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장 진자앙은 국상(國傷)을 따라가고 양신임(梁新任)은 횡액
을 당하다.
1
중추절(仲秋節), 장안(長安).
삼황야(三皇爺)가 어전시합(御前試合)을 연다.
속으로야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기 짝이 없던 무림이 이 한 가지 소문으로 발칵 뒤집어졌다.
삼황야는 전대 황제의 셋째 아들이며, 당금 황제의 동생이다. 폭정(暴政)이니 학정(虐政)이니는 하지 않으니 사람은 좋다지만 여색에 빠져 골골대는 것이 당금 황제의 상황, 그리고 이런 경우 언제나 그렇듯이 황태자는 아직 어렸다.
그쯤 되면 뒤는 뻔했다. 야심만만한 황야들이 용이 새겨진 의자에 군침을 흘리기 마련인데 삼황야는 그 중에도 일 순위라고들 했다.
젊어서부터 똑똑하고, 야심 많고, 용감하기까지 해서 무예도 좋아했던 삼황야. 그가 맏이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나라의 불행이라고 참람한 말을 하는 대신들도 있었으니 가히 그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삼황야가 무림대회(武林大會)를 여는 것이다.
원래 무림대회, 혹은 비무대회가 벌어지는 데에는 서너 가지의 경우가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 그래서 가장 자주 벌어지는 경우가 시비를 해결하기 위한 비무대회였다.
무림은 말보다는 칼이 대신 말해 주고, 또 그 경우 말이 제대로 먹혀드는 경우가 많은 곳이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일단 중재자를 내세워 말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해결되는 경우는 아예 문제랄 것도 없는 경우고 대개는 주먹이 오가고 창칼이 번뜩이고 나서야 수습이 된다.
이때 조금이라도 피를 덜 보고, 관가의 이목을 두려워 않고 합법적으로 싸울 수 있는 방법이 비무대회였다. 대표자를 뽑아서 겨룬 뒤 이긴 쪽이 이득을 차지하는 것이다. 무림인으로서는 지극히 공평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무대회는 양측에 초청을 받아 대표가 되지 않으면 구경은 가능해도 나가 싸울 수는 없으니 가장 자주 열리기는 해도 성대하게 벌어지기에는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또 다른 경우로는 물유각주(物有各主:보물에는 따로 주인이 있다)의 원칙에 의거해서 보물을 걸고 그 주인을 가리기 위해 벌어지는 비무대회와 비무초친(比武招親)이라 해서 또 다른 형태의 보물, 즉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비무대회를 여는 경우가 있다.
이 두 경우가 민간에서는 가장 크게 비무대회를 여는 경우고, 참가자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 어떤 경우보다도 흔히 벌어지고, 또 가장 성대하게 벌어지는 비무대회는 관에서 여는 경우였다.
혹은 재미로, 또 혹은 인재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각 성에서, 혹은 왕공후작(王公侯爵)들이 비무대회를 열곤 하는데 그 중 가장 지명도가 높은 것은 당연히 지고의 존재인 황제의 앞에서 벌어지는 어전시합이다.
그러나 이번에 삼황야가 여는 비무대회는 황제의 어전시합보다도 오히려 높게 치는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지금은 삼황야가 황제보다 오히려 실력자라는 현실적인 이유, 다음으로는 삼황야의 배후에 있는 또 한 사람 때문이었다.
당금 무림십대고수 중에서도 명실공히 수좌의 위치에 있는 황사 매요신, 올해 나이 백삼십 세. 그가 황사의 위치에 있을 때 마지막으로 가르친 제자가 바로 삼황야였다.
이제 나이 들어 조정의 모든 자리에서 은퇴하고 본인의 요청에 의해 삼황야의 성(城)에 가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가 이번 무림대회의 공동 주최자였다.
삼황야와 매요신 외에도 주최자가 둘이 더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이번 대회를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소림장문인 대보선사와 무당장문인 육수정진인이 그들이었다.
이러니 누가 이번 대회에 참가하고 싶지 않을 것인가. 누가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겠는가.
무림에 널리 퍼진 소문으로는 거기 걸린 상품이 무엇이든 간에 이번에 정상에 오르는 사람이 향후 백년을 주도할 것이라고도 했
다. 그것은 곧 무림십대고수를 대신할 사람이 여기에서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였다.
강호가 크게 요동치지 않는 바에야 아무리 실력이 있는 자라도 그 실력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세상이 조용한데 혼자 돌아다니며 비무를 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분란을 일으켜서는 명성을 얻기 힘들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야망이 있는 자라면 이런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을 것이냐. 중추절은 아직 멀었는데도 사람들은 장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중에 진자앙도 있었다. 아니, 이제 곧 끼려 하고 있었다.
“뭐라고? 어딜 간다고?”
