아 들어갔다.
그는 샤워를 하며 앞으로 어떻게 일을 풀어야 할지 고민했다. 정보국장 전한수가 처음에 자신에게 내렸던 임무가 떠올랐다. 만일 그때 성남에서 벌어진 사건이 비밀리에 실험한 순간이동 실험이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일임했던 일을 다시 철회했다는 것은 일종의 은막작전에 해당한다. 일단 인지도 있는 자신에게 일을 맡겼다가 미결사건으로 종결시킨 뒤 목격자들을 제거했을 것이다. 그는 박도진과 임연주가 살해됐는지 아니면 생존했는지 그것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거의 99% 그들의 생존율은 없게 된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붉은 조끼를 입은 시위대들은 팻말을 들고 ‘사기정부, 정권교체’를 외쳐대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곧 시위대들이 마치 근무를 마친 뒤 퇴근하는 모양새로 흩어졌다. 그 중에 동안(童顔)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나이가 삼십대 후반이며, 178cm 가량의 장신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한 여인이 힘없이 털레털레 걸으며 강북방향으로 향하는 정류장 앞에 섰다.
여인은 버스를 타고 마포대교를 넘어 장위동에 이르러서야 하차했다. 장위동의 어두운 골목길을 힘없이 걷던 그녀는 누군가가 뒤를 밟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재빨리 좁은 어두운 골목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박도진을 찾아 나선 강태신은 도진의 집주소 근방에서 어떤 여인의 민감한 반응을 감지했다. 그는 숨을 죽이며 그녀가 숨은 길목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도대체 뭐 길래 나를 의식하고 몸을 피한 거지?.’
그때 그의 머리 위에서 뭔가 묵직한 것이 떨어지고 있었다. 강태신은 재빠르게 땅을 구르며 정체불명의 물체를 피했다.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항아리가 깨졌다. 다시 일어선 강태신은 놀란 듯 다시 위를 쳐다보았다. 그때 좀 전에 사라졌던 여인이 담 위에서 뛰어 내리며 강태신을 향해 발을 뻗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가까스로 그녀의 발길질을 피하자 그녀의 주먹이 다섯 가닥으로 펼쳐지며 태신의 안면을 향했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며 재빠르게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자 그녀의 다리가 유연하게 하늘로 쭉 뻗어 오른 뒤 강태신의 가슴을 내리 찍었다.
퍽
강태신은 피하고 막아 볼 틈도 없이 가슴을 움켜쥐며 뒤로 주춤했다. 여인이 허리춤에서 혁대를 풀 듯 길쭉한 뭔가를 빼냈다. 그녀가 빼낸 검날은 허공으로 촥 소리와 함께 펼쳐지며 야간 등불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그리고 그녀는 곧 현란한 검술로 강태신의 목을 겨누며 휘둘렀다.
휘릭
강태신은 허리춤에 항시 차고 다니던 대검을 신속하게 꺼내더니 빠르게 날아오는 유연한 검(劍)의 날을 반사적으로 막아냈다.
챙
연검(軟劍)과 대검이 부딪히는 소음과 함께 칼의 면이 태신의 단검에 착 감기며 칼끝이 그의 턱에 살짝 스치며 피가 튀겼다. 강태신은 저돌적인 그녀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녀의 검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자, 잠깐만요.”
겁나도록 강력한 그녀의 공격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강태신이 그녀를 설득해보려는 태도를 취했다. 그녀는 잠시 주춤하며 차갑게 식은 큰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굴 찾는 건가?”
“나, 난...”
강태신은 상대가 분명 정부요원은 아닐 것이라 믿었다.
“난 국정원 요원이었지만, 지금은 누명을 쓰고 도망 다니고 있소.”
“왜지?”
“변종바이러스 테러를 일으킨 자를 잡으려다 실패하고 오히려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됐소.”
“북한이 테러범이라던데 사실인가?”
“아니오. 그렇지 않소. 그것은 새빨간 거짓이오.”
“어떻게 증명하지?”
강태신은 왜 자신이 그런 얘기를 낯도 모르는 여자에게 설명해야하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 갔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누구의 소행이지?”
“아무래도...”
“정부쪽인 것 같습니다만...”
여인은 가로등 불빛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붉은 조명에 얼굴이 비치며 여인의 조각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태신은 잠시 상상했던 상대의 모습과 상반된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믿을 수가 없군요.”
“뭐가요?”
의심을 풀린 듯한 여자는 다시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강태신은 잠시 그녀의 외모에 홀려 있었다.
“아닙니다.”
그녀는 손을 내밀며 강태신에게 악수를 청했다.
“저는 유수인이라고 해요.”
강태신은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내심 놀랐다.
“저는 강태신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그는 그녀가 박도진의 이종사촌 누이 유수인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박도진을 찾기 위해 그의 부모가 사는 집을 찾아가다가 그녀를 만났으니 유수인이 바로 박도진의 누이일 가능성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저를 따라오세요. 쫓기는 몸이시니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태신은 일단 몸을 숨길만한 곳이 필요했고, 일단 그녀의 말을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그녀는 다시 연검을 혁대에 다시 꽂으며 어둠속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어느 집 앞에 주차된 차를 열며 그에게 말했다.
“타세요.”
“어디를 가시는 거죠?”
“일단 따라와 보세요. 그러면 알게 될 거에요.”
태신은 보조석에 몸을 실었다. 그녀의 예쁜 얼굴을 한참을 들여다보며 태신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저를 쳐다보세요?”
