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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생전에 편집해 둔 燕?唱酬集 등이 家藏되어 있었으나 많은 작품이 散佚되었고, 남은 것들을 동생 李民?이 수습하여 수천 首를 繕寫해서 定稿本을 만들고 판각하려 하였다. (行狀, 申悅道 撰) 실제 그는 1630년에 張顯光에게 壙銘을 부탁하여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가 1649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간행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 후 李民?의 아들이자 저자의 양자인 李廷機가 1659년 順天 府使로 나가게 되면서 문집을 간행하려고 趙絅에게 序文을 받았으나 이루지 못하고, 다시 1664년 瑞興 府使로 나가게 되면서 재차 鄭斗卿에게 序文을 받아 간행하려 하였다. 실제 이때 문집이 간행되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현재 13권으로 남아 있는 原集이 이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李廷機가 권13의 끝에 붙인 補遺 〈玉堂處置箚〉의 識에 “編次한 뒤에 수습하였기에 문집의 맨 끝에 기록한다.”고 하였으니, 13권으로 편차한 자가 李廷機임을 알 수 있다. 또 국립중앙도서관장본(한46-가1083)의 13권 4책 목판본의 印記에 宋詩烈(1607~1689)의 印이 찍혀 있으니, 늦어도 1689년 이전에는 간행된 것인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1664년경에 곧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李廷機는 李民?이 만들어 놓았던 定稿本을 그대로 살리고 다시 詩 2권을 別集과 續集으로 첨가하여 권10과 11로 편차하였다. 권12와 13의 賦와 文도 새로 편차한 것이다. 현재 규장각(奎5348)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본이 이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원집 초간본》 그런데 1739년에 玄孫 李命天이 지은 家狀에는 “文集 12권이 세상에 통행하고 朝天錄 5권이 家藏되어 있다.” 하였고, 1794년에 丁範祖(1723~1801)가 지은 行狀에도 “敬亭集 12권이 세상에 통행하고 있다.” 하였다. 그리고 1796년에 완성된「鏤板考」에도 敬亭集 12권의 판목이 義城 藏待書院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12권과 13권이라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원집은 모두 목판본 13권뿐이다. 위의 두 본과 장서각장본(4-5744),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D1-A837), 연세대 중앙도서관장본 등이 다 그렇다. 또한 李獻慶(1719~1791)의「艮翁集」에 나오는 〈敬亭先生遺集跋〉에는 구체적인 간행 경위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다만 그의 詩에 대하여 극찬하고 詞�賦�序�記 등도 훌륭하다고 평하였다. 현존본에는 1~11권이 詩이고, 12권이 賦�辭�表, 13권이 記�序�論�議啓 등이다. 따라서 李獻慶이 본 것도 이 13권본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결론지어 말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본서의 원집 저본은 장서각장본인데, 규장각장본과 비교하였을 때 字體가 다르고 補刻한 흔적이 역력하다. 따라서 이는 補刻後刷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속집이나 연보의 字體와도 달라 보각의 시기를 정확히 잡을 수 없다. 다만 장서각장본에는 규장각장본과는 달리 原集의 目錄이 붙어 있고, 거기에 年譜와 附錄을 권14로 편차해 놓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혹 年譜와 續集이 간행된 시기를 즈음하여 補刻이 이루어지고, 이 목록도 집어넣어 인쇄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이 年譜와 續集의 간행은 저자의 玄孫 李命天에 의해 시도되고 그의 손자 李祥發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李命天은 1739년에 家藏 文字와 日記를 모아 家狀을 만들었고, 李祥發은 丁範祖에게 行狀을, 蔡濟恭에게 墓誌銘을 부탁하여 받았다. 丁範祖와 蔡濟恭이 이를 지어준 것은 그 말미의 관직명으로 미루어 볼 때 1794년경이었던 것으로 보이니, 실제 간행은 1794년 이후에 된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1796년에 완성된「鏤板考」에 속집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1796년 이후 正祖 末年 즈음에 간행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는 이미 李命天이 졸한 뒤이므로 李祥發의 주도로 年譜 2권, 續集 4권의 목판본이 정조 말년 즈음에 간행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즈음에 원집도 보각, 후쇄되어 속집, 연보와 함께 결책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서각, 연세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본이다.《연보와 속집 초간》 그 후 1928년에 義城 冷泉亭에서 原集 13권과 續集 4권, 年譜 1권, 附錄 1권을 합하여 19권 9책으로 重刊하였는데, 그 간행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중간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047)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위에서 설명한 장서각장본(4-5744)이고, 이를 촬영한 同館所藏 마이크로필름(M35-1741)을 썼다. 다만 원집, 속집, 연보의 순으로 結冊되어 있는 것을 目錄에 따라 원집, 연보, 속집의 순으로 바로잡았고, 연보를 원집 권14로 편차하였다.
