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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에훗의 죽은 후에 - 에훗의 죽음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능력을 대행한 지도자가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또 다시 이스라엘이 타락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으니 에훗의 치하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평화(3:30) 역시 끝나게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또...악을 행하매 - 사사 시대의 일반적 사회 현상(2:19)을 다시 한번 보여 주는구절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던 이스라엘(3:9)이 이처럼 또다시 죄악의 길에빠져 든 것은 마치 방금 목욕한 돼지가 다시금 오물탕 속에서 뒹구는 것과 같이 어리석고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어쨌든 이는 한번 빠져 들면 헤어나기 어려운 죄의속성을 여실히 증거해 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삼가 자신을 살펴 무릇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살전 5:22).
=====4:2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 - '하솔'(Hazor)은 납달리 지파의 지경에 속하는 북부 가나안 성읍 중 하나(수 19:36)로서 가장 강력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에 해당하였다(A.E. Cundall). 정확한 위치는 분명치 않으나 이곳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메롬 호수(수 11:5,7) 부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이전에 이미 여호수아의 군대에 의해 파괴된 후 납달리 지파의 지배하에 있었다(수 11:1-14). 한편 여호수아가 그곳을 점령할 때도 '야빈'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으나(수 11:1), 본절의 야빈은 그 당시의 왕과 동일 인물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때로부터 벌써 1세기가훨씬 넘은 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하솔을 다스렸던 '야빈'이라는 칭호의 또 다른 왕으로 보아야 한다. 아마 '야빈'(Jabin)이란 말은 애굽 왕의 공식 칭호인 '바로'(Pharaoh)나 블레셋 왕의 공식 칭호인 '아비멜렉'(Abimelech)처럼 하솔 왕을 가리키는공식 칭호였던 것 같다. 한편 그가 여호수아 군대로부터 하솔성을 어떻게 되찾아 세력을 키웠는지는 알수 없으나 아마도 납달리 지파의 지경에 남아 있던 벧세메스와 벧아낫 거민을(1:33) 중심으로 이스라엘에 대항했던 것 같다. 이방 하로셋 - '이방'에 해당하는 원어 '고임'은 '열국'(nations)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어떤 백성이나 지명에 대한 고유 명사인지, 아니면 여러 족속의 집단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개역 성경 창 14:1과 수12:23에서는 이 단어를 고유 명사로 생각하여 문자 그대로 '고임'이라 하였다. 그리고사 9:1에서는 '고임'을 '갈릴리' 지역과 동의어로 보고 '갈릴리'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고임'이란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으므로 이는 고유 명사를 나타내지않는다. 그러므로 '고임'이란 당시 '하로셋'에 거하던 가나안 여러 족속을 지칭하는듯하다. 한편 하로셋(Harosheth)이란 지명은 성경 중 이곳에만 나온다. 따라서 이곳역시 그 위치가 분명치 않은데, 디베랴 호수 남쪽의 갈릴리 평원 어느 한 지점이었던것 같다.
=====4:3
철병거 - 고대 전투에서 철제 병기의 사용은 전략 전술에 못지 않게 승리의 관건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 무기를 가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철병거를 지닌가나안 거민 중 많은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1:19). 이는 곧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가나안 평야 지대를 많이 점령치 못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철병거'는 산악 지대에서는 사용될 수 없고 오직 평야 지대에서만 사용되는 전투 장비이기 때문이다. 한편이와 관련, 당시 가나안인들이 향유했던 철제 문화에 관해서는 1:19 주석을 참조하라.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 고로 - 여기서 '이스라엘 자손'이란 전체 12지파를가리키지 않는다. 대신 하솔을 중심한 일대(2절)의 납달리지파 내지 그 지파를 중심한북부 지역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6,10절). 왜냐하면 당시 야빈이 철병거 900승으로 이스라엘 12지파 전체를 점령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학대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라하츠'는 '비틀어 짜다'는 뜻이다.이는 곧 포도즙을 짜기 위해 밟아 으깨듯 이스라엘에 대한 야빈의 압제가 매우 혹독했음을 시사해 준다.
=====4:4
랍비돗의 아내...드보라 - 랍비돗이 어떠한 자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상에 언급이 없다. 다만 그 이름의 뜻은 밝혀졌는데 곧 '번개' 또는 '횃불'이다. 때문에 일부 유대주석가 및 몇몇 학자(Wellhausen, 1844-1918, 독일의 신학자)들은 '랍비돗'이 바로'바락'(6절)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바락'이란 이름의 뜻 역시 '번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드보라는 곧 바락의 아내인 셈이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서도 드보라가 바락의 아내로, 바락이 드보라의 남편으로 언급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이상의 견해는 전혀 신빙성이 없다. 한편 또 다른 학자(Lange)는 '랍비돗'의 뜻이 '횃불'인 점을 중시 '랍비돗의 아내'란 말을 '드보라'를 수식해 주는 수식어로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를 '불꽃과 같은 여인...드보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역시 '아내'란 말을 '여인'으로 대치하는 등 지나치게 의도적인 해석이 강하다. 따라서 우리는 랍비돗을 문자 그대로 드보라의 남편으로 보아야한다. 다만 성경상에서 더 이상 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까닭은 그가 이미 죽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여선지 - 성경에서 여자로서 선지자직을 감당한 자로는 드보라 외에도 모세의 누이미리암(출 15:20)과 훌다(왕하 22:14)을 들 수 있다. 즉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언자적 기능을 은사로 받았던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 당시 선지자가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등에 관해서는 삼하 12:1-14 강해, '선지자의 사명'을 참조하라.
