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잠(吳岑)은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시조 오현보(吳賢輔)의 넷째아들이다.
그는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 문하시중 평장사, 검교 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 등을 지내고 함풍군(咸豊君:함풍은 咸平의 옛이름)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해주오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는 함평오씨가 되었다.
향사함
상단에 제단은 始祖 岑公 부터 八世祖 正國 公 까지의 제단이며
제단 바로아래는 九世祖 泂[錦山君守]公과 十世祖 舜民[牙山縣監]公의 묘소가 있다
종친회 약사(宗親會 略史)
1. 1762年 英祖壬午에 宗中代表가 모여 始祖壇인 世德壇을 創建하고 大宗中이 連綿享祀
하여 오던중 1944年(倭政末期) 京畿道 楊州郡 眞乾面 培養里에 贊成公派 六百餘年世
居之地이며, 1762年 英祖壬午에 創建한 世德壇을 擴張補修하여 海州吳氏 大宗中 本部
를 여기에 두고 宗親間의 敦睦과 崇祖의 틀을 잡고저 大宗中의 宗憲三章 二十五條를
채택하고 都有司에 楸灘公派 孟善 前議員 副都有司에 楸灘公派 在泳 前郡守 貞武公派
祥根씨 等 各宗中代表로 二十名의 任員을 選出하였다.
2. 6·25戰亂後 1956年 4月 29日 全國海州吳氏 代表들이 모여 先祖의 遺風을 繼承하며
宗親相互 親睦과 後裔育成을 目標로 海州吳氏 花樹會를 創立하여 會則을 通過시키고
會長에 在泳氏, 副會長에 緯泳氏等 任員을 選出하였다.
3. 1957年 5月 春享後 定期總會에서 世德壇을 擴張 補修 키로 決議하었으며 繼續 每年
總會를 祭享後 世德壇에서 開催하기로 하였다.
4. 1959年 봄 世德壇 補修 및 擴張을 爲하여 봉찬회를 發足하고 承德壇을 設置할 것을 決
議하였다.
5. 1960年 花樹會長에 無任所長官인 緯泳氏가 被選되고 世德壇 補修 및 承德壇 設置를
完了하였다.
6. 1962年 花樹會長에 前保社部長官 元善氏가 被選되어 世德壇 淨化擴張을 결의하였다. 7. 1963年 花樹會는 解消되고 世德壇奉德會를 構成하여 享祀하면서 宗親間 敦陸에 힘썼
다.
8. 1969年 大同宗親會를 發足 起善氏가 會長에 就任하면서 世德壇 齋室改築을 完工하고
略記 等도 發刊하여 宗親會發展에 힘썼다.
9. 1980年 制道氏가 會長에 選任되었다.
10. 1982年 泳煥氏가 大同宗親會長에 被選되어 世德壇 및 齋室淨化에 힘쓰고 特히 84年
4月 15日 始祖東渡千年祭를 世德壇에서 盛大하게 擧行하였다.
11. 1986年 4月 南楊州郡 眞乾面 培養里 世德壇 定期總會에서 福根氏를 會長으로 選出
하였다.
12. 1987年4月 12日 春享後 定期總會에서 異壇을 設置하고 不參한 福根氏는 해임되고
寧根氏를 滿場一致로 殘餘任期의 大同宗親會長으로 選出하였다.
13. 1988年 4月 30日 春享後 定期總會에서 大同宗親會長과 全會長團을 留任시키고 大同
譜의 積極推進할 것을 決議하였다.
14. 1989年 2月 天坡女集 국역 發刊.
15. 1989年 11月 13日 寧根會長 逝去로 首席副會長 好善氏가 會長 殘餘任期 承繼.
16. 1990年 4月 10日 春享日 世德壇을 文化財規格으로 再建하여 竣工式擧行 有功者 厚
範 永錫 斗變氏等 表彰. 同日 會長에 泳煥氏를 滿場一致로 選出하였다.
17. 1991年4月 29日 春享總會에서 大同宗親會 會則을 滿場一致로 改正하고 大同譜 收單
은 마감하여 편집할 것을 決議.
18. 1992年 2月 16日 壬申 大同譜 發刊
19. 1993年 3月 30日 定期總會에서 會長에 前國防部長官 滋福氏를 滿場一致로 選出하였
다.
20. 1995年 4月 4日 定期總會에서 「해마다 季節의 변천은 하늘의 理致이고 한 치의 어
긋남이 없다.」 그러므로 傳來의 美風인 봄 제향은 太陽曆 4月 8日이었으며 참다운 美
風인 春秋祭禮를 봄 淸明節인 太陽曆 4月 8日과 秋收感謝節인 11月 8日에 奉行하기로
決議하였다.
海州吳氏 大宗會 沿革
1762年 3月 世德壇 創建 (始祖 仁裕公 以下 7世 光廷公까지 13位)
1944年 3月 大宗會本部 指定 (眞乾面 培養里 所在)
1956年 4月 花樹會 創立(全國 海州吳氏 代表者)會長:재영님, 副會長:위영님 選任
1957年 5月 春香祭享 奉行(世德壇에서)
1960年 4月 世德壇 補修 및 承德壇 設置後 奉安祭 擧行
1963年 4月 花樹會 解體하고 奉德會 創立
1969年 3月 大同宗親會 發足, 初代會長으로 기선님 選任(創刊號 宗報發行)
1980年 3月 第2代 會長 제도님 選任
1982年 3月 第3代 會長 영환님 選任
1985年 9月 大同事務室 入住(당주동)
1986年 4月 第4代 會長 복근님 選任
1987年 4月 第5代 會長 영근님 殘餘任期 繼承 (복근님 解任으로)
1989年11月 第6代 會長 호선님 繼承 (영근會長 逝去로)
1990年 4月 世德壇을 文化財 規格으로 再建 竣工
1990年 5月 大同事務室 移轉 (당주동에서 녹번동 명성빌라 로)
1992年 2月 壬申 大同譜 發刊(全10卷)
1993年 3月 第7代 會長 滋福님 選任 (前 國防部長官)
1993年 3月 金剛會 創立, 初代會長 호선님 選任
1994年 4月 世德壇 神道碑 建設 (韓山公派 一山宗中 獻誠)
1995年 4月 時享祭日程 修正決議 (春: 陽曆 4月8日, 秋: 陽曆 11月8日)
2001年 3月 金剛會 2代會長 재의님 選任
2003年 3月 金剛會 3代會長 인성님 選任
2005年 4月 第8代 會長 漢根 님 選任
2006年 3月 第8代 會長 逝去로 副會長 仁錫님 殘餘任期 繼承
2006年 7月 大宗會則 一部改正(2006.7.11부 施行)
2006年10月 時享祭日程 修正決議(春:陽曆4月둘째주 土曜日, 秋:陽曆11月둘째주 土曜日
2007年12月 金剛會 3代會長 逝去로 柱河님 殘餘任期 繼承
2008年 3月 金剛會 4代會長 柱河님 選任
2008年 3月 第9代 會長 仁錫님 選任
2008年 4月 大宗會報(106號 以後 年2回 發行 修正決議)
2008年 6月 大同事務室 移轉 (녹번동에서 九宜3洞 589-10)大林오피스텔A동412,413호.
2008年 8月 大同宗會 인터넷 홈페이지 開設 (www.haejuoh.or.kr)
2008年11月 8世 潘公 贊成事 碑 移轉 (承德壇에서 世德壇으로)
2008年11月 10世 溥公 墓碑 建設(水事公派 仁川宗中 獻誠)
2009年 4月 世德壇 三門앞 階段 竣工 ( 各 宗派 및 參與 宗親 )
2010年 4月 9世 成式公 墓 둘레석및 墓碑 建設
2010年 4月 世德壇 三門 補修 및 丹靑工事
2010年 7月 인터넷 電子 大同譜 構築 (壬申譜 全14券, 基準)
2011年 3月 第10代 會長 仁錫님 再 選任
2011年 4月 인터넷 電子 大同譜 編纂 案內 新問公告
1.高敞吳氏의淵源
고창오씨(高敞吳氏)의 비조(鼻祖)에 관해서는 悠久한 옛일로 高麗時代
문헌(文獻)에 先祖들을 복양인(濮陽人) 또는 신라왕(新羅王)의 외손(外孫)등으로
記錄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元來 古朝鮮 領土였던 복양(濮陽)에서
新羅에 移住하여 상당한 職位에 있었던 것으로 유추되나 상고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고려 10대 정종조(靖宗朝)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또한 사목(司牧)으로
큰공을 세워 고창(高敞)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오학린(吳學麟)을
고창오씨(高敞吳氏)의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오학린(吳學麟)은 1009년에 出生하여 文憲公 崔冲 先生의 文憲公徒로
지공거전시(知貢擧典試)에 及第하여 당시 學者들이 가장 선망(羨望)하던
청요직(淸要職)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등용되어 그重責을 다했을 뿐아니라.