진삼산은 이번에는 제발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이기를 바라면서 되물었다.
그러나 그의 귀는 잘못되지 않았다. 대신 아들의 머리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진자앙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질문 뒤에 노골적으로 담겨진 강한 거부의 의사를 읽지 못하고 태연히 방금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삼황야의 어전시합에 참가하겠습니다.”
“지, 지금…… 그게 마, 말이 된다고 생각하고 하는 소리냐?”
진삼산은 게거품을 물었지만 진자앙은 그저 눈만 끔벅거리고 있을 뿐, 아버지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 네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지 아, 알고나 하는 소리냔 말이다!”
진자앙은 수줍게 웃었다.
“썩 자신이야 없습니다만 혹시 좋은 성적이라도 거두면 제게도 영광이지만 가문의 명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눈물나게 고맙구나! 하지만 그 반대 경우는?”
“정당하게 싸웠지만 실력이 모자라 진다해도 앞으로 더 잘하라는 격려로 생각하면 그것 또한 좋은 교훈을 얻는 셈 아니겠습니까?”
진삼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말이야 딱 공자님 말씀이지만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쉽게 굴러간단 말인가. 그럴 리도 없겠지만 혹시 이겨도 거기 따라오는 부담이 있고, 혹시 지기라도 하면, 그것도 초반에 지기라도 하면 하루아침에‘명망’따위의 사치스런 단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처참한 위치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이런 일에 게거품을 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없었다.
진삼산은 어떻게 해서든 이번에는 아들을 말리려고 했다. 물론 잘 되는 경우보다는 못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걱정해서 하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단지 소문으로 들었겠지만 그는 아들의 실력을 직접 시험해 본 사람에게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자앙의 고집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나절에 걸친 회유와 협박, 애원에도 진자앙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기울어져 가는 집안을 자신이 일으켜 보겠다는 나름대로의 장한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꼭 가야겠느냐?”
“죄송합니다.”
이 말 한마디로 더 이상의 의논은 불가능해졌다.
진삼산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데는 단 한 군데도 닮은 곳이 없는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저렇게 한번 결정하면 물러설 줄 모르는 쇠심줄 같은 고집은 빼다 박은 것이 진자앙이었다. 그것을 그는 진자앙이 열두 살일 때 이미 알았다.
그러나……!
“이번 일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진삼산은 더 이상 쇠귀에 경을 읽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의 능력으로 해결이 안 되니 원군을 데리러 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원군을 부르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고대랑은 원군이라기보다는 적이었다. 그에게서 아들이 황당한 일을 하려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번에는 부러지지도 않을 빈철대창(賓鐵大槍)을 거머쥐고는 일격에 때려 죽여 평생의 고생을 덜겠다며 펄펄 뛰는 것이었다.
물론 진삼산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마음에야 안 들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꼬치로 만들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원래 싸우려고 들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서슬이 퍼런 무기를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하니 분위기가 좋아질 리가 없다.
결국 대판 싸움이 벌어져 전각의 기왓장까지 덜그럭거리며 비명을 지르니 겁에 질린 하인, 하녀들이 집사에게 보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요, 그 집사야 평생 동안 두 사람을 보며 살아 왔으니 자신의 분수를 알고 일찌감치 진자룡에게 쫓아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진자룡이 해결을 보게 되었다.
“보내 주자꾸나!”
“안 됩니다!”
“안 돼요!”
서로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이번에는 공동의 적에 대항해서 단단히 결합되었다. 그래서 부부라고 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진자룡이 한 발 물러섰다.
“장안이 아니라 광주(廣州)로 보내자는 말이다.”
“광주요?”
광주라면 광동성의 성도(省都)지만 진자앙을 거기 왜 보내자는 것일까?
“너희들이 걱정하는 것은 자앙이 자기 능력을 모르고 있다는 것 아니냐?”
“그렇지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도 자앙의 능력을 모르고 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요.”
“나는 그렇게 본다. 부모만큼 자식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만 사실은 부모만큼 자식을 모르는 사람도 드물지. 부모란 원래 자식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그러니 광주로 보내 다른 사람에게 자앙의 능력을 시험해 보도록 맡겨 보자는 것이다.”
“광주에 누가……?”
“네 사촌 동생이 있지 않느냐!”
“아!”
2
“누님, 광주에 누가 있다구요?”
진황아는 다탁(茶卓)에 놓인 유과(油果) 둘을 집어 하나는 입에넣고 다른 하나는 대기 상태로 든 채 대답했다.
“오촌 당숙(堂叔)님이 거기 계시지.”