=====4:5
에브라임 산지 라마 - 납달리 지파의 지경에 속한 '라마'(수 19:36)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곳이다. 본절의 라마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수 18:25) 예루살렘 북쪽 약9km지점에 위치해 있다. 훗날 예레미야 선지자가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들리니 라헬이...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 31:15;마 2:18)라고읊었던 라마가 바로 이곳이다.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 '드보라의 종려나무'란 이름은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서 재판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본서 저자가 본서를 기록할 때에도그 나무가 '드보라의 종려나무'로 알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여 그렇게 칭하였을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드보라가 그 종려나무있는 곳에서 살았다는 것인지, 그곳에 앉아 재판만을 주관했다는 것인지 하는 점에 있다. 본문의 문맥만으로서는 잘 해결될 수 없다. 왜냐하면 '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솨브'가 '거주하다'란 의미와 '앉다'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려나무'가 드보라의 재판과 관련하여 언급되었으므로, 이는 그녀가 재판시마다 그곳에 앉아서 재판을 진행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더 낫다. 재판을 받더라 - 사사 시대 당시 재판하는 일은 사사의 임무 중 하나였다. 2:16 주석 참조. 즉 사사는 전쟁시에 자기 민족의 구원자 역할을 담당했지만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송사를 맡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시행될 수있도록 했다. 특별히 드보라는 여자로서 사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되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여 '대언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래서 저자는 드보라의 이름을 언급할 때에 '여선지'(이솨 네비아)라는 말을 덧붙였던 것이다(4절).
=====4:6
그런데 그녀가 멀리 북쪽 지방인 납달리 게데스에까지 사람을보내어 바락을 부른 것은 곧 지파간을 초월한 그녀의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 준다. 즉드보라는 비록 자기 지파가 아니었지만 당시 납달리 및 북쪽 지방의 지파들이 야빈의압제하에 당하는 고통을 간과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납달리 출신의 사사 바락을불러 문제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납달리 게데스 - 납달리 지파가 얻은 견고한 성읍가운데 가장 중요한 도성중 하나이다(수 19:37). 이것은 유다 지파에 속한 '게데스'와 구별되는데(수 15:23), 야빈의도성인 하솔 성에서 동북쪽 4.8km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너는...가라 - 이처럼 드보라가 바락을 불러 그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전쟁을수행토룩 한 까닭은 그 자신이 여자였기에 직접 군대를 지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때문일 것이다.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 추측컨대 이들은 하솔 왕 야빈으로부터 가장 많은 괴로움을 당한 지파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대적을 치는 데 선봉장이 되었을 것이다.한편 5장의 드보라의 노래에는 이 두 지파 외에 다른 지파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다.이로 미루어 보아 이 전투에는 납달리, 스불론 지파와 인접한 잇사갈 지파도 참여했음에 분명하다(5:15). 다볼 산 - 해발 약 528km 되는 산이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에서 남서쪽으로 약16km 떨어진 이스르엘 골짜기에 속해 있다. 초대 교회 전승(A.D. 4세기경)에 따르면예수님께서 그 모습이 변형되셨던 변화산(마 17:1-8;막 9:2-8;눅 9:28-36)이 바로 이다볼 산이라고 하는데 분명치 않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p.302). 드보라가 야빈과의 접전지(接戰地)로 이곳을 택한 이유는 아마 그곳이 하솔 왕 야빈의철병거(3절)가 다다를수 없는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4:7
기손 강 - 다볼 산과 그 부근 지역에서부터 발원하여 이스르엘 꼴짜기를 따라 흐르다가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따라서 이 강은 잇사갈, 스불론 그리고 아셀 지파의 지경(地境)을 모두 거쳐 흐른셈인데, 총 연장 길이는 약 40km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겨울의 강우기에는 풍부한 수량으로 인해 이곳 물이 범람하므로 행인들의통행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한다. 특히 이 강 주변에는 넓은 평야인 이스르엘 평지가있어 철병거가 움직이기 용이하였으니 시스라가 이곳에 그의 군대를 집결시키리라는것은 쉽게 예상되어진 것이었다. 그를 네손에 붙이리라 - 여기서 '붙이다'에 해당하는 원어 '나탄'은 '꼼짝못하게 하다' 또는 '패하게 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 대적에게 내어 주시어 패하고 종노릇하게 한 것을 '팔다'라는 말로써 나타낸것과 같은 표현이다(3:8). 즉 이는 과거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완전히 패하였듯이 이제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가 꼼짝없이 이스라엘에게 패하고 말리라는 강조적 표현이다.