거기에 더해 당시 北方國境인 鴨綠江 일대에 거란족의 침노가 심해 소란스러울때
그곳 司牧으로 拔擢되어 그地方을 平定하고 民心과 백성들의 生業을
安定시키는 큰 功을세워, 高敞을 食邑으로 下賜받으면서,
官員이나 土豪들을 包容하는 本貫制와 土姓 粉定制度에 依하여
本貫이 高敞으로 定해젔다.
始祖 오학린(吳學麟)은 文敎 振興에 全力하였으며 ,문장(文章)이 전아(典雅)한
많은 시(詩)와 著述이 있었다고 東人文集 三韓龜鑑등에 記錄이 傳해지나 散逸되고,
재걸추훼압강성궁구장(再乞推毁鴨江城弓口狀), 중유흥복사시(重遊興福寺詩),
상비묘시(湘妃廟試)등이 補閑集,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등에 記錄되어
傳해저서 그文章이 문아(文雅)함을 였볼수있다.
2世 오질(吳質)도 직한림(直翰林)이였고, 3世는 3兄弟로 모두가 著名한 學者였다.
兄 吳世功은 고려 17대 毅宗朝때 청주목장서기(淸州牧掌書記)와 19대 明宗朝에
慶尙道 안찰사(按察使)를 歷任하였고 둘째 오세문(吳世文: 號 濮陽)은 1152年
승보시(陞補試)에 등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동각학사(東閣學士) 등을
歷任하였으며, 歌辭文學의 嚆矢인 歷代歌와 潮水論, 군충시(羣蟲試).
삼백운시(三百韻詩).등의 著書가 있다고 傳해진다.
셋째 오세제(吳世才 謚號 玄靜)는 뛰어난 문장가(文章家)이며 시인(詩人)으로
千餘年이 지난 지금도 그의 청아(淸雅)한 漢詩는 高等學校 敎科書에 登載되었으며,
慶州의 皇城公園, 高敞의 文學碑公園에 詩碑가 세워저있다.
高麗의 석학(碩學)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圭報)는 그의 三百韻詩에
“公의 祖父와 아버지 모두가 及第하여 代代로 이름높은 家門이다.
(公祖及考皆登第爲世名儒)라고 동각학사 오세문(東閣學士 吳世文)을 칭송(稱誦)하였고,
서하임춘(西河林椿)선생은 서하집(西河集)에 그의 아우 세재(世才 謚號 玄靜)를
칭송 “명성은 동국에 짝할 사람이 없고 집안은 대대로 중앙의 名門이다.
(聲名東漢無雙客 家世中朝第一流)”라고 적었으며, 또 東國餘地勝覽 高麗人物編에는
吳學麟은 科擧에 及第하여 翰林學士가 되었고 孫子 셋은 모두가 學者로서 名聲이높다.
(高麗人物 吳學麟 登進士第官 至翰林學士 有孫三人曰
世文, 世功, 世才 皆以 文學知名)라고 記錄된 名門이다.
<參考文獻: 韓國氏族總攬. 牟陽實錄. 高敞吳氏世譜>
竹林祠
始祖 翰林太學士 吳學麟公.濮陽世文公 .玄靜世才公.三位를 配享
所在地: 黃海道 坪山郡 龍山面 坪村里
우리나라 吳氏는 무혜공.오첨(武惠公,吳瞻)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齊나라 수군도독이였으나,신라지증왕 원년(500년)에 함양에
김종지의딸(金宗之女)과 결혼 그손이 번창하여 여러관향(貫鄕)의 吳氏로 갈렸으므로
우리나라 모든 吳氏의 鼻祖이다. 우리 高敞吳氏.始祖(고창오씨.시조) 吳學麟은 鼻祖 吳瞻의 17세손이며
신라왕의 부마 오적길(吳迪吉)의 玄孫이다.
오첨(吳瞻)의 시호 무혜공(諡號 武惠公)은 高麗太祖가 추증한 것이다
吳學鱗은 1009년에 출생하여 문현공(文憲公) 최충( 崔冲)선생의 文憲公徒로 知貢擧典試에 及第하여
당시 학자들이 가장 선망하던 淸要職인 翰林學士에 등용되어 그중책을 다하였을뿐 아니라.
거기에 더해 북방 국경인 鴨綠江일대에 거란족의 침노가 심해 소란스러울때
그곳 牧民官으로 발탁되어 그지방을 평정하고 民心과 生業을 安定시키는 큰공을 세워, 高敞을 食邑으로
下賜받으면서 官憲이나 土豪들을 포용하는 本貫制와 土姓分定制度에 의하여 本貫이 高敞으로 정해젔다.
始祖 吳學鱗은 문교진흥에 진력하였으며 문장이 典雅한 많은 詩와 著述이 있었다고
東人文集 三韓龜鑑 등에 기록이 전해지나 散逸되고,
乞推毁鴨江城弓口狀(걸추훼압강성궁구장). 再乞推毁鴨江城弓口狀(재걸추훼압강성궁구장).
重悠興福寺詩(중유흥복사시). 湘妃廟詩(상비묘시) 등이 보한집.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전해져서 그문장이 文雅함을 엿볼수있다.
2세 吳 質도 直翰林이였고 ,3세는 3형제로 모두가 저명한 학자였다.
兄 吳世功은 고려 17대 毅宗朝때 淸州牧場書記 와 19대 명종조에
경상도 按察使를 역임하였고, 둘쩨 오세문(吳世文 號澓陽)은 1152년 陞補試에 등재하여
翰林學士,東閣學士 등을 역임하였으며,가사문학의 효시인 歷代歌와 潮水論, 羣蟲詩, 三百韻詩등의
저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셋쩨 吳世才(謚號 玄靜)는 뛰어난 문장가이며 시인으로 천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淸雅한 漢詩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등제됬으며, 경주의 凰城公園.
고창의 文學碑公園에 詩碑가 세워져있다.
고려의 碩學 文順公 이규보는 그의 三百韻詩에 공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가 급제하여
대대로 이름높은 가문이다.(公祖及 考皆登第爲世名儒)라고 동각학사 오세문을 칭송하였고
西河 林椿 先生은 西河集에 그의 아우 世才(謚號 玄靜)를 칭송<명성은 동국에 짝할사람이
없고 집안은 대대로 중앙의 명문이다 (聲名東漢無雙客 家世中朝第一)>라고 적었으며,
또 동국여지승람 고려인물편에는 <오학린은 과거에 급제하여 翰林學士가 되었고
손자 셋은 모두가 학자로서 명성이 높다(高麗人物 吳學鱗 登進士 第官至翰林學士
有孫三人 曰 世文世才皆以 文學知名) 라고 기록된 名門이다.
◆나주오씨(羅州吳氏)◆
1. 유래및 시조
우리 나주[금성]오씨(羅州吳氏)는 고려 중엽에 진사(進士)를 하신 휘(諱)숙규(淑珪)조(祖)를 중조(中祖)로 하고, 역시 고려조에서 중랑장(中郞將)을 지내신 휘(諱)언(偃)조(祖)를 1세조로 하여 세계 (世系)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문헌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유래1)에서 (유래7)까지의 문헌들은 나주오씨족보 (정묘보 3판, 1999년 12월 10일 간행)와 나주오씨세적(世蹟)(1999년 12월 20일 羅州吳氏 永成齊 발행) 에서 옮겨 온 것입니다. 다만, 사정공파(司正公派)는 제(提) 조(祖)를 1 세조로 하고 있다.
