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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
여호와께서...말씀하셨으며 - 본문의 화자(話者)를 누구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누인다. 먼저 이스라엘 혹은 고레스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 근거는 본절에 나오는 '부르셨고', '이름' 따위의 표현이 분명히 이스라엘이나 고레스를 가리키는 43:1;45:3과 연관성을 나타낸다는 점이다(Whybray). 반면에 메시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그 근거로는 43:1;45:3과는 달리 본 문맥이 종으로 오신 메시야를 요청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들고 있다(Barnes, Fausset, Clark). 우리는 후자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신약은 예수께서 그의 출생 전부터 메시야의 사역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출생 전 하나님으로부터 그 이름을 부여받았던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마 1:21;눅 1:31). 42장 이후 일반적인 용어들로 그 특성과 사역이 암시되었던 메시야는 본장에서부터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그가 감당할 사역을 선포하고 있는데, 그 선포의 내용은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 나라에도 구원 사역이 확장된다는 것이다.
=====49:2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 성경에서는 하나님 말씀의 설득력과 능력을 나타낼 때 '찌르는 것', '검' 따위에 비유한다(전 12:11;히 4:12). 한편, 계 1:16;19:15 등에서 요한은 본문을 인용하여 구세주를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 바로 앞 구절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할 때 '나'는 칼과 같은 능력있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겠다. 하나님은 망토에 칼을 숨기듯 메시야의 칼과 같은 말씀을 숨기셨다가 적절한 때 그 말씀을 내실 것이다(Hengstenberg).
=====49:3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 여기 '종'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1)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유대인'으로 보는 견해인데(41:8)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는 선포에 근거를 둔다(44:23, Rosenmuller). 이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이 종에 대한 언급으로 나오는 후속절의 내용이 결코 유대인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본서 저자인 이사야로 보는 견해이다(Grotius, Dathe). 이 견해는 '이스라엘'이란 호칭을 이사야에게 붙여줄 근거가 희박하다는 점에서 쉽게 반박된다. (3) 메시야로 보는 견해이다. 사실 후속절들에 나오는 이 인물에 대한 묘사와 신약에 나오는 설명(마 13:57;눅 2:32)은 메시야와 일치하고 있는 특히 7절에 열방의 왕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언급은 메시야 외의 다른 인물을 적용시키기 힘들다는 점을 확정짓는다. 문제는 '메시야'에게 '이스라엘'이란 호칭이 붙여진 점인데 한 개인인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란 민족의 호칭이 부여되었듯이, 사탄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의 머리가 되신 메시야에게 영적 의미의 이스라엘이란 호칭을 부여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될 만하다 하겠다.
=====49:4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 메시야 당시 팔레스틴 땅의 인구 수에 비해 결국 그의 사역을 통해 믿게 된 자의 수가 너무 적을 사실을 내다보는 언급으로 이해된다. 성경은 메시야의 부활을 믿는 수준에 이르렀던 자의 수가 대략 500여 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측케 한다(고전 15:6). 나의 신원이...하나님께 있느니라 - '나의 심판이 여호와와 함께 있고 나의 상급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원문 직역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메시야의 사역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상급을 내리신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메시야의 수고와 고통이 결국에는 목적할 만큼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는 결코 낙심하거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42:4;50:7-9). 메시야의 고난과 십자가 사역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의 사역을 통하여 얻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되었다(53:10-12;벧전 2:23).
=====49:5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모이게 하시려고 - 양치기가 그의 흩어진 양들을 혹은 암탉이 그의 병아리들을 다시 모으는 장면에서 따온 비유이다:"예루살렘아 예루사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깨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마 23:37). 메시야 예수께서 땅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기 위함이었다.
=====49:6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이르게 하리라 - 혈통적 이스라엘을 회개시키는 일은 메시야가 궁극적으로 이루실 과업에 비해서는 너무 작은 일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거듭된 반역으로 한 혈통적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구원은 막을 내렸고 이제 그 사역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온 세계를 대상으로 하되 메시야를 구세주로 믿는 개개인들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구원 사역은 이어질 것이다.
=====49:7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 종으로 오실 메시야의 특징을 한마디로 잘 요약하고 있는 구절인데, 좀더 자세한 묘사는 53장에 나온다.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보고 모든 이방 권세자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가리킨다.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 표현이다.
