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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백부장의 종의 치유와 나인 성 과부 아들의 소생의 이적 및 세례인 요한의 질문과 시몬의 집 도유사건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4:14-9:50까지 이어지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 기사 보도의 연속부분이다. 본장에 기록된 여러 치유 이적 및 예수께 대한 세례 요한의 질문과 그에 대한 주의응답 및 시몬의 집 도유(塗油) 사건 등은 주께서 A.D. 27년 공생애를 개시하신 후 대략 1년이 경과한 때에 발생한 일련 사건들이었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1-10절이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의 믿음(faith)을 보시고 멀리 떨어져 있는 그의 사랑하는 종을 말씀 한 마디로 치유하신 사건을, 11-17절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주께서 소생(蘇生)시키신 이적을, 그리고 18-35절이 세례 요한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 다시 한 번 예수께서 메시야(Messiah)로서 우리를 위해 예비된 바로 그 구속주이신지에 대하여 확인하고자 질문한 것을 계기로 당신의 메시야직을 밝히심과 아울러(18-23절) 세례 요한 및 예수 자신과 관련된 구속사적 시대의 변화와 거기에 담긴 구약과 신약의 구속사적 경륜에 대한 교훈을 주신 사건 (24-35절)을, 끝으로 36-50절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한 여인의 도유사건 전후 기사를 보도하는 순서로 그 내용이 전개된다.
1-10절의 백부장의 종의 치유사건과 11-17절의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의 소생 이적은 먼저 여타 일반 이적 등과 같이 다음과 같은 구속사적 의의를 갖는다. 즉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는 우리 사람들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다시 말해 구속사역을 행하시어 사람에게 구원을 주고자 성육신(Incarnation)하신 인자요 메시야로서 우리의 모든 질고(疾苦)를 아시고 능히 이를 담당해 주실 능력이 있으시며, 또한 이를 위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을 사랑이 있으신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심을 보여 준다. 이럴 때 다만 필요한 것은 사람의 회개(悔改)하고 주를 사모하는 절대적 믿음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결국 이런 예수의 치유 사역은 주께서 세상 끝 날에 우리 성도들을 구원해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사건의 구속사적 예표였다.
한편 본장의 두 이적은 이런 일반적 의의 이외에도 그 자체의 고유한 의의도 갖고 있다. 먼저 백부장의 종의 치유 이적의 독특한 구속사적 의의는 이제 이방인도 예수에 대하여 큰 겸손과 믿음을 가진 사실을 강조함에 있다. 예수님의 강림(降臨)으로 시작된 신약시대의 큰 특징 중의 하나가 구속사(救贖史)의 전개 통로가 주로 육적 선민(肉的選民) 이스라엘에 국한되었던 구약과 달리 세계 만민에게로 확장되는 것이었던 바 본 사건은 이를 잘 보여 주는 실례라 하겠다. 또한 우리는 여기 본장의 백부장(centurion)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자신의 종의 치유를 간절히 호소하면서 주의 능력을 확신하였고 그 결과 그 종은 구원(Salvation)을 얻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여 보아야 한다. 이는 진실로 신앙을 가진 자는 자신을 인간의 자리까지 낮추시고 또한 죄인을 위해 구속 희생하러 오신 주님의 참 사랑을 본받아 자연히 주위의 가엾은 영혼을 사랑하게 됨을 보여준다(요일 4:20,21). 그리하면 그 결과 주님이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며 궁극적으로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웃들에게도 구원의 은혜(Grace)를 끼치게 하는 통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는 또 감당하여야만 한다는 구속사적 진리를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미 죽어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던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키신 이적은 우리가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시면서도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러 성육신하신 주 안에 있으면, 그저 인생의 여러 문제의 어느 한 부분이나 아니면 일시적 해결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문제의 원인인 죄의 궁극적 결과요 영원한 형벌의 시작이기도 한 영육 간의 죽음(death)도 분명히 그리고 영원히 해결될 수 있음을(고전 15:55-57) 예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실로 죽음은 우리 죄의 궁극적 결과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절망과 허무의 원인이며 영원한 지옥 형벌의 원점(原點)이기도 하다. 이는 다른 그 어떤 문제와도 달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주 안에서 해결될 뿐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생명(Eternal Life)과 축복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이 사건은 우리에게 주님의 무한한 능력과 절대적 구원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히 11:16)을 더욱 공고히 갖게 해준다.
다음 18-35절의 세례 요한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 그리고 이에 즈음하여 주께서 세례 요한 및 그의 자신과의 관계에 담긴 구속사적 경륜에 대한 교훈을 주신 것은 그야말로 구속사적 질문과 대답 그리고 구속사의 경륜 자체에 대한 교훈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의 질문은 단순히 예수의 메시야직(Messiahship)에 대한 확인 질문이었지만,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시면서 자신의 메시야직에 대해서는 물론 그 자신의 메시야 사역의 본질 및 이를 중심한 구약 구속사(救贖史)의 신약 구속사에로의 발전까지 계시(啓示)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를 보다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에는 분명 메시야에 대한 계시가 있었지만 그것은 훗날 한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더욱 정확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세계만방에 영육 간의 축복과 평화를 줄 것이라는 점만 밝혀진 부분적 계시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이 구약 계시에만 집착하고 또 이를 곡해(曲解)하여 언젠가는 정치적 메시야가 등장하여 이스라엘 민족 본위의 그리고 이 지상에서 만의 번영을 줄 것으로 기대하였었다. 한편 이 당시 공생애를 진행 중이시던 예수는 일단 옛 언약(covenant) 곧 구약의 성취로 자신이 오셨으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 것이 아니라 당신은 다만 초림(初臨) 때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법적 근거인 구속 희생을 성취하시고 다시금 천국 구원을 중심으로 한 새 언약을 주신 후 훗날 재림하여 최종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은 아직 계시해주시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당신의 강림(降臨)으로 구약 시대가 종결되고 새 신약 시대가 개시되었으며 이제 구속사의 지평은 이스라엘 중심에서 세계의 이방 만민에게까지 확장될 것 등도 아직 계시해 주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은 지난날 마 3장 등에서 보듯이 성령의 계시로 예수의 메시야 직에 대해서 확신하였고 또한 주께서 한 특이한 인자(人子)로 오신 사실은 예수의 사역으로 확신하였었다. 하지만 예수의 사역과 교훈이 자신의 예상과 꼭 일치하지는 않자 다시금 주께서 다만 한 특이한 인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유일한 인자로서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세계만방에 구원을 가져올 메시야(Messiah)의 사역을 행하실 것인지를 새삼 확인하려 예수께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이러한 요한의 의도를 파악한 예수는 다만 당신이 메시야시라는 단답형 대답을 주시지 않고 포괄적인 답을 주셨다. 즉 예수는 자신이 현재 행하고 있는 권능의 이적들과 복음의 교훈이 증거하듯이 메시야이심이 분명함을 밝힌 것(22,23절)에서, 나아가 세례 요한의 사역은 구약에 예언된 대로 메시야, 즉 바로 자신의 선구자로서 사역한 것(24-27절)임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신약의 출발점인 예수 자신의 선구자 역할을 한 세례 요한은 결국 구약과 신약을 잇는 가교적(架橋的) 역할을 한 자로서 그로 인하여 구약이 종결되고 자신으로 인하여 신약이 개시되어 구속사(救贖史)의 시대가 확장 전개되었음도 선포하셨던 것이다(28절). 끝으로 세례 요한이나 예수 당신이나 모두 이 땅에 와서 구약과 신약의 구속사 진리를 각각 전하였으나 이를 완악한 세대가 편견(偏見)과 무관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책망하는 말도 덧붙이셨다(29-35절).
이상의 본 단락을 대하면서 우리는 태초부터 끊임없이 흘러온 도도한 구속사의 실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구약과 신약의 두 시대로, 그리고 두 경륜(經論)으로 나누어지나 그것은 기실 예수 안에서 우리 택한 성도의 구속(救贖)을 위하여 구약과 신약을 계시하고 신약은 구약을 더욱 확장 승화시키는 양상으로 태초부터 예수 때까지 전개돼 왔고 지금도 계속되는 도도한 구원 역사의 강물인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는 예수로부터 종말까지 바로 지금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도는 역사를 단순히 역사라 하지 않고 구속사(救贖史)로 칭하는 것이다. 더욱이 본문에서도 암시되었듯이 구약 시대는 그 계시의 질과 양이 신약을 예비하는 수준에 불과했었던 시대로서 구약 성도들은 신약의 우리에 비하여 구속 복음의 빛을 그저 희미하게 누릴 수밖에 없었다(고전 1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시대는 믿음의 숱한 선배들을 배출하여 신약의 우리에게까지 믿음을 전수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경륜이 광명처럼 드러난 신약 시대의 우리는 이 빛을 편견이나 아집으로써 거부하지 않고 회개함(repentance)으로 받아들여 거기에 동참하는 삶을 누려야 하겠다. 참으로 신약 시대는 구약 시대와 비교할 때 회개하기만 하면 천국 구원의 희망을 밝히 깨달아 알 수 있는 축복의 시대인 것이다.