2. 주요 인물
1)파조
ㅁ 송은당공파(松隱堂公派) : 2세 휘 탁진(卓眞)
ㅁ 사정공파(司正公派) : 2세 휘 경진(敬眞)
ㅁ 부사공파(府使公派) : 4세 휘 신교(愼交)
- 백은공파(柏隱公派) : 5세 휘 경조(敬祖)
- 송은공파(松隱公派) : 5세 휘 경친(敬親)
- 죽은공파(竹隱公派) : 5세 휘 경장(敬長)
ㅁ 금양군파(錦陽君派) : 7세 휘 겸(謙)
- 남평공파(南平公派) : 8세 휘 언후(彦厚)
- 파성공파(坡城公派) : 8세 휘 언관(彦寬)
ㅁ 칠성공파(七松公派) : 7세 휘 인(認)
ㅁ 공조참판공파(工曺參判公派) : 9세 휘 희철(希哲)
ㅁ 공조참의공파(工曺參議公派) : 9세 휘 희량(希亮)
ㅁ 도암공파(韜菴公派) : 9세 휘 희길(希吉)
ㅁ 도림공파(道林公派, 장탄파) : 10세 휘 이구(以久)
ㅁ 명곡공파(明谷公派) : 9세 휘 희도(希道)
ㅁ 석문공파(石門公派) : 10세 휘 이익(以翼)
ㅁ 참봉공백양동파(參奉公白羊洞派) : 8세 휘 언인(彦仁)
ㅁ 지봉공파(芝峰公派) : 8세 휘 언지(彦智)
ㅁ 난봉공파(蘭峰公派) : 8세 휘 언예(彦禮)
ㅁ 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 : 6세 휘 세익(世翊)
ㅁ 정언공파(正言公派) : 5세 휘 자영(自濚)
ㅁ 내금위공파(內禁衛公派) : 4세 휘 신의(愼儀)
2)군작을 책봉 받으신 분
ㅁ 4세(世) 금성군(錦城君) 휘(諱) 신중(愼中)
ㅁ 5세 나성군(羅城君) 휘 자치(自治)
ㅁ 6세 나원군(羅原君) 휘 세훈(世勳)
ㅁ 7세 금양군(錦陽君) 휘 겸(謙)
3) 공신 및 건국유공자
ㅁ 5세 나성군(羅城君) 휘 자치(自治)~'이시애의난'을 평정, 적개공신
ㅁ 9세 도암공(韜庵公) 휘 희길(希吉)~'임진왜란'때 '왕조실록' 보존, 1등 공신
ㅁ 19세 죽파공(竹坡公)휘 성술(成述)~한말 의병장, 건국훈장 수상
ㅁ 21세 휘 상렬(相烈)~한말 의병장, 건국포장 수상
4)고위관직을 역임하신 분
ㅁ 5세 시(諡) 양평공(襄平公) 휘 자치(自治)~병조참판, 증 이조판서
ㅁ 7세 시 정간공(貞簡公) 휘 겸(謙)~우의정, 숭정대부
ㅁ 9세 명곡공(明谷公) 휘 희도(希道)~도승지
ㅁ 14세 만범공(晩范公) 휘 정원(鼎源)~대사간
ㅁ 14세 산운관공(山雲館公)휘 한원(翰源)~호조참판
ㅁ 18세 소계공(小溪公) 휘 필선(弼善)~대법관
ㅁ 21세 금석공(錦石公) 휘 중렬(重烈)~국회의원
5) 유학자
ㅁ 11세 옥헌공(玉軒公) 휘 기석(祺錫)
ㅁ 11세 생노당(生老堂) 휘 효석(孝錫)
ㅁ 18세 후석공(後石公) 휘 준선(駿善)
ㅁ 19세 난와공(難窩公) 휘 계수(繼洙)
6) 조선조 대과에 급제하신분
□ 5세 석천공(石川公) 휘 한상(漢相) 성종22년 별시(丙科), 부정(副正)
ㅁ 7세 정간공(貞簡公) 휘 겸(謙) 중종27년 별시(乙科), 우의정
ㅁ 9세 명곡공(明谷公) 휘 희도(希道) 인조1년 알성시(丙科), 도승지
ㅁ 10세 지천공(支川公) 휘 이규(以奎) 효종1년 증광시(丙科), 도승지
ㅁ 10세 석문공(石門公) 휘 이익(以翼) 효종3년 증광시(丙科), 함평현감
ㅁ 10세 휴암공(休菴公) 휘 석하(碩夏) 숙종7년 식년시(丙科),
ㅁ 13세 갈은공(葛隱公) 휘 현주(鉉胄) 영조42년 정시(乙科), 능주목사
ㅁ 14세 만범공(晩范公) 휘 정원(鼎源) 영조42년 알성시(을과), 경주부윤
ㅁ 14세 산운관공(山雲館公) 휘 한원(翰源)영조51년 정시(乙科), 개성유수
ㅁ 15세 명거공(明擧公) 휘 상욱(相昱) 순조34년 무년시(병과), 호조참의
ㅁ 19세 휘 광수(光洙) 고종11년 증광시(병과)
ㅁ 18세 휘 학선(鶴善) 고종30년 알성시(丙科), 통사랑
3. 집 성 촌
나주 오씨는 본래 전남 나주 흥룡동(중흥리, 현재 나주시 송월6동) 사람이다.
흥룡동은 고려 2대왕 혜종이 태어난 곳이며, 혜종의 어머니 장화 왕후가 고려 태조 왕건을 만나기 전에 용을 품에 안은 꿈을 꾸었다 하여 「흥룡동(興龍洞)」이란 지명이 생겼다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 일가들은 전국 곳곳으로 번창(繁昌)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데 그 집성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옛 삼도면 관내) 도덕동(도림, 도덕, 봉정, 양림, 상지)
〃 송산동(내동, 세동, 죽산)
〃 지평동(가삼, 지정)
〃 오운동(양촌, 운암, 광암, 복림)
〃 삼거동(칠성, 상암, 송암, 응유)
〃 송학동(봉학, 국영, 신동)
광주광역시 광산구 (옛 본량면 관내) 남산동(풍숙)
〃 명도동(가마, 명곡, 애림, 평림)
광주광역시 광산구 (옛 임곡면 관내) 고룡리(연동)
광주광역시 서구 덕흥동(덕산)
전라남도 나주시 동강면 (성지, 군지, 병반, 대각촌, 사향)
〃 공산면 (상구리)
〃 남평읍 (교원리 2구)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후산, 월전)
〃 남 면 (청계동)
〃 수북면 (너분들)
〃 담양읍 (삼만리 고도실)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청수동, 당촌, 사창,봉산리 1구)
〃 일로읍
〃 운남면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 (포라리 1구)
〃 대마면 (성산리)
전라남도 장성군 남 면 (덕성리 풍산)
〃 삼계면 (이암)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외우리, 남강리, 대척리)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갈마리)
〃 공음면 (두암, 군율)
〃 상하면 (수동)
〃 아산면 (마명리)
〃 신림면 (다포리)
〃 해리면 (수동)
〃 고창읍 (도산리 목골)
전라북도 김제시 월촌면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신중)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면 외포리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외석리)
경상북도 구미시 비산동, 황산동, 송정동
※위와 같은 집성촌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청장년들이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울산, 목포, 순천, 여수, 마산 등 대도시에 이주해 생활하고 있는 실정이다.
4. 항렬표
세(世)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항렬자 시 원 상 환 (규,재) 선 수 근 (열,섭)(교,균) 종 영 병
行列字 時 源 相 煥 圭,在 善 洙 根 烈,燮, 敎,均 鍾 泳 秉
세(世)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항렬자 희 재 호 순 식 영 길지 금 청 수 광 행 록
行列字 熙 載 鎬 淳 植 榮 吉志 金 淸 秀 光 幸 錄
세(世) 39 40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항렬자 호 권 희 희충 철 태 리 묵 효 진 온 화
行列字 浩 權 熹 喜忠 鐵 泰 利 默 孝 鎭 溫 和
:: 낙안오씨(樂安吳氏)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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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낙안오씨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 27대 吳成國
본관명 | 울산(蔚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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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명 | 오씨(吳氏) |
본관소재지 | 울산광역시 (蔚山廣域市 ) |
시조명 | 오연지(吳延祉) |
울산(蔚山)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동해안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는 진한(辰韓)의 땅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으로 파사왕(婆娑王) 때에 지변현(知邊縣: 戒邊城·神鶴城·火城郡)을 설치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하곡현(河曲縣 또는 河西縣)으로 고쳐 임관군(臨關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 때 이 고장 사람인 박윤웅(朴允雄)이 태조를 도운 공으로 하곡현과 우풍현, 동진현 등을 병합해 흥려부(興麗府)로 승격되었다가, 991년(성종 10)에 공화현(恭化縣)으로 강등되었고, 지울주사(知蔚州事)로 고쳤다. 1018년(현종 9)에 울주군(蔚州郡)이 되어 속현으로 동래현(東萊縣)과 언양현(彦陽縣)을 관할하였다가 방어사로 고쳤다. 1397년(태조 6)에 진(鎭)을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진을 혁파하고 울산군으로 고쳐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1418년에는 염포(鹽浦)를 개항해 일본에 대한 문호를 열었으나,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왜관이 폐지되었다. 임진왜란중인 1598년(선조 31)에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로 승격되어 병마절도사가 부사를 겸하게 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별도로 부사를 파견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동래부 울산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상남도 울산군이 되었다. 1906년에는 월경지 정리에 의해 두입지(斗入地)인 외남면·웅상면이 양산군으로 이관된 대신 경주의 두입지인 외남면이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울산군의 21개 면이 14개 면으로 통합되었고, 언양군은 폐지되어 언양군의 6개 면이 5개 면으로 폐합, 울산군에 편입되었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 울산읍을 시로 승격하였다. 1995년에 울산시와 울산군을 통합하고, 1997년 울산광역시로 출범하였다.