“아, 아닙니다.”
태신은 쑥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제가 당신을 믿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아니요. 어째서 저를 믿으시는 거죠?”
“당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어서요. 임연주 아시죠?”
“네? 어떻게 그걸...”
강태신은 순간 유수인이 자신보다 한수 위의 정보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연주는 저희와 함께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당신에 대해서 말했죠. 당신이 붙여 놓은 초정밀 마이크로칩은 꽤 비싼 거던데. 미안하지만 저희가 분해했어요. 당신은 우리를 감시만 했지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이 사건을 접고 다른 자들이 움직였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죠.”
태신은 그녀가 모든 사실을 꿰뚫고 있다는 점에 여간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차차 말씀드릴게요.”
장위동의 밀집한 빌라 중 가장 큰 규모의 건물로 들어선 유수인은 301동의 문을 열며 강태신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고갯짓했다. 강태신은 주위를 살피며 유수인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난 뒤 방문 다섯 개와 넓은 거실과 소파가 있는 집안으로 들어선 강태신은 그곳이 여느 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혼자 사는 집치고는 꽤 넓네요.”
“혼자 살지 않아요.”
그때 한 개의 방문이 열리며 박도진이 나타났다. 강태신은 박도진을 보며 뜻밖의 수확을 얻은 느낌이 들었다. 박도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유수인에게 물었다.
“누구셔?”
“어, 내가 아는 사람. 일단 좀 이분 쉴 수 있게 도와줄래?”
박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강태신을 훑어보았다.
“이 마당에 남자친구를 데리고 왔을 리는 만무하고...”
유수인은 도진이 그에 대한 오해의 소지를 말끔히 지우게 하려고 모든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이 분은 강태신 국정원 요원이셔. 변종바이러스 테러를 막으려다 목숨을 겨우 부지해 이곳으로 온 거야. 현재는 쫓기는 몸이야. 왜냐하면 변종바이러스 테러가 북한이라고 떠들어대는 매스컴과는 다른 증거를 가지고 계시거든. 목숨도 위태로우시고. 일의 실마리를 풀어 보려고, 널 찾으려고 온 것 같던데. 그래서 여기로 데려왔어.”
“나를 찾으려 했다고?”
강태신은 기회를 놓칠 새라 직접 설명했다.
“박도진 씨가 목격한 성남대 버스기사 김덕수 씨의 사건 말입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분명 도진씨가 목격한 장면은 놈들이 마취된 김덕수를 실험 한 뒤 다시 집으로 돌려놓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대체 그자들이 김덕수 기사님께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저도 조사를 하다가 중간에 그만둔 탓에 자세한 것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 예감에 김덕수 기사는 정부에서 은밀하게 하는 거대한 실험에 희생양이 된 것 같습니다.”
유수인이 주방 앞 식탁에 음료수를 따른 잔을 놓고 두 사람을 불렀다.
“여기서 음료수 한 잔씩 하면서 말씀 나누죠.”
강태신과 박도진은 주방으로 건너가서 식탁 의자에 앉았다. 유수연도 그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태신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독일 레이다에 잡히지 않기 위해 순간이동프로젝트라는 실험을 단행했었습니다. 그때 실패한 그 실험이 다시 재개 된 것 같아요.”
“미국 놈들은 미국에서 실험할 일을 왜 한국에서 실험했을까요?”
“만일 그 실험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그 순간이동 장비가 미군이 주둔한 각 국가마다 있을 것이고, 각 국가마다 실행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실험을 했을까요?” 수인이 물었다.
“그것까지는 저 역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때 박도진의 입에서 설명이 술술 흘러나왔다.
“세계단일정부 실행을 위한 엘리트들의 순간이동포트를 개설하고, 군사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미 미주둔군이 점령한 것 이상으로 UN군이 밀고 들어올 것입니다. 어차피 같은 뜻으로 움직이는 군사력이고 UN군은 미군보다 조금 더 인지도가 있으니 국민들이 속을 만도 할 테니 말입니다.”
유수인이 탁자 위에 두 팔꿈치를 대고 강태신 앞에 고개를 드밀며 심각하게 말했다.
“변종바이러스는 이제 시작에 불과해요. 전 세계적으로 그들은 그러한 실험을 단행하고 있어요. 한국만이 유일한 타겟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은밀하게 인구수를 줄이려는 음모를 단행하고 있어요.”
강태신은 두 사람이 음모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말을 백프로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까지 그가 겪은 일들은 그들의 괴변에 대한 충분한 설득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유수인이 박도진과 눈으로 무언가 신호를 보내는 행동을 취했다. 유수인은 도진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강태신에게 말했다.
“강태신 요원님. 제 말 잘 들으세요. 어차피 국가로부터 버림받으셨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냐는 생각이 드시겠죠. 하지만 지금 상황에 강태신 요원님과 저희의 구미가 당겨지는 곳이 같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거예요. 강태신 요원님을 노리는 자들은 박도진을 노리는 자들과 같아요. 그들을 응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복수나 누명을 벗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일이요?”
“네. 더 중요한 일이요.”
“그게 뭡니까?”
잠시 뜸들이던 유수인이 결심한 듯 이내 대답했다.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세 사람은 자정이 넘어서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이동하는 선선한 바람이 창문 너머에서 불어 들어왔다. 유수인과 박도진으로부터 새로운 진실을 접하게 되자 강태신의 두 눈에서 활기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