36-50절은 예수의 공생애 동안 두 번 있었던 도유(塗油) 사건 중 첫 번째인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도유사건의 기록이다. 보다 세분하면 36-39절은 도유사건 자체를, 40-50절은 도유사건을 못 마땅히 여기는 시몬에게 주께서 그 사건의 의미를 각성시키시며 동시에 도유 받은 당신은 인자이시면서도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메시야요, 구속주(Saviour)이므로 그 결과 죄를 사하는 권세까지 있음을 분명히 선포하신 말씀의 기록이다. 고난주간 직전에 있었던 베다니 도유사건(마 26:6-3; 막 14:3-9; 요 12:2-8)이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한 신앙고백으로서 다가오는 죽음과 장례 예비에 그 주안점이 있었다면 이 가버나움 도유사건은 동일한 신앙 고백적 행위이면서도 능력과 사랑을 가지고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에 대한 전적인 신앙에서 우러나온 올바른 순복(obedience)과 헌신 (devotion)의 자세를 강조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고 하겠다. 이런 관점 하에서 본 단락의 구속사적 의의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거의 자신의 전 재산이었을 향유를 그것도 주님의 머리에는 감히 손도 못 대고 발에 부으며, 발에 입 맞추며, 여인으로서는 자신의 인격의 상징인 머리칼로 닦으며 전적인 신뢰와 헌신을 나타낸 죄인인 한 여자와 예수를 초대는 했으되 기본적인 손님의 대우도 해주지 않으면서 예수를 저울질이나 하려고 했던 바리새인 시몬의 대조는 우리에게 주님에 대한 바른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를 보여 준다. 또한 도유 사건을 통하여 이 죄인인 여인은 그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주님의 직접적 변론과 아울러 그 죄 사함에 대한 주의 선포까지 들은 반면 바리새인 시몬은 그의 무지와 교만만이 드러나게 된 사실은 주님께 대한 자세의 여부에 따라 세상 끝날 구원과 심판이 판가름 날 것이라는 구속사적 진리를 암시한다.
한편 주님께서 드신 비유 즉 빚을 탕감 받은 두 종의 비유는 우리에게 주님은 그 어떤 죄인도 그 죄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구원을 주시므로 우리는 죄가 많다고 또는 나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무궁히 용서를 베푸시는 주의 사랑(출 34:7)을 믿고 담대히 주께 나아가야 하며 다만 당연히 그런 많은 죄를 용서해 주신 은혜에 대하여 더욱 큰 헌신으로 보답(고전 6:19,20)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끝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주님께서는 도유한 여인에게 죄 사함 곧 믿음을 통한 죄 사함을 선포하심으로써 이 여인의 신앙 고백과 헌신의 결단이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른 자세로 행한 것이었음을 입증해 주셨으며 또한 이런 여인의 행동은 그 열매가 있는 보람된 행위이었음을 보여 주셨다. 이는 주님은 실로 우리가 믿고 의탁할 수 있는 인자이신 동시에 메시야 우리 구주이심을 새삼 확증해 준다. 따라서 우리도 이 여인처럼 우리의 신앙의 대상을 오직 주 예수만으로 삼아야 하겠다. 또한 이는 주님을 바르게 섬길 때 우리에게는 분명히 구원과 상급이 있을 것이라는 구속사적 확신도 전해준다.
외울 말씀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눅 7:47)
백부장의 종의 치유
1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 이다
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康健)하여 졌더라
나인 성 과부 아들을 살리심
11 〇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세례 요한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
18 〇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 요한에 대한 주의 증언
24 〇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29 모든 백성과 세리(稅使)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마 3:4; 막 1:6
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시몬의 집 도유 사건
36 〇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탕감 받은 두 빚진 자의 비유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 하소서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죄 사함을 얻은 여인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시 23:5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
본문 & 자료노트
지리배경 7:1,가버나움
마 9장 자료 노트 참조
원어연구- 7:7, 감당하다.
마 8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7:11-17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의 영적 교훈
1. 예수는 약하고 외로운 자들을 찾으심(11,12절)
2. 예수는 약하고 외로운 자들을 긍휼히 여기심(13절)
3. 예수는 약하고 외로운 자들을 위로하심(13절)
4. 예수는 말로만이 아닌 구체적인 도움을 베푸심(14절)
5. 예수는 인생에게 가장 심각한 죽음의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심(15절)
6. 예수는 인생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심(15절)
7. 예수는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심(16절)
주요 주제-7:2-10 예수의 치유 사역 이해
지도-7:11 예수의 나인 성 방문 경로
도표-7:11-15 본서에만 기록된 예수의 이적들
1. 베드로가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심(5:5,6)
2.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심(7:11-15)
3. 18년 동안 귀신들려 등 굽은 여인을 고치심(13:10-17)
4. 고창 병 든 한 사람을 고치심(14:2-4)
5. 문둥병자 열 명을 고치심(17:11-19)
삽화-7:12, 장례 행렬
장례 행렬은 예수 당시 유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례식 풍습의 일부였다. 보통 시체는 평평한 나무 상여에 담겨 운구되었고, 앞뒤로 가족과 친척, 직업적인 조문객이 뒤따랐고, 고인을 애도하는 뜻에서 악기가 연주되고 애가 등이 불려졌다. 가장 일반적인 고대의 장례식용 악기는 피리였다.
주요주제-7:15 죽은 자의 부활에 있어서 성자 그리스도의 역할
요 11장 자료 노트 참조
인물연구-7:19, 세례 요한
막 1장 연구 자료 참조
보감-7:36-50 향유 부은 한 여인의 신앙 특징
1. 오직 예수를 만나는 데 열심인 신앙(37절)
2. 예수를 기름부음 받은 자로 고백한 신앙(38절)
3. 자신의 죄를 애통해 하고 진실로 회개한 신앙(38절)
4. 주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춘 신앙(38,45절)
5. 자신의 소중한 것마저 아낌없이 바친 신앙(38절)
6.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신앙(38,47절)
7. 죄로부터 구원받아 평안을 얻은 신앙(48-50절)
보감-7:2-10 백부장의 믿음의 10대 특징
마 8장 자료 노트 참조
역사배경-7:5, 회당의 이해
본서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참조.
지리배경-7:11-17, 나인
본문에는 사복음서 중 유일하게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후 갈릴리 전도 사역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본 사건의 배경이 되는 성읍나인에 대해 간략히 그 위치와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명칭 및 위치
'나인' (Nain)은 '사랑스러운', '즐거운'이란 뜻을 지닌 갈릴리 지역의 한 작은 성읍이다. 이곳은 아름다운 에스드렐론(Esdraelon) 평원의 북쪽 가장자리 기슭, 곧 나사렛 동남쪽 9km 지점에 있는 '모레 산 기슭'에 위치하였다. 때문에 이곳은 에스드렐론 평원의 경관이 내려다보이는 좋은 경치와 기후를 갖고 있었고, 이에서 '사랑스러운'이란 성읍 이름이 주어진 듯하다. 한편 이곳은 오늘날의 '나인' 마을과 동일시되며, 현재 이 마을에는 모슬렘(Moslem) 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
2. 의의
성경상에 나인은 예수께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셨던 본문의 기사에 만단 한 번 등장한다. 한편 본문의 사건을 기념하는 교회가 1880년 프란시스코(Franciscans)회에 의하여 건축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곳에 있다.
한편 재미있게도 예수께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나인 성의 부근에는 약 8세기 전에 선지자 엘리사가 '수'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린 이적이 행해졌던 '수' 지방이 위치해 있다. 이에 나인 성의 주민들이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를 보고 그를 엘리사와 같은 '큰 선지자'로서 여긴 것으로 보인다(16절).
아무튼 과부의 슬퍼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께서 그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기적을 행하신 곳 나인은 오늘날 우리에게 죄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주님께서 죄 사함과 새 생명을 주셨음을 영원히 증거해 주고 있다.
주요주제-7:18-35예수의 선구자 세례 요한
눅 3장 연구자료 참조
풍습-7:38, 눈물 병
본문에는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붓기까지 예수를 사랑한 죄인인한 여인의 감동적인 기사가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라는 표현은 당시의 눈물을 모아 병에 보관했던 풍습에서 나온 듯하다. 이에 눈물 병의 용도와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본문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눈물 병의 모양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슬픔의 눈물을 받아두는 '눈물 병'이 있었다. 이 눈물 병들은 주로 얇은 유리로 만들어졌는데, 크기가 다양하여 보통 7~8cm에서 20cm의 크기까지 있었다. 이 병은 바닥이 넓고 몸통은 호리호리하며 아구가 깔대기 모양으로 생겼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단순한 토기로 만든 병들을 눈물 병으로 이용했던 것 같다.