《울산오씨족보》에 의하면 시조는 오연지(吳延祉)이다. 오연지는 도시조(都始祖) 오첨(吳瞻)의 24세손 오현보(吳賢輔 海州吳氏의 시조)의 8세 차손이다. 고려 충숙왕과 충혜왕 때 충직하고 절개가 곧다 하여 형 오연경(吳延慶)과 함께 울산에 강배(降配)되었다. 그러나 널리 알려지기로는 고려(高麗) 때 군기감(軍器監)을 지내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동남 변경(東南邊境)에 출몰한 왜구(倭寇)를 토평(討平)하여 학성군(鶴城君; 학성은 울산의 옛 이름)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관향을 울산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연지는 해주오씨의 시조 오인유(吳仁裕)의 6세손 효성공(孝成公)의 둘째아들이다. 지금까지는 효성공의 아우의 둘째아들로 잘못 알려졌었다. 이런 사유로 울산오씨는 《해주대동보(海州大同譜)》로 합보(合譜)되어 해주오씨 시랑공파(侍郞公派)로 고쳐질 계획이라고 한다. 오연지의 손자 오수천(吳受天)은 고려에서 정의대부(正義大夫)로 좌부대언(左副大言)을 지냈고, 증손 오식(吳湜)은 조선 태종 조에 형조참의와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경주부윤 겸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5세손인 오흠로(吳欽老)는 세종 조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제용판관(濟用判官) 및 황주판관(黃州判官)을 지냈다. 또한 오도남(吳道男)은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장사랑(將仕郞) 오적남(吳迪男) 또한 유명하였다. 오탁(吳琢)은 현감을 지냈고 경사(經史)에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덕망이 높았다. 오환은 가선대부로 한성부판윤을 지냈고, 오필제(吳必濟)는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오찬웅(吳贊雄)은 절충장군에 올랐고, 오병규(吳炳奎)는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였다.
시조 오연지(吳延祉)의 업적으로 인해 후손들이 봉군(封君)된 울산(蔚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해주오씨(海州吳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울산오씨는 764가구 총 2,491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울산오씨족보 (蔚山吳氏族譜)
《성씨(姓氏)의 고향》 (중앙일보사, 2002)
두산백과사전
부천족보도서관 (http//jokbo.re.kr/)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울산(蔚山)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동해안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는 진한(辰韓)의 땅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굴아화촌(屈阿火村)으로 파사왕(婆娑王) 때에 지변현(知邊縣: 戒邊城·神鶴城·火城郡)을 설치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하곡현(河曲縣 또는 河西縣)으로 고쳐 임관군(臨關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 때 이 고장 사람인 박윤웅(朴允雄)이 태조를 도운 공으로 하곡현과 우풍현, 동진현 등을 병합해 흥려부(興麗府)로 승격되었다가, 991년(성종 10)에 공화현(恭化縣)으로 강등되었고, 지울주사(知蔚州事)로 고쳤다. 1018년(현종 9)에 울주군(蔚州郡)이 되어 속현으로 동래현(東萊縣)과 언양현(彦陽縣)을 관할하였다가 방어사로 고쳤다. 1397년(태조 6)에 진(鎭)을 두었으며 1413년(태종 13)에 진을 혁파하고 울산군으로 고쳐 지군사(知郡事)로 삼았다. 1418년에는 염포(鹽浦)를 개항해 일본에 대한 문호를 열었으나,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으로 왜관이 폐지되었다. 임진왜란중인 1598년(선조 31)에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로 승격되어 병마절도사가 부사를 겸하게 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다시 별도로 부사를 파견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동래부 울산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상남도 울산군이 되었다. 1906년에는 월경지 정리에 의해 두입지(斗入地)인 외남면·웅상면이 양산군으로 이관된 대신 경주의 두입지인 외남면이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울산군의 21개 면이 14개 면으로 통합되었고, 언양군은 폐지되어 언양군의 6개 면이 5개 면으로 폐합, 울산군에 편입되었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 울산읍을 시로 승격하였다. 1995년에 울산시와 울산군을 통합하고, 1997년 울산광역시로 출범하였다.
《울산오씨족보》에 의하면 시조는 오연지(吳延祉)이다. 오연지는 도시조(都始祖) 오첨(吳瞻)의 24세손 오현보(吳賢輔 海州吳氏의 시조)의 8세 차손이다. 고려 충숙왕과 충혜왕 때 충직하고 절개가 곧다 하여 형 오연경(吳延慶)과 함께 울산에 강배(降配)되었다. 그러나 널리 알려지기로는 고려(高麗) 때 군기감(軍器監)을 지내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동남 변경(東南邊境)에 출몰한 왜구(倭寇)를 토평(討平)하여 학성군(鶴城君; 학성은 울산의 옛 이름)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관향을 울산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연지는 해주오씨의 시조 오인유(吳仁裕)의 6세손 효성공(孝成公)의 둘째아들이다. 지금까지는 효성공의 아우의 둘째아들로 잘못 알려졌었다. 이런 사유로 울산오씨는 《해주대동보(海州大同譜)》로 합보(合譜)되어 해주오씨 시랑공파(侍郞公派)로 고쳐질 계획이라고 한다. 오연지의 손자 오수천(吳受天)은 고려에서 정의대부(正義大夫)로 좌부대언(左副大言)을 지냈고, 증손 오식(吳湜)은 조선 태종 조에 형조참의와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경주부윤 겸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5세손인 오흠로(吳欽老)는 세종 조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제용판관(濟用判官) 및 황주판관(黃州判官)을 지냈다. 또한 오도남(吳道男)은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장사랑(將仕郞) 오적남(吳迪男) 또한 유명하였다. 오탁(吳琢)은 현감을 지냈고 경사(經史)에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덕망이 높았다. 오환은 가선대부로 한성부판윤을 지냈고, 오필제(吳必濟)는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오찬웅(吳贊雄)은 절충장군에 올랐고, 오병규(吳炳奎)는 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였다.
시조 오연지(吳延祉)의 업적으로 인해 후손들이 봉군(封君)된 울산(蔚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해주오씨(海州吳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고 알려져 왔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울산오씨는 764가구 총 2,491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
울산오씨족보 (蔚山吳氏族譜)
《성씨(姓氏)의 고향》 (중앙일보사, 2002)
두산백과사전
부천족보도서관 (http//jokbo.re.kr/)
뿌리를 찾아서 (http://www.rootsinfo.co.kr/)
본관명 평해(平海)
성씨명 오씨(吳氏)
본관소재지 경상북도 울진군 (慶尙北道 蔚珍郡 )
시조명 오극중(吳克中)
본관연혁
평해(平海)는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와 신라에 속했을 때의 근을어현(斤乙於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평해로 고쳐 유린군(有隣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때 예주(禮州)의 영현이 되었고, 1172년(명종 2)엔 지군사로 승격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울진군 평해면이 되었고, 1963년에는 울진군이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1980년 평해읍으로 승격되었다.
성씨의 역사
평해오씨(平海吳氏) 시조 오극중(吳克中)은 고려시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추증된 인물이다. 그는 해주오씨의 시조 오현보(吳賢輔)의 먼 후손이라 하는데 분명치 않다. 그의 아들 오종인(吳宗仁)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을 지냈고 손자 오경(吳璥)은 조선조에 상호군(上護軍)·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여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주요세거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고현리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봉황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평해오씨는 345가구 총 1,09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복오씨 세계도
오현좌(吳賢佐) 동복군(同福君)
1세 오 녕(吳 寧) - 동복군(同福君) 오현좌(吳賢佐) 의 장자. 동복군(同福君)
2세 중환(仲環)
3세 대승(大陞) 문헌공(文獻公) 시중(侍中)
4세 광찰(光札) 조정대부(朝靖大夫)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5세 선(璿) 문정공(文靖公) 광정대부(匡靖大夫)
6세 잠(潛) 문제공(文齊公) 찬성사(贊成事)
7세 선(僐) 찬성사(贊成事)
8세 중화(仲和)
※. 7세 찬성사(贊成事) 선(僐)은 화의군(和義君) 휘(諱) 달상(達祥) 조(祖)의 장인(丈人)이시다.
同福吳氏
1. 씨족의 연원
시조 오현좌(吳賢佐)는 고려(考慮) 고종 때 동복군(同福君)에 봉해 졌다. 그의 선계(先系)는 중국에서 지증왕(智證王) 원년(서기501년) 우리 나라로 건너온 무혜공(武惠公) 오첨(吳瞻)이고 23대손 병부상서 (兵部尙書) 오수권(吳守權)은 고려 고종3년 거란군(契丹軍)이 침입했을 때 오현보(吳賢輔). 오현좌(吳賢佐). 오현필(吳賢弼)등 세 아들에게 이를 격파케 하였다. 그 공으로 오현보(吳賢輔)는 해주군(海州君)에, 오현좌(吳賢佐)는 동복군(同福君)에, 오현필(吳賢弼)은 보성군(寶城君)에 각각 봉(封)해졌다. 그리하여 오현좌(吳賢佐)의 후손들은 오녕(吳寧)을 시조(始祖)로 하고 동복(同福)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2. 본관지 연혁
동복(同福)은 원래 전남 화순군(和順郡)에 있는 지명이다.
동복은 마한(馬韓)시대에는 비리(卑離)의 치소(治所)였고 백제(百濟)의 두부지현(豆夫只縣)이라 하였고.신라(新羅)시대에 동복(同福)이라 하여 곡성군(谷城郡)에 속하였고 고려조(高麗朝)에는 보성군(寶城郡)에 속하다가 고승(高僧)조영(祖英:光札아들)의 향리(鄕里)라 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태조(太祖) 3년(1334)에 다시 분리(分離)되어 오다가 1914년 화순군(和順郡)으로 합하였다.
