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을 말할 때, 종종 유상적인 것에 치우친 경향이 있습니다. 마음은 근본과 면모로 나뉩니다. 근본이란 심과 식과 의가 드러난 곳이며, 면모란 심(心), 식(識), 의(意)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근본은 무상이고, 면모는 유상입니다. 유상의 마음이 의지하고 있는 것은 몸이 아니라, 몸을 도구로 하여 근본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면모로써 심(心)이란 생명이 갖고 있는 감정 체계를 말합니다. 희, 노, 애, 락, 우, 비, 고뇌를 비롯해서 가슴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그리움이나 외로움 사무침 등 일체의 감정체계가 심(心)에서 비롯됩니다.
심(心)은 감정의 중추이면서도 자기 주체가 세워지는 자리입니다. 이때의 자기 주체란 모든 의식작용이 이루어지는 중심이라는 말인데, 이것은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워서 갖추는 것입니다.
심(心)의 주체는 가슴에서 세워 집니다. 가슴에서 세워진 심(心)의 주체에 입각해서 식의 작용이 이루어질 때, 이를 일러 '중심이 쓰여진다'고 말하고, 그렇게 되면 식의 작용 자체는 번뇌가 되지 않습니다.
식(識)이란 2가지 개념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하나는 생명이 갖고 있는 의식의 틀을 이르는 말이고, 또 하나는 안이비설신의의 작용을 이르는 말입니다. 마음을 심, 식, 의로 나눌 때는 후자의 개념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식은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고. 쌓아져서 형성된 것입니다. 무명의 상태에 있던 생명이 행(行)이라는 과정을 통해 식의 틀을 갖춘 이후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생명이 접한 수없는 경계가 식을 이루는 조건이 되지요. 마치 우리가 모르던 것을 배워서 알게 되는 것처럼, 식은 그런 과정을 통해 쌓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업식이라 말하기도 하지요
생명이 인과를 받는것은 바로 식의 창고에 쌓여진 의식들 때문입니다. 식의 틀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은 서로 다른 종류로 태어나고, 식의 틀이 어떻게 변화 되느냐에 따라 생명은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합니다.
의(意)는 의지를 말합니다. 곧 자기를 지켜보는 의지적인 힘의 각성을 말하지요. 의는 지각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식의 작용과 심의 작용이 반복되면서 생명 스스로 갖고있는 분별성이 비교적 성향을 갖게 됨으로써 생긴 것이 지각성인데, 생명에 따라 발달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깨달음'이란 의(意)의 작용성을 키워서(각성을 진보시켜서) 이루는 것입니다.
의(意)는 심과 식의 사이를 넘나들며 그 상태를 파악하면서 생명으로 하여금 주관성을 드러내도록 합니다.
예를 들면 배고프니 밥 먹어야지, 심심하니 컴퓨터 해야지 이런 마음들은 의(意)가 주관적으로 드러나는 경우입니다. 흔히 말하는 '깨어있는 마음'이란 바로 '심식의 작용을 의(意)로써 주시한다'는 말입니다. 생명의 형성 과정을 보면, 가장 처음 갖춰진 것이 식이고 그 다음이 의(意)이며 그 다음이 심입니다.
식(識)은 생명이 물질적 성품(생명이 가진 물질적 성품은 혼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있음. 여기서는 혼적인 것을 말함)을 갖기 이전부터 형성된 것이고, 심은 생명이 혼성을 갖고나서 형성된 것입니다. 참고로 설명하면 우리 우주에는 심적인 체계를 갖추지 않은 생명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적정성을 자기 중심으로 삼고 있어서, 극도로 진보된 각성을 가지고 있고 윤회에 들지도 않습니다. 생멸이 없는 4개의 세계에 거하고 있지요. 이들은 부처와는 다른 존재이지만, 이들에 의해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일부 생명들이 창조되기도 합니다.
심과 식과 의의 측면에서 마음을 논하고 그런 경지에서 무아를 말하는 것은 그 3가지 마음을 이루는 체계는 그 근본이 비었기 때문이며, 그 면모도 딱히 이것을 내세워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 존재목적이 상대적으로 활용되어짐으로써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심, 식, 의는 공한 근본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 근본에 입각해 보면 '나'라는 상이 없고, 그 면모가 쌓아져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따로이 어떤 것을 내세워서 주체로 삼을 수 없습니다.
존재목적에 입각해 보면 심, 식, 의는 어느 한 가지만으로는 생명으로써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에(창조를 주관하는 '신'도 식과 의를 갖고 있음) 서로 의지해야만 온전해지는 관계인데, 이 같은 이유로 개별적 '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갖고 있는 정신 작용은 바로 심 식 의의 작용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생명이 갖고 있는 정신작용으로써 오온의 개념을, 심과 식과 의의 작용을 놓고 설명해 보겠습니다.
색 의식은 식을 이루는 체계 중 안이비설신의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색성향미촉법의 행위가 있도록 하지요.