2. 눈물 병의 용도 및 의미
눈물 병은 가정에 어떤 재난이 생겼거나 마음이 상하여 눈물을 흘리게 될 때 자기의 흐르는 눈물을 모아 보관하는 데 쓰였다. 식구들은 모두 제각기 눈물 병을 하나씩 갖고 있었고 슬픈 일로 눈물을 흘리는 동안 눈 아래에 자기의 눈물 병을 댐으로써 흐르는 눈물을 눈물 병에 담았다. 그리고는 그 병을 밀봉하여 집 안의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보관했고, 또다시 가족이나, 친척 중에 재난이 생기면 그 눈물 병을 챙겨서 그 재난이 일어난 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런 탓에 그들에게는 눈물 병이 매우 성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의 눈물 병은 그 사람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로서 그와 함께 매장되었다. 그리고 만일 이렇듯 신성하고도 귀한 자기의 눈물 병을 깨뜨리거나 그 안의 눈물을 다 쏟아버림으로써 그들의 풍습대로 죽음 시에 눈물 병을 매장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대단한 수치로 여겨졌다.
3. 교훈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눈물 병에 담긴 눈물은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한 여인이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다는 것은 정확히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자리에서 직접 눈물을 흘려서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이전에 눈물 병에 모아 두었던 눈물로 그 발을 적셨다고 봄이 옳은 듯하다. 이와 같이 이 여인의 행동은 진정한 회개의 표시임과 동시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표시였다. 참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청했으면서도 마땅히 손과 발을 씻을 물조차 떠다 주지 않은 바리새인 시몬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의 죄인됨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간구한 본문의 여인을 통해 진정 자신을 낮춰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는 자만이 죄 사함과 평안함을 얻음을 깨닫게 된다(48,50절).
주요주제-7:31-35 예수의 비유의 이해
마 13장 연구 자료 참조
보감-7:36-50 회개에 관한 12대 교훈
1. 회개는 말로만이 아니라 그 열매가 있어야 함(마 3:8)
2. 때를 놓치기 전에 회개해야 함(마 11:21)
3. 주님의 복음을 겸손히 받을 때 회개하게 됨(마 13:15)
4. 교만을 버리고 어린아이들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함(마 18:3)
5. 회개하는 자가 성부 하나님 앞에 서게 됨(마 18:7-10)
6. 주님은 죄인들을 회개케 하기 위해 오심(6:12)
7. 회개하는 자만이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게 됨(눅 7:36-50)
8. 주님은 죄인의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심(눅 15:11-32)
9. 회개하는 자에게 죄 사함과 구원이 있음(눅 24:47)
10. 회개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보살피심(눅 24:47-49)
11. 회개하는 자에게 주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심(요 1:12)
12.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죄를 주께 자백할 때 기쁨이 있음(요일 1:9)
풍습-7:37, 향유 사용
막 14장 자료 노트 참조
원어연구-7:38, 입 맞추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카타필레오'이며 이는 '카타'와 '필레오'의 합성어이다.
먼저 '카타'는 전치사로서 '~ 아래로'(down) 또는 '~를 향하여'(toward)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동사 '필레오'는 '친구'(마 11:19; 행 19:31)나 '벗'(눅 15:9; 약 4:4)을 뜻하는 명사 '필로스' (piaos)에서 유래하여 '사랑하다'(마 10:37; 딛 3:15), '좋아하다'(마 6:5; 계 22:15)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전치사 '카타'와 동사 '필레오'가 합성된 '카타필레오'는 '서로를 향하여 좋아하다' 또는 '~아래로 사랑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결국은 서로에 대해 얼굴의 아래 부분에 위치하는, '입맞추다'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카타필레오'하면 '열정적으로 입 맞추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입 맞추다'라는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눅 7:38; 행 20:37).
특별히 본절의 '카타필레오'는 시제상으로 미완료형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그 의미는 '계속해서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가 된다. 따라서 본절 전체의 의미를 살펴보면 옥합을 바친 죄인인 한 여인은 예수의 발을 계속해서 씻고 열정적으로 입 맞추며 향유를 부었던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한 여인의 예수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수 있다.
주요 주제- 7:34, 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7:38-44 성도가 흘려야할 눈물
1. 의를 위한 고난의 눈물(시 126:5)
2. 믿음의 눈물(막 9:24)
3. 회개의 눈물(막 14:72)
4. 감사의 눈물(눅 7:38,44)
5. 죄인에 대한 연민의 눈물(눅 19:41)
6. 자비의 눈물(요 11:35)
7. 봉사의 눈물(행 20:19)
8. 훈계의 눈물(행 20:31)
9. 권고의 눈물(빌 3:18)
10. 기도의 눈물(히 5:7)
보감 -7:50 성도들이 가져야 할 10가지 믿음
마 15장 자료 노트 참조
7:1-10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
본장에서는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1-10절),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11-17절), 한 여인이 향유를 부은 사건(36-50절) 등을 통해서 예수께서 인간을 병, 죽음, 죄로부터 해방시키실 메시야이심을 더욱더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중에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 백부장의 병든 종을 치료해 주신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마태도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마 8:5-13)누가와 약간의 차이를 나타낸다. 즉 마태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는 장로들이 백부장의 종이 죽게된 것과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게 간청했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마태가 사건의 세부적인 내용보다 그 중심적인 내용에 치중한 반면 누가는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기록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3절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하여튼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이다. 당시 대부분의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을 압제했으므로 민족적 반감을 사고 있었는데 이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위하므로 장로들의 신뢰를 받을 정도였다(3-5절). 또한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는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은 탁월한 믿음의 소유자였다(6-8절). 백부장은 예수님의 칭찬대로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선민이라 자랑하던 유대인들보다 더 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9절). 따라서 성도들도 이러한 백부장의 믿음을 좇아 절대 겸손과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전적인 신뢰 그리고 주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져 칭찬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약 5:15,16). 둘째는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가능성이다.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마태의 병행 구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이후(9절)에 이방인의 구원과 유대인의 버림받을 것에 말씀하신 것으로 나타난다(마 8:11,12). 이는 구원이 혈통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오로지 믿음에 근거함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구원의 보편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직접 찾아가셔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으나 이렇게 찾아오는 이방인들에 대하여는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것은 이방인 신자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누가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예수님의 복음이 세상 만민을 위한 것임을 암시하고 후에 제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이방인의 구원은 절정에 달하게 된다(행 1:8).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을 자랑하면서도 복음을 거부한 교만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경고가 되는 말씀인 동시에 이방인들에게는 소망을 주는 말씀이라 아니할 수 없다.
7:1 예수께서 …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 평지 수훈 이후 예수의 행선지와 사역에 관한 누가의 기록은 마태의 것과 일치하고 있다. 다만 마태복음에서는 산상수훈 이후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중에 한 문둥병자를 치유하시는 기록이 삽입되어 있다(마 8:1-4). 한편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대부분을 지내신 곳으로 갈릴리 전도의 본거지였다(마 4:12,13). 그런데 가버나움은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가 다스린 영토에 속해 있었을 뿐 아니라,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에는 군대가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눅 9장 연구 자료 '세례 요한 및 예수 공생애 당시 분봉왕들의 통치구역'을 참조하라.
7:2 어떤 백부장. - 백부장은 로마 군단(軍團)에 속한 말단 장교로서, 보통 100명 정도의 병사들을 직접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다. 신약 성경에는 대략 다섯 명의 백부장이 소개되고 있다. 즉 본절에 언급된 가버나움의 백부장,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진두지휘했던 백부장(막15:39), 이달리야대(隊)의 백부장 고넬료(행 10:22), 예루살렘의 백부장으로서 바울이 고문을 당할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사람(행 22:26), 바울을 로마까지 호송책임을 맡았던 아구사도대의 백부장(행 27:1) 등이 나타난다. 하여튼 이스라엘 내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와 백부장들은 대개 당시 치안 유지와 반발 진압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의 적대감은 매우 골이 깊었다. 그러나 본절에 언급된 백부장은 유대인을 사랑하고 많은 선한 일을 베풀었으며 경건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묘사된다(4,5절). 그에 대해서는 헤롯 안디바의 용병이었을 것이라는 견해(Plummer, Bruce, Gimour)가 있으나 분명한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종. - 누가는 '종'(둘로스)이라고 표현한 반면 마태는 '하인'(파이스)이라고 했는데, 후자의 경우는 보통 '아들'로도 번역이 된다. 따라서 이 백부장의 종은 특별히 총애를 받은 하인 중 한 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태는 그의 병이 중풍병이라고 전하고 있다(마 8:6).
