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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및 신하의 아들 치유 이적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예수께서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신성(神性)을 가지신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입증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그리스도직과 예수 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의 절대성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록된 요한복음의 먼저 예수 공생애의 여러 사건 중에서도 이상의 사실을 잘 입증하는 여러 자료를 곧 예수의 관련자들의 증언들과 예수 자신이 행한 표적들과 자기 계시를 제시하는 1:19-12:50까지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1:19-12:50은 예수의 공생애 개시 기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시어 이제 곧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인 최후의 만찬 직전까지의 사건 중 이상의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주요 기사들을 대략 연대순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전장에서는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와 더불어 세례인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성령을 통한 중생, 중생의 조건으로서의 성도의 믿음, 그리고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이어 본장은 초기 유대 사역을 마치시고 유대를 떠나 공생애의 대부분을 보내실 갈릴리로 가시던 도중에 행하신 A.D. 27년 초반경의 사마리아 지역에서의 사역과 갈릴리 지역에서의 초기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문맥의 본장은 그 내용에 따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 1-42절은 사마리아에서의 예수의 사역을 기록한 부분이다. 이를 좀 더 세분하여 살펴보면 1-26절은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대상으로 한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자기 증거를, 27-38절은 사마리아 여인의 예수 증거와 사마리아인들이 그 여인의 증거를 받고 예수께 나아오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인들로부터 천대받던 사마리아인들까지도 구원의 반열에 동참케 되는 임박한 영적 추수의 시기에 대해 교훈한 사실을, 39-42절은 예수께서 이틀 동안 사마리아에서 유하시면서 사역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 내용과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은 이 사건은 심오한 구속사적 의의를 담고 있다. 사마리아는 B.C.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된 후 많은 이방 민족들이 옮겨와 살던 곳으로서 유대인들이 이곳 사람들을 멸시하여 지나기조차 꺼려하던 곳이었다. 더욱이 사마리아인들은 대부분 포로 귀환 시대 이후 소위 중간기(B.C. 400-4년) 동안 여호와 종교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 혈통이 순수하지 못한 이유로 민족주의적 배타성이 매우 강했던 유대인들로부터 반목 질서를 당하였으며 급기야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그리심 산에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예수께서 당시의 이 같은 관례를 깨시고 사마리아 땅으로 가사 복음을 전파하시고 사마리아인들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수께서 성육신 초림하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구속사는 주로 구약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으나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구속사가 혈통과 국경의 장애를 넘어 온 열방으로 확대될 것을 예표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리라는 예언은 이미 구약에서도 누차 있어 왔던 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사 61:1,2; 렘 4:2). 본문 35-38절에 언급된 바 임박한 영적 추수시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도 결국 이와 같은 구속사적 경륜과 연관된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이스라엘에서 세계 만민에게로 확장된 것에 관해서는 롬 11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후반부 43-54절은 예수의 초기 갈릴리 사역에 대한 기록이다. 이를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43-45절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할 줄 아시고 갈릴리 지역의 다른 곳으로 가사 그곳에서 예수의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을 목격한 자들에 의해 환영 받으신 사실을, 46-54절은 이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첫 표적을 행하신 가나에서 신하의 병든 아들을 치유하시는 두 번째 표적을 행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공관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의해 배척 받으신 사실을 집중 기록하였으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참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거듭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그를 그리스도로 믿은 자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의도에서 본문에서도 예수께서 자신을 믿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으며, 또 그렇게 표적과 기사가 없으면 믿지 아니하는 인간들의 완악함을 꾸짖으신 사실(48절)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 보아야만 믿는 인간의 완악함, 심지어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인간의 패역함이 얼마나 큰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같이 패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믿게 하시고 결국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공생애 기간 동안 끊임없이 표적을 보이시며 궁극적으로는 십자가 수난과 부활이라는 최후의 표적을 보여 주사 누구든지 당신을 믿고자 하는 자에게는 확실한 믿음의 근거가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은혜에 새삼 감격해 마지 않는다. 예수의 7대 표적에 관해서는 요 2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외울 말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개역개정 요 4:24)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
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사마리아 여인의 그리스도 증거
27 〇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니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임박한 영적 추수 시기에 대한 교훈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시마리아인들의 회심
39 〇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제 2표적 신하 아들 치유 이적
43 〇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4:1-42 예수의 수가 성 여인 전도 과정
주님은 하나님의 사도로서 또는 선지자, 선생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가르치신 방법은 그 때마다 각각 달랐다. 즉 주님은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남을 강조하셨으나 본문의 수가 성 여인에게는 생명수를 말씀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전도 받는 자의 상황과 특성에 따라 구원 진리의 여러 측면 중 강조되는 내용을 달리 하시며 전도하셨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의 수가 성 여인 전도 과정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전도의 모형으로 삼을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 보자.
