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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위치: 지중해 동남방
인구: 9,001,610명 (2023년 추계)
수도: 예루살렘(예루살렘 지위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논란이 있으며, 각국 대사관은 대부분: 텔아비브 또는 인근에 소재하고 있음)
면적: 21,643㎢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State of Israel
기후: 지중해성기후
민족 구성: 유대인(80%), 비유대인(20%)
언어: 아랍어,히브리어
정부/의회형태: 공화제 / 다당제&단원제
종교: 유대교(77%), 이슬람교(16%)
화폐: 이스라엘 쉐캐림 (NIS) 환율계산기
국화: 올리브
대륙: 중동
국가번호: 972
GDP: USD 373,751,000,000
인구밀도: 410명/㎢
전압: 220V / 50Hz
도메인: .il
이스라엘과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지중해 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 중동의 국가. 남북길이가 약 400km, 동서길이가 가장 넓은 곳이 121km에 이른다. 수도는 예루살렘이며 화폐는 이스라엘 쉐캐림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유대인이며 종교는 77%의 국민이 유대교이다. 서비스업과 제조업에 바탕을 둔 혼합경제체제이며, 국민총생산(GNP)은 인구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1인당 GNP는 개발도상국과 비교해 낮은 편이다.
이스라엘은 남북길이가 약 400km, 동서길이가 가장 넓은 곳이 121km에 이른다.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 동쪽과 남동쪽은 요르단, 남서쪽은 이집트, 서쪽은 지중해와 이웃한다.
1967년 전쟁으로 빼앗은 여러 점령지에서는 지금도 분쟁이 계속되고 있고, 수도인 예루살렘도 한때 요르단 지역과 이스라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자연환경
이스라엘은 지형학적으로 4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형성된 길이 185km, 남쪽 가장 넓은 곳의 너비가 32km밖에 안 되는 지중해 연안의 좁고 기다란 평원지대이며, 둘째, 북쪽 국경에서 점령지인 웨스트뱅크를 지나 이스라엘 중부에 이르는 구릉지대, 셋째, 동쪽 국경을 따라 지구표면에서 가장 낮은 지역인 사해(해수면보다 400m 낮음)를 거쳐 아카바 만까지 크게 갈라진 틈의 일부를 이루는 그레이트리프트밸리, 넷째, 이스라엘 남부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장 넓은 지역인 네게브 사막지대이다.
요르단 강은 내륙분지에서 훌라 분지(해수면과 거의 같음), 담수호인 갈릴리 호(해수면보다 210m 낮음), 세계에서 가장 염도가 높은 호수 가운데 하나인 사해로 차례차례 흘러들어간다. 갈릴리 호는 급수장과 저수지를 통해 서쪽의 대수층과 연결되며, 전국 농토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에 물을 공급한다.
기후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겨울 기온(1∼2월)은 예루살렘의 약 8℃에서 네게브 사막 남쪽 아카바 만 엘라트의 16℃ 사이를 오르내리며, 여름 기온(7∼8월)은 같은 지역의 경우 23∼32℃를 기록한다. 북부 산악지대와 북부 연안지역은 연강우량이 400㎜ 이상이며, 북부 산악지대 끝부분은 1,016㎜에 이른다.
북부의 경우 10∼4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온다. 네게브 사막은 102㎜ 이하, 사해 남쪽 아라바 계곡 주변은 25㎜ 이하를 기록한다.
강우량이 203㎜ 이하인 지역이 전국토의 1/2 이상을 차지한다. 농업은 연강우량이 305㎜가 넘는 북위 31°30′ 북부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옛날의 상록수림은 대부분 사라졌으나 조림사업이 계속 펼쳐지고 있다. 구릉지대는 상록관목(야생 관목식물)으로 뒤덮여 있으며, 네게브 사막에는 야생사막관목이 자란다. 동물은 멧돼지·살쾡이·영양 같은 포유류에서 아가마도마뱀 같은 파충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서식한다. 천연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편이며, 한정된 양의 구리와 석유 및 천연 가스가 조금 매장되어 있다.
국민
유대인들의 약 3/5이 이스라엘 태생이며 약 1/5이 유럽·미국, 약 1/6이 아시아·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의 출생률은 아랍인보다 약 1/3이 낮기 때문에, 아랍인이 전체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는 유대인의 이민으로 상쇄되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인구증가가 거의 이민 때문이었지만 머지않아 자연증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며 아랍인의 인구증가도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전체 인구 가운데 약 1/3이 15세 미만이다. 인구의 9/10가 도시에 거주하며, 주로 지중해 연안 평원에 집중되어 있다. 2023년 기준 인구수는 900만 1,610명이고 인구밀도는 400명/㎢이다.
