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스칠 때마다 모란의 그윽한 향기가 뜰안 가득 퍼져서 울타리를 넘어 골목까지 퍼져나가고 있는 흐드러진 모습.
J형,
나는 지금 5월의 뜨락에 붉게 핀 모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저 붉은 모란의 빛깔과 향기가 뜰안 가득 황홀하게 묻어와 울타리를 넘어 골목까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 옆엔 화려하게 만개한 영산홍이 봄날의 환희를 노래하고, 작약의 꽃망울이 혼기를 앞 둔 과년한 처녀의 속 마음처럼 붉게 맺혀 있습니다. 두 그루의 주목나무는 고아한 기품으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며, 그 우측엔 깊은 연륜의 수관이 묻어나는 소나무 한 그루가 의젓한 의관을 갖춘 대인의 풍모로 서 있습니다. 대문 입구 양측엔 쉼없이 바람의 애무를 받는 두 그루의 앵두나무가 있고, 그 안 쪽엔 하얀 꼬리조팝꽃이 눈부시게 피어 있어, 나비의 희고 고운 몸짓이 바람결을 타고 울타리를 넘어옵니다. 우측 담장엔 수령 깊은 감나무의 연두빛 이파리가 잔잔히 흔들리며, 알록달록 때때옷 차려입은 금낭화가 연분홍 연가를 부르는 듯 5월의 뜨락엔 바람이 불 때마다 붉고 흰 꽃잎과 푸른 잎들이 황홀하게 일렁이며 마음을 홀리고 있습니다. 울타리 넘어 골목까지 퍼져나가고 있는 봄날의 이 황홀한 색깔과 향기는 이 봄이 가고나도 오랫도록 머물 것 같습니다.
*화려하게 만개한 연산홍과 산수유와 소나무, 꼬리조팝과 회양목, 모란과 주목, 소나무와 감나무가 저만치 서 있는 봄날의 뜨락 풍경.
J형, 지난 4월 11일날 숙소에 있던 제 단봇짐만 이곳 주택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사 온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 마을에 들어섰을 때가 20년 전이었습니다. 그때 안팎으로 마음 지친 6월의 어느 날 고찰사 툇마무에서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들렸던 곳입니다. 그 무렵 눈부시게 피어난 하얀 찔레꽃이 지친 내 소맷자락을 수줍게 잡아주며 속삭이듯 쉬어가라던 곳입니다. 그날 그 꽃의 양감 속에서 한나절 머물러 갔던 곳으로, 저의 첫 수필집 첫장에 나오는 <칠장산의 찔레꽃>에 등장하는 그 마을입니다. 어쩌면 20년 전에 잠시 스쳐갔던 인연이 흘러가는 이승의 시간 속에서 오늘의 연분을 맺게 된지도 모르겠습니다.
* 대문 쪽 전경. 좌측 깊은 연륜의 수관이 묻어나는 소나무의 의젓한 풍모를 중심으로 화려한 연산홍이 부채춤을 추는 모습.
이곳의 대지는 200평이고 대지에 딸린 밭이 200평 입니다.
이사 온 첫 날 집 둘레를 가만히 둘러보았습니다. 잡초가 주인 행세를 하는 텃밭은 유허처럼 남겨져 주인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발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삿짐을 대충 정리한 이틀 뒤 바로 읍내로 나가서 예초기를 한 대를 구입했습니다. 시동을 걸고 끄는 방법만 익힌 뒤, 장비를 어깨에 메고 오후 내내 땀이 뒤범벅이 된 채 거침없이 후려첬습니다. 이 일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맹렬한 기세로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예초기날에 무잡한 잡초들이 맥없이 주저앉고 팍팍 쓰러져 나갔습니다. 참으로 속 시원한 일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것은 돼먹지 못한 이 세상과 돼먹지 못한 족속들을 모조리 날려 버리듯 했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에 대한 해일처럼 밀려오는 내 분노의 감정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직하게 박힌 돌과 맹렬한 기세의 예초기날이 맞부딪칠 때마다 격렬한 불꽃이 튀었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격전을 치른 그날 저녁 밥상머리에 앉자마자 수전증에 걸린 듯 손이 덜덜 떨리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곤 다음날 바로 읍내로 나가서 약통을 구입해서 제초제 네 말과 농약 두 말을 친 뒤, 샤워를 하기 위하여 상의를 벗으니 하햔 어깨에 시퍼런 피멍이 맺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옥수수와 고구마를 파종하기 위하여 오전 오후를 건너 구슬 땀 쏟으며 삽질로 밭고랑을 파 나갔습니다. 그때 앞집에 거주하시는 맏형 같은 어르신(강남 경찰서장 출신)께서 물끄러미 보시더니 "정사장은 일을 참 무식하게 하시네. 느긋하고 쉬엄쉬엄 하시게, 이곳은 그런 곳일세~." 염려하셨습니다. 그 말씀 떨어지기 무섭게 저는 그 길로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곤 이틀 간 고열에 파죽이 되어 들어누웠더랬습니다.
*두 그루의 주목나무가 고아한 가품으로 뜨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는 모습.
J형, 저는 지금 서툰 일에 함부로 겁도 없이 덤벼들었다가 혹독한 적응기를 치르고 있습니다.