동복의 군명(郡名)의 변천(變遷)으로 보면 비리(卑離). 두부지(豆夫只). 구성(龜城). 옹성(壅城), 라복(蘿) 동복(同福)의 순으로 되어있다. 동복면(同福面)의 면적은 62km2이며 행정(行政)동리(洞里)는 22개소이고 자연부락(自然部落)은 26개소. 법정(法定)동리(洞里)는 12개소이다.
3. 파명록
귀은공파(歸隱公派). 감천공파(感泉公派). 의재공파(毅齋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 주서공파(注書公派). 만취공파(晩翠公派). 묵재공파(默齎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 매암공파(梅庵公派). 금위장공파(禁衛將公派).승지공파(承旨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재신공파(宰臣公派).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진무장공파(鎭撫將公派) 17개파이다.
4. 주요 세거지
해방 전후(前後)까지만 해도 동복(同福)의 복(福)자를 따서 '복삼'(福蔘) '복청'(福淸:벌꿀) '복천어'(福川魚)등의 특산물로 유명했던 화순의 동복은 동복오씨(同福吳氏)의 오랜 세거(世居)의 터이다.
이 곳 모후산(母后山) 서록(西麓) 재궁동(齋宮洞)에는 1세 오녕(吳寧)에서 5세 선(璿)에 이르기까지 신위단비(神位壇碑)와 3세 오대승(吳大陞)의 묘소(墓所)가있다. 일찍이 동복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全國)각지(各地)로 뿔뿔이 흩어져 곳곳에 뿌리를 내렸던 동복오씨(同福吳氏)의 자손들의 집성지(集姓地)로는 제주도(濟州道) 북제주군(北濟州郡) 추자면(湫子面)과 전남 순천(順天). 여수(麗水), 완도(莞島). 진도(珍島). 고흥(高興). 장흥(長興). 해남(海南). 신안(新安). 보성(寶城). 강진(康津). 영암(靈巖). 함평(咸平). 화순(和順). 전북 고창(高廠). 남원(南原). 정읍(井邑). 김제(金堤) 완주(完州). 옥구(沃構).익산(益山)등지를 들 수있다. 또한 충남 서천(舒川). 보령(保寧). 청양(靑陽). 논산(論山). 금산(錦山). 공주(公州)등지 충북 청원(淸原). 옥천(沃川). 중원(中原). 제천(堤川). 단양(丹陽).등지와 경북 의성(義城). 경남 진양(晉陽). 함양(咸陽). 강원도 양구(楊口). 홍천(洪川). 원주(原州). 경기도 연천(漣川). 고양(高陽). 남양주(南陽州). 시흥(始興)등지에도 자손(子孫)들이 많이 살았다.
그리고 이북(以北)지역(地域)에서는 해방전 평남 평원(平原)과 황해도 연백(延白). 옹진(甕津). 장단(長端).등지에 많이 살았다. 지금은 서울 수도권(首都圈)지역에서 대다수(大多數)가 살고 있다.
5. 씨족사 개요
전국 오씨대종회(吳氏大宗會)는 우리 나라 모든 오씨(吳氏)는 해주군(海州君). 동복군(同福君). 보성군(寶城君)등 삼군(三君)의 후손으로 동조동근(同祖同根)이라고 말한다. 충남 공주 취리산(忠南公州就利山)에 해주(海州). 동복(同福). 보성(寶城) 오씨의 시조를 모시는 금양단(錦陽壇)이란 신단(神壇)이 있어 매년 후손들과 지방 사림(士林)이 모여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다.
동복군(同福君) 오현좌(吳賢佐)는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녕(寧)도 아버지에 이어 동복군(同福君)에 봉(封)해져 1세가 되어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고 둘째 아들 숙귀(淑貴)는 군위오씨(軍威吳氏)로 분적(分籍)하였다. 녕(寧)의 3세손 대승(大陞)은 고려(高麗) 원종(元宗)때 (서기1260년) 문과(文科) 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시중(侍中)까지 올라 문헌(文獻)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나중에 동복현(同福縣:현 전남(全南) 화순군(和順郡) 동복면(同福面)에 낙향. 여생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암석(岩石)에 석등(石燈)48개를 만들어 밤마다 점화(點火)해.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후손들의 융성(隆盛)을 기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석등(石燈)은 현재 원형(原形)대로 보존되어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62호로 지정 되었다.
동복오씨(同福吳氏)의 못 자리인 전남 화순군(和順郡)동복면(同福面) 모후산(母后山)에는 1세 오영(吳寧)과 그의 아들 중환(仲環). 4세 고려(高麗)조정대부(朝靖大夫)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오광찰(吳光札). 5세 광정대부(匡靖大夫) 선(璿)등 4위의 신단(神壇). 문헌공(文獻公) 대승(大陞)의 묘등 동복오씨 17개파 전 문중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초정일(初丁日)에 제사(祭祀)를 지내고 있다.
동복오씨(同福吳氏) 세적(世蹟)에 따르면 봉군(封君)은 녕(寧) 잠(潛) 백령(百齡) 등 3명. 상신(相臣)은 대승(大陞). 시수(始壽)등 2명이다. 시호(諡號)는 대승(大陞). 선(璿). 천(薦). 식(軾).윤감(允). 유년(有年). 승(陞). 백령(億齡). 광운(光運)등 10명이다. 학행(學行)은 억령(億齡). 백령(百齡) 형제이고. 생진(生進)은 75명. 문과(文科) 급제(及第)는 28명 무과(武科)는 32명 정도이다.
국조방목 참조(國朝榜目 參照) 이 밖에 효행(孝行) 51명. 충의(忠義)11명 등으로 기록 되있다.
진신관작보참조(縉紳官爵譜 參照) 제각(祭閣)은 동복(同福)의 효사재(孝思齋)외에 전북 김제시 신월동의 경모재(敬慕齋). 남원시 산내면 매동의 경모재(景慕財). 전남 해남군 오산의 효모재(孝慕齋) 계곡면 사정리의 용지사(龍池祠) 등이 있다. 고려조(高麗朝)의 동복오씨(同福吳氏) 인물(人物)로는 동복군(同福君) 현좌(賢佐) 동복군(同福君) 녕(寧) 부자(父子)를 비롯하여 시중(侍中) 문헌공(文獻公) 대승(大陞). 조정대부(朝靖大夫) 광찰(光札)과 그의 아우 재신(宰臣) 광명(光明).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광식(光植), 광붕(光棚)등 4형제. 광찰(光札)의 아들 문정(文靖) 선(璿). 대선사(大禪師) 조영(祖英). 선(璿)의 큰아들 문제(文齊)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잠(潛).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천(潛). 밀직사사(密直司事) 선(璿). 상서(尙書)윤백(允伯).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윤후(允侯). 한림승지(翰林承旨) 자귀(自貴). 좌윤(左尹) 윤감(允감). 상서(尙書) 유년(有年).등이 있다.
동복오씨의 대표 인물은 광찰(光札)의 10세손 세현(世賢)의 아들 억령(億齡). 백령百齡) 형제이다. 이때부터 동복오씨는 본격적으로 중앙(中央) 정계(政界)에 진출 기라성(綺羅星) 같은 명현(明賢)을 배출하면서 명문(名門)의 위치를 굳혔다. 의제(儀制) 오전(吳詮)은 중종 36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삼도해운판관(三道海運判官)에 이르고 의제문집(毅齋文集) 상하권(上下卷)이 있다.
만취(晩翠) 오억령(吳億齡)은 조선조 선조 1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벼슬에 있는 동안 대사헌(大司憲)5회 형조판서(刑曹判書) 3회 등을 역임 40여 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검소(儉素) 청렴(淸廉)하니 청백리(淸白吏)에 녹선(祿選)되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에도 뛰어나 만취문집(晩翠文集)을 남겼다.
그의 아우 묵재(默齋) 오백령(吳百齡)도 문과(文科)에 급제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등을 지내고 복천군(福川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이 집안에서만 8판서(判書)를 배출하였다. 동복오씨의 인물은 거의가 이들 형제의 후손이다. 조선조(朝鮮朝) 인물중 정평공(靖平公) 승(陞)도 크게 돋보인다.
문헌공(文獻公)의 6세손인 그는 공조판서(工曹判書). 대제학(大提學)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역했다. 이조참판(吏曹參判) 시절 주현둔전제도(州縣屯田制度)를 개설했고. 역사상(歷史上)처음으로 군주(君主)정치(政治)의 독선(獨善)을 배제하고. 민주적(民主的)인 국민투표를 창안(創案)왕의 재가(裁可)를 받아. 실행에 옮긴 장본인이다. 저서(著書)로는 죽헌유고(竹軒遺稿)가 있다. 동복오씨(同福吳氏)는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급제(及第) 28명이다. (國朝榜目參照) 우의정(右議政)1명(始壽). 호당(湖堂) 1명(億齡)등을 배출했다. 한림학사(翰林學士).자귀(自貴)의 증손(曾孫) 준(浚:1444~1494)은 조선조(朝鮮朝)의 손꼽히는 효행(孝行)자로 이름난 인물이다.