7:3 예수의 소문을 듣고. -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자신의 병든 종을 치유할 수 있는 분으로 예수님을 지목하게 된 것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 때문이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종류의 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축출하는 기사와 이적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특별히 중풍병이 든 환자를 낫게 하신 적이 있었는데(눅 5:18-26), 백부장이 들었던 소문은 이런 내용의 것이었을 듯하다.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 여기서 말하는 장로는 회당의 장로(행 13:15)가 아닌 백성들에게서 존경을 받는 사람들, 즉 백성의 장로이다. 한편 마태의 병행 구절에서는 백부장이 직접 예수께 나아간 것으로 되어 있어서(마 8:5) 본 구절과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들은 마태와 누가의 기록관점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조화에 별 어려움이 없다. 즉 마태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기록했던 이전의 방법에 따라서 백부장이 예수님께 간청한 과정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간청 내용에 초점을 맞추었고, 누가는 섬세한 그의 필치의 특징에 따라 간청 과정까지도 세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는 전달자가 백성의 장로라는 사실을 생략했던 것이다. 아무튼 어떤 경우이든지 백부장이 예수님께 간청하고자 했던 바 소원은 잘 전달되었던 것 같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백성의 장로들이 이방인인 백부장의 간청을 대신 전달했던 점인데, 이는 아마도 백부장이 유대교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하면서 유대인에게 많은 선을 베품으로써 그 지역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7:4 간절히 구하여. - 여기서 '간절히'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푸다이오스'는 서두름을 의미하는 '스푸데'에서 나온 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열심히', '진지하게 무엇을 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구하여'(파레칼룬)는 미완료 능동태로 구하기를 계속했다는 의미가 있다. 즉 장로들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백부장의 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예수의 응답이 있기까지 계속해서 예수께 열심을 다해 간구한 것이다.
7:5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 이 구절은 장로들이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종을 치유해 주시도록 간청하는 이유로 제시했던 첫 번째 내용이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일반적으로 교만하고 잔인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그가 유대교로 개종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유대 민족을 사랑하였던 것이다. 회당을 지었나이다. 두 번째 이유는 백부장이 회당을 건립한 사실이다. 회당은 당시 성전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중요한 종교 교육 기관으로서, 실질적인 종교 교육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이와 같은 유대민족 종교 교육 기관인 회당을 이방인 백부장이 건축해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서, 적어도 백부장이 유대교로 개종했을 개연성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백부장이 회당을 지어준 것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매우 인상적인 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7:6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 백부장이 이차로 벗들을 보내게 된 정확한 계기는 밝혀지지 않지만, 그가 장로들을 보내고 난 이후에 예수님께 대한 인식이 점점 더 깊어졌다는 사실만은 알 수가 있다. 그가 먼저 백성의 장로들을 파송했을 때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올 예정이었지만, 지금 벗들을 보낸 것은 자기 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류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백부장의 행위는 모순이 있어 보이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내 집에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 이것은 백부장이 자기 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류한 이유이다. 여기서 백부장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 정도를 알 수 있는데, 그는 적어도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기에는 감당치 못할 분으로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백부장이 예수님이 단지 병을 고치는 의원을 넘어선 분이라는 인식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감당치 못하다'(우… 히카노스)는 무가치함을 느낄 때 사용하는 말로(마 3:11), 이는 백부장이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초월성과 자신의 무가치성을 자각했음을 시사한다.
7:7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 -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가서 만나보는 것도 꺼리고 있다. 이 구절 역시 백부장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내용을 보여주는데, 그는 이미 예수님을 소문으로 들은 바 큰 이적을 베푸는 선지자 이상의 분임을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이 구절 역시 백부장의 믿음의 정도를 잘 보여준다. 즉 백부장은 전절과 본절의 상반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대면할 수 없을 정도의 위엄이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의 말씀은 절대적인 능력이 있어서 직접 하인을 접촉하지 않고서도 치유할 수 있는 분임을 깊이 깨달은 것이다.
7: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하나이다. - 본절의 백부장의 대답은 예수님께 대한 그의 신앙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 여기서 '남의 수하에 들었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권세 아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본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로마 군대의 조직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당시의 모든 권세는 로마 황제에게 속해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권세'란 로마 황제의 권한을 가리킨다. 그런데 백부장은 로마 황제의 권한을 위임받은 자이므로 그 수하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복종해야만 했다. 만일 백부장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백부장은 지금 이러한 인위적 명령 체계의 원리를 예수와 자연 세계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백부장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분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 받았으며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온 우주의 참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말씀만 하셔도 질병을 복종시킬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백부장의 고백은 하나님과 예수와의 관계를 완전하게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예수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와 같다는 것과 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효력을 지녔다고 믿은 그 믿음은 실로 놀라운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7:9 저를 기이히 여겨…하시더라. - 여기서 '기이히 여기다'(다우마조)라는 말은 어떤 것을 보고 놀란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이는 예수님께 대한 백부장의 고백으로 인한 놀라움과 아울러 그의 신분이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즉 예수께서 당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계시에 풍부했던 유대인들에게서 배척당하셨을 뿐만 아니라(막 6:6), 제자들조차 아직 이러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볼 때(눅 9:20), 당시로서 계시에서 소외되었던 이방인 백부장이 이 같은 믿음을 소유한 것은 특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없었던 훌륭한 믿음이라고 칭찬하신 것이다.
7:10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 마 8:13에서는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는 선언이 덧붙어 있다. 즉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훌륭한 믿음에 정당한 반응을 보이셔서, 백부장의 믿음에 합당한 결과를 얻게 하신 것이다. 한편 마 8:13에는 백부장의 종이 단순히 '나으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누가는 그가 나을 뿐만 아니라 강건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어 예수의 이적의 완전함을 보여 주고 있다.
7:11-17 나인성 과부 아들의 소생
앞 단락(1-10절) 에서는 예수님께서 로마 백부장의 겸손한 믿음을 보시고 그 총을 고치신 사건을 보았다. 이어 본문은 공관복음 중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신적인 권능으로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시는 이적을 소개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중 죽은 자를 살리신기사는 세 번 나타난다. 본문의 기사와 더불어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 5:41 ; 눅 8:49-56) 및 나사로(요 11:17-44)를 살린 것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모두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처한 인생의 슬픔을 깊이 동정하여 신적인 권능을 베풀어 소생시키신 것이었다. 하여튼 누가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보여 주고 있다. 때는 인자로서 오신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을 보여 준다. 즉 앞에 언급된 백부장의 믿음과 달리 이번에는 슬픔을 당한 불쌍한 과부에게 연민을 느끼신 예수님이 직접 찾아 가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는데(11-13절), 이는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가 권능으로 나타난 것이다. 두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로 오셨음을 증거한다. 사람들은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예수님을 엘리야(왕상 17:17-24) 나 엘리사(왕하 4:32-37) 같은 큰 선지자로 여겼는데(16절), 예수께서는 실로 직접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의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영생을 주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이셨던 것이다(요 6:40; 살전 4:14; 벧전 3:18).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을 예표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통해 그 자신 또한 비록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것이나 다시 부활하실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요 11:25).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우리가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의지와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긍휼의 결과라는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죽음이 그 끝이 아니며 종말에 생명의 부활로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③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에게 참 생명과 구원을 주실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이다(요 3:15-36; 요일 5:11).
7:11 본절에서 17절까지는 예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신 기사로 누가의 독특한 보도이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은 복음서를 통해 모두 세 번 나타나는데, 본절의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을 비롯하여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사건(눅 8:49-56),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요 11:1-44)을 볼 수 있다. 한편 이 세 이적의 공통된 특징은 모두 죽음에 처한 인생의 슬픈 문제에 대한 깊은 동정이 이적의 동기가 되었다는 것인데 예수께서는 바로 이 사망의 권세에서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사람의 아들로 나신 것이다.
나인. - '나인'( )은 히브리어 '나임( )에서 유래했는데, '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인 성은 나사렛 동남쪽 9km 지점에 있는 작은 성으로서, 엔돌(Endor; 삼상 28:7) 바로 곁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는 에스드론 평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기도 한다. '나인'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7: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 - 이때 정황은 예수님 일행이 나인 성에 들어가실 때를 맞추어, 일단의 장례 행렬이 공교롭게 성문을 중심으로 교차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러 오신 예수님(요 6:32,33)과 아담의 타락으로 세상에 들어온 죽음의 세력이 마주치는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하겠다.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 이 여인을 흔히 나인 성 과부라고 일컫는다. 그녀는 과부에다, 자신의 마지막 소망이었던 독자마저 잃어버린 가장 불쌍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과부는 성경에 고아와 나그네와 더불어 특별한 보호를 받아야 할 만큼 불우한 계층에 속했다(레 22:13 ; 신 14:28,29; 16:10,11; 26:12,13). 따라서 나인 성 과부가 그녀의 독자를 잃어버린 것은 세상에서 위로 받을 수 없는 가장 비참한 지경에 빠졌음을 말해 준다.