=====4:8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 이와 같이 바락은 반드시 전쟁에 드보라와함께 출전(出戰)하겠다고 고집했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견해가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견해로 압축된다. (1)바락이 드보라의 예언을 믿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Bertheau). (2)바락은 대적들과 전쟁하는 것이 두려워 예언의 능력을 지닌 여선지 드보라와 동행하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G. Bush). (3)바락이하나님께 받은 소명에 대하여 자신이 그 소명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드보라와 동행하기를 요청했을 것이다(Keil, Lange). 이상과 같은 세 견해 중 가장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견해는 세번째 해석이다. 왜냐하면 모세도 과거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자신의 약점을 앞세워 거절하고자 시도했으며(출 4:10), 사사 기드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때 자신의 비천함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6:15). 사실 만약 바락이 불신앙적이거나 대적들을 정말로 두려워 했다면결코 하나님과 드보라에 의해 야빈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선봉장으로 선택될 수 없었을 것이다.
=====4:9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 이처럼 드보라가 순순히 바락과의 동행을 허락한까닭은 물론 바락을 격려하며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기 위함이었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아마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지시와 명령을 받아 바락에게 대언하기위함이였을 것이다(Matthew Henry).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그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 어떤 이는 드보라가 바락의 요구(8절)로 인해 불쾌하여 본절과 같이 말했다고 주장한다(A.E. Cundall).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본절 전후 문맥 어느 곳에서도 암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본절은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와 싸워 승리할 것이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여인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17-24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패는군사의 많고 적음이나 훌륭한 병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는믿음에 달려 있음을 바락에게 깨닫게 해주시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삼상 17:47). 게데스로 가니라 - 혹자는 여기에 언급된 '게데스'는 '납달리 게데스'(6절)와 동일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A.E.Cundall). 왜냐하면 드보라와 바락이 현재 만나서 이야기 하고 있는 장소가 바로 이 '납달리 게데스'인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성경은 분명 라마와 벧엘 사이에 거하고 있던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납달리 게데스에 살로 있던 바락을 불러온 것으로 되어 있다(6절). 따라서 이 드보라와 바락이 군사를 모아 다볼 산으로 출전하기 위해(12절) 우선 납달리 게데스로 올라간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4:10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부르니 - 이로 미루어 보아 당시 바락은 가나안 북부지방의 이스라엘 지파를 통치하였으며 많은 추종자들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바락의 권위는 분명 군사를 모집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그를 따라 올라가고 - '올라가다'에 해당하는 알라는 군대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에는 전투가 예상되는 어떤 장소로 그 군대가 진격하는 것을 가리킨다(수 7:2;삼상 24:22;왕상 9:16;14:25;20:1;대하 35:20).
=====4:11
모세의 장인 호밥 - 성경상에서 혼란을 일으켜 주기 쉬운 구절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다른 곳에는 모세의 장인의 이름이 '르우엘'(출 2:18;민 10:29) 또는 '이드로'(출3:1;4:18:18:1)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르우엘이 본명이며 이드로는 모세의 장인이 제사장이 된 후에 얻은 공식 존호(尊號)라고 주장한다. 그러면'호밥'은 누구인가? 이에 대해서 대개의 학자들은 모세의 처남인 것으로 본다. 그 근거는 '장인'과 '처남'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모두 동일한 '호텐'이기 때문인데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민 20:29 주석을 참조하라. 겐 사람 헤벨 - 모세의 장인이 바로 이 겐족 출신인데(1:16), 성경 다른 곳에서는미디안 출신인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출 2:16;3:1;민 10:29). 이로 볼 때 겐족과 미디안족은 일찍부터 상호 친밀한 유대 관계를 이루었거나 아니면 서로 동화되어 한 민족을 이룬 것 같다. 아무튼 '겐 사람'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16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드보라와 바락에 관한 기사 도중 갑작스레 겐 사람 헤벨이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이후 전개되는 시스라와의 전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자가 바로 이 '헤벨'의 아내인 '야엘'이기 때문이다(17-24절). 즉 본절은 헤벨의 아내 야엘의 가문과 신원을 미리 소개할 목적으로 삽입된 것이다.
자기 족속을 떠나 -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자손들은 팔레스틴으로 이주 후 유다 지파의 경내에서 거주했다(1:16). 그런데 헤벨은 그 가족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납달리지파의 경내인 '사아난님 상수리 나무' 곁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등지고 이스라엘의 압제자 하솔 왕 야빈과 손을 잡았다(1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그러한 헤벨의 아내를 들어 쓰사 시스라를 죽였으니 인간이 미처 헤아리기어려운 깊고 오묘한 섭리를 잘 드러내 준다.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 문자적으로 이 말은 '사아난님에 있는 상수리 나무'란 뜻이다. 무슨 사연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나무는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알려졌던 것 같다. 한편 '사아난님'(Zaanaim)은 납달리 지파의 남쪽 변경에 위치한 한장소이다(수 19:33). 오늘날 '칸 엣 투잘'(Khan et Tujjar)로 불리우고 있는데 아다미(Adami) 남동쪽 약 6.4km 지점의 '벧스안-다메섹 도로'의 중도에 위치해 있다.
