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하면 190명의 유대인 고아 어린이들 손을 잡고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부터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연기로 사라질 때까지 죽음의 행진을 함께 한 야누스 코르착 선생님이 떠오른다. 유럽의 상처,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학살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지 않고 유럽여행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일 바이마르에서 부헨발트 기념관 가는 초저녁,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가 홀로코스트 영화 배경처럼 으스스함을 더했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를 기념관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는 바이마르에서 북쪽으로 차로 겨우 15분 정도 떨어진 산에 있었으나 바이마르 주민들도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수용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부헨발트 수용소는 독일 본토에 가장 먼저 생기고 가장 규모가 컸던 강제수용소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와 그에 동조가 의심되는 자를 수용했으나, 유럽 전역에서 온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폴란드인, 슬라브인, 정신질환자, 장애인, 정치범, 전쟁포로들을 수용했던 곳이다. 수용자들은 주변 군수공장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운영되었고 139개의 서브캠프에 50여개 국가에서 온 27만여 명이 수용되었던 곳이다. 가스실은 없었으나 기아와 질병, 처형, 생체실험으로 부헨발트수용소와 부헨발트에 딸린 수용소에서 총 56,000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시체 소각실과 일부 건물들이 남아있으나 수용소 건물들은 모두 없어지고 빈 터만 남아있다. 가장 높은 곳에 감시탑이 있고 아래로 수용소들이 있었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다. 현장학습 온 많은 학생들과 백여 명의 관람객이 기념관을 관람하고 있었으나 기침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분위기가 엄숙하고 무거웠다. 영화나 책으로 보아왔던 참상이 더 생생하게 느껴져서 참으로 무겁고 힘든 시간이었다.
독일은 1939년 유럽 전역에 여타구역과 벽으로 분리된 게토를 만들어 유대인과 정치범을 수용했다. 바르샤바 게토가 45만 명을 수용해 가장 컸고, 우치 20만, 르비우 15만, 빌뉴스 8만, 크라쿠프에 7만 명이 수용되었으며, 대도시 외에 여러 중소도시에도 게토가 세워졌다. 나치가 세운 게토는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다보니 비위생적이었으며 사망률도 아주 높았다. 게토에서 굶어죽거나 병사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로 끌려가서 학살당했다.
발트 삼국을 여행할 때 리투아니아 빌뉴스 구시가지 중심에 게토였던 구역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 시내에도 게토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을 돌아보며 좁은 공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치에 협력한 라트비아인들 때문에 더 많은 유대인들이 게토에 갇혔다가 죽어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독일과 러시아에 이중 점령된 발트 삼국이 같은 양상이었다니 안타까웠다. 북쪽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빌뉴스는 인구의 30% 정도가 유대인이었는데 전쟁 후 통계수치로 잡을 수 없을만큼 줄어들었다고 한다.
폴란드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절멸수용소이다.나치가 운영한 수많은 강제수용소가 있었지만 노동력이나 수용이 목적이 아닌 대량학살을 위해 운영한 절멸수용소 여섯 곳 중 하나이다. 1942년 독일은 반제회의에서 최종해결책으로 모든 유대인의 절멸을 결정하였고 폴란드(5곳), 우크라이나(1곳)에서 절멸수용소를 운영했다. 나치는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 1호)과 인근 브제진카(비르케나우, 아우슈비츠 2호), 드보리마을에 수용소(아우슈비츠 3호)를 운영했다. 다른 절멸수용소와 달리 나치가 철수하며 미처 파괴하지 못한 채 소련군이 접수했기 때문에 현장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1호 수용소에는 머리카락이 산더미처럼 쌓인 공간이 있다. 강제로 잘린 여성 수용인들의 머리카락은 가발이나 카펫을 만드는데 썼다고 한다. 그리고 피부가 깨끗한 사람의 가슴 가죽을 벗겨 장갑이나 지갑 등을 만들어 기념품으로 소유했고, 심지어 악기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의 엔딩 부분에서 두 소년이 걸어 들어간 지하 공간이 바로 이곳을 참고로 만든 것 같다, 지하공간에는 샤워를 할 거라며 옷을 벗게 한 공간, 한꺼번에 몰아넣고 천장 구멍을 통해 독가스를 살포하던 가스실, 시체를 보관하던 공간, 시체를 소각하던 공간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아우슈비츠 2호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독가스를 이용한 대량학살을 위해 지어진 수용소이고 불록마다 가스실과 시체 소각시설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 막바지에는 비르케나우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들을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선별한 후 바로 가스실로 보냈다고 한다. 비르케나우에는 지금도 수용소 건물들이 남아 있어서 수용자들의 생활을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나치는 수용소에서 일일이 총살로 처리하지니 집행하는 독일군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많아 독가스를 사용하게 됐고, 값싸고 성능(?)좋은 독가스를 개발해서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스스로 옷을 벗어(새 수용자에게 다시 사용) 잘 개어두게 하기위해 가스실을 샤워실로 위장했고 시체를 처리하는 일도 유대인들이 하게 했다. 소각로를 이용하기 힘들 정도로 시체가 많아지자 구덩이에 넣고 한꺼번에 태웠다고 한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잔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웠다. 오슈비엥침에서 사망한 사람은 250만명 정도로 추정되지만 400만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 비르케나우 수용소 철조망 너머로 핏빛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독일에 의해 팔레스타인으로 추방되었던 유대인들과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모여들어 세운 나라 이스라엘, 지금은 그 이스라엘이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또 다른 학살과 전쟁을 이어가는 것은 아닌가? 민간인을 희생시키는 그 어떤 전쟁도 정당화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