기사전거 : 序(趙絅�鄭斗卿 撰), 行狀(申悅道�丁範祖 撰), 家狀(李命天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目錄, 原集 14권, 續集 4권 합 1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目錄은 原集의 것이고, 續集 目錄은 속집 권두에 따로 실려 있다. 原集은 원집 13권과 補遺, 年譜로 되어 있다. 권1~11은 詩이다. 1592년에 江陵 任所로 부친을 모시고 갔을 때 지은 〈陪登北城〉을 시작으로 대체적으로 저작 연대순으로 편차하였다. 권1~4는 1592년의 작품부터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나오기 전까지의 작품이다. 여기에는 〈謁夷齊廟〉 등 1602년 王世子冊封奏請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오면서 지은 시들이 다수 들어 있고, 〈浮海〉 등 1605년 濟州의 點馬御史로 다녀오면서 지은 시들도 있다. 1617년에 지은 〈打麥詞〉는 崔?으로부터 “文力이 雅健하니 今人의 口氣가 아니다.”는 극찬을 받기도 한 작품이다. 권5에는 명 나라 大復 何景明의 七言律에 和韻한 시 150여 수가 실려 있는데, 저작 연대순 편차 원칙으로 볼 때 1623년 전후 고향에 있으면서 독서에 전념할 때 지어진 것 같다. 권6~8은 燕?唱酬集 上�中�下로, 인조반정 후 奏聞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오는 동안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인데, 함께 갔던 副使 白沙 尹暄과 나눈 시가 다수이다. 저자는 중국인들로부터 ‘李謫仙先生’이라 불리울 정도로 시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1624년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을 때 편집한 것이다. 권9는 1624년 4월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1629년 졸할 때까지의 작품이다. 권10은 詩의 別集으로 月課와 文臣庭試때 지은 작품 등이 실려 있고, 권11은 詩의 續集으로 연대가 불분명한 시들을 따로 모아 실은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권은 아들 李廷機가 原集을 간행하면서 새로 편차한 것으로 보인다. 권12는 賦 11편, 辭 2편, 表 6편이다. 賦 가운데는 〈鳳凰來儀〉가 유명한데, 1595년 26세에 지은 작품이다. 辭는 〈和歸去來辭〉와 月課로 지은 〈弔混沌死辭〉가 있다. 表에는 月課로 지은 〈擬宋監南嶽廟……〉 등과 〈領議政李恒福四度不允批答〉, 〈鳶魚亭上樑文〉, 〈四六精粹序〉 등과 雜儷文이 실려 있다. 上樑文이나 序는 권13의 雜著나 序에 함께 실어도 될 듯한데 굳이 여기에 실은 것은 권12까지를 韻文 성격의 글을 모은 것으로 구분하려 한 것 같다. 권13은 記, 序, 論, 祭文, 銘, 讚, 議啓, 題跋, 雜著를 모아 놓았다. 記에는 1609년에 宣慰使를 대신하여 玄蘇에게 지어준 〈酊庵記〉, 1604년 關西伯 金藎國을 위하여 지어준 〈望日軒記〉 등이 있다. 序는 送序 3편으로 권12에 실린 序와 구분되어 있다. 論은 〈東海無潮汐論〉, 〈孟子不尊周論〉, 〈階伯論〉 등이다. 〈東海無潮汐論〉은 1609년 弘文錄에 든 뒤 課題로 지은 것으로, 東海에 潮汐이 없다 하는 것은 見聞이 편벽한 소치임을 논하였다. 議啓는 〈政院白虹貫日啓辭〉 등 1625년에 올린 계사 3편과 1628년에 集慶殿을 봉심하고 온 뒤 올린 계사가 실려 있다. 雜著 가운데는 1623년 인조반정 뒤 중국에 올린 〈辨誣呈文〉과 太極의 動靜 등을 논한 策問이 주목된다. 또한 여느 문집과는 달리 疏箚가 실려 있지 않은데, 이는 자신의 자취를 남기지 않으려 한 저자의 의도 때문이었다. 이에 아들 李廷機가 政院日記에서 수습하여 권13의 끝에 補遺로 계축년 6월 23일의 玉堂處置箚를 넣었던 것이다. 권14는 年譜와 附錄이다. 원래 2권으로 되어 있던 것을 본 총간에서는 목록에 따라 원집 14권으로 합하여 편차한 것이다. 附錄에 行狀, 壙銘, 墓誌銘, 家狀, 기타 祭文과 挽詞, 藏待書院 奉安文 등이 들어 있다. 續集은 4권으로, 朝天錄 上�中�下 3권과 奏本, 啓辭와 拾遺를 모은 1권이 그 내용이다. 朝天錄은 인조반정 이후 奏聞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올 때의 기록으로, 1623년 4월부터 1624년 4월까지의 旅程과 활동 사항을 적었다. 1624년 5월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있는 동안 편집한 것이다. 奏本과 啓辭 모두 이 시기에 올린 公文이다. 拾遺로는 敎, 啓, 記, 題跋 한 두 편씩이 실려 있다. 필자 : 金炅希
