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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이 좋으면 결혼과 이혼은 자유>의 줄거리: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관한 당신의 생각을 주님의 명령을 토대로 밝히시는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전혀 결혼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문제를 소재로 삼아서 하나님 사랑을 피력하고 계십니다. 핵심은 하나님을 좋아하는 마음이 유지되는 가운데 네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으면 결혼과 이혼은 자유
(고린도전서 7:1~16)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이 좋으면 결혼과 이혼은 자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이 좋으면 결혼과 이혼은 자유”
마음에서 하나님이 진짜로 좋으면 결혼도 이혼도 자유입니다. 우리는 결혼과 이혼의 문제를 끊임없이 율법적으로 접근합니다. 결혼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이혼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이혼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타당한지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도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혼이라는 문제를 소재로 하나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남자가 여자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을 하는 고린도 교인들 앞에서 사도 바울은 한순간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주제를 놓친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우선적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사랑이었습니다. 이 관심사 아래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제기한 결혼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우선적 관심사인 사람에게 결혼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에 부자와 결혼을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선적 관심사인 사람은 어떨까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을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짊어지고 다닌다고까지 말했던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하나님 이외의 이 세상 어떤 피조물에 대해서도 있다고 느끼고 좋다고 욕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관심과 하나님 사랑의 유일한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관심사를 떠나 본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오직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만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도 바울에게 결혼에 대한 질문을 해도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돈만 아는 사람에게 결혼은 돈 버는 방법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출세를 바라는 사람에게 결혼은 출세하는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사랑만 아는 사람에게 결혼을 물어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에서 결혼이라는 문제가 차지하는 자리를 자리매김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사도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결혼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뭘 안다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만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령님께서는 하나님 사랑밖에는 몰라서 결혼도 하지 않았고 결혼에 대해서 무지할 수밖에 없는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서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하십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전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도 바울에게 결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절을 보면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하였습니다. 안 하는 것이 좋지만 불타는 정욕 때문에 음행의 유혹을 받으며 견딜 바에는 차라리 결혼하라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 덧붙이는 말이 6절에 이어집니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7절을 보면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결혼을 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사하시는 은사 곧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은 자기의 상태 또한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로 여겼습니다.
여기서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는 말과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는 부분은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다양하게 주시는 선물 앞에서 내가 받은 선물이 최고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자신과 같기를 원한다고 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선물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결혼을 안 했지만 하나님을 가졌기에 더는 바랄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결혼을 한 사람도 똑같은 고백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안 해도 너무나 좋고 결혼을 해도 너무나 좋을 수 있다면 그 이유는 결혼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하나님 사랑에서 찾고자 합니다.
우리는 본문의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하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남녀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 2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결혼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결혼에 대한 말씀은 창세기 1장 28절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과 연관되어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예로 들며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는 결혼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불타는 정욕으로 인한 음행의 유혹과 사탄의 시험을 피하기 위하여 동원해야 하는 차선책으로 결혼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흡연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정욕을 억제하지 못할 바에야 흡연실에 들어가듯이 결혼을 하라는 식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야 부끄러워서 결혼을 할 수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불타는 정욕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본문 7장의 말씀을 풀어보면 “결혼은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불타는 정욕을 이기지 못할 바에야 음행의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결혼하라”는 내용이 됩니다. 이것은 7장 전체를 통해 이어지는 결혼에 대한 이야기의 중심 내용이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도 바울을 통해서 결혼에 대해 배울만한 대단한 행동원칙이 있다고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 사랑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결혼을 해본 적도 없었기에 결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결혼에 대해서 공부한 적도 없을 것이고 책을 읽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서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이러한 기조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8~9절을 보면 과부들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이미 결혼한 자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서도 10~11절을 보면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결혼이라는 상황을 주체적이고 의도적으로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단순히 이혼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않은 대로 하나님 사랑에 몰두하고, 결혼을 했으면 한 대로 하나님 사랑에 몰두하라는 내용입니다. 