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아직 먼 데, 홀로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존재가 있다. 얼음을 뚫거나 눈을 녹이며 피는 복수초이다. 매화가 움을 틔울 때 벌써 꽃을 피웠다. 꽃 한 송이를 발견한 것은 1월 말이다. 두 주째 군락지를 살펴보지만, 더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봄이 오고 있다는 기별을 가장 먼저 알리겠다는 심사와 결기를 드러낸 것이다.
한 사람이 카메라 장비를 갖추고 찾았다. 그도 겨울을 빨리 떨쳐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먼저 피는 꽃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 앞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처음은 낯설고 외롭고 힘든 댓가를 치르지만, 이를 마다하지 않는다. 전주에서 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와서는 야생화를 블로그에 담기 위해서이다.
복수초福壽草는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꽃말은 영원한 행복으로 복과 장수를 의미한다. 거친 환경과 오래 산다는 뜻에서 연유한 탓인지 이름이 많다. 눈 속에 피는 연꽃과 같다고 해서 설연화, 새해들어 가장 먼저 핀다 하여 원일초元日草, 그리고 우리 고유의 이름인 얼음 사이에서 피어나 얼음새꽃, 눈을 녹이며 핀다는 눈색이꽃 등으로 불린다.
꽃말이 좋아서 일까, 다른 꽃들의 시샘을 받아서 일까? 이름과 꽃말에서 논란도 있다. 복수라는 말에는 앙갚음한다는 중의적인 뜻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수復讐는 한자가 엄연히 다르다. 또 서양에서는 꽃말이 슬픈 추억이다. 이는 가치의 순위를 정하는 데 있어 동양은 좌를 우선하고 우를 나중에 두는 반면 서양에서는 이를 거꾸로 생각하는 문화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복수초는 이런 논란을 일거에 잠재우려는 듯 거체전력擧體全力, 즉 죽을 힘을 다해 얼음이나 눈속을 뚫고 꽃을 피워낸다. 마치 땅 속에서 따뜻한 지열을 길어 올리는 것처럼 열을 발생시켜 눈을 녹이는 것이다. 실제 활짝 핀 꽃 안의 온도는 바로 옆 50센티 떨어진 곳보다 7도 이상 높다는 연구 자료가 있다.
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범접할 틈이 없고, 오직 순수와 진실만을 보인다. 보는 이로 하여금 한 번이라도 자신의 절정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는지, 허물과 약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했는지 묻는다. 그리고 먹는 것과 입는 것에서 육체적 욕망을, 허영과 위선이라는 정신적 치장을 줄이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뭇 묘함이 꽃 속에 다 함장돼 있다.
꽃은 낮에 피고 밤에는 오므린다. 산기슭을 따라 구석 바위까지 펼쳐보이는 황금빛 물결은 장관이다. 도랑 근처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핀 꽃은 더욱 찬란하고 더욱 황홀하다. 꽃을 피운 뒤 잠시 숨을 돌리고는 제비꽃, 얼레지, 꿩의바람꽃, 산자고를 깨운다. 그제서야 다른 꽃들도 깨어나 여기저기서 부산하게 꽃을 피울 것이다.
야생화 군락지는 입소문을 타고 찾아오는 방문객이 늘고 있다. 간혹 복수초를 캐가는 사람도 있다. 화단에 옮겨심은 꽃도 좋지만, 자연 그대로 있는 모습이 복수초답다. 산비탈 돌틈 사이가 본래 자리이다. 복수초의 생명력과 결기는 언제나 부럽고 경이롭다. 이런 복수초의 마음을 가지면 어떤 삶도 살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