1. 퇴계문인 정구(鄭逑, 寒岡, 星州 柳村, 1543~1620) 계남 양문하 ▼ 본관(本貫) 청주(淸州) → 박성(朴惺, 大菴, 玄風 求智, 1549~1606) 본관(本貫) 밀양(密陽) → 서사원(徐思遠, 樂齋, 大邱, 1550~1614) 본관(本貫) 달성(達城) → 손처눌(孫處訥, 慕堂, 大邱, 1553~1634) 본관(本貫) 일직(一直) → 장현광(張顯光, 旅軒, 仁洞, 1554~1637) 본관(本貫) 인동(仁同) → 조정(趙靖, 黔澗, 尙州 升谷, 1555~1636) 본관(本貫) 풍양(豊壤) → 조익(趙翊, 可畦, 尙州 升谷, 1556~1613) 본관(本貫) 풍양(豊壤) → 신방집(辛邦楫, 永慕堂 靈山 丈麻 1556 ~ ?) 본관(本貫) 영산(靈山) → 황중윤(黃中允, 東溟, 平海, 1557~1648) 본관(本貫) 평해(平海) → 이천배(李天培, 三益齋, 星州 巖浦, 1558~1604) 본관(本貫) 경산(京山) → 최항경(崔恒慶, 竹軒, 星州 法山, 1560~1638) 본관(本貫) 영천(永川) → 성안의(成安義, 芙蓉堂, 榮州, 1561~1629) 본관(本貫) 창녕(昌寧) → 김수인(金守認, 九峯, 密陽, 1563~1626) 본관(本貫) 경주(慶州) → 김주(金輳, 雲巖, 善山 海平, 1564~1636) 본관(本貫) 해평(海平) → 이명호(李明호, 梅竹軒, 咸安, 1565~1624) 본관(本貫) 성주(星州) → 이윤우(李潤雨, 石潭, 漆谷 上枝, 1569~1634) 본관(本貫) 광주(廣州) → 이민성(李民宬, 敬亭, 義城 山雲, 1570~1629) 본관(本貫) 영천(永川) → 강재산(康在山, 一竹, 善山, 1573~1636) 본관(本貫) 신천(信川) → 신적도(申適道, 虎溪, 義城, 1574~1663) 본관(本貫) 아주(鵝州) → 배상룡(裵尙龍, 藤菴, 星州, 1574~1655) 본관(本貫) 성산(星山) → 박회무(朴檜茂, 六友堂, 榮州 寒亭, 1575~1666) 본관(本貫) 반남(潘南) → 오여벌(吳汝벌, 敬庵, 榮州 草谷, 1579~1635) 본관(本貫) 고창(高敞) → 김광계(金光繼, 梅園, 禮安 烏川, 1580~1646) 본관(本貫) 광산(光山) → 배상익(裵尙益, 癡巖, 榮州, 1581~1631) 본관(本貫) 대구(大邱) → 박종무(朴종茂, 三樂堂, 榮州 寒亭, 1582~1664) 본관(本貫) 반남(潘南) → 권수경(權守經, 自樂堂, 義城 沙村, 1584~1659) 본관(本貫) 안동(安東) → 최동집(崔東集, 臺巖, 大邱 漆溪, 1586~1661) 본관(本貫) 경주(慶州) → 박종우(朴宗祐, 陶谷, 達成 竗洞, 1587~1654) 본관(本貫) 순천(順天) → 김광악(金光岳, 野逸齋, 禮安 烏川, 1591~1648) 본관(本貫) 광산(光山) → 허목(許穆, 眉수, 京畿 連川, 1595~1687) 본관(本貫) 양천(陽川) → 도신수(都信修, 止巖, 大邱 鋤齋, 1598~1650) 본관(本貫) 성주(星州) → 최동직(崔東直, 香巖, 大邱 枝洞, 1602~1665) 본관(本貫) 경주(慶州) → 정윤해(조목 문하) 본관(本貫) 청주(淸州) → 문위(오건 문인) 본관(本貫) 남평(南平) → 정온(정인홍 문인) 본관(本貫) 초계(草溪) → 정윤목(유성룡 문인) 본관(本貫) 청주(淸州) →이도장(장현광 문인) 본관(本貫) 광주(廣州) →전이성(정경세 문인) 본관(本貫) 용궁(龍宮)
2.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이민성(李民宬) #경상도(慶尙道) 의성(義城) *장대서원(藏待書院) 현종임자건(顯宗壬子建). 제향. 김광수(호송은 진사 효행 본안동). 신원록(호회당 군수 증호의 본아주). 신지제(호오봉 승지 증이참 본아주). 이민성(호경정 승지 본영천). 祭享. 金光粹(號松隱 進士 孝行 本安東). 申元祿(號悔堂 郡守 贈戶議 本鵝州). 申之悌(號梧峰 承旨 贈吏參 本鵝州). 李民宬(號敬亭 承旨 本永川).
3. ■蘇齋盧先生龍潭先生文集卷之六 附錄 ■소재노선생용담선생문집권지륙 부록 [挽詞]李民宬。敬亭 [만사]이민성。경정 平生責沈歎。瞻仰卽朝班。禁裏聞種話。宵分取燭還。兩朝傷聚散。十載愧癡頑 평생책침탄。첨앙즉조반。금리문종화。소분취촉환。양조상취산。십재괴치완 。契??莩末。交遊父子間。公時在漁浦。余亦臥雲山。寶唾頻叩寄。狂詩不見刪 。계??부말。교유부자간。공시재어포。여역와운산。보타빈고기。광시부견산 。自多驥附尾。頗幸豹窺斑。伽路曾迂?。氷川獨掩關。厚情蒙色笑。薄俗付誹? 。자다기부미。파행표규반。가로증우?。빙천독엄관。후정몽색소。박속부비? 。別後星霜改。幽居水石環。蒼生占出處。天意餉淸閒。只冀神明佑。何圖大?? 별후성상개。유거수석환。창생점출처。천의향청한。지기신명우。하도대?? 。士流相慟吊。哀賻阻恩頒。安仰非私悼。無從遽涕?。老成需驛召。?論際時艱 。사류상통적。애부조은반。안앙비사도。무종거체?。노성수역소。?논제시간 。志慕高平范。賢布陋巷顔。文章爲可範。辭令豈徒?。官至貳卿秩。家無半捧? 。지모고평범。현포루항안。문장위가범。사령기도?。관지이경질。가무반봉? 。江山收爽氣。流滓足塵?。楚些千年調。凄?怨莫攀。 。강산수상기。유재족진?。초사천년조。凄?원막반。
4.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 장대서원(藏待書院)임자년에 세웠다. : 김광수(金光粹)호는 송은(松隱), 진사다. 이민성(李民宬) 호는 경정(敬亭), 승지를 지냈다.