지난 번 고열에 파죽이 되어 나가떨어진 뒤로 수시로 몸살기가 돕니다. 오랜 꿈과 이상의 지향점이 고열에 파죽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이야 말로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끔찍하다는 말이 한평생 농사일에 이골이 나신 분들에겐 외람된 표현이 될 줄 모르오나, 밭고랑에만 서면 삽자루 하나가 큰 바위 같고, 때론 태산같기도 합니다. 요 며 칠 전에는 아차 하는 순간 예초기날이 왼손 둘 째 손가락 마디를 스치면서 붉은 피가 튀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날 멀쩡한 사람 절단 날번 하였으나 참으로 운이 좋았던 날이었습니다. 앞집 어른신께서 바로 지혈을 해주셨고, 쑤셔오는 통증을 동여 매고 급히 차를 몰아 읍내의 의원 문을 밀고 들어서니, 접수대의 아가씨가 원장님이 퇴근하셨으니, 시내 큰 병원 응급실로 가세요. 하였습니다. 그랬습니다. 회색빛 도시를 떠나 마당 넓은 집에서 아침 이슬을 밟고 꽃밭을 가꾸고 싶었던 저의 농익은 꿈들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 꿈은 이미 꿈이 아닌 명징한 현실 그 자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손가락에 하얀 붕대를 감고 저녁마저 거른 채 어둠 내린 길을 돌아올 때, 마음에 파문이 일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말쑥히 진열된 현대식 마트에서 제철 과일이나 푸성귀 쯤이야 2,3만원이면 세상 편할 것을,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물결의 파문처럼 일면서, 나의 오랜 꿈은 발 밑에 허물어지는 모래알 같았습니다.
*감나무 아래서 촬영한 시여재, 연산홍과 우측 주목나무, 우측 차문 쪽이 거실이고, 좌측이 건너방 창문임*
J형, 그 와중에도 이틀에 걸쳐서 기념식수를 식재를 마쳤습니다.
살구나무와 감나무, 라일락 그리고 석류나무 입니다. 본 나무들은 평시 제가 좋아하였으며, 제 가족사에도 얽힌 나무입니다. 먼저 살구나무는 하늘길로 먼저 떠난 형에 대한 내 슬픔과 아픔과 그리움이 서려 있습니다. 나 보다 다섯살 위였던 형은 어릴 때부터 지병이 깊었습니다. 헤어날 수 없는 육신의 지병은 순박하기 그지 없는 형을 한없는 절망의 바람꽃으로 내몰았습니다. 그 절망의 끝을 한도없이 헤매던 형은 제가 현역 복무 때, 운명을 달리하였습니다. 가끔 산바람이 불어 와 가슴을 데울 때면 형에 대한 한없는 미안함과 아픔과 그리움이 밀려오곤 하여 제일 먼저 살구나무를 심었습니다. 더불어 큰 감나무 아래 대청마를 펴고 세상을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그 마루 그늘에 드러누워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노정의 구름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감이 붉게 익어 가는 날, 붉은 낙관처럼 달리는 가을의 서정이 너무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꽃 중에서 가장 매혹적인 향기를 가진 꽃이 찔레꽃과 라일락꽃 향기로 치고 싶습니다. 찔레꽃 향기는 어머니의 가장 깊은 심성이 빚어내는 향기라면, 라일락꽃 향기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고혹적인 향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몇 해 전 스위스를 여행할 때 체르마트의 푸른 초지 위에 그림 같은 집들이 펼쳐지고 골목마다 라알락 향기가 비등할 때, 이방인인 나를 홀리며 반하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석류나무 입니다. “불타오르는 정열에 앵도라진 입술로/ 남 몰래 숨겨온 말 못할 그리움아/ 이제야 가슴 뽀개고/ 나를 보라 하더라." 가곡歌曲으로 불리어진 김부민의 "석류"란 시詩 입니다. 앵도라진 입술은 참고 견뎌 내는 인간 내면의 감정을 속속들이 담아 절제의 미로 승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불타오르듯 알알이 붉게 박힌 내면의 뜨거운 사랑의 정염을 가슴 뽀개어 보라하는, 그 정淨한 싯구에 가슴이 벅차 매료되었습니다. 저무는 계절의 시간 속에서도 알알이 영글어 붉게 벌어지는 석류를 보노라면 세월 넘어 두고 온 희미한 옛 사랑과 그 그리움 마져도 수연한 아름다움이 있어, 계절은 외로워도 석류의 계절만큼은 외롭지 않은 가슴 따뜻한 시간을 간직할 수 있으리라, 여겨져 석류나무를 심었습니다.
* 감나무 아래 둥지를 틀고 때때옷 차려입은 금낭화의 자태.
J형, 달빛이 참 고운 밤입니다.
내 자신이 꿈꾸었던 세상의 한순간 속으로 걸어 들어온 지금, 달빛 고운 밤을 골라 안부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 뜰안에 휘영청 밝은 달빛이 하염없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달빛은 산골을 골골이 비추고도 모자라 넘실넘실 거실까지 흘러듭니다. 이슥한 시간 비록 몸은 고단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달빛을 가만가만 밟고 뜰안을 거닐어 봅니다. 사위는 고요하고 적막하여 개구리 울음소리 가득 귀에 담겨오고, 달덩이 같은 그리움도 함께 밀려오는 황홀한 달빛의 밤입니다. 이 시간만큼은 세상 살이의 고단함과 지난함 또한 잊습니다. 이 자리에 내 존재를 있게 해 준 저 하늘나라에 계실 어머님께 감사함을 전하며, 아내의 속 깊은 내조와 세상의 모든 뜻 깊은 인연들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J형, 내일이면 또 해야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제 고구마를 심었는데 동네 어르신께서 잘못 심었다 하셔서 다시 손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잔디에 풀도 뽑아야 하고, 울타리의 쥐똥나무도 전지를 해야하며, 고추 모종에 지주대를 세워 끈으로 잡아줘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내 오랜 꿈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만사가 뒤죽박죽된 채 혹독한 적응기를 치르고 있음을 전합니다. 시간을 보니 벌써 밤이 꽤 깊었습니다. 다음 안부 때까지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를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모란꽃 향기 그윽한 5월의 뜨락에서, 2020.5월._석등 정용표.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