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홍수 후의 지구
연구 범위: 창 9~11장
기억절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3~4)
수년 전에 진화론의 유력한 지지자인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진화 과정의 절정적 결말에 대해 이런 농담을 했다. “만약 나에게 전능한 힘이 주어지고 실험할 수 있는 수백만 년의 기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인간을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둘 생각이 없다”(댄 포크, 티셔츠에 새겨진 우주, 펭귄 출판사, 2002년, 203). 기원에 관한 이 철학자의 근본적인 오해는 접어두고라도, 그가 인간에 대해 얼마나 냉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특히 홍수와 그 이후의 인간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냉소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지구 전체를 쓸어버린 대홍수 후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와 반역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에 대해 교훈을 얻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대로 교훈을 얻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성령께서 모세를 통해 영감으로 기록하신 홍수 후의 이야기는 결코 아름다운 장면이라 할 수 없다. 인간은 별다른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상황은 즉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번 주에 우리는 홍수 직후에 일어난 변화와 그 결과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소동과 반역의 와중에서도 우리는 타락한 인류를 사랑하시고 그들의 추악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님은 오늘날도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노아와 새로운 지구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와 새로운 세상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 세상은 이전에 그들이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과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황량하게 변해버린 광경을 보면서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홍수의 증거를 보지만, 우리가 보는 삭막한 환경은 이미 우리 눈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이다. 더군다나 천연계는 처음 황폐하던 모습으로부터 어느 정도 정비되고 정화되었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처음 본 홍수 후의 모습은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무시무시한 경험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 9:1~3을 읽으십시오. 노아와 그의 가족은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나마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소망과 용기를 받았습니까?
답:
위의 구절과 여호와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신 창세기 1:28~30 말씀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 두 기사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으며, 그러한 차이가 생긴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들과 동물들과의 관계에 어떤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답: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과거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육식이 도입된 것이었다. 전에는 인간의 동료였던 많은 동물들이 이제는 그들의 식물(食物)이 되었다. 훌륭하고 조화롭던 것이 죄로 인해 망가지고 말았다. 죄는 언제나 이런 결과를 낳는다.
성경 본문에 따르면, 인간은 육식성이 아니며 동물들도 그러하였다. 인간과 동물들 사이에 큰 구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창 1:26-27), 원래 낙원에서는 많은 면에서 서로 간에 공통점이 많았다. 모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모두 생명을 가졌으며, 서로 비슷한 식물(食物)을 공유했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을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이 ‘다스리는’ 생물들을 존중하도록 가르쳐주신 것 같다.
교훈: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왔을 때, 세상은 완전히 황폐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육식이 허용되면서 더욱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피와 생명(창 9:4~6)
위의 본문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준다고 생각합니까?
답: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죄의 결과와 타락한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에 관해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된다.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관한 규례를 통하여 유대인들을 가르치시기 이미 오래 전에 피 채 먹는 것을 금한 명령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수세기 후에 사도행전(15:20, 29)에서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피를 먹지 말도록 권면한 사실은 아마도 이곳 창세기의 기록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참고 레 17:11; 벧전 1:19).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엄격히 금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이 구절의 의미와 특히 그 적용에 관하여 수세기 동안 논쟁이 있어 왔다. 과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일 경우에,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사람도 죽임을 당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구약 율법의 많은 경우를 살펴보면, 예외적인 특별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주어진 조항들도 있었다(예, 민 35:11). 또 혹자는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성경에는 다른 편 뺨을 돌려대라, 비판하지 말라 등 용서에 관한 수많은 구절들이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성읍 전체를 쓸어버린 사례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이 모든 말씀들을 모아서 공의와 심판에 관한 신학을 내세운다 할지라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즉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며 참으로 존중히 여겨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인간의 신성한 생명을 경시한 자들을 언젠가는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후 5:10).
교훈: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육식을 허용하시면서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에는, 생명을 존중하라는 강한 암시가 담겨 있다.
대홍수 이후(창 9:18~29)
여호와께서는 끊임없이 평안과 안전과 번영을 베풀어주시고, 또한 심판과 파멸과 죽음의 경고를 발하시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 우리는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펼치지 않아도,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는가?
창세기 9장을 읽으십시오.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물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시면서, 당신의 약속의 증표로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그 다음에 이 ‘영원한 언약’의 약속과 대조를 이루는 어떤 이야기가 나옵니까? 여기서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듣게 됩니까? 또한 의로운 노아(창 7:1)가 깊이 관련된 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노아가 자녀들에게 한 저주와 축복의 말은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사건은 이미 그들 속에 있는 성품의 특질들을 드러낸 것이었으며, 이 특질들이 각 세대를 통하여 어떻게 전수될 것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함의 죄는 무심코 저지른 범죄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상황을 우연히 보았을지 모르지만, 자기 아버지의 어리석음을 깊이 슬퍼하는 대신, 자기가 본 것을 기뻐하고, 그 일을 퍼뜨리는 데서 즐거움을 찾았다. … 함의 두 형들은 동생의 왜곡된 감정에 동조하지 않았다. 아담도 역시 잘 훈육된 두 아들, 아벨과 셋을 두었고 죄의 자식인 가인도 두었다. 비록 모두가 똑같은 부모의 사랑과 훈육을 받았지만, 죄는 다른 두 사람보다는 한 사람에게서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형들은 함과 똑같은 가정,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칭찬할 만한 예모와 자제의 정신을 보인 반면, 노아의 자녀들 중 한 사람에게서 가인과 동일한 타락의 정신이 표출되었다. 범죄한 가인의 악한 성향들이 그의 후손들 가운데서 영속되었던 것처럼, 함의 타락한 본성은 그의 자손들 가운데서 더 크게 나타났다”(재림교 성경주석 1권, 244).