5. ■敬亭先生集 年譜 卷之二 附錄 家狀[李命天] ■경정선생집 년보 권지이 부록 가상[이명천] 公諱民宬。字寬甫。號敬亭。我李之氏於永陽者。實自高麗領同正諱 始。同正 공휘민성。자관보。호경정。아이지씨어영양자。실자고려영동정휘박시。동정 後四世有諱暉。佐忠烈王討哈丹賊。建大功。擢授神護衛上護軍。元皇帝降璽書 후사세유휘휘。좌충렬왕토합단적。건대공。탁수신호위상호군。원황제강새서 褒之。是生典工判書諱永堅。是生判軍器寺事諱績。是生精勇郞將諱興龍。是生 포지。시생전공판서휘영견。시생판군기사사휘적。시생정용낭장휘흥룡。시생 諱麗。當國初卜居赤羅之良谷村。滅跡而終。名以國號。蓋不忘舊國之意也。越 휘려。당국초복거적라지량곡촌。멸적이종。명이국호。개부망구국지의야。월 二世有諱世憲。中弘治甲子進士。見士林禍起。隱居不仕。以文章行誼名世。稱 이세유휘세헌。중홍치갑자진사。견사림화기。은거부사。이문장행의명세。칭 牛巖先生。贈左承旨。是爲公曾祖。祖諱汝諧。參奉。贈吏曹參判。考諱光俊。 우암선생。증좌승지。시위공증조。조휘여해。참봉。증이조참판。고휘광준。 文科官觀察使。贈禮曹參判。自赤羅又遷于聞韶之金鶴山下。號鶴洞。旅軒張先 문과관관찰사。증예조참판。자적라우천우문소지김학산하。호학동。여헌장선 生誌其墓。?平山申氏。贈貞夫人壯節公崇謙之后。引儀權之女。以隆慶庚午十 생지기묘。?평산신씨。증정부인장절공숭겸지후。인의권지녀。이륭경경오십 一月八日生公。公生而天資近道。擧止端重。自年七八歲。已曉文義。藻思出凡 일월팔일생공。공생이천자근도。거지단중。자년칠팔세。이효문의。조사출범 。見者莫不驚歎。稍長。?書砥行。有志古人之學。以觀察公命。偕弟參判公民환 。견자막부경탄。초장。?서지행。유지고인지학。이관찰공명。해제참판공민환 往遊于鶴峯金先生之門。得聞爲學大方。自是聲譽?蔚。己丑。遭貞夫人喪於觀 왕유우학봉김선생지문。득문위학대방。자시성예?울。기축。조정부인상어관 察公靑鳧任所。歸葬故山。持制甚嚴。壬辰。觀察公拜臨瀛。赴任未幾。倭寇充 찰공청부임소。귀장고산。지제심엄。임진。관찰공배림영。부임미기。왜구충 斥。賊將吉成傳檄列邑。持檄者至府。觀察公卽令斬之。領兵出戰。斬獲甚多。 척。적장길성전격렬읍。지격자지부。관찰공즉령참지。영병출전。참획심다。 以功陞通政階。蓋公日侍左右。周旋戎務。實有傍贊焉。丁酉。登廷試第四名。 이공승통정계。개공일시좌우。주선융무。실유방찬언。정유。등정시제사명。 選補承文院權知兼春秋館記事官。陞正字。歷著作博士。己亥。觀察公出宰中原 선보승문원권지겸춘추관기사관。승정자。역저작박사。기해。관찰공출재중원 。公在子舍。鄭古玉?來過。聞公評其詩。大加敬服。起拜曰。子吾師也。辛丑 。공재자사。정고옥?내과。문공평기시。대가경복。기배왈。자오사야。신축 。拜承政院注書。遷侍講院說書。陞司書兼司憲府監察。壬寅。以書狀官赴京。 。배승정원주서。천시강원설서。승사서겸사헌부감찰。임인。이서상관부경。 及還。行?蕭然。惟書籍若干卷而已。卽除成均館典籍知製敎兼司憲府監察。癸 급환。행?소연。유서적약간권이이。즉제성균관전적지제교겸사헌부감찰。계 卯。以禮曹佐郞。遷兵曹。時觀察公按關東節。公與參判公俱受暇省覲。陪遊楓 묘。이예조좌랑。천병조。시관찰공안관동절。공여참판공구수가성근。배유풍 嶽。五峯李文僖公遺觀察公書曰。昔蘇老泉題橋柱云。率天下文章二子過此。令 악。오봉이문희공유관찰공서왈。석소노천제교주운。솔천하문장이자과차。영 公此行。與老泉幷盛云。乙巳。陞正郞兼如故。壬辰亂後。久廢月課之製。至是 공차행。여노천병성운。을사。승정랑겸여고。임진란후。구폐월과지제。지시 冬復設。公連三居魁。李文僖公誦其文。吃吃不離口。嘗語人曰。當世文衡之任 동복설。공련삼거괴。이문희공송기문。흘흘부리구。상어인왈。당세문형지임 。舍此子其誰。朝議欲補天官郞。時有濟州點馬極擇之命。遂以公應選。蓋仁弘 。사차자기수。조의욕보천관랑。시유제주점마극택지명。수이공응선。개인홍 素不悅於公。故其黨承其意?之。知舊有以過海危之者。公笑應之曰。此行。濯 소부열어공。고기당승기의?지。지구유이과해위지자。공소응지왈。차행。탁 足南溟。振衣漢?。何快如之。怡然登途。一松沈相公贈詩有忠信千官表。文章 족남명。진의한?。하쾌여지。이연등도。일송침상공증시유충신천관표。문장 一世豪之句。耽羅故都也。有聲色游觀之富。海路又險遠。自昔奉使者。託以候 일세호지구。탐라고도야。유성색유관지부。해로우험원。자석봉사자。탁이후 風。動經累朔。公辭朝?四十餘日而復命。李公?英時在春秋館。以不憚勤勞。盡 풍。동경루삭。공사조?사십여일이복명。이공?영시재춘추관。이부탄근로。진 心國事等語記之。時朝著不靖。事機多變。公忽忽少仕進意。以親老爲言。與參 심국사등어기지。시조저부정。사기다변。공홀홀소사진의。이친로위언。여참 判公解官。買舟南歸。朝中知舊。咸惜其去。李文僖公作詩以送之。乃以其未老 판공해관。매주남귀。조중지구。함석기거。이문희공작시이송지。내이기미로 退歸。引喩疏廣,受二子。有瞻望行舟不同歸之歎。戊申。除司憲府持平。公以 퇴귀。인유소광,수이자。유첨망행주부동귀지탄。무신。제사헌부지평。공이 重名。久滯鄕曲。及還朝。朝議翕然。凡有論啓。就公裁正。其時被罪之輩。皆 중명。구체향곡。급환조。조의흡연。범유론계。취공재정。기시피죄지배。개 前日忌公者。而公守正平反。多所救解。人咸服其德量。未幾遞拜侍講院文學。 전일기공자。이공수정평반。다소구해。인함복기덕량。미기체배시강원문학。 其冬。復拜持平。賜暇湖堂。公承命瞿然曰。書堂之設。爲預養人才。以備國家 기동。복배지평。사가호당。공승명구연왈。서당지설。위예양인재。이비국가 需用。