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세 번째 묵상>
제목: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준 선물
일자: 2023년 3월 19일 주일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은 하나님이 그 백성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의 모든 병을 고치시며 그들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원하시며 그들의 인생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치료하셨습니다. 그것은 기존에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새로운 세상이며 새로운 질서였으며, 새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파격이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으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시며 나를 직접 돌보시는 것을 체험하는 신세계였습니다. 전에 꿈꾸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전에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병환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사회적 은둔자가 이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안식일에마저 회당에 나갈 수 없던 직업과 환경에 있던 사람들도 이제는 하나님의 품과 같은 분위기 가운데서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는 한편으로는 너무 기쁜 세상이며 동시에 너무 낯선 세상이었습니다. 기존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 낯선 세상이었습니다. 하기야 기존에 익숙한 생활방식과 유사한 세상이라면 그것을 어찌 하나님 나라라고 하겠습니까?
기존 사회에서는 세리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매국노니 수전노니 하면서 차별을 받았습니다. 기존 사회에서는 몸 파는 직업에 종사하는 여인들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밤에만 은밀한 가운데 존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공적인 자리에 올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되 어떤 사람들은 이등인간 또는 삼류인생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이런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라면 낮고 천한 동네에서 살던 사람들도 기를 펴고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좌절하고 살아가던 사람들도 새로운 희망과 웃음을 찾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도 할 일이 있으며 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첫마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네 죄가 용서되었느니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도 그렇게 선언하셨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드리던 여인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죄는 용서되었다! 너는 이제 깨끗하다! 하나님이 너를 의롭다고 여기신다!’ 그런 말을 들은 여인은 그 동네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여인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습니다.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수근거림을 받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첫 마디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였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죄 사함의 세상입니다. 죄 사함의 세상이란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인생이란 없다는 선언이 가장 크게 들리는 세상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차별되어서는 안 되며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은총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생각이 공유되고 실천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에서 사람은 돈이 많고 적으냐에 따라서 그 인생의 가치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물론 지식이 많고 적은 것도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학벌이나 가문이나 외모나 직업이나 성별이나 출신 지역이나 혈통이나 피부색깔이나 그 무엇으로도 사람을 차별하여 등급이 낮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나라는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사람에게 주어지는 카드의 색깔이 달라집니다. 학벌이나 직업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성별이나 출신지역이나 피부색깔이나 국적이 어디냐에 따라 이등국민이냐 삼등국민이냐가 결정됩니다. 인도에 카스트제도라는 신분제도가 있다고 하지만 세상 모든 나라에는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는 보이지 않는 기준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세상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의 나라에 가까이 왔을 때 이 세상 나라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자비와 정의와 진실이 실현되는 세상이라면, 이 세상 나라는 냉정과 불법과 사기를 행하는 사람들을 수완이 좋다고 평가하는 세상입니다. 그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따뜻한 마음과 진실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환영의 대상이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완고한 생각과 자기 중심적인 마음으로 냉랭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거슬리고 불편한 세력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이 기존 질서를 위협하고 자신의 지위를 흔들 수도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임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더 이상 전파되지 못하게 하고 기존의 질서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성 밖에 골고다에는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더 이상 세상에 전파되지 않으며 세상을 소란하게 하던 사람들도 더 이상 설치지 못할 것이라고 살해공모자들은 확신했습니다. 이제 다시 기존의 질서로 돌아가고 자신들의 세상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잠깐 동안의 파티는 끝났으니 이제 과거에 하던 생활로 돌아가자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좋았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쉬워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 앞에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권세가 어찌하지 못하며 죽음까지도 하나님 나라를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을 제자들은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 나라가 죄인으로 유죄 판결을 낸 것을 하나님이 뒤집으신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자기 아들이라고 인정하신 선언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다시 모여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 이후 10일만에 그들이 모인 곳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 모인 곳이 진동하고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며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날에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서 제자들은 큰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통치를 시작하셨음을 제자들은 확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전에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행하시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다시 가르치고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자리에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배우고 떡을 떼며 서로를 격려하며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랬더니 마치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 것처럼 동일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병자는 고침을 받으며 죄인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제자들이 모인 곳에 들어와 환영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용서하시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신 것처럼 똑같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까이서 듣고 배운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시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서로 격려했습니다.
그럴수록 교회는 점점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사람이 많고 적은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돈이 많고 적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며 우리가 지금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미래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세상일 것이라는 확신만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해졌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나라에서 배운 낡은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때로는 다투기도 했으며 서로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이처럼 불완전하지만 자신들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으며 그 나라의 정신을 배우고 성장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기를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골 1:13)라고 썼습니다. 교회는 지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편지로 일깨워준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배우고 따르고 있음을 늘 기억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교회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환영하고 즐겨 순종할 때마다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새롭게 된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셔서 이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므로 이제 온 세상의 참된 주인이시며 왕이심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의지할수록 이 세상이 주는 고민과 염려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마음 졸이며 갈망하던 일들도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새로운 일이 눈에 들어옵니다. 더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인생을 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정부도 없고 통치자도 없지만 보이지 않는 누룩처럼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삶을 배우고 새로운 공동체가 일어서고 기쁨이 충만한 생활이 시작될 때 교회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시다가 죽으셨지만 그 죽음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화목제물과 같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새로운 언약백성이 되기 위해서 피의 언약이 필요했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을 새 언약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님의 가없는 사랑임을 교회는 다시 깨달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1:7
이 말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들어왔으며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세상이라는 기업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며 우리 교회가 지금 배우고 누리고 전하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준 선물은 죄 용서입니다. 그리고 그 죄 용서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합니다. 그런 삶과 세상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마음에 당당하고 떳떳하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사라지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흑암의 권세 아래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던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던 일을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2012년이 시작될 때 저는 서초구 우면동에서 가족과 함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아직 교회 이름도 없습니다. 건물도 없습니다. 그저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는 마음만으로 부교역자의 자리를 내려놓고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우리 가정에 오기로 한 성도가 있습니다. 그의 아들을 가르치면서 전도한 성도입니다. 주일 아침 오전 10시, 임대아파트의 안방을 정리하고 주일예배를 준비합니다. 자리에 앉아 찬송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저의 눈은 문을 향합니다. 언제나 저 문이 열리고 첫 성도가 들어오나 하면서 찬송을 합니다.
바로 그때 제 마음을 울리는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너는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있느냐?’ 너는 사람을 기다리느냐, 아니면 주님을 기다리느냐? 내가 너와 함께라면 족하지 않느냐? 네가 누구를 기다려야 하느냐? 그 울림에 저는 속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모시고 오늘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주님, 어서 오십시요!’ 그렇게 다시 뜨거워진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그 날 그 성도가 아들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도 가끔 주일이면 강단에서 예배를 드릴 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모시고 예배하겠습니다! 천국이 어디입니까? 지금 여기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그곳이 천국이 아닙니까? 만약에 지금 우리가 천국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언제 천국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우리는 천국을 빼앗기겠습니까?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말씀과 약속을 굳게 붙드십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시려고 그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