1.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일상생활과 관련하여 대화 유도(7절)
2. 혼자 있는 조용한 시간을 활용하여 전도(8절)
3. 전도 받는 자의 특성에 맞는 하나님의 은총 제시(10-41절)
4. 전도 바는 자의 죄에 대한 지적(15-18절)
5. 마땅히 경배 받을 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소개(21-24절)
6. 죄인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25,26절)
7. 전도 받은 자의 증거를 통한 복음의 확산(39-42절)
고고학-4:6, 야곱의 우물
본문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복음을 설파하제 된 곳이 '야곱의 우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야곱의 우물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유적지 발견
고고학자들은 그리심 산 꼭대기에서 사마리아 성전의 주춧돌을 발견해 내었고, 마을 아래쪽으로 향하는 그리심 산 산허리 밑에서 많은 계단의 흔적을 찾아내었다. 이 계단 바닥 근방에 바로 '야곱의 우물' 유적지가 있다.
2. 위치와 특징
야곱의 우물은 오늘날의 세겜(텔 발라타, Tell Balatah)과 동일한 곳으로 보이는 수가(Sychar)라 하는 사마리아 성읍 근처의 길가, 곧 사마리아 성에서 동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또한 이 우물은 예루살렘과 요단 계곡에서 뻗어 나온 길이 서로 만나는 지역 바로 북쪽에 있는 한 교차로의 낮은 지대에 있다.
현재 이 우물의 깊이는 약 32m이고, 일부가 흙더미들로 메워졌다. 또한 이 우물의 직경은 약 2.4m에 달하며 꼭대기에 올라올수록 좁아지고, 구멍이 뚫린 커다란 돌로 덮여 있다.
이 우물의 윗부분은 돌로 되어 있는데 반해, 아랫부분은 부드러운 석회석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이 우물은 저수지인 동시에 샘이었기에 오늘날까지도 깨끗하고 신선한 물을 얻을 수 있다.
3. 역사
이 우물이 이스라엘 족장시대에 야곱이 판 것이라는 증거는 성경에서 본문에만 나타나나, 이외 전승에도 이것이 야곱의 우물이라는 증거가 잘 확립되어 있다. 그 후 A.D. 340년경 이곳에 처음 교회가 세워졌고, 그 뒤 1187년에 십자군 교회가 다시 세워졌는데, 현재는 그 교회가 파괴되어 없어지고 벽과 지하실에 있는 야곱의 우물만이 남아 있다. 현재 이 우물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도표-4:1-42, 예수의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비교
본문에 기록된 예수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3:1-21에 기록된 니고데모와의 대화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니고데모는 신분 높은 유대인 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한 논쟁은 좋아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제대로 깨닫지 못한 반면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은 오히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곧장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가 전도하는 신앙의 열정을 보였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1. 때: 밤중 정오
2. 장소: 유대 사마리아의 수가 성
3. 출신: 유대인 사마리아인
4. 신분: 바리새인, 유대인의 관원 부정한 과거를 지닌 평범한 여인
5. 대화의 발단: 니고데모가 찾아옴 사마리아 여인이 우연히 우물 곁에 계신 예수를 만남
6. 대화의 주제: 중생의 방법 생수이신 그리스도, 참된 예배
7. 대화의 결과: 니고데모가 예수의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깨닫고 이웃에게 알림
말씀을 이해하지 못함
도표-4:46-54,예수의 백부장의 종 치유와 신하의 아들 치유 비교
본문에 나오는 예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은 본서에서만 언급되고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기사이다. 또한 이는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는 갈릴리에서의 두 번째 이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사건은 마 8:5-13과 눅 7:1-10에 나오는 백부장의 종 치유 기사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음 도표에서 이 두 사건을 서로 비교해 보자.
백부장의 종 치유 신하의 아들의 치유
1. 장소: 갈릴리 가버나움(눅 7:1) 갈릴리 가나(46절)
2. 신분: 로마 군대 장교(눅 7:8) 헤롯 왕의 신하(46절)
3. 병자의 상태: 중풍병으로 죽기 직전(마 8:6) 열병으로 죽기 진전(47절)
4. 치유 간청 이유: 종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눅 7:2)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49절)
5. 병 나은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때(마 8:13)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때
(52,53절)
6. 치유의 원인: 예수의 말씀을 믿는 믿음(눅 7:7) 예수의 말씀을 믿는 믿음(50절)
7. 치유 결과: 예수의 말씀의 능력 확증(눅 7:10) 온 집이 다 믿음(53절)
보감-4:23,24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의 7대 유익
1.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의해 생각이 정결케 됨(시 51:7)
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항상 간직하게 됨(시 51:12)
3.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과 의지를 복종케 됨(렘 7:23)
4.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이 풍성해지게 됨(렘 15:16)
5.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의해 양심이 일깨워짐(히 10:22)
6.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마음 문이 열리게 됨(요일 4:16)
7.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 복종케 됨(요일 5:3)
지리배경-4:46, 가나
1. 명칭
가나(Cana)는 '갈대'라는 의미로서 통칭 '갈릴리 가나'로 불리웠다. 이는 아셀 지파의 성읍인 가나(수 19:8)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과의 경계를 이루는 시내 가나(수 16:8)와 구분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2. 위치
오늘날 가나의 위치는 어원과 전승에 근거하여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다음 두 장소가 유력하다.