7:13 주께서…불쌍히 여기사. -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독자를 살리신 동기를 잘 보여주는 바 그것은 과부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베푸신 이적은 대부분 이적의 수혜자의 믿음의 여부에 따라 베풀어졌지만, 이것과 관계없이 일방적인 동정과 사랑에서 비롯된 이적이 적지 않았다(마 14:14; 15:32; 20:34; 막 1:41;8:2). 이는 예수님의 조건 없는 무한하신 사랑의 길이를 절감케 해 준다.
울지 마라. - 이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진 나인 성 과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의 명령이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결연하게 과부의 슬픔을 중지시킨 것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예수님 자신이 그녀의 슬픔의 원인을 제거시킬 충분한 능력과 넉넉한 사랑이 있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7:14 그 관에 손을 대시니. - 이는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여기서 '관'(소로스)은 뚜껑이 없어 시신이 잘 보이는 관을 의미한다. 하여튼 죽은 자의 관에 손을 대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민 19:14-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관에 손을 대신 것은 예수의 나인 성 과부에 대한 극진한 연민의 발로였으며, 또한 예수께서 율법을 초월하신 분이심을 보여준다. 청년아… 일어나라. - 여기서 '일어나라'(소이 레고)는 말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때 사용하셨던 전형적인 어법이었다(눅 8:54; 요 11:43). 이것은 예수님의 권위가 죽어서 들을 능력을 상실한 자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여튼 성경에는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죽은 자를 살린 경우가 나타나나(왕상 17:21; 왕하 4:35; 행 9:40; 20:10) 자신의 권위로 죽은 자를 살린 경우는 예수 밖에 없다. 이는 예수께서 비록 육신을 입고 계시지만 신적 권위를 지니신 분임을 증거한다.
7: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 여기서 '일어 앉고'(아네카디센)라는 단어는 본래 환자가 침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의학 용어로 본절과 행 9:40에만 나타나는데 모두 죽은 자의 부활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 이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직후 행동과 같다(왕상 17:23). 이것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큰 선지자'(16절)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여튼 나인 성 과부의 독자가 다시 살아난 것은 도탄과 비탄에 빠졌던 그녀에게는 새로운 소망을 얻은 것과 진배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7: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 이는 신성한 능력이나 권위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다(눅 5:10). 이는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가 주의 천사를 보았을 때(눅 1:12) 뿐 아니라 마리아와 요셉(마 120; 눅 1:30)에게도, 그리고 목자(눅 2:9)들이 주의 천사의 방문을 받았을 때에도 나타낸 반응이었다.
큰 선지자… 일어나셨다. - 아마도 무리들은 예수를 모세나 엘리야(눅 9:19) 정도로 생각한 듯하다. 예수를 이렇게 부른 것은, 사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는 최대의 경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그보다 더 뛰어나신 그리스도이신 것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 여기서 '돌아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켚토마이' 는 본래 의사가 환자를 왕진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유대인들은 400년 동안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예수의 이적을 목격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오랜 침묵을 깨고 그들을 돌아보셨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7:17 온 유대와 사방. - 예수님 당시 '유대'는 대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통치했던 지역으로서, 예루살렘을 포함한 주변 지역을 뜻했지만, 여기서는 전 팔레스틴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Meyer, Bleek, Plummer, Gilmour). 이렇게 볼 때 '사방'은 당연히 주위의 이방 지역을 가리키게 된다.
7:18-23 세례 요한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
앞 단락(11-17절)에서는 예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말씀 한 마디로 살리신 사건을 통해 예수께서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신적 권위를 가지신 분인 것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세례 요한과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밝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기는 했지만(요 1:34), 막상 그가 헤롯 안디바에 의해 옥에 갇히게 되자 진정 예수께서 메시야인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메시야관의 오해에서 기인하였다. 즉 요한은 그에 앞선 다른 사람들과 당시의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야를 정치적 메시야로 이해하여 그가 오면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다윗시대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메시야로 증거한 예수께서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그를 위해 증거했던 자신의 투옥에도 불구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과연 진정 메시야인지 여부를 그의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직접 묻기에 이른 것이다(18-20절). 이에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 대신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표적(사 11:2; 42:1-5; 60:1-3; 61:1,2)이 그에 의해 행해지고 있음을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메시야되심을 알게 하셨다(21-23절).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지식과 논리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구속 사역과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오직 완전한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히 11:1-3).
7:18 이 모든 일…고하니. -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이후의 모든 행적을 가리킨다. 즉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옥에 갇혀 있는 세례 요한에게 예수의 행적을 일일이 보고한 것이다.
7:19,20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 이는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를 통해서 예수님께 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시 40:7; 118:26; 단 7:13 등을 배경한 구약 메시야 사상을 반영해 주고 있다. 한편 평소 예수님을 참 메시야로 알았던 세례 요한이 여기서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에 관한 질문을 새삼스럽게 제기한 사실은 매우 의아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확고하게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Chrysostom, Calvin, Bengel). ② 예수로 하여금 요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야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Plummer). ③ 요한에게 이때에야 비로소 메시야에 대한 확신이 생겨서였다(Holtzmann). ④ 세례 요한 자신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이상 네 가지 견해 가운데 ①의 견해는 타당성이 없지는 않으나 문맥의 흐름상 ④의 견해가 보다 합당하다. 즉 세례 요한은 그 자신이 구약적 인물이었던 까닭에 비록 예수를 메시야로 알고는 있었으나 예수께서 자신의 생각과 같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찬란한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리라는 것과는 달리 무저항주의를 가르치고 자비와 용서 등의 교훈을 말씀하시자 예수의 메시야성에 의구심을 품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서 참 메시야인지 여부를 직접 물어보게 한 것이다(Barbieri, Bruce, Carr, Ridderbos).
7:21 마침 그 시에. - 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했을 때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셨고, 이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주시고자, 이 시간에 맞추어서 치유와 축사의 이적을 베푸신 것이다.
7:22 보고 들은 것. - 여기서 '들은 것'은 예수님이 전파하신 복음이고 '보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진리임을 확인해 주는 '표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특별히 여섯 가지 표적들을 열거하심으로써,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증거하셨다. 즉 이 표적들이 메시야에 대한 구약적 증거로 사용되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사 35:5,6; 61:1), 이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자기 계시는 구약적 사고의 틀 안에 있는 세례 요한과 그 제자들에게도 이해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경이 보며…복음이 전파된다하라. - 이 구절에 나타나 있는 여섯 가지 표적 중 처음 네 가지는 사 35:5,6; 42:7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이다. 이사야서에 예언되어 있는 이 말씀들은 한 마디로 '이적과 전파'를 언급하고 있는데,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 역시 이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가 구약의 예언된 메시야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Hendriksen). 그런데 예수의 답변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며'라는 내용은 이사야서에 나타나지 않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의 예언 성취가 구약에서의 예언된 내용을 능가하는 것임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Ridderbos). 즉, 예수께서는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과 같이 여러 이적들을 실제로 베푸셨을 뿐 아니라(마 8:2-4; 9:27-31; 15:30; 막 7:31-37 등), 이 모든 것보다 우월한 기적, 곧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베푸심(마 9:18-25; 눅 7:11-15)으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예수는 사 61:1을 인용하시면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이란 말을 생략하셨는데 구약에 정통하셨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의도적으로 인용하지 않으셨던 이유는 메시야에 대한 오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고, 악인을 벌하며 새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라는 오해가 요한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여튼 예수께서 설명하신 이 모든 사역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구원의 때가 이미 도래하였음을 증거하고 있다(Ridderbos). 즉 그의 예언 성취는 더 이상 미래에 있을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실체인 것이다.
가난한 자. - 성경에서 '가난한 자'는 영적·물질적 의미로 동시에 사용되는데, 누가의 경우는 대체로 물질적으로 궁핍한 사람을 뜻한다. 이것은 당시 경제적 불평등이 일반적으로 부와 권력을 지닌 사람들의 착취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가난한자'들은 고난 받는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시 9:9,10; 14:4-6; 37:14,15; 69:33; 사 3:15; 합 3:13,14), 그래서 예수님 역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오신 메시야의 중요한 증거로 제시하신 것이었다.
