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1일 하늘언어교회강론
본문: 사도행전 9장 1절-2절
1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절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제목: 기독교와 기독도
복음에는 종교차원의 복음과 진리차원의 복음이 있습니다. 전자를 복음의 종교화라 한다면 후자를 복음의 진리화, 보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바로 종교화된 복음입니다. 진리화와 보편화된 복음에 대한 명칭은 마땅히 접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진리차원의 복음을 기독도(基督途)라고 명명해보았습니다.
기독도라는 명칭은 생소한 것 같고 제가 조잡하게 조어한 것 같이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성경에 나오는 개념입니다. 본문을 보면 초대교회 시절에는 기독교인들을 “그 도를 따르는 무리”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경에는 기독교라는 말이 없고 그 도 즉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이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길게 늘어진 어구를 한자로 간략히 표기하면 그리스도를 기독으로 음역한 다음 길 도를 붙이면 바로 기독도가 됩니다.
성경을 보면 처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하고자 했던 것은 기독교가 아닌 기독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율법종교인 유대교의 문제가 율법의 진리측면인 살리는 정신을 망각하고 율법의 종교 측면인 세목들을 만들어 사람을 억압하고 옥죄고 정죄하고 죽이는 도구로 전락한 상태에서 다시금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도를 회복하고 율법보다 완전한 하늘나라복음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헌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와 도의 차이가 어떤 것일까요? 교에는 하느님이 아닌 율법이나 규칙이나 조직이나 시스템이나 교리 등을 절대시해서 사람을 그것에 복속시키는 속성이 있습니다. 반면에 도는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오직 완전하신 참 하느님만을 중심으로 삼고 그 아래에 사람이 있고 사람 아래에 종교와 율법과 조직 등 모든 것을 두는 구조를 말합니다. 따라서 진리성이 결여되고 오직 종교성만 남은 집단은 필연적으로 우상의 수렁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장이라도 하느님나라의 진리를 세상에 정착시켜서 겨자씨와 밀알이 무성한 나무로 자라듯이 온 세상에 퍼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완악함과 왜곡된 속성 때문에 하느님이 진리를 주시면 인간은 반드시 그것을 종교로 바꿔서 세상에 퍼뜨려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퍼진 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는 종교가 퍼지기는 아주 쉽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종교에 소속되고자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온 유럽에 퍼지게 된 것은 수백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종교가 아닌 진리차원의 복음은 수천년이 지나도 아직까지 충분히 퍼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기독도의 차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부하고자 한다면 그 내용이 엄청나게 방대할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언어의 문제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기독교와 기독도의 차이를 이해해보려고 합니다.
현대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교회 용어들이 한국의 정서에 맞게 정착된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주님’이라는 말은 기독교 외에서는 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왕을 폐하라고 부르고 상놈이 양반을 부를 때에는 나리 등으로 불렀습니다. 주님이라고는 결코 부른 적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시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주님이나 그리스도라는 말이 일반명사로 쓰였습니다. 왕도 그리스도이자 주님이었고 제사장, 선지자들도 그리스도이자 주님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특히 당시 로마 황제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군주로서 신의 아들이자 주님으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그들의 문화권에서는 주님이라는 말이 굉장히 자주 다양한 대상에게 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고 사랑과 말씀으로 양육받은 이들이 주님이라는 말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강력한 왕권과 힘을 가진 황제나 종을 소유한 이들을 주님으로 부르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그러한 폭력과 세상적인 권력을 가진 이들은 진정한 주님이 될 수 없고 예수님처럼 참된 사랑과 복음을 가르쳐주신 분이야말로 진정한 주님이다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도를 따르는 이들은 세상의 군주를 그리스도나 주님으로 부르기를 거부하고 예수님만을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부르게 된 것이고 이러한 태도를 반사회적, 반신앙적인 태도로 규정하여 기독인들을 무신론자라고 매도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당시의 그 문화권에서는 주님이라는 말이 하나도 낯설거나 이상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적용할 대상을 당시의 사람들과는 달리 황제나 권력자가 아닌 예수라는 목수였다는 사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주님이라는 말이 한번도 임금이나 권력자 등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 적이 없는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혹시 고대 문헌을 조사하다보면 그런 사례가 발견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사극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임금을 지칭할 때 주님이라고 한 적은 한번도 볼 수가 없습니다. 대신 한국에서 주인 주를 사용하는 경우는 굉장히 세속적이고 소유적인 경우를 주로 가리킵니다. 건물주, 지주, 물주, 점주, 주주 등 단순히 무엇을 가진 주인이라는 의미로만 이 한자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주인 주를 사용해서 예수님을 지칭하게 되면 초대교회 때처럼 신성하거나 위대하신 분이라는 뉘앙스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예 제도가 폐지된 현대에는 주님이라는 말을 쓰면 시대착오적인 느낌마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노예를 부리던 주인들은 아주 혹독하고 잔인하게 그들을 착취하고 학대를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말에는 그러한 착취자들의 이미지가 씌워져 있어서 자못 거부감을 일으킬 우려조차 없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라는 말 대신 한국의 정서에 부합하는 다른 용어를 찾을 수 있을까요? 