① '케프르 켄나'(Kefr Kenna):
나사렛 북동쪽 약 6km 지점, 가버나움과 벳새다로 통하는 디베랴 가도에 위치해 있는 작은 성읍이다. 고대와 중세의 전승 및 로마와 희랍 정교회가 지지하는 곳으로. 오늘날 일반적으로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② '케르벳 카나'(Khirbet Qana):
나사렛 북쪽 약 14km 지점에 위치한 고대의 폐허지, 많은 학자들(요세푸스, 로빈슨, 달만 등)이 이곳을 복음서의 가나로 보고 있다. 어원학상 이 지역의 아라비아 명칭 '카나 엘 옐릴'(Qana elJelil)은 갈릴리 가나와 관련이 깊다. 또한 이 지역의 '밧투프'(Battuf) 평야지대는 예로부터 갈대숲으로 유명한데, 이는 '갈대의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가나 성읍과 잘 부합된다.
3. 관련 기사
성경에서 이곳은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이곳 혼인 잔치에 참석하여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최초의 이적을 행하신 곳으로 처음 소개된다(요 2:1-11). 그리고는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가버나움에 사는 왕의 신하의 병이든 아들을 고쳐주신 곳이고,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나다나엘의 고향(요 21:2)으로서만 언급되었다.
4. 유적 및 고고학
A.D. 70년 성 전 파괴 후 엘리아십이라는 제사장 가족이 이곳에 정착한 이래, 가나는 로마 시대 동안 줄곧 엄격한 유대 사회로 존속해 왔다. 적어도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는 케르벳 카나 지역에 주민이 살았던 것 같으나 지금은 단지 고대 유적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밧투프 평원 북쪽 구릉 위에 있는 유적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발굴되지 않았으나, 저수지와 건물 유적이 있고 부활에는 바위 무덤들이 있다. 현재 이 근방의 지역에서는 헤롯 시대의 제작 양식을 따른 전 결례용 돌 항아리(요 2:6)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1963년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헤롯 시대로부터 십자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질그릇을 발굴해 냈다. 아울러 A.D. 1세기경에 사용되던 동전과 토기 조각들도 발견하였다. 이러한 발굴 작업은 케르벳 카나 지역이 복음서의 가나 지역과 통일한 곳임을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5. 영적 교훈 및 상징적 의미
왕의 궁전이 아닌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예수께서 공생애 최초의 이적을 수도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의 작은 동리 가나에서 행사하신 점은 깊은 의의를 갖는다. 이처럼 주의 섭괴는 종종 약한 것, 미련한 것, 보잘 것 없는 것을 들어 영광을 나타내신다(고전 1:27-29).
아울러 먼 곳에서 말씀으로만 거의 죽게 된 자를 살려 주시고,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가나의 기적(요 2:6-11; 4:46-54)은 부족한 것을 채우시고 모자라는 것을 충만케 하시며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면 가나의 놀라운 기적을 날마다 맛볼 수 있을 것이다(빌 4:1,7).
주요 주제-4:25, 메시야 이해
막 서론 특별 자료 참조
원어연구-4:23 신령과 진정으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프뉴마티'와 '알레데이아'이다.
먼저 '엔'은 '~안에서'(in)라는 뜻의 전치사이다. 그리고 '카이'는 '그리고'(and)라는 뜻의 단순 접속사이다. 만편 '프뉴마티'의 원형은 '프뉴마'로서 이는 바람 따위가 '불다'(마 7:75; 요 3 :8)라는 뜻의 '프네오'에서 유래하여 '영'(고전 15:45; 갈 4:6) 또는 '영혼'(마 27:57) 및 마음의 '중심'(막 2:8)이나 '귀신'(막 1:26; 눅 9:39)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나 심령 및 귀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바람의 속성에서 이 길은 의미가 파생되어진 듯하다.
본절에서는 문맥상 '신령'의 의미가 예배자의 자세와 관련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본절의 '신령으로'라는 뜻은 '귀신'이라는 의미보다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것을 뜻하는 '영으로' 또는 '마음의 중심으로'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진정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인 '알레데이아'는 그 원형이 '알레데이아'이다. 이것은 '숨기다'(막 7:24; 눅 8:47) 또는 '알지 못하다'(행 26:26)및 '잊다'(벧후 3:5,8)를 뜻하는 '란다노' 에 부정적 의미를 갖는 접두모음 '아'가 합쳐져 명사화된 단어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숨김이 없는 상태' 또는 어떤 일을 '깨달아 아는 것' 및 하나님의 뜻을 '잊지 않는 것'을 뜻한다. 개역성경에서 '알레데이아'는 일반적으로 '진리'(요 17:17; 벧전 1:22) 및 '진실함'(엡 5:9)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위에서 언급한 의미들 가운데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뜻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진정으로'의 정확한 의미는 '있는 모습 그대로 숨기지 않고' 혹은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아 알며 하나님의 뜻을 잊지 않고'라는 것이 된다.