7:23 누구든지…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예수께서는 참 메시야 사역을 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메시야관을 갖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쉽게 거부되었다. 즉 유대인들은 그들의 메시야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참 메시야이신 예수를 그들의 '오실 메시야'(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막 12장 연구자료 '유대인의 예수 배척'을 보다 참조하라. 이것은 결국 누구든지, 비록 지금 예수께서 행하시는 사역이 자기의 기대와 다르다 할지라도 이것 때문에 '실족하지' 않고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따른다면, 그의 영원한 생명과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실족하지'로 번역된 헬라어 '스칸달리스데'는 '돌 같은 것에 걸려 또는 부딪쳐 넘어지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갖고 있다(Kittel). 본절을 이런 의미에서 다시 살펴보면 '누구든지 예수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복이 있다'는 뜻이 된다.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을 통해 이미 자기가 메시야라고 확신할 만한 증거들을 제공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불신앙하거나 의심하는 자들은 예수 때문에 실족한다. 즉 불신자들에게 있어 예수는 넘어지게 하는 돌이요 거치는 돌이다. 그러나 그를 믿고 따르는 자는 구원과 영생을 얻어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할 것이다(롬 19:33). 따라서 예수의 이 경고의 말씀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해물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그를 따르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말씀인 것이다(Ridderbos).
7:24-28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평가
앞 단락(18-23절)에서는 예수께서 '그가 진정한 메시야이 신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세례 요한에 대해 구약에 메시야의 표적으로 제시된 이적들을 행하시고 또한 그것이 자신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자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증거하셨음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평가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을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로, 자신을 세례 요한이 증거한 바로 그 메시야로 증거하고 계신다. 이것은 눅 3:1-17의 세례 요한의 시각에서 본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연약한 사람도 아니고(24절), 화려한 상류층의 사람도 아니며(25절), 어떤 선지자보다 나은 자로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며 (26,27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로 평가하였다(28절). 이런 세례 요한의 출현은 구약의 선지자 말라기에 의해 이미 예언된 것으로(말 4:5), 그는 회개의 세례를 통해 메시야의 첩경을 평탄케 한 위대한 선지자였다.
한편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한 그와 같은 긍정적인 평가와 아울러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니라'(28절)라는 말씀을 첨가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단순히 세례 요한의 사역이나 업적을 과소평가하여 하신 말씀이 결코 아니다. 세례 요한은 실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서의 자신의 본분과 사명을 결코 흔들림이 없이 아주 잘 감당했었다(요 1:19-34). 다만 예수께서는 그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가지는 구약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한계를 지적하신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구약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구속사역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신약의 성도들에 비해 못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마 11:11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따라서 예수의 이 말씀은 구속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밝히 깨달은 신약 성도의 은혜가 얼마나 값진 영적 축복인가를 잘 드러내 준다 하겠다.
7: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 - 본절에서 28절까지는 예수님의 세례 요한에 대한 증언을 담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이후 주위의 군중들을 상대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해 친히 증거하신 것은 조금 전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들로 인하여 군중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 의심이 많고 줏대가 없는 변덕스러운 인물이라는 생각을 갖게될 것에 대비해 그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었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 광야는 세례 요한의 중심 사역지로서, 그는 이곳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다(마 3:1,3; 11:7; 눅 1:80). 그래서 많은 군중들이 세례 요한을 만나러 광야로 모여 들었었다(눅 3:1-6).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이는 의지가 박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을 비유하는데, 이것을 군중들에게 반문한 것은 세례 요한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줏대 없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사역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확고한 신앙의 사람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7:25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 이는 세상 권력자의 신하를 뜻하는데, 당시 로마 권력에 기생하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화려한 복장을 염두에 둔 듯하다. 반면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지냈을지언정, 세상의 권력의 비리를 준엄하게 꾸짖는데 인색하지 않았던 사람이다(눅 3:13,14,19). 결국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권력의 그늘에서 아첨하며 살았던 사람과는 달리 오직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굴절 없이 훌륭하게 수행한 사람이었음을 암시하기 위한 말씀이었다고 할 수 있다.
7:26 선지자냐. -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소개는 점층법에 의지했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에서 '선지자'까지 이르렀다. 물론 '갈대'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은 세례 요한의 정확한 소개를 위해 동원된 부정적인(negative) 표상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부정적인 표상을 거치는 동안 세례 요한은 점점 '선지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원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직분으로서,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했다고 한다면, 선지자는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지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임을 본 구절은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 이는 예수님의 세례 요한에 대한 최종적인 소개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개했던 직분 가운데, 선지자를 넘어선 것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구체적인 직분을 제시한다고 보기보다는, 세례 요한의 선지자로서의 독특한 사명과 관련해서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과는 구분되어, 특별히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활동했고, 오직 이를 위해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만 살았던 사람이었다(마 3:3). 그리고 오실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희미한 계시의 빛 속에 대망하면서 살았던 어떤 구약의 선지자들보다, 세례 요한은 직접 예수님을 상면하면서 구체적인 계시를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7:27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예비하리라. - 이는 말 3:1의 변형된 인용이다. 이 인용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길을 예비한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볼 때, 내용의 변형이 없지만, 단어의 구체적인 변형은 주목되고 있다. 말 3:1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해 보면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이다. 이것이 본문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은 하반절인 '네 앞에 보내리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는 대목이다. 즉 1인칭이 2인칭으로 변형되어 있다. 말라기에서 '내'는 '하나님'이고 '내 사자'는 '세례 요한'을 뜻한다. 반면 본 구절에서 2인칭인 '네'는 '예수님'을 뜻하고 '내 사자'는 '세례 요한'을 뜻한다. 이 문제는 예수님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라는(마 1:23) 사실에서 볼 때 대체로 무난히 해결할 수 있다. 즉 말라기 선지자 당시에는 아직 예수님에 대한 계시가 희미했다고 볼 때, 거기서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일체(一體)로 표현했고, 이제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까닭에 예수님에 대한 계시가 분명해진 시점인 본 구절에서는 삼위(三位)의 관계를 '내-네'의 표현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Godet).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말 3:1를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인 자신에게 말하는 식으로 변형시켜서 인용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사자' (messenger)는 전절의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되는데, 이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은 선지자임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한편 여기서 '예비하다'(카타스큐아조)란 말은 원래 '세우다'는 뜻으로서, 건축물을 건립하기 위한 기초를 닦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사명을 지닌 세례 요한의 사역의 성격을 보여 주기에 적합한 단어라고 하겠다. 눅 3장 연구자료 예수의 선구자 세례 요한을 참조.
7:28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 이는 예수님의 세례 요한에 대한 최극상의 호의적인 평가이다. 물론 여기서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라는 것은 그의 인격이나 능력에 관한 평가가 아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사역이 구약의 모든 성도들에게 희미하게 보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예비했다는 측면에서 주어진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약의 끝부분에 위치한 세례 요한이 구약의 어떤 선지자들보다 예수님에 관해 풍부한 계시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는 가장 큰 자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구속사적 위치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구절이 되고 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백성들에 비해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가장 큰 자가 되었지만, 예수님과 더불어 전파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 중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고 할 수 있다('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눅 서론 특별 자료를 참조하라). 세례 요한은 비록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의 사역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그가 신약의 성도들에 비해 예수님에 대한 계시에 관한한 열등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세례 요한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고결한 인격이나 도덕과 같은 것에 있지 않고, 다만 그의 사역의 독특한 위치를 밝히시는 데 있다고 하겠다. 이에 대해서는 마 11:11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7:29-35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앞 단락(24-28절)에서는 예수께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사역에 대해 증거하신 것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들은 두 무리들의 상반된 반응에 대해 말씀하고, 세례 요한의 증거와 예수의 복음을 배척한 무리들의 완악함을 장터에 노는 아이들의 비유를 통해 지적하고 계신 말씀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는 먼저 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일반 백성과 죄인으로 천대받던 세리들은 하나님을 의롭다한 반면 (29절), 스스로 하나님께 열심인 자신들의 의를 자랑하던 율법사와 바리새인은 영적 교만에 빠져 세례 요한이 메시야로 증거하는 자신과 복음을 거부하였음을 지적하셨다(30절). 즉, 그들은 세례 요한의 외침을 거절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함으로써 저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편협되고 배타적이며 외식적인 율법주의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악함을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어 신랄하게 책망하고 계신다(31-35절). 장터에서 놀기 위해 모인 아이들 중에는 상대편 친구들이 결혼식 놀이를 제안하며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반대로 장례식놀이를 제안하며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며 그 놀이 자체만을 반대하는 아이들이 있었다.(31, 32절).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을 이러한 무감각한 상태의 아이로 비유하신 것이다. 이들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외치면서 경건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켜서는 그가 귀신들린 것이라고 비난하였고(33절), 이와 반대로 천국 복음과 소망을 전하시면서 사람들과 자유로이 교제하시는, 예수를 향하여서는 먹고 마시는 것을 탐하는 자요 죄인의 친구라고 정죄하였다(34절). 실로 영적인 교만과 편협한 율법주의에 빠져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의 절대적인 진리마저도 외면하고 거부하는 그들의 죄악된 행위는 장터의 고집장이 아이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비록 복음의 진리가 그 대적들에 의해 거부되고 배척된다 할지라도 진리를 좇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하여 옳다고 인정된다고 말씀하신다(35절).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복음의 빚은 언제나 역동적인 능력으로 전파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위로와 소망을 가지고 확신 있게 전해야 한다(고전 1:18; 히 4:12).