其可燕嬉自廢乎。每終日正坐。看書不輟。己酉。選弘文錄。差遠接使從事官。以親病辭不赴。七月。丁觀察公憂。廬墓終制。癸丑。拜禮曹正郞。遷弘文館副修撰。陞校理兼侍講院文學。時巫蠱獄起。辭連母后。掌令鄭造,尹?等乃以出處別宮。發論於臺席之上。獻納柳活亦主造,?之議。公倡同僚上箚。略曰。國家不幸。逆變外起。巫蠱內作。臣民之痛。人倫之變。實前古之所未有也。討逆之義。不可不嚴。而處變之道。亦不可不盡。苟於二者。有一毫之未盡。則王法有所不行。而人道亦幾乎熄矣。以殿下無間之孝。遭千古所無之變。一國臣民之所望於殿下者。豈不以古聖人至極之道。爲法於今日乎。頃者鄭造,尹?等?拾李偉卿之疏。直斥慈殿。至曰顯有當絶之惡。又曰爲今日臣子者。不可以國母待之也。又引遜?遷后之語。而結之以臣等之所見如此。此豈人臣所可道之語哉。其得罪於倫紀甚矣。今者有費辭說。曲爲分疏者。無非爲鄭造,尹?之地。且以爲巫蠱獄似爲虛無者然。未知活之言。何所據而?張之至此也。其心所在。固不可測也云云。光海雖心?而不敢爲非。卽遞活等職。永昌出置之後。爾瞻嗾三司必欲置之法。漢陰李文翼公進一箚營救。爾瞻大怒。以爲黨逆。使其黨李惺,朴鼎吉等請按律。公極力救之。遂以此見罷。 甲寅。復拜校理辭遞。又拜修撰兼持平。秋。差關西京試官。公?選公平。西土咸稱其藻鑑。 乙卯。梧里李文忠公上密箚。有大妃將不得保全位號之語。光海大怒。爾瞻等又從而論罪甚力。公奮斥不已。知其終不可救。棄官歸鄕。群邪尤嫉之。謀所以構公者不遺餘力。先是光海追尊所生母謂之恭聖王妃。令百官進賀箋。公以知製敎。使魯國成風之語。爾瞻等遂摘此語。論以不敬。削職廢錮。東陽都尉申公翊聖目擊當時事。記之甚詳。痛言諸僚首鼠畏縮之狀。而末段稱玉堂李某持正論云。自是公屛居家食者幾十年。謝絶世故。左右圖書。端坐一室。上自濂洛關?之旨。下逮諸子百家之文。無不反復尋繹。於中庸用工益深。嘗有詩曰。潛玩中庸理氣章。何嘗求道杳冥鄕。須知上下鳶魚妙。只這吾心勿助忘。向裏契悟之微。於此亦可見矣。癸亥改玉。首命公差奏請使書狀官。除司憲府持平。翌日。遷宗簿寺正兼司憲府掌令。時浮海朝天。人皆危懼。公無幾微見於色。遂應命而行。海島山川。歷歷指點。若平日遍踏者然。舟中人無不神之。次登州。有吳相公大斌者號晴川。以文行見重上國。聞公名。求詩甚懇。公次其韻以贈。吳書以謝之曰。非胸藏琬琰。口吐珠璣不能也。遍示搢紳士大夫。皆斂?敬服。我中國能有幾人哉。非敢面譽貌言也。前此有皇朝推官孟養志者齎?東來。討索貿換。色目甚多。時當改紀。未遑他事。不能盡副所望。挾憾而歸。構誣??。罔有紀極。至謂反正之日。引用倭兵。燒諸宮室。?縛舊君。投之火中。做此?說。分布於道路。轉申於各衙門。中朝信以爲然。中外交章。至謂屬國廢君。關係甚重。?宜問罪。以正大義。萬口譁然。公旣到京。與正副使諸公。周旋其間。相機應變。或面陳訟?。或呈文辨誣。其文皆出公手。其略曰。反正之日。引倭兵燒宮室壞舊君?三者。職等竊未曉此等說話。胡爲而至此哉。爲此說者。原其本意。不過恣行胸臆。構誣小邦。實則欺?朝廷。謀害屬國。讒說之殄行者。蓋不止此。非但職等之所痛心疾首。而亦閤下之應且憎者也。其曰。?縛舊君。投諸火中。?。是何言耶。閭巷匹夫匹婦之死生。固不敢容諱。廢君雖失德無道。不得保有天位。而其在小邦。自大妃視之則其子也。自群臣言之則舊君也。其敢爲此說。加我以弑逆之名。擧一國不免爲禽獸之歸。苟非至不仁者。胡寧忍此哉。舊君方無恙處於畿邸。服御供給。少無欠缺。此則可質諸鬼神而不惑。告於天地而無愧矣。我新君以言其緖則我先王之孫也。以言其賢則仁孝之德。屬望于中外。內有所承於王大妃。外迫大小臣民之推戴。名正言順。毫無可疑。謂之簒逆者。不亦痛且誣乎。夫所謂簒逆者。以下賊上之謂也。干名犯分之謂也。以淫破義之謂也。反正之初。將此曲折。卽稟于督府。請命于天朝。則名義明正。謂之簒逆。何所據而云耶。其忠亮懇切。有足感動人者。群議乃得稍解。留九箇月。竟得竣事。甲子還朝。未及復命。除成均館司成兼司憲府執義。旣還。上引見於隆政殿。下諭曰。成事而來。予甚喜焉。賞加通政階。又賜土田臧獲。 乙丑。除刑曹參議。不赴。冬。授承政院同副承旨。丙寅春。陞左副承旨。會仁順王后山陵卜於金浦。工役垂訖。而勳臣疏陳制殺不當之法。將欲移定於健元陵內枝山。朝議莫敢有異。上命公按視。公回啓曰。制殺之法。詳具方書。此說孟浪則他方書一樣孟浪矣。信彼而不信此。未知所見之如何。傳曰。獻議之言。不無所見。遂因用金浦。時謂之片言回天。反正後與建虜相絶。邊鄙晏如。公因白虹貫日之變。以爲將有外寇之應。遂陳啓。略曰。日者。衆陽之宗而人君之表也。虹者。不正之氣而兵亂之象也。陰濁而制陽明。小人而勝君子。夷狄而乘中國。可憂之端。不一而足。天之譴告丁寧。實出於仁愛殿下云云。朝廷不省。翌年丁卯春。虜人潛師渡江。連陷城邑。人始服公先見之明。時旅軒先生以號召使。特薦公左道義兵大將。登聞于大朝。而公已發奔問之行矣。馳赴王世子分朝至全州。柳川韓文翼公爲陪衛大將。梧里李文忠公爲體察使。公共贊兵事。遂引對曰。今日急務。收拾人心爲本。而兩西最急。伊賊反爲招輯。使之還出耕種。其計尤凶。臣意兩西被陷。城鎭守令邊將。間以土望塡差。其處山川險隘。素所?歷。而鄕曲情面。無不相熟。其附賊者易於句引。遊散者易於招集。必不至於靡然從賊。或保山砦。相機攻?。其感戴報效之誠。必倍於他處之人。又陳運餉之策。賦役不均之弊。 三月。朝廷議和解兵。公作憂憤詩以見志。仍詣江華行在所。扈從還京。冬。屢除承旨皆不赴。戊辰春。除左承旨。集慶殿有鼠變。上特命遣公公馳到本府。奉審論啓。後聞前參奉崔光遠者。不謹守護。致令?漏。手自?持?容。潛到屛風匠家。用?斗?過。當時守宰曲護光遠。掩匿不報。輿情莫不憤鬱。公至是更爲馳啓。論光遠罪狀甚悉。聞者快之。冬。除左承旨。 己巳。除刑曹參議。皆不赴。是年八月十五日。以疾終于氷月堂。享年六十。訃聞。