=====49:8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 갑자기 시제가 완료형이 되었다. 메시야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장면이 선행되어 있음을 짐작케 하는 표현이다. 은혜를 구하는 장면이란 다름 아닌 메시야의 대속적 죽음을 가리킨다. 메시야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가리킨다. 메시야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근거를 마련하셨다. 이와 같은 메시야의 대속 사역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은혜를 베푸실 것을 확신하는 의미에서 저자는 완료형으로 표현하고 있다.
=====49:9
잡혀 있는 자 - 영적 우매에 사로잡혀 있는 자를 가리킨다. 메시야께서 대속적 죽음을 죽으시고 인간의 죄를 속하신 1차적 이유는 영적 우매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을 해방하시기 위함이었다(42:7). 길에서...것인즉 - 여기 '길'이란 광야를, '자산'이란 나무,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을 각각 가리키는데, 그곳에 푸른 초장이 있다는 묘사는 후속절에 나오는 그 양떼를 먹이시는 목자되신 메시야의 이미지와 조화를 이룬다. 비록 메마른 광야를 다닐지라도 참목자되신 그리스도가 있으면 그 양떼들은 목마르거나 굶주리지 않는다는 영적 의미가 숨어 있다.
=====49:10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 이것은 사막을 여행하던 대상(隊商)이 쉴만한 그늘이나 수풀을 만나게 되는 것을 연상케 한다(4:6;14:3;25:4;32:2). 목자되신 메시야를 통해 부여되는 보호, 쉼, 기쁨 등을 가리키는데, 신약에서도 동일한 이미지가 나온다:"...해나 아무 뜨거운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계 7:16).
=====49:11
모든 산을 길로 삼고 - 여기 '산'은 장애물을 상징하는 바, 본문은 그 장애물을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혹자는 여기 '산'을 복음 전파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로마라는 한 나라에 복속되었던 애굽, 시리아와 같은 큰 나라들로 보기도 한다(Vitringa).
=====49:12
시님 - 성경에 한 번만 등장하는 용어이므로 이곳이 정확히 어딘지를 규명하기란 불가능하다. 70인역(LXX)은 '페르시아'로, 갈대아역은 '남부'로, 또 다른 학자는 '팔레스틴의 남부'로 각각 보고 있다. 특이할 만한 견해는 오늘날의 '중국'으로 보는 견해인데 이 견해는 당시 아라비아나 시리아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의 중국은 '시님'과 그 음역이 비슷한 '신', '친', '치니' 등으로 불리웠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Gesenius). 이렇게 견해가 엇갈리지만 분명한 것은 이곳이 팔레스틴으로부터 먼 곳이라는 사실이다. 이방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 혹은 이방인이 메시야의 복음을 듣고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의 구성원으로 소속될 것이다.
=====49:13
하늘이여 노래하라...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 이것은 하나님께서 무생물인 자연을 그의 성가대로 부르신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 '위로'란 문자 그대로 억울하거나 힘든 경험을 한 사람에게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베푸는 정도의 선한 말이나 행동이 아니다. 본서의 특징은 동일한 사상을 계속 반복 심화시킨다는 점인데, 이곳과 유사한 사상을 피력하고 있는 44:21-23에 의하면 '위로'란 죄사함이다. 또 본서는 '의'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본서에서 '의'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그 무엇이다. 그런데 본서는 동시에 그 '의'가 메시야의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만족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할 때 여기 '위로'란 메시야의 대속적 죽음을 통한 죄인들의 죄사함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놀라운 사실 때문에 자연까지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그 백성을 메시야를 통하여 구속하시는 근거는 그의 언약이다. '그 백성'이 언약적 용어라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49:14
시온 -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포로지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마치 하나님이 그들을 그곳에 영원히 버려두시고자 한 것처럼 불평할 사실이 기록되고 있다. 본서의집필 시점은 포로로 잡혀가기 100여 년 전인데, 그 성취의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완료형이 사용되었다.
=====49:15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보다 훨씬 승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표현은, 없는 사실을 일부러 가정안 것이 아니다. 인륜이 땅에 떨어지는 오늘날의 세태에서도 가끔 볼 수 있거니와, 당시 이방 부모들 가운데는 형편상 그의 어린 자녀를 버려서 죽어가게 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한다(롬 1:31, Barnes).