그 효행(孝行)사적(史蹟)으로 남아있는 전북 고창군 신림면 외화리 효감천(孝感泉)이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었다. 의재(毅齋) 오전(吳詮)은 가정(嘉靖)16년 정유(丁酉)1537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 영남(嶺南)지방 암행어사 (暗行御史)를 거쳐. 삼도해운판관(道海運判官)을 역임하고 지병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유고(遺稿)는 의재(毅齋) 문집(文集)2권이 있다. 오억령(吳億齡)의 아들 오익(吳翊)은 선조36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손실된 이조실록(李朝實錄)의 재간(再刊)에 공헌했고. 승지(承旨)등 벼슬을 지내면서 명나라를 다녀 오기도한 명필(名筆)이었다. 오백령(吳百齡)의 아들 오준(吳竣)(광해:10년)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효종조(孝宗朝)에 형조(刑曹)판서(判書)를 현종조(顯宗朝)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으며. 當代의 국필(國筆)로 이름을 떨쳤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송파(松坡)의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 전남 영암군 월출산(月出山)에 있는 보물급 문화재(文化財). 선국사비문(道詵國師碑文) 충남 아산(牙山)충무공(忠武公) 이순신장군(李舜臣將軍) 신도비문(神道碑文) 등 그의 필적(筆跡)은 전국 각지에 많이 남아있다.
저서(著書)로는 죽남당유고(竹南堂遺稿)가 있다. 오준(吳竣)의 아우 오단(吳端)역시 인조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황해도 관찰사(觀察使)등을 역임했고. 오익(吳翊)의 아우 오전(立專)도 같은 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충직(忠直)한 암행어사(暗行御史)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오단(吳端)의 아들 오정일(吳挺一)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승지(承旨)를 거쳐. 황해도(黃海道). 경기도(京畿道)등 관찰사(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刑曹判書)등을 역임했고.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 재직시 휼민(恤民) 선정(善政) 송덕비(頌德碑)는 경기도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 지정(指定)되 있다.
전(吳立專)의 아들 오정위(吳挺緯)도 인조10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관찰사(觀察使)와 형조판서(刑曹判書)등을 두루 거쳤다. 오백령(吳百齡)의 손자 오정원(吳挺垣)은 효종원년(孝宗元年)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서해(西海).호서(湖西)등 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오단(吳端)의 아들 오정창(吳挺昌)은 대사헌(大司憲).예조판서 禮曹判書)를 지내고 특히 오정원(吳挺垣)의 아들 오시수(吳始壽)는 암행어사(暗行御史). 관찰사(觀察使). 도승지(都承旨). 형조판서(刑曹判書)등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을 숙종(肅宗)5년까지 지낸 당대(當代) 동복오씨(同福吳氏)의 큰 별이다.
이 밖에 조선조(朝鮮朝)의 오시복(吳始復:숙종)이조판서(吏曹判書). 오시만(吳始萬:숙종) 대사헌(大司憲). 오시대(吳始大:숙종) 관찰사(觀察使). 오상유(吳尙游:숙종). 해운판관(海運判官). 오광운(吳光運:숙종) 예조참판(禮曹參判). 오달운(吳達運:숙종). 오수찰방(獒樹察訪)을 지내고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이다.
오인영(吳麟泳:철종) 승지(承旨). 오필운(吳弼運:정조) 예빈직장(禮賓直長). 오대익(吳大益:영조) 호조참(戶曹參判)이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는 오유(吳宥). 오정달(吳廷達). 오극신(吳克信). 오홍적(吳弘績) 오대무(吳大武) 오신령(吳信齡)등 6충(忠)의 열사(烈士)가 순국(殉國)했고.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오정직(吳挺稷)과 무신란(戊申亂)때의 오한필(吳漢弼)은 2.000여명의 의병(義兵)을 거느리고. 반군을 토벌하기도 했다.
특히 오현영(吳憲泳)은 순종 경술 (庚戌)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보를 듣고 독립(獨立) 투사(鬪士) 나만성(羅萬成). 상수(金相洙)등과 합께 중국(中國). 몽고(蒙古)에 근거(根據)를 개설하고 13년간 항일 (抗日)투쟁(鬪爭)을 하다. 순국(殉國)한 인물이다. 이 밖에 오준상(吳準相)은 충청도(忠淸道). 의병장(義兵將)으로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 주석(主席). 백범(白凡) 김구(金九)와 밀통. 광복(光復)에 힘쓰다 붙잡혀 오래 동안 복역(服役)하기도 했다.
동복오씨(同福吳氏)는 조선조(朝鮮朝)초기(初期)이후 벼슬을 마다하고.문학(文學) 철학(哲學). 사상(思想). 실학(實學)등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한 명현(名賢)들이 드러지게 많다. 그 결과 오억령(吳億齡)의 유고(遺稿)인 만취문집(晩翠文集)을 비롯 20여명의 문집(文集)과 시고(詩稿)등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이에 따라 1981년. 동복오씨(同福吳氏) 문헌선양회(文獻宣揚會)가. 발족(發足)되 씨족사(氏族史)정립(定立).목표로 선조들이 남긴 고문헌(古文獻)의 번역(飜譯)과 가승(家乘)의 정통(正統)계승사업(繼承事業)을 활발하게 추진. 동복오씨(同福吳氏). 세적지(世蹟誌:국역판) 2집을 발간(發刊) 하기도 했다.
동복오씨(同福吳氏)문헌선양회(文獻宣揚會)편집(編輯)
3세 대승(大陞) 공(公)의 행적(行蹟)
고려조에 시중을 지내셨다. 문헌(文獻), [묘] 동복면 독상리산 23번지 모후산 서쪽기슭 재궁동 묘좌. 공은 관아(官衙)의 남쪽에 돌을 쪼아서 48등(四十八燈)을 만들고 밤마다 등(燈)에 불을 켜고 국가(國家)의 번영(繁榮)과 자손의 창성(昌盛)을 축원하니 그 후에 자손들이 대대로 잇따라 벼슬에 오르게 되니 사람들이 전하기를 기이한 일이라 했다. 석등(石燈)의 형체(形體)가 여러 백년을 지나도록 그대로 남아있고 지금도 완연하다. 현종(顯宗) 경술년(서기1670년) 후손 시수(始壽 : 호는 水村)가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로 있을 때 묘 앞에 비(碑)를 세우고 사적(事蹟)을 간단히 새겼으며 또 석등 옆에 작은 비석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상고할 수 없게 되자 새로 비를 세우고 김상보(金尙保)의 기록을 추가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이 또한 마모되었다. 영조(英祖) 정해년(서기 1767년)에 다시 바꾸어 세웠다. 1959년 후손 병석(炳晳)이 비문을 지어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1990년 동복오씨 광주 전남 종친회(회장 형옥, 간사장 기탁)주관으로 석등각(石燈閣)을 중수(重修)하고 四十八 석등기비와 헌성비를 세웠다. 1993년 문헌공 묘소로 가는 길을 넓히고 묘들래석을 설치하는 등 묘역을 정화하였다. 1996년 효사재(孝思齋)를 보수하고 효원당(孝源堂)을 건립하여 종원과 후손의 교육장으로 활용토록 하였다.
4세 광찰(光札) 공(公)의 행적(行蹟)
고려 충렬왕(忠烈王) 6년 (서기 1280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왕으로부터 홍정자(紅?子)를 하사 받았다. 조정대부(朝靖大夫)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89세 되던 해 관직(官職)을 그만 두었다. [부인] 동북화씨 [묘] 동북면 재궁동에 부군과 함께 설단하여 시향을 모시고있다. 父 散員 仁亮.
5세 선(璿) 공(公)의 행적(行蹟)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都僉議) 시랑찬성사(侍郞贊成事)로 판도랑사(版圖郞事)의 찬사(判事)와 상호군(上護軍)이시다. 고려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벼슬을 그만 두다. 시호 文靖(문정) [부인] 안강 安씨 父 별장 정용(精勇) 안강은 강진 땅에 있던 고을이다.
6세 잠(潛) 공(公)의 행적(行蹟)
초명 祁(기), [字]興雨, [諡號] 東軒, 고려 충숙왕 때에 중대광(重大匡) 품계로 첨의부(僉議府)의 찬성사(贊成事)로서 우문관(右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이며 춘추관(春秋館)의 감사(監事)와 총부(摠府)의 판사(判事)로서 귀성군(龜城君)에 봉(封)해지다. 행장(行狀)은 묘지문(墓誌文)에 실려 있다. [부인] 이천申씨 [묘]진서면 눌목리 서쪽 대덕산 합장 [父]상서(尙書) 전(?)으로 전하나 묘지문에는 통의대부(通議大夫) 품계에 예빈시(禮賓寺)의 판사며 춘궁(春宮:왕세자)의 시독학사(侍讀學士)의 사관(史館)의 수찬관(修撰官)과 지제고(知制誥)를 지낸 욱(頊)의 따님이라 하였다.