그녀에게 오촌 당숙이니 진삼산에게는 사촌 동생이 되는 인물이 광주에 살고 있다. 이것은 매사에 주의 깊은 악조린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는 대기 상태에 있던 유과를 마저 입에 집어넣으며 다른 손은 다시 다탁에서 유과를 집어 드는 지극히 기능적인 일관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진황아를 혐오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금세 눈빛을 바꾸었다. 진황아가 한편 입 속의 유과를 우물거리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시집간 이후 몸이 몰라보게 불어 거의 그녀의 어머니만큼이나 비대한 몸집이 되어 버린 진황아. 그래도 그 어머니의 동물적인 감각을 생각한다면 진황아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성격상 어머니의 포악함을 물려받았다면 그 감각도 같이 물려받았을 수도 있었다. 악조린은 사소한 실수로 대사를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는 보기 좋은 미소를 보내며 다시 물었다.
“왜 소제는 진작에 들어 본 적이 없을까요?”
진황아는 유과를 씹다 말고 악조린을 향해 미소를 보내었다.
시집에서 쫓겨나다시피 이곳에 온 이후, 그와 노는 재미로 매일 보내고 있는 그녀였다. 그것이 남자를 보는 시선인지, 혹은 십년이 넘는 터울의 동생을 보는 시선인지는 그녀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동생이 그걸 몰랐다고 해도 신기할 것은 없지, 평소 교제를 자제하고 계시거든.”
악조린은 그녀가 자신을 남자로 보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작년에 먹은 월병(月餠)이 목구멍으로 다시 기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시선이 분명 남자를 보는 눈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호감 어린 미소를 유지했다.
“왜요?”
“그분은 관부에 계시거든!”
“아……!”
관부와 무림이 원수 보듯 할 건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 친하지 않은 것만큼은 분명했다. 진가장이 광동에서 차지하는 위치상 흑도의 인물들이 도움을 청할 때도 있는데, 그런 인물들은 관부에서 볼 때는 그저 강도, 범죄자에 불과하니 말이다. 알게 되면 입장이 애매해진다.
진황아는 놀라게 해줄 것이 있어 잘되었다는 빛으로 생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분이 말이야……!”
“그분이요……?”
악조린은 그녀의 기색을 예리하게 파악하고는 속으로 놀라게 하는 게 소원이라면 놀라 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황아의 말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애써 연기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진황아를 만족시킬 만큼 놀랐다.
진황아는 그분, 그녀의 오촌 당숙이 광동성의 형률(刑律)을 주관하는 광동 제형안찰사(提刑按察使)라고 알려 준 것이다.
“제형…… 안찰사요?”
“음! 정삼품(正三品) 광동 제형안찰사, 철판관(鐵判官)으로 유명하신 진탁(陳鐸), 진(陳) 대인(大人) 어른이 그분이셔.”
“정삼품 광동 제형안찰사 철판관 진탁, 진 대인 어른이라……!”
악조린은 스무 자나 되는 그 긴 명호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뇌다가 문득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고 낯빛이 변했다.
“그럼……?”
“왜? 아는 분이셔? 무림인이 그분 이름을 알기란 쉽지 않은데?”
악조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단지 재미있는 사람이 그분 밑에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재미있는 사람?”
“금문공 맹방평!”
3
금문공 맹방평이 근 백여 년을 포두로 있었던 복건성을 떠나 광주로 옮겨 온 것은 삼 년여 전의 일이었다.
그의 일이라는 것이 어차피 상부의 명에 따라서 이리저리 임지를 옮겨 다녀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처럼 유명한 인물이, 그처럼 유능한 인물이 그처럼 자주 임지를 옮겨 다니고, 또 옮겨 갈 때마다 시골구석으로 밀려난 것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외고집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었다. 불법을 저질렀으면, 그가 고관(高官)이든 왕후장상의 아들이든 상관없이 법에 따라 처벌을 해버리는 그 대쪽 같은 성미가, 그를 아래에 두기도 껄끄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정적으로 그는 무림의 거마(巨魔), 거흉(巨兇)들을 적으로 돌렸다. 어지간하면 시끄러워질까 봐 관부에서도 거마, 거흉들은 감히 건드리지 않지만 천하의 금문공에게 거마거흉이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 앞에서는 클 거(巨) 자를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잡혀가서 족쇄 차고 들어앉아 있기 싫으면 하는 수 없이 금문공을 처리해야 했다. 무공으로는 안 되니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힘보다 때로는 강하고, 효과에 있어서는 엇비슷한 수단,방법을 사용했다. 관부의 고관들에게 돈을 먹여 관할권이 다른 지방으로 쫓아 보내는 것이다.
그곳에는 그럼 거마거흉이 없는가? 있었지만 금문공이 부임하는 순간 없어져 버렸다. 그러니 그곳에서도 돈이 관부로 들어가고, 금문공은 다시 새로운 임지를 향해 떠나야 했다.