7:29,30 본문은 누가의 독특한 보도로 마치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증거(24-28절)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31-35절) 사이의 삽입절과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를 누가의 삽입절로 보기에는 문맥의 흐름상 자연스럽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 역시 세례 요한에 대해 증거하시는 예수의 연속적인 말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Hendriksen).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 백성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실은 마 3:6에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백성들이 세례 요한의 선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도 믿음으로 수용했을 것이다. 한편 '모든 백성'이라는 말에는 '세리'도 포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로 표기한 것은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창기와 같은 부류의 죄인으로 취급되어 미움과 배척을 받은 까닭이다.
바리새인과 율법사. - 일반 백성들과 세리들은 세례 요한의 증거를 받아들이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던 반면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자처하며 교만히 행하다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혹독한 비탄을 받았다(마 3:7-9). 이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와 메시지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거절함으로써 인류를 구원코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스스로를 제외시켰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율법사'는 흔히 '서기관'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서기관에 대해서는 마 5:20 주석을 참조하라.
7:31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 여기서 말하는 '이 세대 사람'은 직접적으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뜻하지만, 결국 요한과 예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당시 모든 사람들까지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들의 진리에 대한 완악함을 비유로써 말씀하시고자 하셨다.
7:32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울지 아니하였다. - 예수께서는 당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한 무리들을 묘사하기 위해 장터에서 혼례와 장례의 흉내를 내며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비유로 도입하셨다. 여기서 '피리'와 '춤'은 혼례식을 나타내며 '애곡'은 장례식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본절의 내용을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장터에 모인 아이들 가운데 한 명이 결혼식 놀이를 제안하자 많은 아이들이 이에 호응하여 역할 분담을 하고 놀이에 들어간다. 그런데 정작 놀이에 들어가자 피리를 불며 춤을 추기로 되어있는 아이들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춤을 추지 않는다. 그래서 그 결혼식 놀이는 깨지고 만다. 이에 이번에는 장례식 놀이를 제안하고 결혼식 놀이에서 춤을 추도록 되어 있는 아이들에게 애곡을 하도록 하게 한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장례식 놀이가 진행되어도 애곡을 하지 않는다. 결국 놀이는 완전히 깨지고 만다. 이에 아이들은 놀이가 진행되지 않은 것에 대해 상대방을 비난하고 나선다. 이처럼 아이들 간에 조화가 되지 않은 상태를 비유로 들어 예수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설명하신 것이다.
7:33 세례 요한이 와서…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 본격적인 비유의 해설이다. 세례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주식으로 삼고, 떡과 포도주는 일절 삼갔는데, 이는 그가 이스라엘에 임박한 진노를 긴급히 알리는 선지자였기 때문이었다(눅 1:15).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례 요한의 외침에 대해 회개하고 돌이키기는커녕 그의 생활의 습관을 트집 잡아 그를 귀신이 들렸다고 매도하였다. 즉 그들은 세례 요한의 외침에 정당한 반응을 보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세례 요한의 모습이 그들의 생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마치 장례식 놀이가 지신들의 생리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아이들과 같다 할 것이다.
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과는 달리 금욕 생활을 하지 않고 비교적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셨다. 즉 예수께서는 당시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 습관을 좇아 사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세리와 창기 등과 같이 소외되고 멸시받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대우하셨다. 그러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예수를 먹기를 탐닉하며, 죄인들과 한 통속을 가진 자라고 매도하였다. 실로 그들은 장터의 한 무리의 아이들과 같이 변덕스러웠다. 금욕 생활을 하던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이제 평범한 생활을 하던 예수께는 먹기를 탐하며 죄인과 한 통속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즉 그들은 세례 요한의 메시지도, 예수의 메시지도 내팽개쳐 버리고 도리어 악의에 찬 비난만을 퍼부은 것이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 이는 예수님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평가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주 연회를 베푼 데서 비롯되었는데, 여기서 예수님은음식과 포도주를 거리낌 없이 잡수신 듯하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마저 이를 의아하게 여기기까지 했다(마 9:14).
세리와 죄인의 친구. - 이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기쁘게 수용했던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했던 반면, 당시 사회적 · 도덕적으로 소외되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진리에로의 초청에 기꺼이 응했던 것이다. 그 결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표적이 되기도 했다(눅 5:30).
7:35 지혜는…옳다 함을 얻느니라. - 지혜는 구약의 지혜 문학 중에서 종종 의인화되어 표현되는데(잠 1:20; 9:1), 이는 지혜가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나,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지혜의 총체이신 예수님 자신을 뜻한다.
자기의 모든 자녀. - 마태의 병행 구절에서는 '자녀' 대신 '행한 일'로 되어 있는데, 문맥 그 자체는 변함이 없다. 여기서 '자녀'는 세례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복음 잔치 초청에 응한 세리와 죄인들을 뜻한다. 이들은 세례 요한의 회개의 외침에 세례 받음으로 응답했고, 예수님의 진리되심을 정당하게 고백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14:6), 이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은 증명된다.
7:36-50 시몬의 집 도유사건
앞 단락 (29-35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비유를 통해 종교 지도자들의 교만을 풍자하며 책망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이어 본문에는 옥합의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은 한 여인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친구로 오신 인자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예수께서 한 여인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사건은 네 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세 복음서는 동일한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마 26:6-13; 막 14:3-9; 요 12:1-8) 반면에, 누가는 그와는 다른 내용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즉 세 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 직전에 유대 베다니에서 있었던 사건이지만, 본문은 그보다 훨씬 전인 갈릴리 2차 전도 기간 중에 일어난 일이다. 또 그 내용상의 전개도 다르게 서술되어 있고 잇따라 일어나는 논쟁에도 차이가 있다. 누가의 관심은 메시야에 대한 한 여인의 헌신적인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죄인에 대한 사랑과 용서에 있지만, 다른 세 복음서에는 메시야에 대한 여자의 신앙과 그의 죽음을 준비하는 측면이 강하게 부각된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영적 교만을 자랑하고 죄인 여자를 멸시하던 바리새인 시몬과 자신의 죄인됨을 뉘우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향유를 붓는 한 여인의 예수에 대한 대조적인 태도를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어떤 사람에게 임하는지를 보여 준다. 즉,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던 시몬은 아무런 예의도 행하지 않았지만 불청객이었던 이 여인은 예의 이상의 헌신의 예를 행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이 여인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죄됨을 회개하며 메시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함으로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누리게 됨을 본다(48절).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비난대로 죄인들의 친구가 되었지만 단순히 친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바꾸어 주는 구세주이셨고 이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리새인 시몬과 죄인 여자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충만할 때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여인은 값비싼 향유라할지라도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다 표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그로 하여금 헌신적인 행위를 하게 했던 것이다.
7:36 한 바리새인. - 본절에서 마지막 절까지는 죄 많은 여인의 예수께 대한 도유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이와 비슷한 사건이 4복음서에 공히 수록되어 있다(마 26:6-13; 막 14:3-9; 요 12:1-8). 이 가운데 본서의 기록을 제외한 나머지 세 복음서의 기록은 모두 동일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왜냐하면 누가를 제외한 나머지 세 복음서들은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모두 베다니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서의 도유 사건은 베다니가 아니라 가버나움에서 있었고 시기적으로도 공생애가 끝날 무렵이 아닌 갈릴리 사역 시기에 일어났다. 따라서 도유 사건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두 번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한편 본서에서 도유 사건이 일어난 곳은 시몬이라는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서였다. 그런데 바리새인이 예수를 위해 베푼 연회는 대부분 예수님을 시험코자 했던 의도에서 베풀어졌다(눅 14:1). 본절의 바리새인의 경우에는 그 의도를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의 예수님에 대한 결례를 미루어 볼 때 깊은 존경심으로 인한 연회 초청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하겠다.
앉으셨을 때. - 여기서 '앉으셨다'는 말은 유대인의 식사 태도인데, 정확하게는 비스듬히 누은 자세를 말한다. 보통 왼팔을 바닥에 대고 몸을 옆으로 세우고 발을 뻗고 있는 자세이다. 이러한 자세는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접근하여 기름을 적시기에 용이했을 것이다(38절).