수 의식은 심을 이루는 체계 중 중심이 쓰여짐으로써 발현되는 의식입니다. 식을 이루는 안이비설신의가 가슴 바탕에 세워진 심의 주체 즉 중심에 입각해서 쓰여지게 되면 '수'라는 의식이 깨어나게 되는데, 이 때의 수의식은 색의식과는 인식하는 성향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색의식에 있어서 눈의 작용은 빛의 파동을 시신경을 통해 받아들여 사물을 보는 것이지만, 수의식에 있어 눈의 작용은 안에서부터 빛을 일으켜서사물에 비춤으로써 사물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의식의 눈을 통해 사물을 보게 되면 그 사물의 형체가 빛 덩어리로 인식됩니다.
상 의식이란 식 의식을 이루는 생각이 심의 주체에 입각해서 작용하되, 뚜렷한 명제 즉 목적성을 갖고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사유성이라 말하는데, 이때의 사유는 식의 작용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고, 심에서 생성되는 에너지가 생각에 제공되어야만 이루어집니다. 곧 심의 '공'함에서 생성되는 에너지가 식을 이루는 의식 중 생각에 제공되어야만 목적이 부여된 사유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평범한 생명들은 심의 체계를 세워서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사유를 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의 흐름이 자꾸만 단절되게 되지요. 상 의식은 심, 식, 의가 전체적으로 쓰여져야만 발현될 수 있는 의식입니다.
행 의식이란 사유를 통해 드러난 목적(이치나 경계의 존재목적 또는 더 넓은 교류성의 확보)이 조화를 통해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마음을 놓고 볼 때는 심, 식, 의가 서로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쓰여지는 것을 말하고, 상대를 놓고 볼 때는 서로의 존재목적에 입각해서 주변상황과 어긋나지 않게 쓰여지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경우를 일러 '안팎의 조화를 성취했다'고 말합니다.
행의식이 발현되기 이전에는 심, 식, 의가 서로 동떨어져서 작용하게 되지만, 행의식이 발현되고 나면 심, 식, 의는 일여(一如)를 이룹니다.
행의식이 발현되기 이전에는 심과 식이 가슴과 머리에 분리돼 있고, 의는 심식과 서로 다투는 관계가 됩니다. 생명이 육체를 갖고 태어나면 그 과정에서 심과 식이 서로 분리됩니다. 이는 생명이 육체에 깃들 때 의식을 잃어버리기 때문에(3일 동안) 생기는 현상인데, 이렇게 되면 식은 머리에 거하고 심은 오장에 나뉘어 거하게 됩니다. 생명이 육체에 깃들 때 의식을 잃어버리는 것은, 육체의 조건이 되는 수정란과, 정신의 주체가 되는 심식의 고유 진동수(이때 심식의 의식체계를 영혼이라 부르기도 함)가 서로 맞지 않아서입니다.
이렇게 생의 과정을 통해 분리된 심식은, 육체를 갖고 있을 때는 7가지 감정과 6가지 의식 작용으로만 드러날 뿐, 그 본래의 역량을 대부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온 중에 색의식만 활용하면서 살게 되지요.
수 의식이나, 상 의식, 행 의식을 발현시키려면 반드시 심의 주체를 세워서 심과 식의 일여를 이루어야 합니다. 심의 주체가 뚜렷이 세워지면 심은 감정활동만 주관하는 것으로 쓰여지는 것 이외에 성품의 공함을 볼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심식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의가 그 뿌리를 잃어버려서 불안정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심식과 의가 서로 다투는 관계가 되지요.
삼매란 심의 주체를 세워서 식의 작용이 그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도록 하고, 그 과정을 의로써 살펴볼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행의식이 발현되기 이전에는 이렇듯 심과 식과 의가 서로 다투는 관계로 있지만(수 의식과 상 의식도 심, 식, 의가 쓰여지는 의식이지만 완전하게 일여를 이룬 상태는 아님) 행 의식이 발현되면 심, 식, 의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서로 보완해주는 관계가 됩니다. 마치 마혜수라의 세 개의 눈처럼, 솥의 세 발처럼.
이렇게 심, 식, 의가 안의 조화를 이루었을 때 그런 역량을 통해 밖의 존재가 갖고 있는 존재목적을 알게 되고, 그로써 나와 그간에 존재목적을 통한 교류를 통해 조화를 성취하게 되면 밖의 조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런 때를 일러 '행 의식의 발현이 완전하다' 고 말하죠. 단순히 자비심이나 자애심, 희생심 등을 행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로써 합당치 않습니다.
식 의식이란 생명이 갖고 있는 인식의 틀입니다. 즉 생명이 색 의식만을 갖고서 쓰고 있으면 색 의식에 한정된 인식 틀을 갖게 되고, 수 의식을 발현시켜서 쓰게 되면 수 의식에 한정된 인식의 틀을 갖게 되겠지요. 생명은 스스로가 활용하고 있는 면모로써 의식체계와 자기사상, 자기근본을 보는 역량에 따라서 인식의 틀을 서로 다르게 갖고 있습니다.
글; 구선/ 스님
출처; https://cafe.daum.net/gycenter/Dl1y/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