7세 선(僐) 공(公)의 행적(行蹟)
초명 方愿(방원), [字]백아(白雅) [諡號]눌재(訥齋) 1284(갑신)7.5생 공민왕(恭愍王)때인 1352년에 봉익대부(奉翊大夫) 품계에 밀직사(密直司)의 판사이며 우문관(右文館)과 총부(摠部)의 판사를 지내고 세습하여 귀성군(龜城君)에 봉(封)해지다. 정사(政事)를 돌보던 14년 동안은 신돈(辛旽)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법을 어기는 데에 유숙(柳淑) 정세운(鄭世雲)등과 같이 나라를 해치는 사람은 머리를 깎아 내쳐야 한다고 왕에게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자 속으로 생각하기를 더 이상의 뜻을 접기로 하고 가솔인 다섯 아들과 세 딸 그리고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데리고 광나루를 지나 초월(初月:광주군 초월면 길(路)의 지월봉(池月峯) 아래에 대(臺)를 쌓고 숨어 살게 되었다. 그곳을 말문이 막혔다 하여 언두(言杜)라 하고 세상(世上)을 근심하고 탄식하다. 1366.925별세하였다. [묘]지월봉 뒷기슭새변단(塞邊壇) 유좌,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이 지은 행장(行狀)이 있다 [부인] 여산송씨 [父]밀직사사 좌부승지 진(瑨) 1366.11.3별세 [묘]위 합장 이하 3世 분묘가 수백년 동안 실전(失傳)되었다가 종인(宗人) 이영(理泳)이 전한 바를 덕산리 종인(宗人) 재도(在道)가 성심(省尋)하여 그 사실을 대동보(大同譜) 수권(首券)에 실었다.
※2004.11.6에 이하 3世분의 묘역을 정화하고 묘비를 세웠다
득관조(得貫祖) 오숙귀(吳淑貴) 입도시조(入道始祖) 오석현(吳碩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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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軍威)오씨 시조는 고려조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오숙귀(吳淑貴)공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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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은 1456년 가족과 함께 제주 성산포구로 입도하여 현재 성산읍 신양리인(정의현 가둔리(嘉遯里))에 정착하였다. 이곳이서 인지(人智)를 펴고 향민을 훈학계도하며 이 고장에 뿌리를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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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래 | |||||||||||||||||||||||||||||||||||||||||||||||||||||||||||||||||||||||||||||||||||||||||||||||||||||||||||||||||||||||||||||||||||||||||||||||||||||||
시조 : 오현필(吳賢弼) 시조 오현필(자는 응남, 호는 성제)는 도시조 오첨의 24세손이다. 그는 1216년(고려 고종 3년)에 계단을 토평한 공으로 보성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본관을 보성으로 하였다. 보성 오씨에서 분관된 오씨는 4개의 본이 있는데 첫째 아들 오숙부와 둘째 아들 오양의 후손은 보성 오씨를 계승했으며, 셋째 아들 오원은 화순 오씨로, 넷째 아들 오광휘는 함양 오씨로 분관 했으며, 오현필의 둘째 아들 오양의 6세손 중권은 흥양 오씨로, 오현필의 6세손 오사염의 둘째 아들 오천우는 장흥으로 각각 분관하였다. - 오현필의 묘소는 충남 공주군 장기면 신관리 취리산에 있다. | |||||||||||||||||||||||||||||||||||||||||||||||||||||||||||||||||||||||||||||||||||||||||||||||||||||||||||||||||||||||||||||||||||||||||||||||||||||||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 |||||||||||||||||||||||||||||||||||||||||||||||||||||||||||||||||||||||||||||||||||||||||||||||||||||||||||||||||||||||||||||||||||||||||||||||||||||||
오준근(吳濬根) : 문과(文科) 정조0년(1776)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오대곤(吳大坤, 1734 甲寅生) : 문과(文科) 정조10년(1786)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오몽량(吳夢樑, 1734 甲寅生) : 문과(文科) 중종31년(1536) 친시 병과(丙科) 오봉원(吳奉源, 1702 壬午生) : 문과(文科) 영조30년(1754) 함경도도과 병과(丙科) 오익환(吳翼煥, 1754 甲戌生) : 문과(文科) 정조1년(1777) 증광시 병과(丙科) 오익환(吳翼煥, 1754 甲戌生) : 문과(文科) 정조10년(1786) 중시 을과(乙科) 오성근(吳聖根, 1743 癸亥生) : 문과(文科) 정조14년(1790) 별시 병과(丙科) 오창(吳昶, 1743 癸亥生) : 문과(文科) 명종10년(1555) 식년시 병과(丙科) 오덕증(吳德曾, 1690 庚午生) : 문과(文科) 경종1년(1721) 식년시 병과(丙科) 오맹경(吳孟經, 1690 庚午生) : 문과(文科) 문종1년(1451) 증광시 정과(丁科) 등 모두 108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28명, 무과 9명, 사마시 71명) | |||||||||||||||||||||||||||||||||||||||||||||||||||||||||||||||||||||||||||||||||||||||||||||||||||||||||||||||||||||||||||||||||||||||||||||||||||||||
▣ 항렬자 | |||||||||||||||||||||||||||||||||||||||||||||||||||||||||||||||||||||||||||||||||||||||||||||||||||||||||||||||||||||||||||||||||||||||||||||||||||||||
부위공파
양무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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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22世孫은 21代孫) | |||||||||||||||||||||||||||||||||||||||||||||||||||||||||||||||||||||||||||||||||||||||||||||||||||||||||||||||||||||||||||||||||||||||||||||||||||||||
▣ 본관 연혁 | |||||||||||||||||||||||||||||||||||||||||||||||||||||||||||||||||||||||||||||||||||||||||||||||||||||||||||||||||||||||||||||||||||||||||||||||||||||||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보성 보성(寶城)은 전라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한 보성군(寶城郡) 지역의 옛 지명으로 마한 54국 중 불운국(不雲國)이었다고 한다. 백제 때에는 복홀군(伏忽郡)이라 불리었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보성군(寶城郡)으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고려 태조는 삼양군(三陽郡)이라 하였으며, 996년(성종 15)에 패주(貝州)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보성군(寶城郡)이 되었다. 1441년(세종 23)에 조양현(兆陽縣)과 복성현(福城縣)을 제외한 대부분의 속현이 흥양현으로 이속되어 면적이 크게 축소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보성군, 1896년에 전라남도 보성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권역이 다시 확대되었고 1941년에 보성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 |||||||||||||||||||||||||||||||||||||||||||||||||||||||||||||||||||||||||||||||||||||||||||||||||||||||||||||||||||||||||||||||||||||||||||||||||||||||
▣ 인구수 | |||||||||||||||||||||||||||||||||||||||||||||||||||||||||||||||||||||||||||||||||||||||||||||||||||||||||||||||||||||||||||||||||||||||||||||||||||||||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보성오씨는 1985년에는 총 12,342가구 52,544명, 2000년에는 총 18,229가구 59,91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
◀ 흠소재(欽紹齋) 전경 : 청은(淸隱) 오자화(吳自和)를 배향.
- 소재지 : 전북 군산시 회현면 세장리
장흥(長興)은 전라남도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는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인데 신라 때 오아(烏兒)로 개칭되어 보성군에 속해 있다가 고려 때 영암(靈岩)에 소속되고, 인종(仁宗) 때 장흥부(長興府)로 승격되었다.
1265년(인종 6)에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장흥부가 되었다.
그 이후 많은 변천을 거쳐 1895년에 장흥군이 되었다.
1914년 부·군·면 폐합에 따라 웅치(熊峙)·회천(會泉) 2개면이 보성군에 이관되었으며,
1936년 부동면(府東面)을 장흥면으로 개칭하고, 남상(南上)·남하(南下) 양면을 용산면(蓉山面)으로,
고읍면(古邑面)을 관산면(冠山面)으로 개칭하였다.
1942년 장흥면이 장흥읍으로 승격하고, 1980년 관산면이 관산읍으로, 대덕면이 대덕읍으로 승격하였다.
장흥 오씨(長興吳氏)의 시조(始祖)인 오천우(吳天佑)는 현필(賢弼 : 보성 오씨의 시조)의 6세손인 사충(思忠)의
둘째 아들로 조선조(朝鮮朝)에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그후 후손들이 장흥(長興)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보성 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장흥(長興)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조선(朝鮮)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섭의(燮宜)와 목사(牧使)를 지낸 신언(愼言),
그리고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신행(愼行)이 있다.
이외에도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맹을 떨친 계은(繼殷),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한 린(麟)과 언신(彦信) 등이 가문을 빛냈다.
유래]
시조 오현필(자는 응남, 호는 성제)는 도시조 오첨의 24세손이다. 그는 1216년(고려 고종 3년)에 계단을 토평한 공으로 보성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본관을 보성으로 하였다.
보성 오씨에서 분관된 오씨는 4개의 본이 있는데 첫째 아들 오숙부와 둘째 아들 오양의 후손은 보성 오씨를 계승했으며, 셋째 아들 오원은 화순 오씨로, 넷째 아들 오광휘는 함양 오씨로 분관 했으며,
오현필의 둘째 아들 오양의 6세손 중권은 흥양 오씨로, 오현필의 6세손 오사염의 둘째 아들 오천우는 장흥으로 각각 분관하였다.