결국 이상을 통해 '영과 진정으로'의 의미는 사람이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아 알고'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본절 전체의 뜻을 풀어 설명해 보면, 예수께서는 장차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 곧 사람이 그 마음 중심을 드리며, 또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예배드리는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이다.
4:1-26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
앞에서는 예수의 초기 유대 사역(요 2:13-3:36)을 통해 드러난 그분의 하나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되심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제 본장 1-47절에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무모한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1,2절)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올라가는 도중(3절) 사마리아 에서 행하신 사건이 소개됨으로써 초기 유대 사역과 1차 갈릴리 사역(43-54절) 사이에 발생한 삽화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요한만이 기록한 이 내용이 갖는 깊은 의미는 결코 무시될 수 없다 그 가운데서도 본문은 예수가 사마리아의 수가 성 여인과 대화를 나누심으로 저를 구원에의 길로 초대하는 장면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겨서 의도적으로 우회하던 사마리아 땅을 일부러 친히 방문하셨다(4-6절). 뿐만 아니라, 그곳의 부정한 과거를 지닌 여인에게 관심을 기울이사(7-15절)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자각케 하고(16-18절) 마침내 영적 기갈(飢渴)의 근본 해결자이신 당신을 소망하게 하셨다(19-26절).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혈통과 인종, 종교상의 이유 등으로 멸시한 사마리아의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하여서조차 돌아보신 이 사건을 통하여 그분이 결국에는 이방인들까지 모두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계시는 점에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예견할 수 있다(마 28:19,20; 막 7:24-30).
한편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의 수가 성에서 만난 여인은 앞장에 언급된 바 있는 니고데모(요 3:1-21)와 여러 모로 대조된다. 다시 말해서 니고데모는 정통 바리새인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으나, 수가 성의 여인은 비천하기 짝이 없는 사마리아인이었고 남몰래 물을 길러 다녀야 할 정도로 주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인물이었다(6,7,18절). 하지만 이와 같은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을 전혀 차별하지 않으셨으며, 똑같이 구원의 진리를 증거해 주셨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복음은 제한적이거나, 특정인의 것이 아닌 인종, 빈부, 귀천 등을 넘어선 차별 없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현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인종 분규와 문화적 갈등 그리고 경제적 격차를 해소시킬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바로 이 복음 가운데서 온 인류가 하나로 연결되는 데에 있음을 모든 사람들이 주지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 복음 전도자는 일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보다 가급적 상대방과의 접촉점을 발견해냄으로써 상대방이 쉽게 복음에 대해 열린 마음을 지니도록 유도해야 된다. 즉,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하신 방법을 살펴보면, 일상적인 대화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더 중요한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랬기에 그녀의 굳게 닫혔던 마음 문이 마치 봄 햇살에 얼음 녹듯 쉽게 녹아 열렸던 것이다(7-26절).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께서 수가 성 여인에게 일러주신 '참된 예배'에 관한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새기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곧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게 주신 불변의 진리의 말씀이며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예배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전인격을 바침으로써 행하는 것이다(20-24절). 그러므로 이 같은 사실을 망각한 채 오로지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 처소를 통해 하나님을 감격시키려고 시도하거나, 값진 예물들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훌륭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헛되이 하나님을 섬기는 어리석은 자들이요 영적 소경들이라 하겠다(사 1:11,12).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진정한 예배는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만을 갈구하는 상한 심령들의 부르짖음과 감사 찬미이다(시 51:17).
결론적으로 이상과 같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앞서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가 그러했듯이 예수가 인간의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구원자이심을 강조해 준다. 본서 저자가 공관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이 두 기사를 앞장과 본장에서 연이어 소개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1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 세례인 요한은 A.D. 26년 여름경에 출현하여 검소한 생활양식과 엄숙한 설교,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영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회개와 영적 정결의 필요를 외침으로써 영적 갈급함을 느끼고 있었던 백성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또한 그 결과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세례인 요한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막 1:5). 그러나 이러한 세례인 요한의 신선한 활동은 타성적인 종교 생활로써 주어진 기득권만을 지키려 하였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A.D. 27년 12월경 세례 요한이 투옥되자(막 6:17-20) 기쁨 가운데 젖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겐 '예수'라는 더욱 큰 골칫거리가 생겼다. 그리고 그 예수는 세례 요한보다도 훨씬 많은 인기를 갖고 있었다(요 3:22-26). 아마 예수의 인기가 이와 같이 급속도로 커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더불어 종교 부패의 온상이었던 성전을 정화한 일이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 - 본서 저자는 이때 예수의 반대자들의 대표자들로서 당시 상당한 종교적 기득권층이었던 사두개인들이나 정치적 기득권층이었던 헤롯당을 들지 않고 바리새인들을 언급했다. 이와 유사하게 본서 전체에서도 주로 바리새인들만이 잘못된 종교인들로서 언급되고 있다(L. Morris). 이러한 이유로 웨스트콧(Westcott)은 저자가 사두개인들이나 다른 유대인들에게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단지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숫적으로 많았으며 당시 민중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대표적으로 언급한 것뿐이다. 또한 본서 저작 시기였던 1세기 후반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A.D. 70년)로 인하여 성전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두개인들이 급격히 소멸하였고, 또한 주권의 완전한 상실로 헤롯당 역시 없었던 반면, 그 당시까지 바리새인은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참조).
