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4: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 여기 "또"란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더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에 지은 죄를 기억시키며, 그들의 회개가 신빙성이 없음을 탄식함이다. 그들의 선조들도 광야에서 회개함에 신빙성이 없었다. 그들이 회개하였다가도 변하곤 하였으므로 시편 저자는 그들의 그와 같은 회개를 가리켜 하나님께 대한 아첨이라고 하였다. 곧, 시 78:34-41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그러나 저희가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저희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치 아니하였음이로다 오직 하나님은 자비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저희는 육체 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 저희가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격동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삿 4:2,3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 - 은 그 땅의 다른 모든 족속들의 왕보다 더 악하고 강한 권세를 잡았던 자이다. 그것은, 수 11:1에 하솔 왕 야빈이 다른 왕들을 연합시킨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하솔은 일찌기 여호수아에게 정복된 적이 있었다(수11:11). 그런데 그 후에 가나안 족속이 다시 그곳을 점령하고 그들의 전쟁 근거지로 만들었다. 영계(靈界)에 있어서도 가장 강한 죄악들은 우리가 정복한 후에도 우리 속에서 일어날 위험이 얼마든지 있다.
삿 4:4,5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 - "랍비돗의 아내"란 말은 "번갯불의 아내"(wife of lightning)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바락의 아내란 뜻과 같다고 하는 학자가 있다(Hilliger). 그 이유는 바락이란 말 뜻도 번갯불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Das Deborah-lied, Giessen, 1867). 이 견해는 벧하우젠(Wellhausen)도 찬성한다(Comp3. p.218). 그러나 이와같은 해석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 이유는 드보라가 한 번도 바락을 자기 남편이라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5:12, 15 참조.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 여자가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린 실례는 이 때에 한번 있었다. 여자가 주장하는 일은 창조 질서에서 용납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하여 창조되었다.(창 2:18; 고전 14:34; 딤전 2:11-14). 그러나 돕는다는 것은 인권(人權)의 독립성과 기업(來世의 基業)의 독립성에 남자보다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고(벧전 3:7; 고전 11:11-12), 다만 직능과 직분이 달라서 여자는 남자를 내조(內助)한다는 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 위인들로서 남자들은 많이 드러나고 여자들은 숨겨 있다. 언제나 그들은 내조자들인 만큼 수고는 많이 하고 이 세상에서는 명예와 상급을 적게 받는다. 드보라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녀의 역활은 내조자의 테두리를 벗어 나지 못하였다. 그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예언자의 영적 방면에서는 영감(靈感)의 전달과 통로(通路)가 되어 있으면서도 장군의 활동 분야인 전쟁을 직접 담당하지는 않았다. 장군의 역할은 바락이 담당하였다.
삿 4:6,7
"납달리 게데스"는 야빈의 도성 하솔(현재의 명칭으로 엘 하디레=el-Hadireh)에서 동북쪽으로 3마일 밖에 있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 란 말은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의 하나님은 되실 수 없다는 편협한 사상이 아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계시(啓示)되시며, 또 역사(役事)하시며, 그들을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란 뜻이다. 이것은, (1) 그 때의 모든 이방 우상과 반대되는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2) 언약(혹은 제약)에 의하여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세우셨다는 뜻 있는 칭호이다.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 이 질문식 발언은 그 명령 내용의 확실성을 더 역설(力說) 하기 위한 것이다. 다볼산...기손강 - "산"과 "강"의 대조로 두 전진(戰陣)을 대치시킴은 이 때에 전략상 중요한 것이었다. 곧, 이스라엘 군대가 고지(高地)를 차지해야만 적군의 철병거의 침해를 받지 않게 되고, 적군은 기손강 가의 평지에 놓여 있어야 폭우(暴雨)로 인한 탕수 때문에 그들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 "다볼산"은 에스드렐론(Esdraelon) 평원의 동북쪽에 있는 553미터쯤 되는 산이다. 그리고 "기손강"은 겨울철에는 물이 넘쳐서 위험하다. 이 전쟁을 계기로 하여 폭우가 내린다면 강은 넘치고 평야는 질어서 야빈의 병거들이 다니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5:20-21).