=====4:12
다볼 산에 오른것 - 바락과 그의 군사 일만 명이 다볼 산을 거점으로 전투 태세를취한 것을 가리킨다.
=====4:13
시스라가...온 군사를...기손 강으로 모은지라 - 이것은 드보라의 예언이(7절)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기손 강'은 겨울 우기를 제외하고 다른 때에는거의 말라 있는 건조천(Wadi)이며, 그 주위에는 평지가 형성되므로 시스라가 철병거를배치시키기에 적당하였을 것이다. 7절 주석 참조.
=====4:14
일어나라 - 이것은 '마음을 굳게 하여 전투에 임하라'는 의미이다(수 8:7). 일반적으로 이 말은 어떤 일로 인해 심령이 위축된 사람에게 '힘을 내라'는 격려의 의미로사용되었다(수 7:10). 그런데 드보라가 이처럼 바락에게 담대히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친히 인도하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즉 드보라는 과거 출애굽 노정에서도 이스라엘을 위해 앞장서서 싸우시고 앞길을 인도해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시스라와의 싸움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해 주시리라 굳게 믿었던 것이다(출 13:21;14:14). 이는...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 즉 오늘이 20년 동안 가나안 왕 야빈으로부터 받았던 압제(3절)에서 해방되는 날이며, 그 위대한 역사는 바락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시스라를 죽인 자는 바락이 아닌 야엘(21절)인데이는 이미 드보라가 예언한 바이다(9절).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제적인 장군은 바락이 아닌 바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준다. 따라서 이 같은 사실은 하나님을 대행하여 전쟁을 수행하던 자인 바락에게 큰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또한 바락이 수행하는 전쟁에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셨다는 사실은 바로 그 전쟁이 단순히 이스라엘을압제했던 하솔을 징계하기 위한 전쟁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 하솔의 죄악을심판하기 위한 거룩한 전쟁임을 시사해 준다(신 9:3;삼하 5:24;시 68:7;사 52:12). 이와 관련해서는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을 보다 참조하라. 바락이...다볼 산에서 내려가니 - 드보라와 바락의 탁월한 전략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즉 그들은 시스라의 군대가 기손 강 평지에 집결한 것을 보고서는(13절) 다볼산 고지에 매복시켜 두었던 일만 명의 군사들로 하여금 일시에 기습 작전을 감행토록한 것이다.
=====4:15
패하게 하시매 - 이에 해당하는 원어 '와야함'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이적에 의해 그 군대가 참패당하는 것을 의미한다(출 23:27;수 10:10;시 144:6). 즉이는 과거 하나님께서 바로의 병거와 마병을 홍해에 수장(水葬) 시키셨듯이(출14:23-31) 이적적으로 시스라의 군대를 격파하신 것을 가리킨다((Keil & DelitzschCommentary, Vol.II.p.304). 이같은 사실은 여호와께서 바락 앞에서 행하시고 있다는드보라의 말(14절)과 매우 잘 어울린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도보로 도망한지라 - 이처럼 시스라가 병거를 버리고 도망친 까닭에 대해서는 5:21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기손 강을 범람케하사 그 주변 평지에 집결해 있던 시스라의 철병거와 군사들을 휩쓸어 버리게 하신 것으로나와 있다. 그러니 자연 진흙탕이 된 평지에서 철병거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버렸고 시스라는 도보로라도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초자연적 방법으로 시스라의 군대를 격파하셨는지를잘 드러내 준다.
=====4:16
바락이 그 병거들과 군대를 추격하여 - 기손 강이 범람한 물로 인하여 바닥이 질펀해지자 기동력이 떨어지고 만 시스라의 군대와 그 철병거들을 바락의 군대가 일일이추격하여 다 격멸시키려 한것을 가리킨다. 이방 하로셋에 이르니 - 시스라의 패잔병들이 도망간 곳은 '이방 하로셋'으로 시스라가 거주하던 장소였다. 2절 주석 참조. 이로 보건데 시스라의 군대는 자기들이 주둔하던 곳으로 도망쳐 원군과 합세하여 바락의 군대와 싸울 작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바락의 군대를 대항한다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이었다.
=====4:17
시스라가...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 헤벨의 가정이 거주한 사아난님 상수리 나무 곁은 게데스와 인접해 있었으므로(11절) 당연히 야빈이 거주하던 하솔과도 매우 근접해 있었을 것이다. 6절 주석 참조. 따라서 시스라가 이곳까지 도망한 것은 하솔 왕야빈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시스라가 헤벨의 가정을 찾아갔을 때 헤벨의 아내 야엘이 그를 알아본 점으로 미루어 보아 헤벨의 가정은 하솔 왕 야빈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유력한 인물들과도 늘 알고 지낼 만큼 그 지역에서 세력있는 집안이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헤벨은 자기동족 겐 족속을 보호해 주고 가나안땅에 기업을 준 이스라엘 백성(1:16)과 나아가서는 그 기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배반하고 자기만을 위해 간사하게도 이스라엘의 대적 야빈과 손을 잡고 살았음에 틀림없다. 11절 주석 참조. 화평이 있음이라 - 비록 공수 동맹(攻守同盟) 관계는 아니지만 야빈과 헤벨 사이에두터운 친교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서로 다툼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II.p.143).