주께서 아신지라. - 본문에는 본서의 주인공인 예수를 '주'(퀴리오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를 가리킴에 있어 마가복음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수'란 고유 명사를 쓰고, 누가복음에서는 '주'란 명칭을 사용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보통 '예수'가 사용되며 '주'는 단지 다섯 번만 나온다(1절; 요 6:23; 11:2; 20:20; 21:12). '예수'와 '주'란 호칭에 대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주'가 후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고 당시에는 '랍비'나 '선생'이란 호칭이 주로 사용되었으므로 본문에서는 '예수'가 더 적합하다고 한다(Davey, Bernard, L.Morris). 그래서 버나드(Bernard)는 여기서 '주'라고 쓴 것이 원래의 원본과는 상관없는 '해석상의 주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리한 주장이고, 일찍이 누가가 그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썼을 때와 마찬가지로 요한도 그의 복음서를 썼을 때 예수님을 '주님' 으로 파악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Robertson).
4: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 본절은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주시는 것처럼 언급된 4:1과 3:22의 설명으로 삽입된 것이기에 괄호 안에 두고 있다. 한편 본절의 기원에 대하여 혹자는 예수께서 직접 세례를 베푸시는 것은 예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또한 본절의 문형(文型)이 요한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요한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후대의 필사자들이 예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삽입했다고 주장한다(Bernard, Lindars). 그러나 후대에 추가 기록했다는 이러한 주장보다는 요한 자신이 예수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직접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세례 요한이 주는 세례를 예수의 제자들이 주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예수는 세례 요한의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라 그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Godet). 또한 예수님께서 세례를 직접 주시지 아니하신 까닭은 물세례는 준비적인 회개의 세례로서, 세례 요한이나 주님의 제자들이 할 일이고 예수 자신은 참 세례인 성령의 세례를 주실 분이시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Plummer). 여하튼 저자 요한은 세례와 관련하여 초대 교회에 유포되었던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에 뒤이어 '물 세례를 베풀었다'는 잘못된 소문을 불식(拂試)시키고자 예수님이 아닌 그의 제자들이 세례를 베푼 사실을 부각시켜 삽입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4: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신 이유는 자신을 반기지 않으며 해치고자 하는 유대인들과의 때 이른 충돌을 피하시기 위함이다. 즉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기 전에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많은 일이 있었기에 교권주의자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기 보다는 제자들을 비롯한 민중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유대 지역을 떠나신 것이다. 한편 '다시'라는 말은 본절이 1:43의 갈릴리 행과 대조해서 두 번째로 방문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4: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여러 개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은 해변으로 가는 길과 요단강 동편에 있는 베레아를 통과하는 길, 그리고 사마리아 중심부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다. 그 중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은 가장 짧은 시간에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그래서 갈릴리에서 유대로 가는 성전 순례자들이 곧잘 사마리아를 통과하곤 했다(Josephus). 그러나 사마리아에 대한 유대인의 나쁜 인식 때문에 완고한 바리새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베레아를 통과하는 먼 길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B.C.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뒤, 사마리아 지역에 남아있던 유대인과 이곳에 이주해 온 이방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이 사마리아 지역에 거주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즉 순수 혈통을 보존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혈통과 여호와 종교의 순수성을 더럽혔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멸시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은 협력하겠다고 자청했으나 유대인들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처럼 긴 역사를 지니고 이어온 유대인들과 이들 간의 반목(反目)은 1세기 초까지 계속되었으며 예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이 지역을 통과하신 것은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냉대 받는 이들을 보살피실 기회를 갖기 위해서였으며 아울러 그들에게도 구원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4: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 이르시니. - '수가'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이 '수가'와 다른 성경에서 '술에 빠진 자의 성'(사 28:1), 또는 '거짓 성'(합 2:18)이라 불리우는 '세겜'을 동일시하는 견해인데(Godet, Meyer, Zahn), 수가(Sychar)와 세겜(Shechem)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발음할 때 유사하기 때문에 저자 요한이 혼동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Albright, Brown). 