아무리 많은 수효의 군인들과 우수한 무기를 가진 강한 군대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자연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다. 출 14:27-28 참조. 현대의 강국들이 핵무기 (核武器)를 믿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힘을 이용하셔서 여하한 신무기의 위협도 막으실 수 있다. 현대인들은 핵무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된다. 그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잠 1:7). 벧후 3:9-13 참조.
삿 4:8,9
바락이...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 - 바락이 이와 같은 청원에 드보라는 함께 가기로 동의하였다. 어떤 학설에, 바락의 이 청원이 그의 겁약과 불신앙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G. Bush). 그러나 바락의 이와 같은 태도는 나약이 아니고 도리어 겸손과 신앙에 속한다. 그는, 그 전쟁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존해야만 승리할 줄 믿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자는 여선 드보라였고 바락 자신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가 드보라의 동행을 원한것은 그의 겸손이었고 신앙이었다. 신약 성경은 그를 신앙의 인물로 칭찬하였다(히 11:32).
70인역(LXX)에는 8절의 바락의 청원 끝에 그의 가지 못할 이유가 첨부되어 있다. 그것은, 곧 "나는 어느 날 여호와의 사자가 나를 형통하게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 문구이다.
네가 이제 가는 일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 (9절 상반) 이 말씀은 야빈왕의 장군 시스라가 야엘이란 여인의 손에 죽게 될 것(17-22)을 예언한 것이다.
삿 4:11
본서의 저자가 여기서 모세의 처족(妻族) "헤벧"의 거처에 대하여 말하는 목적은, 헤벧의 아내 야엘의 의거(義擧)를 말하려는 준비이다. 모세의 장인 호밥 - 성경에 모세의 장인의 이름이 여러가지로 나타났으니, 여기서는 "호밥"이고, 출 2:28에는 "르우엘"이고 출 3:1에는 "이드로"이다. 이 난제는 잘 해결된다. 곧, "르우엘"은 모세의 처조부였을 것이고. "이드로"는 그의 장인을 가리키는 존호(尊號)였을 것이고, "호밥"은 그의 장인의 실제 본명 이었을 것이다.
삿 4:12-15
이 부분에는 "바락"의 군대와 "시스락"의 군대가 전쟁한 그 결과에 대하여 진술되었다. 그 때에 폭우가 내려서 기손강이 넘쳤고(5:20-21), 시스라의 군대가 홍수로 휩쓸림이 되었다. 이 일에 대하여는 6-7절의 해석을 참조하라.
삿 4:17-20
이 부분에는 "야엘"이란 여인이 "시스라"장군을 죽인 사실이 기록되었는데 여기에 난제가 있다. 곧, 그녀가 그를 죽인 방법이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1) 거짓말로 그를안심시켜 자기 집 장막 안에서 깊이 잠들게 하였으니, 기독교는 거짓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 (2) 그 죽이는 방법이 극히 잔인하였다는 것. (3) 하솔 왕과 겐 사람 헤벧은화평스럽게 지냈으므로 (17절), 헤벧의 아내 야엘의 처사는 배신 행위라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다. (1) 전쟁터에서 가지는 윤리는 어떤 면에 있어서 일반 사회 윤리와 다르다는 것과, (2) 시스라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것이다. 극악한 죄인이 받는 그 심판이 표면으로는 극히 가혹해 보이지만그 원인이 되는 그의 죄는 그보다 더욱 혹독했던 것이다. 남을 속이던 악한 죄인은 속임을 당하게 되고, 배신을 떡 먹듯이 했던 자는 배신을 맛보게 되고,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던 자는 잔인하게 죽임이 되고야 만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된 야엘(9 절)을 정죄할 필요는 없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권능을 노래할 때에 야엘을 축복하였다(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