上震悼。特命致賻有加。亦異數也。中外士類。無不齎咨歎惜。用其年十一月三日。葬于縣西霞峴山。觀察公墓下卯向之原。有文集十二卷刊行於世。朝天錄五卷藏于家。鄕人慕其德。立書院以祀之。公精神秀朗。聰明絶倫。未弱冠。人皆以公輔文衡期之。而公於富貴利達。泊如也。每有除命。或赴或不赴。未嘗久於朝也。値昏朝時。憤斥廢母之論者。反正後。生者加資。死者贈職。而公獨絶口不自言。又不載其箚子於家稿。以沒其跡。故嘗與公聯啓者。亦蒙陞擢。而公則不與焉。知者以爲高。觀察公晩而恬退。優遊林下。怡愉奉養。盡其誠愛。須臾不離側。及遭喪。情文備至。禮俗相稱。鄕黨稱焉。治家嚴而有法。內外截然。恩信竝至。不立?業。不畜?妾。自奉如寒士。門庭蕭然。無雜賓。平居終日正衣巾。無惰容。俯讀仰思。至忘寢食。遂以敬揭號。以寓其涵養存省之意。遇急變處大患。煞有定力。輒靜正自持。未嘗動心。其浮海朝天也。夜泊石城島。忽波濤洶湧。衝撞船底。危在呼吸。舟中人皆遑遑。?手祝天。公獨凝然整坐不變。有舍達如斯之意。及其還也。値奔鯨噴浪。梢工云大則呑舟。小則覆船。無不錯愕失措。公獨從容援筆賦詩以諭之。有頃奔鯨自止。波濤平恬。人以其詩擬之韓文公逐鰐魚文。龍洲趙文簡公題其後曰。操數寸管。與鯨波雪山爭?。何等精神。詩中江海賦。所居里前有一丘。溪流淸淺。樹木?蔥。又有石泉。朱夏如氷。公樂之。結以茅屋。榜曰冷泉。日坐其中。吟玩自樂。作詩九絶。以道其閒居之趣。又於赤羅之花谷村。有巨巖臨江?起。景趣淸絶。擬築亭其上。扁以鳶魚。爲晩年藏修之所。作?梁文而不克就。爲文章。雄健高古。無世俗??氣。詩特淸新頓挫。直透杜少陵?奧。嘗夢見崔學士孤雲論。南華經第一篇。覺後面目語音。了了可記。公作詩以識其事。說者謂公之文章。自此益進云。崔簡易於文小許可。見公詩。?然自失曰。不但今世無此等作者。求之古人。鮮與倫比。當時主文衡諸公。極口稱賞。兩度朝天之行。名動中華。學士大夫。爭與?遺。稱之以李謫仙先生。無不致敬。公又嘗往來於西厓,寒岡,旅軒諸先生之門。其講論授受之旨。雖有不可得而聞者。而當日師門推許期待之意。蓋不淺矣。公之歿也。旅軒先生詩以?之曰。匡時懷未展。樂道遣平生。又誌公墓而斷之曰。公以英特之姿。加文學之博。通遍古籍。該貫無遺。留意世務。?有商量。可謂適用之才。知公者皆望其大有展布。而公於勢利所在。謙退遜避。若將?焉。又曰。文章特其餘事耳。公之孝友。乃其所立本也。而行己也端。發言也和。處事也審。接人也寬。此皆實德也。嗚呼。是可以傳信於百世矣。公前娶襄陽權氏。睡軒先生五福弟參奉五常曾孫。士人文淵女。早亡。贈淑夫人。?在公墓左。後娶宜寧南氏。參判應雲曾孫。察訪以仁女。 生於戊寅十一月十三日。十八歲歸公。端莊嚴肅。治家有法。未嘗以家事煩公。公之專意文學。未始不由內助也。公歿後二十二年以禮法持門戶甚得母道。 辛卯二月十日終。享年七十四。?在公墓右。無嗣。以弟參判公第三子諱廷機後 신묘이월십일종。향년칠십사。?재공묘우。무사。이제참판공제삼자휘정기후 。文科忠州牧使。前娶延安李氏。府院君光庭孫。郡守贈都承旨女。有一女。後 。문과충주목사。전취연안이씨。부원군광정손。군수증도승지녀。유일녀。후 娶靑松沈氏。縣監贈吏曹判書?女。有四女。無子。子重?。兄諱廷?出也。女長縣監尹善慶。次士人崔慶涵。次士人洪敍揆。次左尹崔敬中。次正郞兪任重。側室子重烈,重勳。武科通政。重?生四子一女。長秀逵。次秀堈出爲季父後。次秀?生員。我先君。次秀時生員。女士人李時禎。重烈無子。以重勳子秀埰後。內外曾玄孫男女數百餘人。不能盡載。公之去世。今已百十有餘年。影響將昧昧焉。獨幸其立朝大致。旅軒誌文在焉。可考而徵。而述行之文。尙未有屬筆。命天竊懼其日遠日忘。漸就湮沒。?敢不揆愚拙。歷搜家藏文字及日記等書。撰次如右。將以?控於當世有德有言之君子。而庶幾得一言之惠。豈敢妄加一辭。厚誣吾祖也哉。辭若繁而不敢殺者。蓋有待於筆削云爾。歲在己未暮春。玄孫命天謹書
6. 錦溪先生文集卷之八 外集 祭文 금계선생문집권지팔 외집 제문 聾巖先生墓誌銘 농암선생묘지명 公諱某。字某。其先永川人。自軍少尹諱軒。始寓居禮安縣。是爲高祖。曾祖義 공휘모。자모。기선영천인。자군소윤휘헌。시우거예안현。시위고조。증조의 興縣監諱坡。贈兵曹參議。祖通禮門奉禮諱孝孫。贈嘉善大夫吏曹參判。皇考中 흥현감휘파。증병조참의。조통례문봉례휘효손。증가선대부이조참판。황고중 訓大夫麟蹄縣監諱欽。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皆隱德卑官。委祉于公。?貞 훈대부린제현감휘흠。증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개은덕비관。위지우공。?정 夫人權氏。護軍
7. 企齋文集卷之三 碑銘 ○墓誌 기재문집권지삼 비명 ○묘지 監察李侯墓碣銘 감찰이후묘갈명 侯姓李。諱?禎。字?休。永川人也。父諱寅。求禮縣監。祖諱永弘。工曹佐郞。 후성이。휘?정。자?휴。영천인야。부휘인。구례현감。조휘영홍。공조좌랑。 曾祖諱承孫。議政府左贊成。高麗判圖判書允卿之玄孫。母成氏。永春縣監孝元 증조휘승손。의정부좌찬성。고려판도판서윤경지현손。모성씨。영춘현감효원 之女也。家世綿遠。代有紀績。今略不載。惟侯之生。在弘治戊申。侯生而?逝 지녀야。가세면원。대유기적。금략부재。유후지생。재홍치무신。후생이?서 。九齡而父又逝。猶知執喪。所食匙箸。不使食肉者雜。漸知讀書。爲文屢干有 。구령이부우서。유지집상。소식시저。부사식육자잡。점지독서。위문루간유 司。求試不得。正德丙寅。參靖國原從功。年二十九。以門蔭補獻陵參奉。例陞 사。구시부득。정덕병인。참정국원종공。연이십구。이문음보헌릉참봉。예승 義盈奉事,長興直長,?儲主簿。所?淸謹。嘉靖戊子。拜司憲府監察。古之殿中 의영봉사,장흥직장,?저주부。소?청근。가정무자。배사헌부감찰。고지전중 侍御史也。庚寅。出除甑山縣令。適値國恤。未卒哭而妻病思食肉。 시어사야。경인。출제증산현령。적치국휼。미졸곡이처병사식육。