예수 폐하, 예수 나리, 예수 영감님 등 어떤 호칭도 사실 어색합니다. 그나마 제가 보기에 가장 좋은 대체어는 ‘임, 님’이라는 용어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정몽주의 단심가에서 임금에 대한 지극한 충성을 나타낼 때 ‘임 향한 일편단심’이라는 표현을 썼고 한용운의 시 중에서 ‘님의 침묵’이라는 시에 나타난 님이 바로 초월자를 지칭하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식석상이 아닌 혼자서 기도하거나 묵상할 때는 주님 대신 임, 님 등으로 불러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주님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던 어색한 말을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기존에 존재하던 주님이라는 말을 가져다가 예수님에게 붙이기만 하면 바로 설득과 합리화가 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한국상황은 그와 전혀 다릅니다. 한국인들은 태어나서 한번도 누구에게 주님이라는 말을 사용해볼 기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은 옛날 노예 제도가 있던 미국에서나 있을 법한 말이라고 생각해서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한국인들에게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뜬금없고 어색한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란 말은 오직 기독교 안에서만 사용하는 폐쇄적 용어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이라는 명칭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은 하느님인데 이것을 버리고 교회안에서만 사용되는 하나님을 고집하는 것도 교회가 보편성을 잃고 게토화, 폐쇄화 되어가는 한 요인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전파하시기를 원하셨지 특정 종교 집단 안에 갇히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은 기독도이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없이 기독도를 전하기에는 사람의 그릇이 너무나 작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그릇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그릇은 온전한 그릇이 아니라 여러 조각으로 분리된 깨진 그릇입니다. 깨진 그릇에는 음식을 제대로 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교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도에는 한계가 없고 깨짐도 없습니다. 그래서 도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온전해지고 건강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도가 없는 교에만 집착하게 되면 인간성도 깨지고 옹졸해지고 극단화되어갈 수 있습니다.
종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길을 제시해줍니다. 종교는 사람을 많이 모으는 데만 힘을 쓰지만 도는 한 사람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모으고 도는 모인 이들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람을 교회에 모으는 역할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기독도로서 사람을 하늘나라 시민으로 성장시켜가야 옳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모으기만 하는 종교적인 행사에만 치중하고 하늘나라 사람으로 키워가는 도의 경지로 끌어올리는데 관심이 없다면 이는 예수님의 의도를 완전히 저버리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종교의 수준에 있는 기독교인은 교회 출석을 잘하고 헌금과 십일조를 잘하는 습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모든 종교인들이 다 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런 것에 대해 달리 강조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일조는 율법시대가 막을 내림과 함께 의무가 아닌 선택 사항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힘써 가르치신 것은 이웃 사랑과 용서와 화평과 온유 등 세상을 화목하고 따뜻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실천적 덕목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된 다음에는 반드시 기독도인으로 성장을 해가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교회들은 사람을 기독교인으로 교회에 모으는 것까지만 열정적으로 하고 기독도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에는 극히 무기력합니다. 왜냐하면 종교화는 대단히 쉬운데 반해 진리화는 고도로 어렵고 협착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리화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구원의 지향점이 바로 진리화이기 때문입니다. 즉 종교화로는 결코 구원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단지 구원에 대한 용어와 의식들에 익숙해지기 시작할 뿐입니다. 그 시작은 씨를 뿌린 상태와 같아서 그대로 방치된 채 자라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씨앗이 성장하고 자라서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이 바로 진리화의 과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도의 단계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을 기독교인으로 만든 다음 반드시 기독도인으로 양육시켜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기독교라는 말이 없다고 말씀드렸죠? 그럼 그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뭐라고 했다고요? 네 바로 “그 도를 따르는 무리”라고 했습니다. 이를 한자로 간략히 표기해보면 기독도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종교차원의 복음이고 기독도는 진리차원의 복음이라고 말씀드렸죠? 현대 한국교회의 문제는 기독교는 만연하지만 기독도의 단계가 극히 미약한 데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헌신적으로 도의 단계에서 사는 분들이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대다수가 교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교의 단계에만 머물러서는 구원이 자라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사람을 인도해서 기독교인으로 만든 다음 반드시 기독도인으로 양육해가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기는 쉽지만 기독도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진리화의 길이 그만큼 어렵고 힘들고 의지대로 되지 않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기독교인이 된지는 수십년이지만 기독도인이 되는 길은 아직도 요원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주제로 말씀을 전하는 경우가 굉장히 드문 것 같습니다. 