결혼이나 이혼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아닌 배우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12절 이하를 보면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여기서 나머지 사람이란 불신자와 결혼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아내와 남편을 버리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15절을 보면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불신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지 않는다면 그냥 살되 헤어지자고 하면 구애되지 말고 헤어지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좀 더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결혼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결혼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7장에서처럼 몇 마디 말로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수십억의 부부는 각기 다른 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에 임하는 각자의 생각과 태도가 다릅니다. 결혼의 의미가 주는 비중도 다릅니다. 결혼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결혼을 했는데 이혼을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성도간의 결혼과 이혼, 불신자와의 결혼과 이혼, 배우자의 폭력과 도박 중독 등의 문제, 배우자의 습관이나 생각이나 인격적 기질, 상상도 할 수 없는 부부만의 변수와 복잡한 관계까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결혼이나 이혼의 문제는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남의 결혼문제에 대해 단답형으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박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결혼관에 집중하기보다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결혼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원칙을 가르쳐 주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결혼이라는 문제를 대하는 사도 바울의 태도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는 앞서 살펴본 고린도전서 6장 12절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태도를 7장에서의 결혼문제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유익이란 몸으로 하는 행위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은 오감을 가지고 있는 육체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이 합쳐진 몸으로 행위를 합니다. 이 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란 한 가지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땅에서 이루고 싶어 하시는 뜻을 몸으로 이루어드리는 것만이 유일한 이익입니다. 이러한 유익을 얻으려면 반드시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며 바라는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고 천국이 현실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부부생활이란 마치 연극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독으로서 남편이나 아내라는 배역을 하게 하실 뿐입니다. 다만 여기에 죄의 체질이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 체질 때문에 정욕이 불타는 경우를 염두에 두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결혼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았습니다. 이제 그것을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고 하였습니다. 가능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얽매임을 염두에 두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혼이라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려는 사도 바울의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가야 되는 마음이 얽매인 것을 결혼이라는 문제와 연관시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배우자에게 얽매이기 쉽습니다. 부부는 인간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눈앞에 보이고 같이 자고 같이 밥을 먹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마음은 배우자에게 얽매이기 쉽고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는 일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이라는 문제를 대표로 삼아 얽매임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얽매임이 없어야 이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유익을 추구하는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얽매일 바에야 결혼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2장 24절에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 땅에서 결혼의 문제를 생각하기에는 죄의 체질이 문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강박적이기까지 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얽매이면 안 되기에 결혼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한 사도 바울은 또 2절에서는 결혼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 또한 얽매임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정욕에 얽매이면 예수님을 따라 하늘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결혼을 해도 마음의 얽매임이 문제이고 결혼을 안 해도 마음의 얽매임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정리해보자면 사도 바울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나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방법은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는 것뿐입니다. 이 일에 배우자가 방해가 된다면 결혼을 안 하는 편이 낫고, 반대로 배우자가 없어서 정욕으로 인해 방해를 받는다면 결혼을 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2절 이하의 말씀에서 이 두 가지 경우의 얽매임의 강약을 비교합니다. 결혼을 안 해서 불타는 정욕에 얽매이는 것과 결혼해서 배우자에게 얽매이는 것을 비교해보면 얽매임의 정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로 가는 일을 위해서 마음이 얽매여서는 안 되지만 그나마 배우자에게 얽매이는 것이 정욕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불타는 정욕에 얽매이면 마음이 땅에 묶인 채로 전전긍긍하다가 음행으로 빠지느니 차라리 결혼을 해서 정욕을 해소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기를 도모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결혼은 부끄러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결혼의 신성함이나 축복 됨의 언급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는 일에 있어서 정욕이 큰 얽매임이라면 결혼은 작은 얽매임 정도로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결혼해서 정욕을 해소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 가기를 도모하라는 것입니다. 저도 결혼한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사도 바울은 결혼에 관한 지침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과 연관된 삶에서 하나님 사랑에 관한 지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 배워야 할 것은 결혼으로 대표되는 얽매임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4~38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해서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지 못한다면 얽매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아들이나 딸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지 못한다면 얽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 끊어야 할 얽매임으로써 가장 먼저 가족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관점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은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가족관계는 결국 결혼으로 인해서 생기는 관계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주님을 믿고 따르려면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끊어내야 될 얽매임이 바로 