교훈: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던 의로운 노아가 홍수 후에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은, 누구든지 경계하지 않으면 실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과거의 조롱자들과 오늘날의 조롱자들
베드로후서 2장에서 사도는 한때 주님을 신실히 따랐으나 이제 돌아선 거짓 교사들에 반대하는 글을 썼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베드로후서 3:1~11을 읽고 다음 질문들에 답하십시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과 조롱하는 자들에게 어떤 권위 있는 자료를 제시합니까? 왜 이 대답은 그처럼 중요합니까?
답:
조롱하는 말의 이면에 숨어있는 진정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오늘날에는 이와 동일한 원리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답:
여기서 베드로는 노아 홍수에 관해 언급하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습니까?(참고 벧후 2:5)
답:
베드로의 말 중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조롱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고 한 점이다. 이 구절은 특별히 약 150년 전에 극적으로 성취되었다. 과학자들은 지표면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노아 홍수와 같은 갑작스런 격변보다는 긴 세월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지질학적 해석을 내놓았었다. 다시 말하면, 사물은 예전과 같이 그냥 있다는 것이다. 많은 대협곡들, 암석 지층들은 격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창조 시로부터 계속 있어온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동일 과정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과 같이 엿새 동안의 짧은 기간에 지구에 생명체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맨 처음부터 일정한 과정을 통해 천천히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베드로는 이 두 상반된 주장이 마지막 때에 논쟁의 요지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과연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중요한 선택의 시기에 살고 있다.
교훈: 베드로가 예언한 대로 사람들은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벧후 3:4)고 하는 ‘동일과정설’을 주장한다. 놀라운 예언의 성취이다.
바벨탑
매우 일반적인 의미에서, 창세기 10장에는 홍수 후에 사람들이 다시 거주하게 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민족이 세워지며, 나중에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세력을 형성하면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창세기 11:1~10을 읽으십시오. 과학이 어느 정도로 발전했으며, 그들은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시도했습니까?
답:
그 당시까지의 그들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그들이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쌓으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답:
여호와께서는 왜 바벨탑을 쌓는 자들을 멈추게 하고자 하셨습니까?(참고 창 3:22 6:5)
답:
“시날 평지의 거민들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그분의 언약을 믿지 않았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홍수를 자연적 원인의 결과로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지존자가 계심을 믿고, 홍수 전 세상을 멸망시키신 분이 바로 그분임을 믿었으나, 가인처럼 그들의 마음은 그분께 대한 반역으로 일어섰다. 탑 건축에 있어서 그들이 염두에 둔 한 목적은, 또 다시 대홍수가 일어날 경우에 그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홍수의 물결이 닿은 높이보다 훨씬 더 높은 건축물을 만듦으로 그들은 그들이 어떤 위험도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구름이 있는 층에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면 홍수의 원인을 규명해 보기를 소망했다. 이 전체적인 사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계획 입안자들의 이름을 높이고, 후세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고, 저들을 우상숭배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계획되었다”(부조와 선지자, 119).
교훈: 바벨탑을 쌓은 자들은 하나님의 무지개의 언약을 믿지 않았고, 자기들의 힘으로 안전을 확보하려고 했으며,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였다.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제8장 ‘홍수 후’(105~1l0).
“노아가 아들들에 대해 한 예언은 독단적인 진노의 선고도 아니요, 총애의 언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아들들의 품성과 운명을 고정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각자 선택한 생활과 그들이 계발시킨 품성의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그들 자신들의 품성과 행동을 참작하여 그들과 그들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발표한 것이었다. 대체로 아이들은 부모의 성질과 성벽을 물려받으며, 부모를 본받는다. 그같이 하여 부모의 죄는 대대로 그 자손들에 의하여 행하여진다”(부조와 선지자, 118).
“지질학자들은 지구 자체 가운데서 지구가 모세의 기록이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질학은 성경 역사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 그 발견에 확신을 가지는 자들도 홍수전의 사람들, 짐승들, 나무들의 크기나 당시에 일어났던 큰 변화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땅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현대와는 많은 점에서 모든 조건들이 달랐다는 증거를 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태가 존재했었던 때는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에서만 배울 수 있다. 홍수의 역사 가운데서 영감은 지질학만으로는 결코 파헤칠 수 없는 것을 설명하였다”(부조와 선지자, 11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현대 과학은 또 어떤 종류의 바벨탑을 쌓으려고 시도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왜 옛날 바벨탑과 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유전자나 품성의 유전적 특성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품성의 특성 중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들을 줄여나가기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중생(重生)의 개념은 이 중요한 품성 변화의 개념과 얼마나 잘 부합됩니까?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