이제 중원에서 보면 남쪽 끄트머리인 광동성까지 흘러 들어갔는데, 다행히 여기에서는 더 이상 옮겨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돈을 가진 거마 거흉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을 받을 상관이 없어서였다.
그의 직속상관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간 맨 꼭대기에 앉아 있는 인물, 광동성 제형안찰사 진탁은 돈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금문공 맹방평은 그의 숙부인 천기공 진자룡과 동격으로 취급되며, 친분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 돈의 힘에 떠밀려 이리저리 다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의 임기 동안만이라도 한곳에 정착해서 노후를 즐기도록 했으면 하는 것인데 이제 그것이 안 되게 되었다.
누구의 힘에 밀려서도 아니고 바로 맹방평 본인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그는 포두 생활 일백 년을 마무리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허락해 주도록 집요하게 청원서를 넣었던 것이다.
진탁이 그 요청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중앙으로 파발을 띄워 가며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다. 맹방평이 관할권에 상관없이 범죄자를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허락하는 내용이었다.
진탁은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 더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느 것 하나 급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또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이 많은 문건들을 처리하려면 사흘은 꼬박 걸릴 것이고, 그때쯤에는 또 이만큼 쌓일 터였다. 그런데 가외의 일이 또 생긴 것이다. 그것도 대충 처리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그는 사촌인 진삼산에게서 온 서한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아들을 보낸다. 삼황야의 어전시합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시험한다는 명목으로 적당히 혼을 내서 돌려보내라.
이것이 서한의 대체적인 내용이었다.
간단하게 생각하자면 서한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집안 문제는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하는 말을 그대로 알아들었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원망을 살 수도 있었다. 그는 사촌 형인 진삼산의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 같이 놀다가 맞아서 생긴 머리의 흉터가 그대로 있는 한 그는 절대로 그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 문제에 비하면 다른 문건들은 그야말로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그는 진삼산의 서한을 조심스럽게 문건들의 제일 위에 올려 두고, 다른 문건들은 그 아래에서 하나씩 차례로 빼서 처리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잊을까 봐 매번 보고 기억하려고 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아래에서 첫 번째로 뺀 문건이 맹방평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 때문에 다시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맹방평이 이 허가서를 가지고 중원에 들어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할 때에는 아무리 맹방평이지만 그것은 위험천만한 일일 뿐 아니라 죽음을 찾아가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그래도 혼자 중원으로 보내기엔 안됐다는 점이었다. 하다못해 시중을 들 사람이라도 데리고 가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누가 그를 따라갈 것인가?
죽음의 길을 같이 갈 사람은 세상에 드문 법이었다. 그는 우(禹)씨 성을 가진 서리(署理) 하나를 불러 적당한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우 서리로서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도 중요 문건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니 맹방평이 대단히 위험한 일을 하려 한다는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업상 그는 포두, 포교들과 친분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기존에 있는 사람들은 추천할 수가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문득 그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부임하는 신임포교가 있습니다.”
물론 좋은 생각이었다. 진탁은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승낙했다.
“오는 대로 맹 포두에게 보내게!”
그러고는 다른 문건을 꺼내 들다가 그는 진삼산이 보낸 서한을 책상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것을 주으러가다가 그는 생각했다.
‘이러다 혹시 잊으면 어찌 큰일이 아니랴!’
그는 이번에는 이(李)씨 성을 가진 서리를 불러 당부를 해두었다. “오늘 불산에서 청년 하나가 올 것이다. 철탑처럼 체구가 큰 놈이다. 그가 오면 최우선적으로 내게 보고해라. 만약 그것을 잊어서 착오가 생길 경우 맹세코 자네를 면직시켜서 밭이나 갈면서 살도록 만들어주겠다.”
이 서리는 미리 겁부터 먹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대답했다.
“저는 물려받은 밭도 없으니 만약 정말 그렇게 하시면 목을 매다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요.”
이렇게 해서 이 서리도 다른 어떤 일보다도 그 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는 진자앙은 배를 타고 삼수를 따라 흘러와서 광주에 도착해 포구에 내리고 있었다.
진자앙은 배를 타고 올 때부터 어쩐지 뒤통수가 따끔거린다고 느끼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건 대단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처럼 둔감한 사람이 뒤통수가 따끔거릴 정도면 그를 보고 있는 사람의 눈빛은 단지 눈빛만으로도 살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것이어야 할 터였다.
그러니 그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사람의 눈빛은 비단 강렬했을 뿐만 아니라 비추는 반경이 넓기도 했다. 그 사람은 눈이 퉁방울만큼이나 큰 거한이었던 것이다.
진자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단지, 왜 그가 자기를 뚫어지게 보고 있느냐는 점이었다. 배를 타기 전에는 전혀 모르던 사람 아닌가.