그러나 본서의 저자 요한은 팔레스틴 본토인으로서 이 지역의 지명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더구나 구약에 등장하는 세겜을 다른 곳으로 혼돈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이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둘째로 타당성 있는 설명은 '수가'가 세겜에서 가까운 다른 마을이라는 것이다(Talmud, Eusebius). 그 마을은 세겜으로부터 동남쪽 2마일에 있으며 현재 아스카르(Askar)라 불리고 있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 수가는 별로 유명한 장소가 아니므로 저자 요한은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해 보충 설명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즉 이 지역은 과거 야곱이 세겜의 족장 하몰의 아들로부터 은 일백 개를 주고 구입한 세겜 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창 33:18,19) 요셉에게 이 땅이 분배되었으며(창 48:22) 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에 의해 요셉이 이곳에 매장되었던 것이다(수 24:32),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 이 우물의 기원에 대해서는 문헌적 기록이 없고, 야곱이 우물을 팠다고 하는 기사가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는다. 그러나 구전(oral tradition)에 의해 야곱의 우물이라 불리우는 것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즉 유대교, 사마리아인,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 모두 이 우물을 족장 야곱의 우물과 관련시키는 것에 일치한다. 한편 이 구절의 '우물'(페세)은 원어적으로는 사람이 판 우물보다는 자연적인 샘을 뜻한다. 그러나 곧이어 사람이 판 우물을 가리키는 '프레아르'라는 헬라어가 이 우물을 가리키는데 사용됨으로(11,12절) 본문의 야곱의 우물이란 표현을 야곱이 판 우물로 의역할 수도 있다. 한편 이 우물은 나블루스(Nablus)에서 약 1km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이물질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뚜껑이 덮혀져 있었고 여행자들이 쉴 수 있는 자리가 그 옆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Morris).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 오랜 시간을 여행함으로 인하여 먼지투성이며 피로에 지치고 갈증을 느끼시는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강조하는 본서이지만(요 20:31)같이 예수의 인성을 보여주는 구절 또한 적절히 기록하고 있다(Kasemann). 이는 본서 기록 당시 범람했던 가현설(假顯說), 즉 예수가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을 부정하기 위한 목적 또한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제 육 시쯤 되었더라. - 본서의 저자 요한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정확한 시간을 제시함으로 독자들에게 현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육시'가 최대의 시간 법으로 몇 시를 가리키는가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오늘날과 같이 자정을 기점으로 정오까지를 12시간으로 나누고 다시 정오부터 자정까지를 12시간으로 계산하는 로마식 시간 계산법에 따라 '제 육시'를 오후 6시로 보는 주장이다(Townson. Mdellan). 둘째는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를 12시간으로 나누어 계산하는 유대인의 계산법에 의해 육시는 정오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다(Meyer, Godet, Bernard, Lindars, Morris, Barrett).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다섯 남편을 가진 사마리아 여인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저녁 시간(창 24:11)을 피했을 것이며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은 가운데 한가하게 진행되었고 대화가 끝난 후에도 이어지는 사건이 있었다는 점에서 여기서의 6시는 정오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한 1세기 말쯤에는 로마식 시간 구분이 보다 보편적으로 시행되었고 또한 본서의 독자를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 세계의 사람들로 생각했으므로 전자의 입장에 따라 오후 6시경에 이 일이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듯하다(요 19:14).
4: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 길러 나왔으매. - 당시 혈통적·종교적 혼합 지역이었던 사마리아 자체가 부정한 지역이었을 뿐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들은 남자들보다 더 부정한 자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까지도 부정하게 만드는 자료 간주되었다(Jeremias). 더구나 이 여인은 그러한 자들 중에도 순결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하여 더 부정한 여인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18절). 정통 유대인들은 이러한 부정한 자와의 접촉이 자신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화하는 것을 피했다. 그러나 예수서는 그 여인과 만나 대화함으로 부정한 것과는 접촉을 하지 않는 유대인의 전통을 부정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 이것은 아주 자연스런 요구였다. 즉 예수께서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그 여인에게 접근하는 계기를 마련하신 것이다. 물론 당시 예수께서는 실제로 매우 지쳐 있었고 목말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물을 얻음'에 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그 여자를 회개시키고 생수의 근원을 알려주기 위함이다(13,14절).
