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기독교 신학에는 수많은 탐구 주제가 있지만, 이 모든 주제의 결정적 기초와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어떤 주제에 관한 신학적 성찰이 기독교적이라고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 성찰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그를 통한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기독론이 기독교 교리의 전부는 아니지만 기독론의 관점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들이 결정적으로 조명된다.
■ 기독론의 문제
전통 신학 기독론 ―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론 ―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전통 신학 구원론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론 ― 그는 우리를 어떻게 돕는가?
고전에 속하는 기독론적 신조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단순히 반복하지 말고 새롭게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식의 증가와, 역사비평 방법의 복음서 연구에 대한 적용 작업은 기독론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을 몰고 왔다. 복음서의 특성이 신앙과 선포를 위한 문서임을 고려할 때 예수에 대한 역사적 전기가 불가능하지만, 그의 메시지와 사역은 1세기의 유대교의 종교적·사회적·정치적 흐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약성경 안에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현저할 정도로 다양하다. 예수의 인격과 사역의 다양한 면들에 대해 열린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구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자신의 시대와 장소에 있어 그리스도가 내포하는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 우리의 자유와 책임을 더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상이한 그리스도가 너무도 많다. 기독론의 다양성은 어느 것이나 허용된다는 상대주의와는 철저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상대주의는 기독교적 정체성의 상실을,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신앙과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구별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종종 “특정성이라는 걸림돌”이라는 이름으로 거론되는 것. 사도 바울은 십자가, 일부 페미니즘신학자들은 예수의 남성성, 흑인 신학자들과 제3세계 신학자들은 제1세계 등을 걸림돌이라고 언급한다.
■ 기독론의 원리들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단순히 “학문적”인 지식도, 역사적인 지식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신앙의 지식이다. 기독론의 진정한 “핵심”은 역사적 호기심의 충족도 헛된 사변에 대한 탐닉도 아니며, 하나님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현존하시며 은혜 가운데 활동하고 계심을 확증하는 것이다. 단지 그에 대해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를 신뢰하는 것이며 길과 진리와 생명인 예수를 기꺼이 따르는 것이다.
2. 만약 예수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과 분리한 채 이해한다면, 또는 예수의 구원 사역의 범위를 창조세계 전체가 아니라 특정 개인이나 비밀 집단으로 제한한다면, 그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3.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교리와 사역에 대한 교리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4.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이해와 고백은 특정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론은 특정한 필요와 갈망들을 반영하며 그것들을 다룬다.
5.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신앙고백과 신조들보다 훨씬 더 큰 분이며, 그에 대한 모든 신학적 반성을 초월한다.
■ 교부 시대의 기독론
신약 시대 이후 수백 년 동안 교회는, 예수가 주님이고 구주라는 고백을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재진술하고, 심각한 오해에 맞서 그 진술을 옹호해야 했다. 이는 집중적인 신학 작업을 요구하는 상황이었고, 새로운 형태의 개념의 창출이 필요한 시기였다.
사도 시대 이후의 기독론 발전의 역사에서 첫 이정표는 기원후 325년에 니케아에서 개최된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이다.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주의가 기독교 신앙에 초래한 위협에 맞서기 위해 소집되었다.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신적인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아니라 탁월한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해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 개념을 표현한 이가 바로 4세기의 신학자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는 니케아 신학 안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 대해 또렷하게 진술한다. 니케아 신학에서 두드러지는 복음의 하나님의 신성의 특징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행동으로 정의된다. 기원후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해 재확증되고 확대된 니케아 신조는, 교회가 삼위일체 신앙을 신조로 표현한 최초의 공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표방한 결정적인 선언이다.
니케아 공의회가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를 해결하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확증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을 통일하는 작업에서는 새로운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을 중심으로 한두 개의 기독론 학파가 집중한 것은 주로 이 문제들에 대해서였다. 아타나시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가 이끌었던 알렉산드리아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의 위격 사이에 있는 통일성을 주로 강조했다. 안디옥학파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했다. 이 두 학파가 내세운 상이한 강조점을 염두에 둔다면,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와 그 직후의 공의회들에 이르기까지, 기독론 논쟁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역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복잡한 기독론적 논쟁은 마침내 기원후 451년에 칼케돈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칼케돈 공의회는 교회의 네 번째 에큐메니칼 공의회로, 고전적 기독론의 발전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이정표가 된다. 칼케돈 신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고,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이 있되 혼동이나 변화나 분리나 분할이 없다.” 대부분의 교리사가들은, 칼케돈의 입장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강조점과 안디옥 학파의 강조점 사이에서 신중한 균형을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기독론 논쟁은 칼케돈에서 끝나지 않는다. 제5차 에큐메니칼 공의회(553년, 콘스탄티노플)는 칼케돈 신조 내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적인 해석을 분명하게 강화시켰고,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681년, 콘스탄티노플)는 안디옥 학파의 관심을 더 선명하게 강조했다.