그렇다고 가서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그가 혹시 그를 보고 던진 것이 아니면 어쩔 것이냐. 또 그가 실제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그게 뭐 잘못되었느냐고 하면 어쩔 것이냐.
진자앙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 그냥 보는 대로 두고 포기해 버렸다. 그러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 마음이 다시 불편해진 것은 포구에 내려서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광동성의 아문(衙門)을 찾아갈 때였다. 배에서부터 그를 쳐다보던 퉁방울눈의 사내가 이상하게도 그의 뒤를 쫓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진자앙이 누군가가 노려보고 있다고 느끼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누군가가 미행을 하고 있다고 느끼기는 더욱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사내는 키가 유달리 커서, 아마 진자앙만큼이나 큰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 틈에 섞여 있을 때도 가슴팍부터 그 위가 전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드러나 있었다.
아이들 틈에 어른 하나가 끼여 있는 것 같으니 어찌 못 알아볼 수가 있겠는가.
퉁방울눈의 사내도 그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진자앙이 돌아볼 때마다 닭무리 속에 선 두 마리 학처럼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라고 어찌 자신이 뒤를 쫓는 것을 들켰다는 것을 모를 것인가.
그래서인지 그는 걸음을 빨리 해 진자앙을 추월했다. 아마도 미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진자앙이 볼 때는 미행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단서가 곧 잡혔다.
진자앙이 아문을 찾아 한참을 더 걷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골목을 돌아 나올 때, 앞서가는 것 같던 사내도 괜히 행인에게 무엇을 물어 보는 척하더니 뒤돌아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사내의 이마에 땀이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것을 진자앙은 가련하다는 빛으로 바라보았다. 저런 체구로 누굴 미행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그에게 미행을 시킨 상관이,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지만, 그놈이 나쁜 것이다.
진자앙은 미소를 보내, 수고했지만 이미 실패했으니 어지간하면 따라오지 말라는 뜻을 표시하고는 돌아서서 걸었다. 그런데 이 퉁방울 눈의 사내는 포기할 줄 몰랐다.
둔탁한 발걸음이 뒤에 다가오더니 이내 그를 지나쳐 갔다. 사내는 다시 그를 추월해 앞서가고 있었다.
그때 진자앙은 그의 소매에서 한 통의 서한과도 같은 것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얼른 주워 들었다. 사내는 자신이 중요한 것을 흘렸다는 것도 모르는지 그냥 성큼성큼 걷고만 있었다.
진자앙은 걸음을 빨리 해서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미행을 했건 어쨌건 주운 물건은 돌려주는 것이 도리였다.
사내가 뒤돌아보더니 낯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진자앙이 그를 바짝 쫓아오는 것이 두려워진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돌아서서 아까보다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진자앙도 그에 맞추어서 걸음을 빨리 했다. 두 사람은 거의 뛰 듯이 하고 있었다. 사람이 가득 찬 대로가 두 사람의 거한에 의해서 물결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안 되겠군!
물건을 돌려주는 것도 좋지만 타인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진자앙이 사내를 불렀다.
“여보시오!”
사내가 딱 멈춰 섰다. 도망가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때에야 진자앙은 퉁방울눈의 사내가 누굴 미행하기도 어렵지만 진자앙 자신이 누군가의 미행을 피하기에도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이렇게 크니 누군들 그를 놓칠 것이냐.
“저……!”
진자앙이 막 입을 열려 하는데 사내가 먼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너 키 크다! 됐냐?”
“……?”
진자앙은 어이가 없어서 아무 대꾸도 못했다. 그렇게 갑자기, 그렇게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소리를 지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반면 사내도 세상에 이렇게 치졸한 놈은 처음 본다는 듯이 흥분하고 있었다.
“세상에 나보다 큰 놈이 있다니…… 해서 본 거란 말이다. 그걸 가지고 화를 내고 쫓아와? 내가 오늘 바쁘지만 않았고, 처음 부임하는 도중만 아니었으면 넌 내 손에 혼 좀 났을 텐데…… 운 좋은 줄이나 알고 그만 쫓아와!”
“그게 아니라……!”
사내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서 걸어갔다. 진자앙이 그 뒤를 쫓아가며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걷더니 어떤 대문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진자앙은 그 뒤를 쫓아가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물건 주워 준다고 남의 집에까지 쫓아 들어가도 좋은 걸까?’
그러는 사이에 사내는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 전각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게 도대체 누구 집이기에 이렇게 큰가……?’
진자앙은 거대한 대문을 보고는 뒤로 한두 걸음 물러서서 다시 보았다. 그런데 대문 위에는 ‘광동성 제형안찰사사 아문’이라고 금박글씨로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었다.
“아, 여기가!”
그가 찾는 곳이 바로 여기였다. 그러고 보면 사내나 그나 같은 장소를 찾아온 셈이었다. 그러니 앞에서 가나 뒤에서 가나 같은 길 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자앙은 실소를 흘리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그는 무슨 일로 여기 왔을까?’