咸陽 吳氏 (함양오씨)
시조: 오광휘(吳 光 輝)
본관 및 시조의 유래
함양은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속함군인데 경덕왕이
전령군으로 고려 현종때 함양군(含陽郡)이되어 합주(합천)에 속하였다가 함(含)을
함(咸)으로 고쳐서 함양(咸陽)이 되었다 .
함양오씨 (咸陽吳氏)의 시조 오광휘(吳光輝)는 고려때 좌복야를 지냈고
흥위위 상장군으로 명주(溟州)에 출몰한 외적을 격퇴시킨 공으로
추충정란광국일등공신에 책록 되었으며, 이어 삼중대광.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원래보성오씨였으나 후손들이 보성오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함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의 아들 홍예(洪芮)가 정의대부에 올라 함양군에 봉해졌으며,
손자 유(裕)가 호부 상서를,
증손 세룡(世龍)이 조선때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세룡의 아들 중원(仲元)이 이조판서를 지냈고,
손자 엄(儼)이 대사헌과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여 대를 이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예종때 한성부 좌윤과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치인(致仁)의아들 응(凝)과
춘추관 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세기(世紀)의 아들 건(健),
임진왜란때 의병으로 활약하여 전공을 세운 사운(思雲)의 아들 빈(玭)과
건(健)의 아들 장(長) 등이 있다.
오유(裕):호부상서를 지냄
오중원(仲元) : 이조판서를 역임
오상덕 : 봉선대부에 오름
오엄 : 가선대부로 대사헌을 지냄
오응(凝) :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
오찬조: 임진왜란때 큰공을 세워 절도사에 이름 오장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아 공을 세우고 급제하여 경성판관을 지냄
오익창 :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을 도와 큰공을 세워 정량이 되었다.
이외도 많은 인물이 공을 세워서 빛나는 분들이 많다 .
항렬 ; 29세 손 ,필,헌 ,녕 30세 손 규, 혁 ,철 31세손 일,영,우
32세손 임, 춘,걸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함양오씨 시조 광휘,함양 박씨상서공과 ,함양여씨 중조임청이
여흥민씨의 3동서였는데 3공이 산수간에 고요하며 쉬어간곳을 삼휴대
(함양 읍에서 서북쪽 10여리에 있는 지금의 삼사동) 라고 하고 갓걸이라 하여
지금도 지명으로 일러 오고 있다 .
인구 분포도 는 년도별로 아래와 같다 .
집성촌 으로는
경북 영양군 영양면 대천동 경남 진양군 미천면 상미리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다천리 전북 남원시 노암동
참고 : 자료에서 틀리거나 보충 상세자료가 있으면 댓글로 올려주세요 .
오광휘 함양오씨 시조 영정
2007년 4월29일 춘향제 행사시 전면모습
조경 상태 (함양오씨 시조묘)
확장공사전 시조 묘소
확장공사전 시조묘 遠景
확장공사중 모습
영화재: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소재 :함양오씨 시조 사당
현제 두원오씨와 흥양오씨가 나누어져 있는데 같은 본관입니다
두원현이 1441년에 흥양현으로 개편되면서 자료에는 두원오씨지만 족보는 흥양오씨인것이지 다른본관이 아닙니다
현제 후손들은 흥양오씨로 부르는데 많은 자료들이 두원오씨에 있는것 같은데
나우어진 자료를 흥양오씨로 합하고 이칭으로 두원오씨로 표기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함양오씨에서 분관이 아니라 보성오씨에서 분관된것이 맞습니다
1세 오완----2세오현우----3세중권---4세사종----5세숙-----6세영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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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오씨대동종친회 자료입니다
흥양(興陽)오씨 관파 연혁
시조 오준민(吳俊玟)은 보성오씨(寶城吳氏) 시조 오현필(吳賢弼)의 9세손으로 고려(高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전주오씨는 427가구 총 145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시조 오준민(吳俊玟)은 보성오씨(寶城吳氏) 시조 오현필(吳賢弼)의 9세손으로 고려(高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전주오씨는 427가구 총 145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대동종친회의 연혁
* 1965년3월 6일(음력) 錦陽壇 設立 및 吳氏本源 編纂 發議
目的; 崇祖 睦宗 育英의 理念으로 總和團結하고 百代之親의 宗誼 繼承
1. 黃海道 海州 首陽山에 모서져 있던 삼군(三君)의 묘소가 실전되고, 또 삼군을 모신 三忠祠마저 회철(回撤)되었으나 日帝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으로 복원하지 못한 체 1953년 7월에 停戰協定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往來가 단절되고 말았음.
2. 1965년에 이르러 緯泳(국회의원과 장관 역임), 制道(검사 국회의원),
潤煥(보학자),範秀(국회의원) 등을 위시한 崇祖, 愛族精神이 투철하신 여러 어른들이 오씨대동종친회를 창립하시고 공주 취리산의 연화부수(蓮花浮水)라는 명당자리에 영단(靈壇)을 설단, 금양단(錦陽壇)이라 명명하고 매년 음력 3월 6일에 儒林과 본손(本孫)이 享祀를 올림으로서 궐향(闕享)의 죄를 면하게 됨.
初代 회장으로 緯泳(국회의원)을 선출함.
3. 2대 회장으로 潤煥(보학자). 3대 範秀(국회의원). 4대 制道(국회의원).
5대 俊錫(국회의원).6대 龍雲(국회의원).7대 益善(사업가).8대 鐸根(법무부장관) 등이 회장직을 역임했으나 禧澤(변호사).德善(변호사) 등이 회장직을 맡으면서 長期間 沈滯期로 들어감.
4. 2005년 새 定款을 제정 공포하고 榮祐(예비역 육군대장)종친이 제20대 총재로, 수석 부총재에 寀泳 종친이 취임, 서울에 중앙 종친회 사무실을 개소하였음.
고창오씨를 비롯하여 해주 동복 보성 등 전국 오씨 15개 관파 대종회가 참여하고 吳氏大同宗報를 발간하기 시작하였으며 각 시,도 종친회(연합회)와 각 시.군.구 종친회(지회)를 조직하였음.
5. 2007년에 제21대 億根(사업가) 종친이 총재로, 수석부총재에 在煜 종친이 취임하였고, 궐향 중인 삼군의 아버님이신 23세 수권(守權 병부전서, 신호위 대장군) ~비조 첨(瞻 무혜공)의 祭殿을 多憐君의 연고지인 羅州에 崇祖殿이라는 이름으로 건립하기로 의결하고 기공하였음.
2012년 4월 억근 총재가 3선이 되었으나 工事가 중단된 가운데 5월에 총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음.
6. 위기에 처한 본회는 즉각 非常對策委員會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警世 종친과 부위원장에 慶善, 鎭宇 종친을 선임하고, 정관 개정과 차기 총재 및 지도부 선출을 정기총회에서 하기로 하였음.
7. 2013년 4월 15일, 금양단 향제를 모신 후 개최된 정기총회에서 鎭宇 종친을 총재로, 南烈 종친을 수석 부총재로, 仁泳 종친을 상임 부총재로 만장일치 선출하였음.
또 정관 규정에 따라 在慶, 義均, 屯榮 종친 3인을 監査로 선출하였음.
8. 2013년 5월 25일, 서울 트레인스 레스토랑에서 23대 鎭宇 총재의 취임식을 거행함.
이 자리에는 榮祐, 警世 명예총재와 南烈 함양오씨대종회장을 비롯환 각 관파회장 등이 전원 참석하였고 각 宗職者에게 선임장 및 위촉장 수여식이 있었음.
9. 2013년 8월 20일, 서울 트레인스 레스토랑에서 임시 이사회 및 오씨대동종친회 中興 宣布式을 거행하였음.
榮祐, 警世 명예총재를 비롯하여 泳食 국회의원 등과 각 관파 회장 및 이사들이 참석하여 본회가 再蹈躍의 기틀을 마련하고 중흥 의지를 다지는 결의를 하였으며, 절판되었던 대동종보 復刊(제8호)을 의결하였음.
10. 2013년 10월 1일, 重世 부총재가 본회 宗旗와 祝旗를 제작 기증하였음.
11. 2013년 10월 13일, 문화체육관광부와 대전 광역시가 주관하고 대전 중구청이 주최한 제5회 全國孝뿌리文化祝祭에 처음 참가하였음.
127개 씨족이 겨룬 門中 퍼레이드에서 당당히 最優秀賞과 副賞으로 상금 1백만원을 수상하는 榮光과 快擧를 이루었음.
12. 2014년 8월 15일 오씨대동종보8호가 발간되었음.
초판 2천부 중 종친 1 천부, 국립중앙도서관.국회도서관.각 대학 중앙도서관.
전국 262개 시군구 도서관 등 공공기관에 약 1천 부가 배포되어 한국 오씨 역사상 최초의 공인 역사서로 자리매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