교부 시대의 기독론을 개괄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될 사항이 하나 있다. 즉 교부 시대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의 통일성을 확증하는 중요한 방식은 “속성의 교류”라는 교리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이 교리에 따르면, 신성과 인성은 성육신한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속성 사이에는 “교류” 또는 “교환”이 일어난다.
■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고전적 진술의 재고찰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주님과 구세주로 진술함에 있어서는 옛 신조를 단순 반복하는 것 이상이 요구된다. 재확증과 동의를 넘어 몇 가지 부족한 점들을 인정하고 보완하기 위한 탐색이 필요하다.
예수는 완전한 참 인간(fully human)이다.
• 예수의 지적·신체적 한계를 함축하고, 그가 환희와 분노와 비탄과 긍휼을 포함해 인간의 모든 차원의 감정을 경험했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 인간의 유한성과 비참함의 경험, 신으로부터 버려진 경험의 심층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예수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행했다 하더라도 그는 필명성과 비참과 유기의 경험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인간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
• 예수는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를 동요시키는 사람, 심지어 유일한 혁명적 인간이다. 예수를 참 인간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선언에는, 단순히 예수가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 새로운 인간성의 규범과 약속을 보여주는 존재라는 점이 함축되어 있다.
• 복음 이야기가 묘사하는 예수를 충실히 따른다면, 우리는 예수의 인성의 신학적 의미가 그의 남성성(혹은 가부장성)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이웃에 대한 놀라운 포용적 사랑에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에야, 예수의 삶과 죽음이 영원히 자기를 내어주고 타자를 긍정하며 공동체를 세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찬란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2. 예수는 참 인간일 뿐 아니라 완전한 참 하나님(fully divine)이기도 하다.
• 예수의 사역과 고난이 동시에 하나님의 사역과 고난이기도 하다.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화된다.
•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 행동하고 고통당하고 승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인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현존이 있다. 이 선언의 요점은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본질”이고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다”라는 선언이다.
• 이 예수라는 인간 속에서, 신성과 주권성이 놀라운 사랑의 관점으로 철저하게 재정의 된다. 예수의 사랑은 죄인을 맞아들이고 남을 위해 자신이 상처를 받는 사랑, 약한 자와 가난하고 버려진 자를 위해 놀라운 방식으로 관심을 갖는 충성스런 사랑이다.
3. 예수가 참 인간이고 참 하나님이라는 확증은 예수의 위격의 연합이라는 신비(mystery of the unite of his person)를 가리킨다.
• 이중 행위(double agency) 개념 : 어떤 이들은 신성과 인성, 즉 “본성들”의 연합이라는 표현을 포기하고 대신 신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분리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역사 속에 연합되어 있다고 표현할 것을 제안한다.
• 베일리의 논증 : 이중 행위 개념은 두 개의 분리된 주체가 단순히 외적이고 의지적인 연합을 이룬다는 오류, 마치 두 장의 판자가 인위적으로 접착된 듯한 오류를 다시 끌어들인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위격적 통일성은 우리가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는 “역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기독교적 경험에 근거한 유비를 통해 어느 정도는 위격적 통일성의 실재에 대해 알 수 있다. (도널드 베일리 『그리스도 안에 계셨던 하나님』)
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인성의 연합은 유일하고 독특한연합이다(성육신 사건). 그러나 우리 인간 경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실재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의 실재의 빛에 의해 우리의 실재가 확인되고 이해될 수 있다.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성의 연합은 비대칭적연합이다. 즉 하나님의 활동이 일차적이고 선행적이며, 인간의 반응은 이차적이며 후속적이다.
③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성의 연합은 역동적연합이다.
④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성의 연합은 성령에 의해 강화되고 지탱된다.
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성의 연합은 자신을 비우는 겸허한(kenotic union) 연합이다. 겸허(kenosis, 문자적으로는 “자기 비움”)는 강압에 의하지 않은, 자유로운 자기 제한과 자기 소모의 행동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상호적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다.
•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은 성령의 연합하는 사랑에 의해 강화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격적으로 연합한다. 여기서는 분리도 없고 구별의 상실도 없다.
■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고전적 해석의 재고찰
영향력 있는 속죄론 중 하나는 우주적 투쟁 이론 또는 승리자 그리스도(Christ the Victor) 이론이다.
• 전투 비유(예 골 2:15). 속죄 사역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악의 세력들과 벌이는 극적인 전투다.
• 한계 : 예수의 인성을 악의 세력을 속이기 위한 변장으로 축소해서 이해할 우려,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 간과. 그리스도인을 자신의 머리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주적 투쟁을 그저 바라보는 구경꾼으로 만들 것. 이 입장이 과도하게 승리주의적인 것은 아닌지, 그래서 역사와 우리의 삶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악과 죄의 실재와 힘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 우주적 전투 속죄 이론이 가진 두 가지 진리 : ①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자유와 화해를 성취함에 있어 강제력이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를 사용하셨다는 점 ② 악의 세력들은 파괴적일 뿐만 아니라 자기 파괴적이기도 하다는 점.