=====4:18
나의 주 - '주'에 해당하는 원어 '아돈'은 '주권자', '최고 통치자' 또는 '주인'이란 뜻으로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 말이다(신 10:17;시 136:3;사1:24). 여기서 야엘이 시스라를 가리켜 '나의 주'라고 말한 것도 그가 곧 자신의 생명까지 관장할 수있는 자기 집안의 최고 통치자라는 뜻이 있는 바 이는 시스라에 대한최고의 호칭이 아닐 수 없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 이러한 말만으로써는 야엘이 처음부터 시스라를 속이려 든 것인지 아니면 처음에는 진정으로 시스라를 환대하며 그의 처지를 위로하였으나 뒤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사 마음을 돌이켜 먹고 시스라를 죽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야엘은 시스라를 안심시키며 그에게 최상의 접대를 베풀었는데 이는 결정적으로 시스라가 방심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II.p.143).
=====4:19
내게 물을 조금 마시우라 - 바락의 추격을 피해 도망하느라 시스라가 얼마나 기진한 채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부분이다. 그가 범죄한 결과 이 땅에서도 이처럼 갈증을 느꼈는데, 하물며 죽은 후에 겪을 영원한 갈증이 어느 정도일런지는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눅 16:24). 젖부대 - 요세푸스(Josephus)는 이 부대 속에 있는 우유는 상한 것 즉 이미 변하여시큼한 맛이 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탄훔(R. Tanchum)은 이 젖부대 속에있는 우유는 완전히 지쳐 있는 사람이 먹을 때 그 사람을 취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Vol.II.p.305). 그러나 드보라의 노래에 나타나있듯이(5:25) 이것은 엉긴 우유 곧 반쯤 '버터'가 된 최고급 우유임에 틀림없다(A.E.Cundall). 그리고 그 우유를 담은 부대는 유목민들이 여행시 포도주나 물, 우유 등을넣어 가지고 다니던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것인 듯하다.
=====4:20
장막문 - 헤벨은 집을 짓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장막을 지어 거주했는데(11,18절),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직업이 유목이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본절의 '장막문'은아브라함이 유목 생활을 할 때 장막을 치고 장막문 앞에서 쉬었듯이(창 18:1) 유목 생활의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단어이다. 네게 묻기를...없다 하라 - 이처럼 시스라가 헤벨, 즉 남자의 거실을 피해 야엘의장막(17절) 곧 여자의 거실에 숨어 들고서도 또다시 보안을 지켜 주도록 부탁한 것은그가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있음을 반증해 준다. 그러나 정작 그가 안심하고 몸을 의탁한 야엘의 거실이 바로 그의 사형 집행대가 될 줄이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나(롬 8:28) 반대로 하나님의 미움을 입은 자는 모든 일이 엉켜서 악을 낳기 마련이다. 즉 시스라는 야엘을 통해서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를 찾아내어 심판하신 것이다(시 139:7,8).
=====4:21
본절에서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자기들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시스라를 죽인 것은그의 남편이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인과 손을 잡은 것에 대해 속죄하는 의미가 내포된 행동이라고 여겨진다. 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시 127:2). 그러나 여기 시스라의 잠은 평안한 휴식을 취하는 잠이 아니었다. 그는영원한 죽음의 잠을 앞에 놓고서 육신의 잠을자고 만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낯을피해 다시스로 도망가던 요나가 배 밑창에서 곤히 잠을 잔 것과 흡사하다(욘 1:5).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 혹자에 따르면 고대 근동에서 생활하는 유목민들에게있어서 장막 세우는 일은 주로 여인들이 하던 일이므로 여인들은 망치로 말뚝을 박는것에 익숙해 있었다고 한다(G.F.Moore). 그렇다면 야엘이 장막 말뚝으로 시스라의 살쩍, 즉 머리의 관자놀이(temple) 부분을 꿰뚫은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하나 그다지 힘든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야엘은 시스라를 추격하는 바락에게 잠든 시스라를 넘겨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직접 그를 죽인 까닭은 아마 바락의 도착이지연되는 동안 시스라가 원기를 회복하여 도망친 후 다시금 힘을 규합하여 이스라엘에대항할 것을 염려했던 데서 비롯되었음에 틀림없다.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 여기서 '기절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야에프'는 '탈진하다'는 뜻이다. 즉 시스라는 관자놀이에 말뚝이 박힌 즉시로 까무러쳤으며 그 후 발악과 더불어 죽어 갔던 것이다. 이로써 드보라의 예언(9절)은 온전히 성취되었다. 한편 혹자는 야엘이 시스라를 안심시켜 깊이 잠들게 한 후 아주 잔인 무도한방법으로 그를 죽였다 하여 그녀의 행동이 사단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본문의 문맥과는 상치되는 주장인데 곧 야엘의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심판의 손길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야엘의 마음을 주장하사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구원, 악인에 대한 심판을 위해 이 일을 하도록 인도하셨다. 따라서거기에는 어떠한 미움이나 사악함 그리고 개인적인 복수심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그러기에 드보라와 바락도 그의 '감사 노래'(5장)에서 야엘의 신앙과 용기를 칭송한것이다(5:24-27).