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 본절은 전절에서 예수께서 왜 직접 여인에게 물을 청해야 하였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제자들이 예수께서 쉬시는 동안 음식을 구하려고 동네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서의 저자 요한만큼은 예수와 함께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사마리아 여자나 예수님으로부터 듣고 기록된 것이라기보다 친히 그 사실을 목격한 자의 기록 같기 때문이다(Westcott). 한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더불어 음식을 먹거나 그들에게서 음식을 제공받는 것조차 부정한 것으로 여겨 피했다. 그러나 예수와 예수의 제자들은 이러한 의식 법을 극복함으로써 보다 넓은 지역에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4:9 사마리아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 여인은 예수께서 유대인이란 것을 바로 알았으며, 평소의 유대인들의 태도와는 너무나 다르게 도움을 요청하자 조금은 빈정거리는 어투로 대꾸하고 있다(Meulton).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멸시하였고 더구나 당시 사회 풍토에서는 엄격한 유대인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 아내와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할 정도로 여자에 대한 경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도움 요청은 너무나 의외적이었던 것이다. 한편 그 여자가 예수를 금방 유대인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은 언어와 복장에 있어 사마리아인과 다소 차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도 이 지역 사람들이 히브리어 자음 '쉬'와 '스'자의 발음을 명백히 하지 못한 적이 있다(삿 12:6).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 물을 달라는 요청이 부자연스러운 까닭을 밝힌다. 한편 여기서 '상종하다'로 번역된 동사 '슁크라오마이'는 본래 '그릇을 함께 사용하다'란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이때 예수께서는 그녀의 물동이에서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이 된다. 그러나 보다 이 단어를 포괄적으로 해석하면 상호 간에 만나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 '하나님의 선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수'(Bengel, Bernard, Godet), ② 3:16절을 참고로 해 볼 때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 주셨던 독생자, 즉 '그리스도 자신'(Calvin, Swete), 37:39에 언급되어 있는 믿는 자에게 주리라고 약속된 '성령'(Augustine) 등이 그것이다. 또한 '선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레안'은 은혜를 베풀기 위해 자의로 주는 선물을 뜻한다. 그러나 신약 가운데에서는 이 단어가 주로 성령의 은사(행 2:38; 8:20; 10:45), 속죄의 은사(롬 5:15; 고후 9:15), 각종의 은사(엡 3:7; 4:7) 등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물도 성령이나 속죄의 은총을 베푸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맥을 살펴볼 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수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가 생수를 그에게 주었으리라. - 그리스도께서 주시겠다는 '생수'(휘도르 존)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 ① 세례(Justin, Martyr), ② 신앙(Lucke), ③ 구원(Tholuck) 등과 본절에서의 '생수'에 특히 관계가 가깝다고 여겨지는 ④ 그리스도 자신(Meyer, Olshausen), ⑤ 영생((Westcott, Godet), ⑥ 성령(Calvin, Luthardt, Bernard, Morris) 등이 있다. 그러나 이는 영생하도록 솟아난다는 점과 이를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는 점(14절) 및 7:37-39과 대조해 볼 때 성령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옳다.
4: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 헬라어 '퀴리에'는 주로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형태(아도나이)로 성부 하나님(창 18:30),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고전 4:5)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러한 신성을 지닌 자에 대한 호칭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존칭(요 12:21)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능하심에 의존하기 보다는 아직도 자기 자신의 제한된 생각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볼 수 있다. 한편 '물 길을 그릇'(안틀레마)은 입구를 세 개의 막대기로 벌려 놓은 염소 가죽으로 만든 두레박으로(Vincent), 항상 우물곁에 밧줄이 묶인 채 놓여 있었다(A. T. Robetson).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 길을 그릇이 없다는 것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사마리아인의 그릇을 사용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생수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물'을 의미한다. 즉 3장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사실들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니고데모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 야곱 스스로는 물론 야곱에게 속한 모든 가솔과 짐승까지 이 물을 먹었다는 것은 다른 우물을 팔 필요가 없을 만큼 이 우물의 수질이 좋았으며 또한 양이 풍부했다는 의미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 말을 한 것은 예수가 주겠다는 생수가 이 물만큼 좋을 수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 이 여자는 성적인 정숙함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조상 야곱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선민의 조상인 야곱보다 더 큰 자는 메시야 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25절). 이런 의미에서 그 여자는 그리스도를 믿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란 여인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적으로 대답치 않으셨다(Plummer). 그러나 결과적으로 더 분명한 대답을 하고 계신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물'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당시 예수와 그 여인이 있었던 야곱의 우물에서 나오는 자연수를 의미하며, 둘째는 더 나아가서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는 재물, 명예, 지식, 권력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의 종교 경전이었던 모세 오경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먹는'(피논)은 현재 능동태 분사로서, 계속 진행되는 행위를 나타낸다. 즉 우물물이나 세상적인 욕망들은 순간적인 갈증 해소나 충족감은 주지만 계속 채워져도 다시 갈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전해준다.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 여기서 '먹는'(피에)은 부정 과거형이다. 따라서 13절에서 '먹는'은 계속적인 섭취를 의미하는 반면 여기서는 단일회적인 섭취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인간에게서 기원된 것과 신적인 기원을 지닌 것은 그 결과에 있어서 뿐 아니라 과정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점을 지닌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 야곱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은 순간적인 만족만을 준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재물, 명예, 권력, 지식 등도 영적인 욕구에 대한 갈증을 만족케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주시는 물은 신자에게 영적 충족감을 지속적으로 주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를 만나고도 영적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물에 비유된 성령 때문이 아니고 이를 받아들이는 편에 무슨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Bengel).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본절은 물이 솟아나는 '목적'을 밝히고 있다(Godet). 즉 샘물은 계속 솟아나서 결국은 영생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영생은 영원히 계속되는 삶이라는 양적인 측면보다는 한 걸음 나아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질적인 풍성함이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4: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비로소 여인은 예수께서 아주 특별한 '물'을 말씀하고 계심을 깨달았다. 그러나 아직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물'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했으며 요 3:4에서의 니고데모처럼 단지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문자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아직 육체적 욕망과 일상적 요구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이러한 자신의 목마름과 수고를 덜어줄 물을 요구하는 것이다.