이스라엘의 인종 분포는 유대인이 전인구의 4/5 이상을 차지하며, 나머지 1/5은 아랍인이다. 1948년 건국 이래로 수많은 유대인이 유럽·북아프리카·러시아 등지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해 왔다. 유대인들은 중부 및 동부 유럽 태생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 사는 그들의 후손들로 구성된 아슈케나지 종파, 지중해 및 중동·극동 지역 태생의 유대인으로 구성되었으며 2개 지파로 이루어진 세파르디·오리엔탈 종파 등 2개의 주요종교집단으로 나누어진다.
유대교인이 전체 인구의 약 4/5를 차지하며, 소수민족으로서 가장 많은 이슬람교도는 아랍인 인구의 2/3 이상을 차지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그리스도교도는 대부분 도시에 살며, 대개 아랍어를 쓴다. 가장 큰 그리스도교도 집단은 그리스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멜키트)이며, 로마 가톨릭과 동방귀일교도는 그보다 수가 더 적다. 예루살렘은 2개의 러시아 정교회 전도사업의 본거지이다. 1957년 이후 드루즈파는 독자적인 아랍어권 집단을 유지하고 있다.
언어
이스라엘의 공용어는 히브리어와 아랍어이다. 학교에서는 제1외국어로 영어를 가르친다. 구소련 출신의 이민자들 사이에서는 러시아가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 문자와 아랍 문자 표기 방식은 모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쓴다. 특히, 히브리어는 이스라엘의 국가 언어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약 30년에 걸친 영국의 신탁 통치와 미국에서 건너온 많은 이주민의 영향, 정부의 영어 교육으로 영어도 제2언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그래서 모든 도로 및 공공장소의 표지에는 히브리어, 아랍어, 영어를 함께 표기한다. 아랍어는 2018년 7월 19일까지 공용어로 지정되었는데, 유대민족법이 제정되면서 특수지위의 언어로 격하되었다. 요르단, 이집트, 레바논계 유대인은 아랍어 사용을 많이 한다. 한편 소련에서 건너온 유대인도 많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아랍어 다음으로 많다.
문화예술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은 그들 나름의 고유한 문화유산과 더 여러 세기에 걸쳐 흡수한 각 지역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 민요, 악기, 그밖의 민간전승 문화 표현양식을 포함하는 민간의 풍속은 주로 세파르디 유대인 사회와 시골의 아랍 주민들 사이에서 보존되어왔다. 문학과 희곡의 경우 초기에는 디아스포라(Diaspora:유대인 이산)라는 주제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점차 국가와 관련된 주제로 관심이 옮겨졌다. 가장 유명한 작가로는 1966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1888∼1970)을 꼽을 수 있다.
역사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사람이 거주한 것은 적어도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BC 10000년경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사육한 증거가 남아 있다.
고대 팔레스타인인들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선형(線形)문자의 개발이다. 선형문자는 BC 2000∼1000년에 가나안인들이 창안한 것으로, BC 1000년경 페니키아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이 찾아냈다.
이스라엘인(히브리인)들이 가나안으로 알려졌던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점령한 때는 BC 13세기말경으로 추측되며, BC 1550∼1200년에는 이집트인들이 지배했다.
해양 민족들의 출현으로 아시아 속국들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팔레스타인에서는 펠리시테인들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에 팽창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정복을 당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BC 10세기 중반 솔로몬 시대에 최고의 번영을 이룩했으며, 최초의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자 왕국은 이스라엘로 알려진 북왕국과 유다로 알려진 남왕국으로 분열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에 아시리아인들의 침략으로 멸망했으나, 유다 왕국은 BC 625년까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남아 있었다. BC 587년 바빌로니아인들이 유다 왕국을 침략했으며 많은 주민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생활을 했다(→ 바빌론 유수).
키루스 2세(BC 550∼529) 때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통치 기간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했으며, 기원전 549년 메디아를 정복한 이후로는 나라의 이름을 페르시아로 바꾸었다.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을 함락한 후, 제국의 기초를 다졌다. 이란 파사르가다에에 그의 무덤이 남아있다.
그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뒤이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 지역을 헬레니즘화하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도와 안티오코스 4세(BC 175∼164)의 성전 모독에 반발한 유다 마카베오가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BC 141년 하스몬 왕조 때 이스라엘은 독립을 얻었다. 그러나 BC 65년 왕족의 내분으로 내란이 일어나 로마 제국이 개입하게 되었는데, 로마 점령기에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리스도는 AD 30년경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 시기에는 또한 2차례의 유대인 반란이 일어났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135년 마지막 반란 이후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족은 극소수 집단으로 위축되어 이스라엘은 더이상 하나의 국가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란사, 로마사).
그뒤 팔레스타인은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도교 성지 보호로 인해 어느 정도 번영을 누렸다.