가족관계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결혼으로부터 생겨난 가정이란 얽매임의 옹달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이나 가정이 기피되어야 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미 결혼을 하였다면 그 상태에서 하나님께 관심을 두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혼을 생각하지 말고, 배우자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기 위해서 십자가를 붙잡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결혼을 했지만 그 상태를 또 바꾸려고 한다면 그 순간이라도 마음이 이 세상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결혼하게 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 결혼하지 않게 하셨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만 이 선물이 마음을 세상에 얽매이게 하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했음을 자랑할 수도 없고 결혼하지 않았음을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준에서 보자면 결혼함의 장점은 얽매임이 덜해서 아버지께 가기 쉽다는 것이기에 자랑하려면 아버지를 자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아버지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상태이기에 아버지를 자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결혼하게 하신 이유는 결혼을 통해서 갖게 된 가족관계에서 원하시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결혼하지 않게 하신 이유는 사도 바울이 7절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고 말한 것처럼 결혼에 대해 얽매이지 않으므로 원하시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이 있으심을 알고 유익을 챙길 수 있어야 합니다. 유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배우자에 대한 불만으로 이혼을 하느냐 마느냐를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당장 마음은 배우자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이것은 불신자를 배우자로 둔 경우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12~13절에서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불신자인 배우자에 대한 얽매임이 사라질 때 비로소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지는 유익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인 배우자가 이혼을 원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15절을 보면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혼에 대해 구애되지 말라는 말씀은 얽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외로움 때문에 결혼을 한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없기 때문에 느끼는 외로움은 죄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가지는 기쁨을 허락합니다. 그러면 몸은 성령님이 오셔서 주관해가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에게 외로움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고독함을 느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 틈에서 홀로 하나님께 마음을 보내는 외톨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고독함은 행복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32절에서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세상에서 고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으셨습니다.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사람의 존재감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존재감을 버린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망각한 사람은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결혼생활에서 유익을 추구하기 힘든 이유는 배우자가 살아있는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는 부부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의 뜻을 요구해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이유에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철저하게 유익만을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익이 없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이익쟁이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유익입니다. 이 유익만을 생각하는 입장에서 결혼이라는 문제에 대한 입장도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뜻을 이루는 데 배우자가 방해가 될 것 같다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 배워야 할 것은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이혼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세상의 얽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혼을 생각하고 문제시한다면 배우자에게 얽매이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던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유익을 챙길 수 있을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마음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를 붙잡는 사람, 이 세상에서는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이루려는 사람이라면 결혼을 해도 하나님 뜻이고 이혼을 해도 하나님 뜻입니다. 배우자가 어떻든 상관없이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 때문에 기쁨이 유지되는 사람에게는 결혼도 은사이고 결혼하지 않는 것도 은사이고 이혼도 은사입니다.
결혼과 이혼의 문제는 행동규칙이라는 율법적 접근으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적 접근을 하는 동안에는 반드시 결혼이 우선적 관심사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 사랑은 두 번째 세 번째 관심사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나 이혼은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를 두고 율법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닙니다. 우선 그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볼 일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결혼에 관한 말씀의 핵심 취지입니다. 결혼이라는 문제를 앞에 두고 고민하지 말고, 결혼했다면 이혼에 대해 고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마음에 들든지 들지 않든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마음은 하늘에서 아버지를 벌고, 몸은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벌어야 될 사람들입니다. 배우자를 마음의 관심사로 삼을 때가 아닙니다. 마음으로는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벌고, 몸으로는 땅에서 아버지의 뜻을 버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다 보면 아버지의 뜻대로 결혼도 할 것이고 이혼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문제 자체를 율법적인 행동원칙과 규정으로 다루려고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을 사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자신을 벌고 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버는 하나님 사랑의 대원칙과 축복 아래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결혼의 문제는 한쪽 구석에 자리매김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제치고 결혼이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결혼을 해야 됩니까? 하지 말아야 됩니까? 결혼했다면 계속 살아야 합니까? 이혼을 해야 합니까? 이러한 질문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일은 물어야 될 문제가 아니고 알아서 하면 될 일입니다.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당신 자신을 아버지로 제시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습니다. 먼저 여러분의 아버지에게로 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도구로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충격적인 은총을 가져다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우선되어야 될 관심사는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사도 바울의 입장과 처지와 태도가 성령님의 은총 아래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