=====4:22
바락이 시스라를 따를 때에 - 즉 바락이 시스라가 도망친 것을 알고서는 그 뒤를추격, 이방 하로셋과 그 일대를 수색하던 때를 가리킨다(16절). 바락이...보니 시스라가 죽어 누웠고 - 이로써 바락 역시 드보라의 예언(9절)대로시스라를 죽이는 영예는 자신이 취하지 못하고 한갓 여인에 불과한 야엘에게 넘어갔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4:23
하나님이...패하게 하신지라 - 전쟁의 모든 과정에서 드보라와 바락 그리고 야엘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활약 때문에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방인을 징계하며 언약의 백성을 구원한 장본인은 바로 하나님이시니 그분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서 저자는 본절을 삽입시켜 그 사실을 강조했던 것이다.
=====4:24
마침내...진멸하였더라 - 이스라엘이 정확히 언제 가나안 왕 야빈을 완전히 격멸시켰는지는 성경상에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이후로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는 기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보아 가나안 왕 야빈의 진멸 사건은 가나안인들이 힘을 잃고 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에 분명하다.
에훗 사후 다시금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원주민인 하솔 왕 야빈의 압제를
받던 중(1-3절) 여선자자이면서 동시에 사사인 드보라(4-10절)와 그의 조력자 바락
(11-16절) 그리고 하벧의 아내 야엘(17-24절) 등의 활약으로 그 압제에서 구원받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장에서 특별히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드보라나 야엘과 같은 여인들의 활
약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4-6, 17-24절). 본래 이스라엘 사회에
서 여자들은 항상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여겨졌다(출 21:7-11). 그래서 심지어 여
자는 남편의 집에 있을 때 곧 결혼하여 남편의 보살핌을 받을 때 평안을 얻은 것으로
까지 여겨졌다(룻 1:9 ; 3:1).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장에서 드보라는 여선지자이면서
이스라엘 백성드르이 송사를 사사의 직위를 얻었으며, 연약한 여자 야엘은 군대 장관
시스라를 죽이는 대활약을 보여 주었다. 이 외에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그 사회에서 구출해 내기도 하엿다(에스더 8, 9장). 물론 이상과 같은 사실
은 성경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특별한 경우들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깊
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남녀 평등의 원리를 귀하게 여기시며 필요에 따라서는 본문에서처
럼, 여성을 들어 쓰시어 큰 일을 이루신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남
자는 여자의 머리'(엡 5:23)라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위계 질서(位階秩序)를 부정
하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
았으며 동일한 인격을 소유한 자라는 점에서 서로가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창
2:18-25 강해 , 창조론에 나타난 성경적 남녀 관계>.
(2) 여성이 남성에 비해 신체적, 기능적 여러 면에서 연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
께 쓰인 바 되면 감히 남자도 할 수 없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남자든 여자든 모두 하나님의 장중에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
는 점이다. 그럴 때 우리들은 분명 이 세상이 능히 감당치 못할 놀라운 주의 일꾼들
이 될 것이다(히 11:38).
1. 야빈의 압제(4:1-3)
이스라엘 백성은 사사 에훗 치하에서 80년 동안 대적의 시달림 없이 평안을 누렸다
(3:30). 그러나 그들은 에훗이 죽자 다시금 우상 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
시켰다(1절). 결국 이스라엘은 그 죄의 대가로 일전에 가나안 정복시 한번 격멸했던
적이 있는 하솔(수 11:10)의 야빈 왕에 의해 다시금 20년 동안이나 압제를 당해야 했
다(3절).
이러한 본문은 죄악의 뿌리가 얼마나 깊으며 강한가를 잘 보여 준다. 그리고 한편으
로는 사람의 죄의 권세에 얼마나 쉽게 복종하며, 더우기 반복적으로 죄를 짓기 쉽게
복종하며, 더욱이 반복적으로 죄를 짓기 쉬움을 시사해 준다. 사실 인간은 평안해지
면 그가 일전에 겪었던 어려울 때의 일을 잊기 쉽다. 더욱이 80년 동안 대적으로부터
아무런 어려움도 받지 않고 살아왔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으로 해이해진 것은 당
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성향을 아시고 가
나안 땅에 열국을 남기시어(2:21)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할 때 그들을 징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코자 의도하셨던 것이다(3:1-4).
본문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는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다
시 회개하게 되었다(3절). 이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구원자를 보내 주셨는데, 곧
여사사 드보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한 백성을 끝까지 버리시지
않고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할 때
에는 언제든지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본장 뿐만 아니라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이것이 본서의 주제이기도 하다.