8. ■경정 휘 민성 할아버지의 행력 1570년 (선조 3 경오, 隆慶 4) 11월 8일, 의성현(義城縣) 소시랑리(蘇侍郞里에)서 태어나다. 1586년 (선조 19 병술, 萬曆 14) 양양권씨(讓陽權氏)와 혼인하다. 1588년 (선조 21 무자, 萬曆 16) 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 나아가다. 1589년 (선조 22 기축, 萬曆 17) 9월, 모친상을 당하다. 1592년 (선조 25 임진, 萬曆 20) 봄, 부친을 모시고 강릉(江陵) 임소(任所)로 가다. 1594년 (선조 27 갑오, 萬曆 22) 9월 부인 권씨(權氏)의 상을 당하다. 1595년 (선조 28 을미, 萬曆 23) 2월, 남이인(南以仁)의 여(女) 의령남씨(宜寧南氏)와 혼인하다. ○ '봉황래의부(鳳凰來儀賦)'를 짓다. 1597년 (선조 30 정유, 萬曆 25) 4월, 정시(庭試)에 합격하다.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어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다. 1599년 (선조 32 기해, 萬曆 27) 부친을 모시고 충주(忠州) 임소(任所)에 다녀오다. 1600년 (선조 33 경자, 萬曆 28) 12월, 정자(正字)가 되다. 1601년 (선조 34 신축, 萬曆 29) 1월, 저작(著作)이 되고, 봉상사(奉常寺) 직장(直長), 박사(博士)를 역임하다. 1602년 (선조 35 임인, 萬曆 30) 윤2월, 승정원 주서가 되다. ○ 4월, 시강원 설서를 거쳐 사서가 되다. ○ 10월, 전적 겸 감찰이 되고, 왕세자책봉주청사 서상관(王世子冊封奏請使 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가다. 1603년 (선조 36 계묘, 萬曆 31) 1월, 고죽성(孤竹城)에 도착하다. ○ 5월, 돌아오다. ○ 6월, 예조 좌랑, 병조 좌랑이 되다. ○ 겨울, 장현광(張顯光)을 따라 ?계서원(?溪書院)으로 가서 '주역(周易)'을 강하다. 1604년 (선조 37 갑진, 萬曆 32) 2월, 전적이 되다. ○ 12월, 병조 정랑이 되다. 1605년 (선조 38 을사, 萬曆 33) 3월, 제주(濟州) 점마어사(點馬御史)로 나가다. 1606년 (선조 39 병오, 萬曆 34) 여름, 동생 자암공(紫巖公) 李民환과 함께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1608년 (선조 41 무신, 萬曆 36)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곧 지평(持平)이 되다. ○ 6월, 시강원 문학이 되다. ○ 겨울, 사가독서(賜暇讀書)하다. 1609년 (광해군 1 기유, 萬曆 37) 봄, 홍문록(弘文錄)에 들다. ○ 7월, 부친상을 당하다. 1612년 (광해군 4 임자, 萬曆 40) 봄, 냉천정(冷泉亭)을 짓다. 1613년 (광해군 5 계축, 萬曆 41) 5월, 예조 정랑이 되다. ○ 6월, 교리가 되다. 23일, 상차(上箚)하여 정조(鄭造), 윤?(尹?) 등이 모후(母后)를 폐(廢)하려 모의한 죄를 논하다. ○ 9월, 이덕형(李德馨)을 논구(論救)하다가 파직되다. 1614년 (광해군 6 갑인, 萬曆 42) 7월, 부수찬이 되다. ○ 9월, 관서 경시관(關西 京試官)이 되다. ○ 10월, 교리가 되었다가 일로 파직되다. ○ 최현(崔晛)과 수정사(修淨寺)에 노닐다. 1615년 (광해군 7 을묘, 萬曆 43) 1월, 사과(司果)가 되다. ○ 8월, 이원익(李元翼)을 신구(伸救)하다가 때마침 일어난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하전(賀箋) 문제로 삭탈관작되다. 이후 두문불출하며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다. 1620년 (광해군 12 경신, 泰昌 1) 1월, 정구(鄭逑)를 곡하다. ○ 동생 이민환(李民환)을 만나러 관서(關西)에 다녀오다. 1621년 (광해군 13 신유, 天啓 1) 4월, 장현광(張顯光)을 따라 ?계서원(?溪書院)에서 경의(經義)를 강론(講論)하다. 1623년 (인조 1 계해, 天啓 3) 3월, 인조(仁祖) 반정(反正)이 일어난 뒤 주문사 서상관(奏聞使 書狀官)이 되어 종부사(宗簿寺) 정(正)의 벼슬로 중국에 가다. 1624년 (인조 2 갑자, 天啓 4) 4월, 돌아와 사성(司成) 겸(兼) 집의(執義)가 되다. ○ 5월,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연?창수집(燕?