7:37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 - 여기서 동네는 가버나움을 가리킨다(Bruce, Plummer, Gilmour). 한편 '죄인'이라는 용어는 '창녀'에 대한 유대인의 통속적인표현이다(Farrar). 따라서 본절의 여인은 창녀였을 확률이 매우 높다(Bengel, Meyer, Bruce, Plummer, Gilmour), 한편 이 여인이 일곱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바리새인의 집. - 바리새인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선생으로서, 죄 많은 여인의 입장에서는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신분이었다. 더구나 그의 집에 출입하기란 더욱더 힘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예수께 나아왔다는 것은 이 여인이 적지 않은 사회적 냉대와 질시, 그리고 배타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향유담은 옥합. - 막 14:3과 요 12:3절에는 '순전한 나드'라고 언급되었으나 본절과는 사건이 다르기 때문에 본절의 향유를 '순전한 나드'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값비싼 향유였을 것은 분명하다. 한편 '옥합'은 '알라바스터'(alabaster)라는 석회 성분을 띤 돌로 만든 항아리의 일종으로 둥근 모양에 목이 길며 내용물을 사용할 때는 목 부분을 깨어 사용했다.
7:38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 이는 죄 많은 여인의 눈물이 잠시 동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흘렀음을 말해 준다는 것과 당시 눈물을 눈물 병에 모아 두었던 풍습에 근거하여 눈물 병을 깨쳐 그 발을 적신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본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자기 머리털로 씻고. - 머리털을 인간 생명력의 한 상징으로 여겼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머리털에 급격한 변화를 주거나(민 65: 삿 13:5; 16:17) 지나치게 장식하는 것을 금지하였다(사 3:24; 딤전 2:9; 벧전 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이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그녀의 머리털로 발을 씻은 행위는 예수께 대한 최대의 경의와 헌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발에 입 맞추고. - '입 맞추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필레이'는 '입 맞추다'(카테필레오)의 미완료 능동태로 입맞춤이 계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실로 여인의 예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의 발로였다.
향유를 부으니. - 몸에 기름을 붓거나 바르는 행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중요한 관습으로서(룻 3:3; 삼하 12:20), 이것을 생략하는 것을 수치로까지 여겼다(신 28:40; 마 6:16-18). 또한 손님에게 그의 발을 씻도록 물을 제공한 후에 바르는 기름을 제공하는 것 역시 당시 관례에 속했다(시 23:5; 눅 7:46). 이런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여인의 이 행위는 예수님에 대한 최상의 존경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7:39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 바리새인 시몬의 예수관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즉 시몬은 예수를 선지자 정도로 생각했으나 예수께서 죄 많은 여인이 근접하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을 보고는 그를 죄인과 한통속을 가진 천박한 사람으로 여긴 것이다.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 - 랍비들의 규정에 의하면, 여인들을 1.8m 이내로는 가까이 못하게 했다. 하물며 죄지은 여인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죄인으로 알려진 여인의 신체적 접촉을 허용하셨다는 사실은 필경 바리새인의 눈에는 예수님의 영적 · 도덕적 무지 내지는 무감각을 보여 주는 지표가 되었을 것이다.
7: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바리새인 시몬은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예수께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그의 속마음까지 이미 아시고 그의 어리석음을 논박하고 계신다. 여기서 예수의 전지하심이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다.
시몬. - '들음'이라는 의미의 히브리 이름으로,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의 이름이다. 그는 제 2차 도유 사건이 있었던 집의 주인인 베다니 문둥이 시몬(마 26:6)과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을 가졌으나, 두 사람은 엄연히 구별된다.
7:41 빚 주는 사람. - 채권자를 뜻하는데, 본 비유의 중심적 개념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빚진 자. - 채무자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죄인인 인간을 뜻한다.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 -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했는데, 여기서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는 죄 많은 여인을 상징한다.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 - 예수님을 마음으로 선지자보다 못한 자로 깔보았던 바리새인을 상징한다. 그는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인 죄 많은 여인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도덕적인 우월감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7: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 오백 데나리온은 마 18:21-35에 언급된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적은 액수라 할지라도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인 액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비유의 초점은 돈의 액수가 아니라, 그 빚진 두 사람이 도저히 이것을 갚을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는 점일 것이다.
탕감. - 빚을 면제해 주는 것인데, 이는 빚 갚을 능력이 없는 두 사람이 채무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다.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결론을 직접 내리지 않으시고 질문으로써 그 대답을 유도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셨다. 이는 바리새인이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어린 아이의 이해력 정도만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7:43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 시몬은 즉각적으로 대답을 했는데, 이것은 그가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 판단이 옳다. - 예수님의 치밀함과 여유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시몬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긍정은 이후 시몬의 결례에 대해서 어떤 반발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확약인 동시에 자신의 방법과 순서에 따라서 서두르지 않는 넉넉한 마음의 표시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7: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 여기서 누가는 의사답게 당시의 정황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위치상 자기의 아래쪽(발) 뒤쪽에 있는 여인에게 먼저 시선을 주신 이후 앞에 있는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시선이 여인과 시몬에게 차례로 주시된 것은 그것 자체가 이 두 사람의 대조적인 신앙을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 이는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께 범했던 첫 번째 결례로서, 죄 많은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7:45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 이는 시몬의 두 번째 결례로서, 죄 많은 여인의 반복적인 입맞춤과 대조가 되고 있다. 사실 입맞춤은 당시 손님을 영접하는 자연스런 인사였다. 그러나 시몬은 이러한 자연스런 예까지 소홀히 한 것이다. 반면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았다(38절).
7:46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 시몬의 세 번째 결례이다. 감람유는 당시 이스라엘에서매우 흔했고 값도 비싸지 않았다. 따라서 손님의 머리에 감람유를 부어 단정케 해주는 것은 당시 주인의 의무와 같이 여겨졌다(시 23:5; 141:5; 마 6:17). 그러나 시몬은 예수께 이러한 기름도 붓지 않은 것이다. 반면 여인은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다. 하여튼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청한 장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손님에 대한 예의를 다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선지자나 혹은 그 이상 되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무례하게 대접해도 괜찮은 정도의 사람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스로 백성의 선생으로 자처하며, 교만했던 바리새인의 영적 무지의 전형을 보게 된다.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 본 구절은 36절부터 시작한 도유 사건의 결론이 되고 있다.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 사랑함이 많음이라. - 이것은 해석에 있어서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구절이다. 만약 이 구절을 사랑이 속죄의 근거가 된다고 해석해 버린다면, 이는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 뿐 아니라 앞서 언급한 비유(41,42절)와도 모순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속죄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근거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속죄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42절). 따라서 우리는 본절에서 예수께서 '사랑'을 '속죄의 근거'로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속죄의 결과'로 제시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여인이 예수를 그처럼 극진히 사랑한 것은 그녀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같이 많이 사함 받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죄 많은 여인이 이미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던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졌었고, 그 결과 속죄의 은총을 입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 - 이는 직접적으로 시몬을 가리킨다. 즉 시몬이 예수께 결례를 범하고 사랑하지 못한 것은 그의 교만으로 속죄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한 까닭인 것이다.
7:48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 여기서 '사함을 얻었느니라'에 해당하는 '아페온타이'는 완료 시제로 이는 이미 그녀가 예수님 말씀 이전에 죄 사함을 받았고 그 효과가 지금껏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굳이 하신 것은 그녀의 굴레인 죄인이라는 오명을 공개적으로 씻어주기 위한 최종적인 신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Bengel, Bruce).
7:49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 예수님의 속죄의 선언에 대한, 함께 한 무리들의 생각이다. 이들은 인간의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구약적 사고방식에 얽매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예수님의 선언은 앞서 중풍 병자를 고치실 당시와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는 신성 모독죄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실례는 예수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실 때에도 있었다(눅 5:21 주석 참조).
7:50 네 믿음이…구원하였으니. - 이와 유사한 선언은 혈루증 앓았던 여인에게도 하셨는데(눅 8:48), 이것은 믿음만이 구원의 기초가 된다는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와 일치되고 있다(롬 3:28; 4:3).
평안히 가라. - 이것은 유대인의 작별 인사법에 해당한다(출 4:18; 삿 18:6; 삼상 1:17; 20:13; 막 5:34). 원래 '평안'이라는 성경적 의미는 주권적인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서(대상 23:25; 시 147:14; 사 45:7), 개인과 공동체의 정신적 · 경제적 · 정치적 안정들까지 포함되고 있다(왕하 20:19; 대상 23:25; 시 147:14; 사 45:7). 이런 의미에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죄 많은 여인에게 사죄의 은총을 베푼 이후 '평안'을 공식적으로 빈 것은 이제부터 시작될 정결한 삶에 대한 격려인 동시에 주변 사람들의 선입관과 편견이 그녀를 괴롭게 하지 말 것에 대한 경고를 동시에 담고 있다고 하겠다. 대상 12장 자료 노트 '평화'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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