=====49:16
손바닥에 새겼고 - 손바닥은 자주 들여다볼 수 있게끔 가까이에 있는 것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 이 표현도 계속 시선을 떼지 않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결국 본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로부터 멀리 계시거나 무관심하지 않다는 사실을 밝힌다.
=====49:17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 원문 직역은 '네 자녀들은 서두를 것이다'이다. 무엇을 하기 위해 서두르느냐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 '자녀들'로 번역된 '바나이크'는 '너의 아들들'로 또는 '너의 건축자들'(70인역)로 번역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서두르며 하는 일이란 건축에 관한 것이라는 암시를 추측케 한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포로 이스라엘이 그 무너진 성벽과 성전을 수축하기 위하여 서둘러 귀환할 사실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
=====49:18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 원문 직역은 '살아 있는 내가 말하노니'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맹세의 중요한 한 형태인데, 이것은 이 맹세에 따르는 예언이 반드시 성취될 것에 대한 엄중한 확신을 내포한다(렘 22:24;겔 5:11;14:16, 18, 20;16:48). 네가 반드시...신부처럼 할 것이라 - 성경에서 시온은 흔히 신부에, 개심자들은 신부의 장식품에 각각 비유되고 있다(62:3;말 3:17). 여기서 시온의 자녀들이란 1차적으로 포로 귀환할 이스라엘 백성을, 2차적으로는 그리스도에게로 개심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이 후자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완전한 회심을 이루는 수단이 될 것이다(미 5:7, 8;롬 11:12-15).
=====49:19
거민이 많으므로 좁게 될 것이며 - 1차적으로는 귀환할 백성으로 인해 그 땅이 붐비게 될 것을 가리키나, 영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될 진정한 개심자들이 무수히 많을 것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본 암시는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주셨다(창 12:1-3;13:14-17 등).
=====49:20
고난 중에 낳은 자녀 - 원문 직역은 '너희의 사별(死別)의 아들들'이다. 이는 남편과 사별한 사실보다는 자녀와 사별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문은 1차적으로 전쟁과 기근으로 말미암아 많은 자녀들을 잃어버린 예루살렘이 이제는 각처에서 돌아온 백성들로 크게 붐비게 될 것을 예언하는 말이다(Whybray). 그리고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십자가 수난 덕분에 믿음을 지니게 될 성도들에 대한 암시로도 이해된다.
=====49:21
누가...생겼는고 - 이것은 1차적으로는 예기치 못한 회복을 목도한 시온의 즐거운 비명이며, 2차적으로는 영적 이스라엘의 행렬이 이방 각처에서 교회로 이어질 사실에 대한 암시이다. 이러한 사실에 따른 탄성, 비명은 행 10:45에서 가장 먼저 성취되었다:"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Fausset).
=====49:22
열방을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 손을 쳐든다는 것은 환영의 표시이다. 하나님은 이방인이 메시야를 받아들이는 복된 대열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을 부르고 환영하신다는 것이다(11:11). 그들이 네 아들들을...올 것이며 - 어느 정도 자란 아이는 어깨에 올려 놓고 아주 갓난 아이는 가슴에 안은 모습을 연상케 하는 이 표현은, 이방인들이 혈통적 이스라엘과 함께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에 구성원으로 가입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49:23
본절의 이미지들은 보호, 복종 등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땅 위의 권세잡은 자들에 의해 보호받고 또 그들을 복속시킬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일례로, 이는 기독교가 로마의국교(國敎)로 공인된 사실이나 기독교의 영향력이 로마 전체에 미쳤던 사실은 생각하면 이해에 도움이 되겠다.
=====49:24
용사의...있으랴마는 - 바로 뒤에 강한 긍정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부정의 문구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포로된 백성을 해방시킬 뿐 아니라 나아가 신약 교회 시대에 핍박 받는 그의 성도들을 핍박으로부터 보호하실 것에 대한 강한 암시이다(Fausset, Clark).
=====49:25
대적하고...구원할 것임이라 - 문자적인 뜻은 '싸워서...구원할 것이다'이(54:17). 전쟁을 연상케 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세상 군왕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무기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바로 그것이었다. 그 무력해 보이는, 그러나 진정 강한 그 무기를 가지고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셨다.