그는 먼저 편지를 돌려주고 나서 당숙 어른을 만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 누군가를 잡고 물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다들 바쁜지 그는 본 척도 않고 지나다니고들 있었다. 진자앙은 간신히 그 중 한 중년의 관복짜리를 잡고 사내가 떨어뜨렸던 편지를 보여 주었다.
말도 꺼내기 전에 관복짜리는 편지의 겉봉을 힐끔 보더니 손을 까딱 하고는 앞서 걸었다. 따라오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진자앙은 그를 따라가며 말을 걸었다.
“저는 진자앙이라고 불산에서 왔는데……!”
관복짜리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알아, 알아!”
그는 마침 저쪽에 걸어가는 역시 중년의 유생을 보더니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어이, 우 서리! 자네가 기다리던 사람이야!”
관복짜리는 바쁜 듯이 휑하니 가버리고 유생이 고개를 끄덕이 며 다가왔다.
“그러잖아도 자넬 기다리고 있었네!”
진자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사람이 날 어떻게 알지?’
봉투를 건네주며 힐끗 봤지만 관부의 표기인 듯한 몇 가지 문양말고는 별것이 없었다. 불산’이라는 글자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건……!”
유생이 그걸 받아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됐어! 이건 이제 필요 없으니 그냥 날 따라오게. 진 대인께서 이미 내게 지시하신 것이 있어!”
진자앙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당숙님이 미리 얘길 해놓으셨구나!’
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유생의 뒤를 쫓아갔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이미 얘기는 듣고 오는 길이었다. 여기에서 뭔가 시험이 있을 것이고, 그는 그 시험을 통과해야 어전 시합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따로 당숙에게 연락을 할까 했지만 일부러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눈은 못 믿지만 당숙의 눈은 믿기 때문이었다.
─네 당숙의 시험도 통과 못 하면 정말 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그렇게 말끝을 흐린 할아버지의 뜻을 진자앙은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문 안의 여러 전각들을 한참이나 꼬불꼬불 돌아간 유생이 멈춘 곳은 마방(馬房)이라는 현판이 걸린 한 채의 목조건물이었다.
마방, 쉽게 말해 마굿간이었다.
유생은 그 마굿간 한쪽으로 진자앙을 이끌더니 검은 나귀 한 마리를 묶어 두고는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데려다 주었다.
유생이 말했다.
“어르신, 여기 데려왔습니다. 이 친구와 함께 가시라는 진 대인의 분부십니다.”
노인은 네모진 얼굴에 주름살은 가득하지만 뭉툭한 코와 꽉 다문 입술, 지금은 하얗게 새어 버렸으나 치켜 올라간 눈썹 등 완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진자앙을 보고는 그 치켜 올라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체격만 크지 멍청한 놈 아닌가? 꼭 이 친구를 데리고 가야 하나?”
유생이 곤란하다는 듯 손을 비볐다.
“구부러진 나무라도 손질하면 기둥으로 쓸 수도 있다지요. 멍청하면 짐이라도 지게 하면 되지요. 데려가시면 어디든 쓸모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대인 어른의 분부십니다.
다른 말은 별로 수긍을 않는 모양이지만 마지막의 대인 어른의 분부라는 말에는 그도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못마땅한 듯 인상을 쓰면서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신참, 넌 저 나귀나 끌고 따라와!”
어디로 가겠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자앙은 이것이 바로 당숙의 시험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예!”
그는 얼른 대답하고 나귀의 목끈을 말뚝에서 풀고는 잡아당겼다. 그런데 나귀는 걸을 생각이 없는지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았다.
진자앙은 이번에는 조금 힘을 줘서 다시 잡아당겼다. 나귀는 여전히 꼼짝도 않았다.
유생이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한쪽에 서서 흥미진진하게 진자앙을 바라보았다. 나귀를 어떻게 다루는지 봐야겠다는 빛이었다.
진자앙은 이번에는 조금 심하게 당겼다. 나귀가 움칠하더니 네 다리로 버티고는 끌려오지 않으려고 했다.
진자앙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치지 않게 데려가려고 힘을 제대로 쓰지 않았지만 남들 보기에는 나귀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보다 못한 유생이 크게 웃고, 나귀의 내력을 말해 주었다.
사실 이 나귀는 평범한 나귀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온몸의 털이 새까맣고 발굽은 중간에 줄이 하나 있어 얼핏 보기에는 통발굽이 아니라 소발굽처럼 두 쪽으로 나뉘어진 듯했다. 게다가 이마에는, 옆으로 줄이 한 줄 간, 혹 같은 것도 하나 달려 있어, 나귀가 아니라 용의 씨라고 하여 천리독각추(千里獨角 )라고 부르는 영물이었다.