성도의 고난 - 사사 시대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계 그리
고 그에 따른 이스라엘의 회개 및 하나님의 구원 등이 반복되는 악순환으로 점철(點
綴)되어 있다. 사사 시대 이전 출애굽 역사에 있어서도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 반복되
었었으며, 사사 시대 이후 왕정 시대에도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의 반복에도 불구하
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지 않고 회개할 때에는 언제든지 구원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구원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 회개할 때 주어진 것이었다는 점이다. 즉 하나
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품을 떠날 때 그들에게 고난을 주셔서 회개하도록 인
도하시며(신 8:5)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성도들이 하나님께 범
죄하여 그 악한 길에서 떠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그 길에서 돌이키
도록 고난의 풀무 속으로 성도들을 던지신다.
한편 이와 달리 하나님으로브터 떠나지 않은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종종 고난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악인들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하시는
때도 있다. 그 한예로 요시야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자기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죄우로 치우치지 아니한 사람이었으며(왕하 22:2). 모든 우상의 산
당을 제하고 성전을 수축하기도 하며 성전 수축 때 발견한 율법책의 내용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며 회개했던 인물이었다(왕하 22:11). 이와 같이 전 인격을 다해 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이스라엘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왕하 23:25). 그런데도
그는 애굽 왕 느고와의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하므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왕하
23:29).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은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있
는 한 가장 비참한 고난을 다당했다(욥 1:13-2:13). 또한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은
안수하여 낫게 하였으나 자신은 사단의 가시로 인해 고생해야만 했다(고후 12:7).
이와 같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자들에게도 고난이 따라온다. 차이가 있
다면 각자에 따라 그 고난의 의미가 다를 뿐이다. 즉 요시야의 전사(戰死)가 새 언약
시대 곧 더 이상 인간 통치자가 아닌 하나님께서 그 통치자가 되시는 영적 이스라엘의
도래를 예시한 것이라면 욥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욥 42:5). 그리고 바울의 고난은 그로 자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며(고후 12:7), 하나님의 능력으로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을 깨닫게 하기 위
함이었다(고후 12:9).
아무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주신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된 것이므로
어떠한 형태의 고난이든지 서로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징계가 없는 자는 사생자라고 선언했던 것이다(히 12:8). 왜냐하면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기에 징계하며 채찍질하기 때문이다(히 12:6 ; 계 3:19). 그러므로 우
리 성도들은 고난을 받을 때, 당장 그 고난의 의미를 알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원망
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 39:7-18 강해, '애매히 받는 고난'을 참조하라.
2. 여사사 드보라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바락(4:4-11)
야빈의 압제로 인해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구원자로 선택된 여사사
드보라의 예언을 따라 바락이 군사를 데리고 다불 산으로 올라가서(6, 9, 10절) 야빈
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일전(一戰)을 벌일 준비를 마치는 장면이다.
이처럼 바락은 여선지이자 사사인 드보라의 예언을 무시하지 않고 압제받는 자기 백
성을 위해 나서기로 결정함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케 된다(12-16절). 즉
그가 압제에 시달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 없는 무기와, 전쟁을 위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백성들을 데리고 병거 900승을 갖춘 시스라의 군대와 싸운다는 것은 오합지
졸(烏合之卒)과 정예 부대의 싸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락은 드
보라의 예언, 곧 하나님께서 시스라의 군대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시리라는 예언을
믿음을 믿음으로써 전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바로 이 믿음과 자기 백성을 위한 희생
정신의 결과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를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엘라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블
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징계하고자 물맷돌 다섯 개와 막대기만을 가지고(삼상 17:40)
투구와 갑옷을 입고 칼과 활, 방패로 무장한 거인 골리앗에게로 나아갔다. 이러한 다
윗의 행동은 인간적인 판단으로 너무도 무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
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는 다음으로 골리앗과 대적했기에(삼
상 1:47)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복 주시고 그들의 신앙 성장을 이루기 위하
여 신앙의 결단을 요구할 때가 종종 있다. 이 요구는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도무지 합
당치 않게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결단하는 참된
지혜를 발휘한다면 우리는 그 요구를 이해하게 되며, 하나님의 크신 일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순종의 축복 - 바락은 여선지 드보라의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고 그 말씀
대로 순종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
을 이방인의 압제에서 구원한 영웅이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은 성경에 무수히 많이 나온다. 노아는 방주를 지어 장차 올 대
홍수를 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였기에 자기와 자기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다
(히 11:7). 또한 아브라함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고향 땅을 떠나
나그네 생활을 한(히 11:8, 9) 믿음의 조상이었다. 심지어 그는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 했을 때도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체험
할 수 있었다(창 22:7-14). 이외에도 모세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
뜨리지 않고 다 지킴으로써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수 11:15).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성경에는 불순종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자들도 언급되어 있
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여호와 앞에 드린 결과로 여호와의 불에 타서 죽임을 당했다(레 10:1, 2). 그리고 유
다 지파의 아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 성을 점령한 뒤 여호와께 바쳐진 것을 아무
도 취할 수 없다는 여호수아의 말을 불순종함으로써 죽임을 당했다(수 7:12-15). 또한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아무 것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
므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왕위를 다윗에게 빼앗기고 말았다(삼상 15:23).