=====49:26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 적의 자중지난(自中之亂)을 암시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대적은 서로 치고 받아 스스로 멸망할 것이다(계 16:6).
앞에서 완고한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사역'을 예언한 바 있는
저자는 이제 본장에서 구원을 성취할 새로운 인물을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즉 종의 성품과 사역, 그리고 이스라엘에 주는 위로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와같이
본장은 신비의 인물인 '종'이 그 주인공이기 때문에 흔히 '종의 노래'라고 불리워진
다.
이러한 본장의 특징은 몇 개의 주요 단락들이 서로 다른 인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1-4절의 경우 인용구의 성격을 띤 3절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1인칭과3인칭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다. 5-12절의 경우에는, 1인칭 및 3인칭 동사와 대명사로 시작
하여(5절) 2인칭 남성 단수 대명사로 바뀌었다(6-8절) 다시 3인칭 복수로 변화되고 있
다(9-12절). 또한 14-21절의 경우에는 시온을 청중으로 잡고 있는 2인칭 여성 단수 대
명사가 사용되고 있다. 이와같이 대명사와 동사에 있어서 서로 다른 인칭들을 사용함
으로써 저자는 여호와의 종의 사역이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음
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본장에서는 종의 사역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
을 가벼운 일로 묘사하는 과장법이 사용되고 있다(6절). 뿐만 아나라 구원의 확실성을
심어주기 위해 두 차례의 질문법이 쓰여졌다(15, 24절).
한편, 본장의 독특한 시각은 종말론적 관점의 소유이다. 저자는 본장 예언이 일차
적으로 역사적 상황에서 이루어질지라도 진정한 성취는 주의 재림 때에 있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종의 사역에 대한 찬양을 나타내는 13절을 중심으로 종
의 신분과 사역의 결과를 진술하는 전반부(1-12절)와 그 진술을 근거로 이스라엘을 향
해 위로를 전달하는 후반부(14-26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본장이 강조하는 내용은 '여호와의 종'의 등장이다. 저자는 40장 이후에
계속해서 포로 귀환을 주요 주제로 다루면서 구원의 대행자로서 고레스를 제시해왔다
(43:14;44:28;45:1-5, 13;46:11;47:14). 바사 왕 고레스는 일시적으로 하나님이 선택
한 이스라엘의 구속자였다(45:1). 반면에 본장은 고레스로 예표되었던 인물로서 이스
라엘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의 영원한 구원자가 되실 메시야에 대해 적극적으로 소개하
고 있다(42:1-4;빌 3:20). 물론 저자는 '종의 노래'로 불리우는 42장에서 이미 메시야
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거기서는 암시적인 의미를 지닌 함축적 용어들이 사
용되어 메시야의 형체가 희미하게 드러났다(42:2-4, 6, 7). 이에 비해 본장은 사역의
내용을 암시하는 적극적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4, 6-8, 13절) 메시야의 모습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럼으로써 포로지의 이스라엘에게 보다 큰
위로와 소망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본장은 몇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종의 신분과 사역 및 그 결과(49:1-13)
전 단락(48:20, 21)에서 고레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구원의 이미지를 사용해 새로
운 인물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였던 저자는 이제 본 단락에서 '여호와의 종'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특히, 종의 출현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과 밀접한 연관
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종의 사역의 우주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조의 신분에 대한 진술(1-3절), (2) 메시야 사역에 대한 짧은 진술(4절), (3) 종
의 사역의 핵심(5-7절), (4) 종의 사역의 결과(8-12절), (5) 찬양에로의 초대(13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본 단락의 특징은 화자가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자꾸 바뀌는 듯
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메시야의 사역 내용은 영적 이스라엘에게 적용되
는 측면과, 예표적 인물인 고레스와 연관되는 측면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제 본 단
락의 핵심적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종의 사역의 범위:40장 이후 각 장들의 저변에 깔린 기본 사상은 이스라엘의
바벧론으로부터의 포로 귀환이었다. 이제 저자는 서두부터 말미에 이르기까지 온 인류
에 염두에 두고 종의 사역을 설명한다. 특히 1절의 '섬들','원방 백성들', 6절의 '이
방' 곧 '땅끝까지 이르게 될 구원'에 대한 업급, 7절의 '열왕들의 종에 대항 부복',
12절의 '원방', '북방', '서방' '시님' 등에서 몰려들 피구원자들에 대한 언급 등은
본 진술을 뒷받침한다. 종은 편협한 민족주의에 의해 제한되지 않고 범세계적인 차원
의 구원을 성취시킨다.