나귀에도 그런 말이 가능하다면 명(名)나귀라고나 할, 그런 짐승.
영리하기도 해서 주인이 아니면 말을 듣지도 않고, 무리하게 다루려고 하면 골탕을 먹이기도 하는 놈이었다.
노인은 그를 골탕먹이려고 하거나 혹은 시험을 해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진자앙은 이것도 하나의 시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시험을 통과할 것인가?
힘으로 끌면 할 수 없지는 않겠지만 귀한 놈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진자앙은 달래 보기로 했다.
“자, 착하지! 너도 생각이 있으면 여기서 지금 이러는 게 옳지않다는 걸 알 거다. 네 주인이 내게 널 맡겼다는 거 너도 알지 않니?”
나귀는 조용히 있었다. 진자앙은 나귀에게 다가가 등에 손을 얹었다. 긁어 줄 생각이었다. 그때 나귀가 펄쩍 뛰어오르며 뒷발굽으로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팍─!
“에구!”
유생의 비명 소리가 격타음과 함께 들렸다. 그는 이 나귀에게 맞아 병신이 된 사람을 여럿 보아 왔었다. 지금 이 발길질을 보니 일부러 시켰다 싶을 정도로 의도적이고, 여태 보아 온 것들 중에서는 가장 세게 걷어찬 것이었다.
분명 저 고약한 늙은이가 이 청년을 데려가기 싫으니 걷어차도록 시킨 것이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청년이 다치는 것이 아니라 대신 또 누굴 데려가도록 해야 하나, 라는 문제였다.
그런데 청년, 진자앙은 끄떡없었다. 그는 가슴팍에 묻은 흙을 털면서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유생은 이 예상외의 일에 절로 감탄했다.
“어?”
저만치에서 노인도 돌아보며 이채를 발하고 있었다.
진자앙은 나귀에게 다가갔다.
“성질이 고약하구나! 사람을 함부로 차니 혼나야겠다.”
푸르르─!
나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순간적으로 펄쩍 뛰며 다시 한 번 진자앙의 가슴을 찼다. 무림고수의 공격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신속한 데다가 정확하기까지 한 공격이었다.
진자앙은 이렇게 쾌속한 공격은 피할 수도 없을 뿐더러 피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나귀의 발굽에 가슴을 내놓은 채 그 넓적다리를 잡아 갔다.
팡─!
진자앙의 가슴팍에서 다시 한 번 격타음이 울렸다. 그 순간 진자앙은 나귀의 넓적다리를 잡아챌 수 있었다. 진자앙은 나귀를 그대로 몸통째 잡아서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 등에 올려진 짐까지 함께였다.
나귀가 발버둥을 쳤다. 강철 조각같이 단단한 발굽이 진자앙의 머리와 얼굴, 팔을 마구 때렸다.
그러나 진자앙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만 해둬! 그만 하지 않으면 던져 버린다!”
진자앙이 위협하듯 나귀를 몇 번 흔들었다. 나귀의 발버둥이 잦아들었다.
진자앙은 나귀를 조금 내려서 얼굴을 마주보며 으르렁거렸다.
“나도 알고 보면 무서운 사람이야. 너 같은 건 이대로 찢어 버릴 수도 있단 말이다. 내 말 똑바로 들어! 알겠어?”
나귀가 말을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자앙이 다시 내려놓을 동안 얌전히 있긴 했다.
유생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만치에서 노인이 불렀다.
“나귀하고 무슨 장난을 치고 있나! 빨리 와! 아니면 관두고!”
“아닙니다! 갑니다!”
진자앙은 얼른 나귀를 끌어당겼다. 나귀는 조금 저항하는 듯하더니 진자앙이 그 눈을 노려보자 고개를 숙이고는 걷기 시작했다.
유생이 뒤에서 감탄했다는 듯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동안, 진자앙과 노인은 아문의 밖으로 걸어 나갔다.
노인은 아무 말이 없었고, 진자앙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시험이 있으면 받으면 그만이었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들이 그렇게 아문을 나와 아까 진자앙이 걸어왔던 길을 거꾸로 내려가서 포구에 있는 배 한 척에 올라탄 다음이었다. 진자앙이 알기로는 바다로 나가는 거대한 범선이었다.
나귀는 선창 아래의 우리에 가두고, 허름한 삼등 객실에 짐을 풀고 기대어 앉아서 노인이 처음 물었다.
“이름이?”
“진자앙입니다.”
“양만리(梁萬里)가 아니고?”
“그건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그래, 그만 됐네.”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진자앙도 짐에 기대어서 쉬었다.
이렇게 해서 진자앙은 광주에 새로 임명된 포교 양만리 대신 금문공 맹방득을 수행해서 중원을 향해 떠났다.