그러나 이스라엘은 역사상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가장 큰 저주를 받은 자들은 역시 출
애굽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그들은 출애굽 노정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
였으므로 당시 순종의 본을 보인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모두 약속의 땅을 밟을 수
있는 축복에서 제외되었다(히 3:16-19).
이상의 불순종한는 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무시했으며, 심지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반면 순종하는 자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이 하나
님을 인정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잠 3:6). 그런데 불행이도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
과는 죽음과 멸망, 심판과 징계하였지만 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이었다
(출 19:5, 6 ; 신 5;29 ; 수 1:8 ; 왕상 3:14 ; 마 12:50 ; 요 14:23 ; 벧전 1:22).
결국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방편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남은 것이라곤 우리 스스로가 순
종과 불순종 이 두 가지 중 어느것을 선택하느냐는 것 뿐이다. 과연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길을 택하는 어라석음을 범할 것인가 ?
3. 이스라엘의 승리와 여걸(女傑) 야엘(4:12-24)
사사 드보라의 예언대로 순종한 바락이 시스라의 군대를 파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을 야빈의 압제에서 구원하는 장면이다(12-16절). 이러한 전쟁은 연약한 한 여인에
불과한 야엘의 의해 시스라가 피살당함으로써 절정에 달한다(17-24절). 하지만 이 사
건은 이미 드보라가 예언하였던 바이니(9절) 결코 우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중에 계획 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혹자는 여기서 야엘의 행위와 관련,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1)
그녀는 시스라를 속였고(20, 22절), (2) 그를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기 때문이다
(21절). 사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을 기독교 윤리의 차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쉽게 생각해서 그녀가 하나남의 백성들을 위해 일
한 것이므로 그녀의 잔인한 행동과 속임수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어떤 사람이 성도들을 위해 세상 사람을 속이거나 곤경에 처하게 하
며, 심지어는 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해도 그 사람의 행동이 합리화될 수 있는가 ? 상
식적으로 생각해도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 5장에서 드보라는 야
엘의 행동을 극찬하면서 그녀에게 축복을 빌어 주었다(5:24). 뿐만 아니라 드보라는
야엘이 시스라를 죽인 과정에 대해서도 노래했다(5:25-27).
결국 이 문제는 이스라엘의 전쟁관을 이해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스
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 전쟁을 할 때, 단순히 영토 확장이나무력 시위를 목적으로 행
하지 아니하였다. 대신 하나님을 머르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징계하며 그들에게 이
스라엘의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기 위한 목적에서 행하였다(신 7:1-5).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시 그 땅의 모든 족속을 진멸시키거나 쫓아내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모압을 쳐서 사로잡은 자를 매우 잔인하게 죽였다(삼하 8:2). 이
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수행한 전쟁은 '거룩한 전쟁'(Holy War)이라 불리운다
<수 5:13-15 강해, '성전'(聖戰>. 그리고 야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여걸(女傑)
로 칭송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영적인 전쟁을 하는 성도들에게
도 적용된다. 즉 성도들은 사단의 세력과 싸움에 있어서 죄악의 뿌리를 뽑아 버라고
(살전 5:22)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킨다는 의미에서 날마다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
고 있는 것이다.
가장(假裝)된 친절 - 본문에는 야엘의 친절한 방심에 시스라가 불의의 일격을 받고
선 죽임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세상 역사에서 뿐 아니라 성경 역사에서도 사
람들이 본래 의도를 숨기기위해 가장된 친절을 베푸는 장면이 가끔 목격된다. 기브온
거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위장 전술로써 여호수아를 속였다(수
9:3-15). 이때 여호수아는 그들과 화친을 맺는 문제에 대하여 여호와께 묻지 않고 자
신의 뜻대로 결정함으로써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수 9:14). 그리고 다윗과 군대장
관 요압은 아브넬을 속여 그가 안심하고 있을 때 그를 살해 했다(삼하 20:10) 이 외
에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 역시 가장된 친절의 표, 곧 입맞춤으로써 제 스승을 원수
에게 팔아 넘겼다(마 26:47-50).
그런데 이와 관련 우리가 명신해야 할 것은 거짓의 아비인(요 8:44) 사단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고후 11:14) 하나님의 자녀를 미혹하여 넘어뜨린다는 점이다.
즉 사단은 하와로 하여금 범죄케 했을 때와 같이 죄악의 요소들이 매우 아름답고 이로
운 것처럼 가장을 해 인간들에게 접근한다(창 3:6). 이러한 예는 분열 왕국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의 정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아들 로호보암의 학
정(虐政)에 반항하여 이스라엘 11지파를 데리고 따로 북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그
다음 그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왕상 12:28)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신'이라 하며 섬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레위 지파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고(왕상 12:28, 31), 절기도 유다 절기와 비슷하게 정했다(왕상 13:33).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선 진정한 여호와 신앙의 소산인 것처럼 보였었다.
이상에서처럼 사단의 거짓된 가르침은 모든 좋은 것으로 위장되어 있다. 사단은 그러한 것들로 서서히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의 노예로 삼으려 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영적 무장을 하고 영안(靈眼)을 깨쳐 그러한 사단의 위장 전술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요일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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