안셀무스의 만족설(satisfaction theory)
• 우리가 법을 위반하는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께 갚아야 하는 만족은 무한히 크다. 인간은 마땅히 이런 만족을 제공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무능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다.
• 한계 : 만족설이 하나님을 그분 자신과 대립시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 용서의 행위 즉 은혜를 조건적인 행동으로 만들어버린 점, 화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점, 대체자와 대표자를 적절하게 구별하지 못했다는 점.
• 칼뱅은 속죄의 동기가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만족시키기 위한 필요성인지, 아니면 세상을 위해 하나님이 자유롭게 내주시는 순수한 사랑인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칼 바르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 의해서만 시작된다고 일관성 있게 해석했다.
도덕적 감화설(moral influence theory)
• 도덕적 감화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주적 전투나 법적인 집행을 통해 인간과 화해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화해의 혜택을 받는 자들의 편에서 보면 그들의 어떤 참여가 없이도 완전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실 때, 우리로 하여금 경이와 감사 속에서 응답할 수밖에 없도록 하신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우리의 적극적 신앙의 행동을 통해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변혁시킬 때에야 완전해진다.
• 비판 : “진노가 없으신 하나님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죄가 없는 사람들을 심판이 없는 나라로 인도하셨다.”리처드 니버
위에서 언급한 속죄의 세 이론과 각각의 이론이 근거하고 있는 신약의 비유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 폭력과 십자가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비폭력적인 자기 선물을 우리의 폭력 세계와 관련해서 세 가지 측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죄와 폭력으로부터 치명적인 속박의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세계의 현실을 폭로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2. 그리스도는 사랑과 용서라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드러내고 전달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3. 그리스도는 폭력적인 세상 한가운데,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창조를 위한 화해와 평화의 미래를 열기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 그리스도의 부활의 여러 차원
“십자가의 신학이 슬픈 결말, 즉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바닥이 없을 정도로 끝없는 고통의 신비주의로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신학은 부활로부터 분리될 수도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미카엘 벨커(Michael Welker)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의 시체가 소생되었다는 주장처럼 완전히 역사적인 관점에서나, 부활은 예수의 제자들의 내면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주장처럼 완전히 사적이고 내면적인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부활”의 성경적 의미는 후기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묵시적 소망과 관련되어 있다. “부활”은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사건을 가리킨다.
첫째, 부활에는 중대한 신적(theological) 차원이 있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 곧 신실하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행위이다.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던 것처럼, 또한 그는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다. 성자를 향한 성부의 한없는 사랑을 확증하는 동시에, 성자가 죽음조차 달게 받으며 구원하고자 했던 세상을 향한 성부의 사랑 역시 확증한다.
둘째, 부활에는 기독록적(Christological) 차원이 있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체를 입었고 겸허한 종으로서 우리 가운데 살았으며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했던 바로 그분이었다.(빌 2:5~11) 예수의 자기 비움(kenosis)의 겸허한 삶의 끝은 구원할 수 없는 비극이 아니라 충만(pleresis)이고, 영웅적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충만이다. 이 부활은 인간의 필연성의 개념을 전복하고, 가능한 것에 대한 우리의 세계관을 뒤엎으며 우리를 맹목적으로 몰아가는 “폭력의 매혹”을 분쇄시킨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하게 변화된 인간성을 볼 수 있다.
셋째, 부활에는 성령론적(pneumatological) 차원이 있다.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령을 통해 인간의 마음과 정신에까지 미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5) 살아 계신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사명을 주신다.
넷째, 부활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에는 교회적(ecclesal) 차원이 있다.
부활한 자의 광채와 권능은 개개인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의 증언과 삶과 실천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그리스도의 진리가 선포되는 것이다. 신앙 공동체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자주 마주치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순종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 자체가 부활한 주님의 궁극적인 원천이나 능력인 것은 아니다. 교회는 결코 예수를 자신과 동일시할 만큼 자신 안으로 그분을 흡수할 수 없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정치적(political) 차원이 있다.
부활한 예수가 주님이라는 선언처럼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선포는 세상의 정사와 권세들의 정당성을 의문시한다. 만약 그리스도가 세상을 다스리는 부활한 주님이라면, 카이사르는 주님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투쟁과 갈등을 초래한다. 모든 불의와 폭력에 영구적으로 저항하라는 부름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불가분리적이다. 십자가는 더 이상 무력한 사랑의 표출이 아니며, 부활은 사랑 없는 힘의 표출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우주적(cosmic) 차원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도래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의 표지이고 약속이며 시작이다. 그러나 부활 메시지가 인간적 차원을 포함함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기대하고 시작하는 새로운 세계는 우리 인간의 운명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개별적 인간과 공동체를 위한 소망뿐만 아니라, 구속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며 신음하는 온 우주 전체를 위한 소망을 의미한다(롬 8:18~25).
이와 같은 종합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선포는 “복음”이며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