삼수를 따라 바다로 나가고, 바다에서는 해안선을 따라서 복건성을 지나 절강성의 항주(抗州)까지, 보름이나 걸리는 길이었다.
4
양만리가 ‘철탑같이 큰 사내’를 찾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이 서리를 따라 안찰사의 집무실로 들어가자. 진탁은 대뜸 호통부터 질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죄, 죄송합니다!”
“네가 불산에서 온 놈이냐?”
“예!”
사실 정확히 불산은 아니고, 그 외곽에 있는 작은 현에서 온 것이지만 대충 맞는 대답이었다.
“내게 주라고 가져 온 게 있나?”
진삼산이나 진자룡에게서 따로 보내는 서한이라도 가져 왔느냐 고 물어 본 것이다.
“예? 예!”
양만리는 얼른 소매 속을 뒤졌다. 그러다가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바래졌다.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새로 광주성부에 속한 포교가 되라는 임명장을 꺼내 바쳐야 하는데 없는 것이다.
“왜 그래?”
“아니, 저……!”
“설마 잃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그게……, 잃어버렸습니다!”
양만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첫날부터 이게 무슨 꼴인가. 임명장 을 잃어버리다니!
진탁이 벌떡 일어나 불호령을 내렸다.
“이런 멍청한 것! 듣던 대로 과연 멍청한 놈이구나! 네 부모들이 얼마나 속을 썩었을지 이제 알 만하다!”
양만리는 자칫했으면 눈물을 떨굴 뻔했다. 잘못하면 욕을 먹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임명되자마자 바로 면직되게 생기지 않았는가.
그는 털썩 무릎을 꿇고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게 진탁의 마음에 더 들지 않았다. 사내 자식이 그 정도 가지고 울상을 짓는 대서야 어디다 쓸 것인가. 저 정도 기개로 어전시합에 가겠노라고 고집을 부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따로 시험을 해보지 않아도 이미 안 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미리 준비해 둔 시험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데려가서 시켜 봐!”
진탁의 양 옆에 서 있던 포두 둘이 양만리를 일으켜 세워서 연무장으로 끌고 갔다. 포방(捕房) 소속 포두, 포교, 보쾌(步快)들이 무술을 연마하는 장소였다.
양만리가 들어서자 바로 포두 하나가 나와서 그와 맞섰다. 포두라고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 웬만한 무림고수 한둘쯤은 찜 쪄 먹을 만한 고수들이 즐비한 것이 그들의 실정이었다.
굳이 맹방평의 예를 들지 않아도 도적질하지 않고 순수하게 무공만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중의 하나가 이것이고, 제법 의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포쾌의 일을 하는 이도 드물지가 않았다.
또한 그 중에서도 여기 광동성 포방에는 굵직굵직한 고수들이 많기로 강남북에 유명했다. 그래서 진자룡과 진삼산이 진자앙을 여기로 보내 시험을 거치도록 한 것이었다. 이곳 포두들을 꺾을 수 있으면 중원에 나가도 그리 밀리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반면 체격은 그럴듯했지만 무공은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양만리였다. 한 번도 체계적으로 무공을 연마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가 팔다리 하나쯤은 부러뜨려도 상관없으니 절대 사정을 봐주지 말라는 안찰사 어른의 지시가 이미 내려가 있는 터였다.
“으아아아악─!”
양만리는 얼마 버티지 못했다.
천기공 진자룡의 손자가 온다기에 잔뜩 긴장했던 포두들로서는 싱거운 일이었다.
진탁이 물었다.
“어떻게 됐나?”
광동성 총포두(總捕頭)인 구두사령(九頭司令) 여본중(呂本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약하더군요!”
진탁이 잔뜩 인상을 그었다.
“그래서 걱정이라네! 광동제일무가에서 그런 녀석이 나오다 니!”
여본중은 아까 전부터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뭔가 말을 해야 하 나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뭔가? 너무 다치게 했나? 병신만 안 만들었으면 괜찮 네. 혼을 낼 땐 눈물이 쭉 빠지도록 혼을 내야 버릇이 고쳐지지 능력도 안 되면서 욕심을 내는……!”
“다치기야 겨우 팔, 다리 하나씩 부러뜨렸으니까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뭔가 이상한 것이……!”
“도대체 뭔가? 뭐가 이상해?”
“글쎄 한참 맞으면서 비명을 지르는데……, 그 비명이……!”
그는 주저하다가 결국 말했다.
“양만리 살려……, 라고 하더라구요. 양만리라는 사람 아십니까?”
진삼산이 얼마나 분노했고, 진탁이 어떻게 빌었으며, 양만리는 고향으로 실려가 어떻게 다시 돌아와서 치료를 받은 뒤 포교로 근무하게 되었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 제 2권 끝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