더러 미흡한 신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제자의 삶을 촉구하는 책들은 많은데 자세히 보면 대체로 더 열성적인 종교인이 될 것을 추구하는 내용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와 구별해서 기독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어린이 천로역정에서 주인공을 기독도라고 지칭한 경우는 봤지만 종교화가 아닌 진리차원의 복음을 지칭하는 용어로 기독도라는 말을 사용한 경우를 본적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그런 경우를 발견하시면 꼭 저에게 기별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이 되기는 쉽고 기독도인이 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그 길이 너무나 어려워서 자력으로는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하늘나라의 도이기에 우리는 제대로 실천은 못하더라도 삶의 방향으로서 반드시 지향해야 하는 세계입니다. 실천은 못하더라도 이러한 두 차원 즉 종교적 복음과 진리적 복음이 있다는 것, 기독교와 기독도가 있다는 것은 꼭 기억해주시고 어떻게 하면 기독도를 지향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를 늘 기도하며 추구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금주의 메시지
1. 하늘언어교회는 기존교회와 차별화를 시도하는 대안교회, 맞춤교회를 지향합니다. 차별화하되 성서에 가깝게 다가가려는 것이 우리교회의 목표입니다. 따라서 강론을 읽으시면서 기존교회와 무엇이 다른지를 눈여겨 보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혹시라도 저와 비슷한 해석이나 견해를 나타내는 책이나 자료를 발견하시면 꼭 알려주시기바랍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동안 대안교회의 필요성이 절실해서 자료를 찾다가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이러한 분야에 대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제가 외로이 시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만약 저와 비슷한 생각이나 시도를 하는 분들이 계시고 관련된 자료나 책들이 있다면 저희 교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상영회 소식
지난 26일(화)에 나사렛 대학교 외국인학생 담당부서로부터 초청을 받고 상영회에 참석했습니다. 외국인학생 70여명이 한국어를 배우고 수료하는 날 저희 부부를 찍은 ‘달팽이의 별’ 다큐를 상영한 후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상영회에 초대받으니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학생들은 어떤 점이 가장 힘든지,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은 역량을 가졌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강점을 끌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질문했습니다. 우선 제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면 아내가 좀 더 자세하게 부연 설명을 했고 최종적으로 저희를 초대해주신 담당선생님께서 한국어와 영어로 설명을 해주셔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무난히 의사가 전달된 것 같았습니다.
제가 어려운 점으로 꼽은 것은 공부를 박사과정까지 마쳤는데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애인의 역량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장애인에게 모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소통의 기회, 공부할 기회, 취업의 기회 등 충분한 기회들을 열어주면 비장애인 이상의 탁월성을 나타낼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늘 소통의 어려움 속에서 책만 읽다시피하다가 모처럼의 상영회를 통해 제 어눌한 말을 외국인에게 전하기 위해 아내와 선생님이 차례로 전달해주고 학생들이 경청해주는 모습이 참으로 훈훈한 풍경으로 가슴에 여운을 남겼습니다.
3. 이번주는 소위 제가 이름붙인 “선한 사마리아주일”입니다.
선한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친절하게 보살핀 사마리아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응당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야 할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지나쳐 갔습니다.
이때 강도를 돌본 사마리아인을 기독도인으로 보고 지나쳐간 이들을 기독교인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주일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됩니다. 교회 갈 시간이 되면 주변에 아무리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은 이들이 있어도 외면하고 교회부터 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주 이상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교회 가기에 급급하기보다는 강도 만난 이를 돌아볼 줄 아는 시간을 갖자는 의미에서 이런 주일을 설정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교회에 나가는 대신 다른 사람을 돌보라는 의미로만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도만난 사람은 타인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의 멘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평신도가 되돌아보아야 할 수도 있고 목사가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습관적인 종교의식을 잠시 멈추고 성서적으로 자기의 삶을 관조하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 주일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주일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정답이 없습니다. 교회를 너무 형식적으로 다녔다는 반성이 든다면 그날은 교회를 쉬고 깊이 성경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는 등 다양하게 성찰의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4. 표준새번역과 바클레이주석 자료 읽기를 권합니다.
성경은 지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우리와는 굉장히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종교상황화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성경만을 읽어서는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극히 어렵습니다.
따라서 최소한 주석을 한권 이상을 성경과 함께 읽어야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표준새번역성경과 바클레이주석을 대목별로 자료화한 것이 있습니다. 바클레이주석은 마태복음에서 계시록까지 신약성서만 주석한 것인데 분량이 방대해서 여러분께는 복음서만이라도 일독하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현재 요한복음과 주석을 교정한 파일이 있는데 원하시는 분들은 카톡을 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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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설리반의 손 헬렌켈러의 꿈 원문보기 글쓴이: 우주인(조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