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성지순례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5에 위치한 한티 순교 성지와 경북 군위군에 있는 김수환 추기경님 생가 (기념관을 방문) 합니다.
◆일시: 7월 13일 (토) : 05:40분 성당 출발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에 자리한 한티 순교성지는 서쪽 가산(901m)과 남동쪽 주봉인 팔공산(1,192m)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산골은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신자들이 교우 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가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을해박해와 정해박해 때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 살았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매우 일찍부터 한티에는 신자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지방 교회의 터전이 돼 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하여 신나무골에 얼마간 살았던 김현상 요아킴 가정이 기해박해 때 신나무골보다 더 깊은 산골인 한티에 와서 살았다. 이렇게 처음에는 한두 집 모여들어 움막을 짓고 사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던 적은 수의 신자들이었으나 한티를 중심으로 인근의 서촌, 한밤, 원당 사람들이 입교하게 되면서 점차 커지기 시작하여 1850년대 큰 교우촌이 되었다.
1860년, 경신박해가 시작되자 신나무골 · 어골 뿐 아니라 한티도 안전한 곳이 못 되었다. 신나무골에서 한티 사기굴로 피신을 왔던 배손이(배정모) 가족이 잡혀, 배손이는 배교하고, 아내 이선이 엘리사벳과 장남 배 스테파노는 신앙을 증거한 후 작두날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한티에 살던 김현상 가족들도 대구로 가고, 어골의 이재영 고스마(이장언 회장의 부친) 가정도 대구 부근의 송골(중리동)로 피신했다. 그러나 몇 달 후 경신박해가 잠잠해지자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에 대하여 베르뇌 주교는 1862년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여 명이 성사를 받았습니다.”라고 성무집행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