7세기에는 이슬람교도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691년 예루살렘에 바위의 돔을 세웠다. 그결과 예루살렘은 3대 주요종교의 성지로 남게 되었다.
이 지역은 1100∼1291년 이슬람교도들과 십자군에게 번갈아 점령되었으며, 1517년에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다. 그뒤 1798∼99년 일시적으로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았고 다시 이집트의 지배 아래 들어가 무하마드 알리의 통치를 받았다. 무하마드 알리를 통해 서유럽의 영향을 받던 팔레스타인은 1840년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갔다.
19세기 후반 팔레스탄인에 유대국가를 세우려는 '시온주의'가 시작되어, 1882년 최초로 시온주의자들의 정착촌이 세워졌으며, 1917년 영국은 밸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했다.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왼쪽)와 밸푸어 선언문(오른쪽). 밸푸어는 1916년 외무장관에 자리에 올라, 유대인의 협력을 얻기 위해 1917년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수립을 약속했다. 밸푸어 선언은 유대인들에게는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을 의미했지만,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민족은 유랑하게 됨으로써 중동 분쟁의 빌미가 되었다.
영국이 1918년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1922년 국제연맹으로부터 위임통치를 승인받아 정치적 책임을 떠맡게 된 후 이 정책은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초 아돌프 히틀러의 박해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늘어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이에 유대인 지역과 아랍인 지역으로 분할하자는 제안도 있었으나 거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시온주의 국가를 배후에서 지원하는 가운데 1947년 국제연합(UN)은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의했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되었고, 이스라엘과 이집트·트란스요르단(뒤의 요르단)·시리아·레바논·이라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중동전쟁). 이스라엘이 1967, 1973년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중동은 지금까지 계속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1967년 전쟁을 전후로 팔레스타인 국가와 그 영토 내의 이스라엘 점령지인 유대인 정착촌 문제로 여러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졌다.
1982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속한 게릴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다.
1987년 이후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이 '인티파다'(intifadah : '봉기'라는 뜻)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이스라엘 당국은 1992년 이후 아랍의 여러 국가와 팔레스타인 대표들과 직접 평화 교섭에 나섰다.
이듬해 이스라엘과 PLO는 5년 동안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의 자치를 점차 확대 이행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스라엘은 1994년 요르단과 평화협상을 맺었다(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중동).
종교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유대교, 이슬람교와 기독교 성지가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가 약 80% 이상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종교이며, 수니파 이슬람교, 기독교, 메시아닉쥬, 드루즈교 등이 존재한다. 유대교 74.2%, 이슬람교 17.8%, 기독교 2.0%, 드루즈교 1.6%, 기타 4.4% 이다.
이스라엘과 한국과의 관계
외교
1962년 4월 한국과 단독으로 수교가 이뤄져, 1964년 8월 주한 상주공관이 설치됐다. 하지만 1970년대 원유수급과 건설시장 확보를 위해 한국이 중동지역에 본격 진출하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소원해져 1978년 2월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폐쇄되고 주일 이스라엘 대사가 겸임을 했다. 그 후 상주공관이 없는 상태에서 카이로 총영사관이 이스라엘 관계업무를 해오다가 1992년 1월 다시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주한 이스라엘 공관이, 1993년 12월 주이스라엘 한국공관이 설치됐다.
북한과는 전혀 관계를 맺지 않고 있으며,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때 북한의 대 아랍 군사지원과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대한 무기 지원으로 적대관계가 됐다. 이스라엘은 6·25전쟁 때 17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을 원조한 바 있다. 1997년 코트라 무역관이 개설된 후에는 LG전자, 삼성전자, 대한항공, 대우인터내셔널, 글로벌 테크 등 한국의 여러 기업이 연구소를 설치해 운영 중이다. 2010년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으며, 그 밖에도 양국의 차관과 장관이 교류하며 회담을 가졌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1962년 양국의 외교 관계가 수립된 후 1970년대의 관계 소원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우호적인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자동차, 가전제품, 전기제품, 합성수지, 건설중장비 등이다. 2016년 한국의 대이스라엘 수출액은 12억 달러이고, 대이스라엘 수입액은 8억 달러이다.
1995년 이스라엘이 WTO에 정식으로 가입된 후 한국과는 꾸준히 FTA를 추진하다가 긍정적으로 마무리 될 상황에 있다. 이 밖에 과학기술협력협정(1994), 사증면제각서(1995), 세관협력협정(1996), 이중과세방지협정(1997), 민간산업기술협력협정(1998), 투자보장협정(1999), 경제협력협정(2000), 해운협정(2004), 관광협정(2005), 한국-이스라엘 워킹홀리데이협정(2013) 등이 체결돼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한국과 이스라엘은 한국에 기독교가 활성화되면서 이스라엘에 성지 순례를 가는 등 종교적인 문화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유학생 포함 약 760명의 교민이 체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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