唱酬集)을 편집하다. 1625년 (인조 3 을축, 天啓 5) 5월, 동부승지가 되다. '상현서원기(象賢書院記)'를 짓다. 1626년 (인조 4 병인, 天啓 6) 2월, 우승지가 되다. '논김포장산제살법헌의계(論金浦葬山制殺法獻議啓)', '백홍관일계사(白虹貫日啓辭)'와 '청침배원계사 (請寢拜園啓辭)'를 올리다. 1627년 (인조 5 정묘, 天啓 7) 봄, 호란(胡亂)이 일어나자 영남소호사(嶺南召號使) 장현광(張顯光)의 추천으로 경상좌도(慶尙左道) 의병대장(義兵大將)이 되다. ○ 3월, 강도(江都) 행재소로 가서 호가(扈駕)하여 환조(還朝)하다. ○ 4월, 고향으로 돌아오다. ○ 11월, 좌승지, 우승지가 되다. 1628년 (인조 6 무진, 崇禎 1) 1월, 좌승지가 되다. ○ 4월, 명을 받고 강릉 (江陵)에 가서 집경전(集慶殿) 영정(影幀)을 봉심하고 논계(論啓)하다. ○ 6월, 좌승지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1629년 (인조 7 기사, 崇禎 2) 4월, 형조 참의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7월, ?계(?溪)에 가서 장현광(張顯光)의 강회(講會)에 참석하다. ○ 8월 15일, 병으로 ?월당(?月堂)에서 졸하다. ○ 11월 3일, 의성현(義城縣) 서쪽 하현(霞峴)에 장사 지내다.
9. ◆경정집(敬亭集) 1664년 (헌종 5 갑진, 康熙 3) 이즈음 아들 이정기(李廷機)가 문집을 간행하 다.〔정두경(鄭斗卿)의 서(序)〕 1672년 (현종 13 임자, 康熙 11) 사림(士林)이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위판(位 版)을 봉안하다. 1928년 (무진) 의성(義城) 냉천정(冷泉亭)에서 속집(續集), 연보(年譜), 부록 (附錄) 등을 모두 합쳐서 문집을 중간(重刊)하다. 【기사전거 : 연보(年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10.이민성(李民宬) 弟 이민환(李民환) 의성지역의 문인 영천인 Ⅲ. 여헌의 강학 활동 이민성(李民宬) 『旅軒續集』9, 拜門錄(申悅道). 영천의 입암에 머물 때도 그 근처의 많은 사류들이 모여든 바 있다. 넷째, 수령 등 관직에 재임할 당시 가르침을 받아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경우이다. 신열도의 경우 여헌이 의성현령으로 재임시에 향교에서 수업을 받음으로 인연을 맺었으며, ) 위와 같음. 李民宬도 역시 여헌이 의성현령으로 재직시 빙계서원에서 주역을 배운 바 있다. 『敬亭集』14, 「年譜」, 34세조. 이러한 강학 형태의 구분은 비단 여헌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일반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한번 사제의 인연을 맺은 후 지속적으로 방문하거나, 서신을 교환하면서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Ⅳ. 여헌의 문인들 영천지역의 문인 이민성(1570~1629).민환(1573~1649) 형제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經史와 諸子百家書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있어 재덕을 겸비한 인물들이었다. 28세를 전후하여 형제가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민성은 34세 때 의성현령으로 부임한 여헌을 빙계서원으로 모시고 주역을 강하였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그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이이첨의 모함을 받아 삭직된 뒤 고향에 칩거하였다. 인조반정후 장령으로 복직하여 좌승지에 이르렀다. 이민환은 강홍립의 막하로 출전하였다가 청의 포로가 되었는데, 항복 권유를 끝까지 물리치고 17개월 동안의 포로생활을 한 바 있다.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이민성은 경상좌도의병대장으로, 민환은 종사관으로 각각 활약하였다. 2년 뒤에는 여헌이 입암에서 인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빙계서원에 들리자 이민성은 유생들을 이끌고 가서 강론을 청하였으며, 인하여 빙계서원 원규를 정하였다고 한다. 의성의 藏待書院에 배향되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門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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