(2) 종의 사역에 대한 신약적 성취:본 단락에서 언급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신약
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까) '복중에서 나오기 전에 그 이름
이 알려졌다'(1절)는 언급은 탄생 이전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가르쳐줌
으로써 성취되었다(마 1:21). (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들고'(2절)는 예수님
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권세 있는 말씀을 선포한 사실에서 드러난다(마 7:29;
막 1:22). 바울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 불법한 자를 '그 입의 기운으로' 죽이신다고 하
였다(살후 2:8). 사도 요한 역시 그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는 영광 중의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말한다(계 1:16;19:15, 21). (따) '영광을 나타내리라'(3절)는 하나님이신
메시야가 세상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심으로 성취되었던(요 1:14).
(마) '헛되이 수고 하였다'(4절)는 사역 말기 갈릴리의 많은 군중들이 더 이상 따르지
않고, 제자들이 도망함으로써 성취되었다.
(3) '종'의 사역과 교환의 연관성:저자는 3절에서 메시야를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이방에로의 복음의 확장 사역은 메시야의 구속 사역에 근거하지만, 복
음을 전달할 기관은 영적 이스라엘, 곧 교회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제자들
->신약 교회' 등을 통하여 세계로 확산될 것이다.
2. 이스라엘에게 주는 구원의 확신(49:14-26)
하나님의 종 메시야의 사역과 그 결과에 대해 종말론적 관점에서 묘사한 후(1-12
절) 저자는 이러한 결과를 주신 하나님께 드릴 찬양에 대해 언급했다(13절). 이제 본
장에서 저자는 거듭되는 소망의 제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낙담하고 있는(14절) 이스
라엘을 위하여 포로 귀환 사실과 이방의 회심에 대해 업급하며 구원의 확신을 제시하
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영적 우매를 염두에 두면서 반복법과 회화적 표현을 사용하
여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또한 14-23절은 시간상의 순서를 따라 구성되었으
며, 24-26절에서는 핵심 내용을 밝히기 위한 새로운 이미지가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
은 본 단락은 (1) 항상 함께하시는 하나님(14-16절), (2) 이스라엘의 귀환과 정복자의
철수(17-19절), (3) 민족 구성원의 증대(20, 21절), (4) 이방의 회심과 굴복(22, 23
절), (5) 구원의 확신 반복(24-26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제 본 단락의 핵심적 특
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저자는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하여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이 비유
는 사용 목적을 고려할 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까) 이스라엘에게 확신을 주려
는 의도로 사용된 비유들은 '어머니의 사랑'(15절), '손에 새긴'(16절), '강한 용사'
(24.25절) 등이다. 곧 하나님의 사랑은 젖먹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보다 크고, 결코
지워지지 않는 문신과 같으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무적의 용사와 같은 능력을 발휘
한다는 것이다. (다) 이방인들로 구성될 신약 교회를 전망케 하는 비유들은 '무리들로
장식될 시온'(18절), '이스라엘의 아들과 딸들'(22절), '시온의 유모 및 부하가 될 열
방의 왕 및 왕비들'(23절) 등이다. 사방에서 모여든 이방인들로 구성된 신약 교회는
일반적으로 신부에 비유되고 있다(고후 11:2;엡 5:29, 32;계 19:7;21:2, 9;22:17). 그
러나 이방 열국의 우주적 굴복은 왕신된 주의 재림 이후에야 성취될 것이다.
(2) 저자는 이스라엘의 반응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추진된다는 점을 강
조하고 있다. 외관적으로 보면 본 단락은 주로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살펴보면 먼 미래에 있을 구원 사건의 진행을 소개
한다. 하나님은 자상한 어머니처럼 자신의 자녀인 이스라엘을 달래고 설득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온 인류를 향한 큰 비전을 빈틈없이 추진하신다. 그러므로 저자는 구원 사역
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위로는 오직 메시야를 통해서만 전달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록 패역과 반역을 일삼는 백성일지라도 메시야는 궁극적 구원을 보증해 줄 토대를 만들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위대함을 자각하고 언제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하여 생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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