4: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 일견(一見) 엉뚱해 보이기도 하고 주제를 바꿔버리는 듯한 이러한 요구는 이 여인에게 참 생수를 주시려고 하는 예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그의 예언적 통찰력을 입증함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그를 신뢰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 것이다(Meyer). 즉 예수의 영적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당신이 사람의 생각과 그 속마음을 다 알고 계심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녀의 조상인 야곱보다 위대함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또 한 가지 기막힌 조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이 요구가 예수 자신의 메시야됨을 알려 주는 것일 뿐 아니라 예수께서 의도하신 주제에 접근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죄책감, 죄의식을 자극시킴으로써 영혼의 갈증을 일깨우려 하신 것이다. 그녀의 남편을 말하는 것이 이 여인에게 그녀의 불륜한 생활을 상기시키는 최선의 수단인 것이다. 이처럼 주께서는 그 여자의 영적갈증을 해결하시기 위해 본격적으로 그녀의 마음 깊은 곳으로 향하고 계신다.
4: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 11,12,15절에서 보이던 여인의 장황하던 대답이 여기서는 단 세 마디로 줄었다(우크 에코 안드라). 이는 예수의 권위 있는 모습을 어느 정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간략한 대답을 통해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즉 여인의 대답은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처녀이거나 과부로 생각케 하여 자신의 부끄러운 생활을 은근히 감추는 의도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 그녀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거나 가면을 벗어던질 것을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4: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 예수께서는 처음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와 현재 생활을 공개하심으로 신적 통찰력을 보이고 계신다. 여기서 '남편'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르'는 '남편'과 더불어 '남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헬라어를 통해서는 그녀가 다섯 번 결혼을 하여 다섯 남편을 가졌는지 아니면 다만 다섯 남자와 살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본문에서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란 표현을 통해 적어도 현재의 남편만은 분명히 합법적인 결혼 관계로 맺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이 여인의 생은 기구(崎)하였고 성적 방종으로 인해 범한 죄악 또한 실로 컸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다섯 남편'에 대해서 상징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초대 교회 시대 헬라 교부였던 오리겐(Origen)은 이를 사마리아인들이 구약 중 정경으로 인정하는 부분인 모세 오경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다(Bernard). 또한 '남편 다섯'을 사마리아에 있던 이방인이 앗시리아의 다섯 도시에서 섬기던 우상(Cuthah, Babylon, Ava, Hamoth, Sepharv-aim)을 말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Josephus). 분명 그 여자는 다섯 남자와 살았으므로 이러한 해석을 취할 수는 없으나 이런 우상적 남편을 떠나지 않고는 참 남편인 그리스도를 맞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여인은 과거 자신의 부정한 사생활에 대해 예수께서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움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15절에 이어 이 여인은 예수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즉 그 여자는 예수를 처음에는 한 사람의 유대인 나그네로 알았다가, 그 다음에는 랍비로 알았으며, 이제는 선지자로 깨닫게 된 것이다. 한편 본절의 '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오로'는 한번 보아서 즉시 아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깨달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 여자는 자신의 앞에 있는 유대인 남자가 메시야로서 세상에 오신 '그 선지자'(요 6:14) 인 것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 '우리 조상들'은 남북 왕국 분열 이후로(B.C. 930년) 예루살렘 성전 예배에 불편을 겪었던 북왕국 사람들의 후예인 사마리아인들을 가리키고 '당신들'은 유대인을 가리킨다. 한편 혹자는 여인에게 고통스런 주제인 '남편' 이야기에서 갑자기 '예배'의 문제로 전환한 것은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De Wette). 그러나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그 여인이 예수를 선지자라고 인정하였으니 예배 문제를 꺼냈고, 상대가 유대인이니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해묵은 문제를 논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예배 처소에 대한 갈등은 남북 왕국의 분리에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특별히 바벨론 1차 포로 귀환 이후에 스룹바벨이 무너진 성전을 재건할 때 참여 요청을 한 사마리아인의 요구가 거부된후(스 4:1-6; 느 4:1,2) 사마리아인이 예배 처소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리심 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건축함으로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즉 그들은 성경을 곡해하여(창 22: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 산과 동일한 곳으로 보며, 신 28장에서는 축복이 선포되었으며, 아브라함(창 12:7)과 야곱(창 33:20)도 단을 쌓았던 곳으로 추정하였던 그리심 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세웠다. 그때가 약 B.C. 322년인데(Josephus) 그 이후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심 산의 성전은 약 2백 년 동안 같이 존속하며 심한 갈등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이 성전은 B.C. 129년 하스모니안 왕조의 힐카누스(Hyrcanus)에 의하여 파괴됨으로써 외형적인 모습은 사라졌다(Josephus). 그러나 '축복의 산'으로 여겨졌던 '그리심산'은 사마리아인들을 위한 기도의 장소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예루살렘 성전과 이곳의 위상 문제에 대해 고민해 온 여인은 '선지자'로 여겼던 예수에게 그 해결책을 요청한 것이다.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 사마리아인의 모세 오경의 기록과는 다르게 실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모리아 산이었다(창 22:2). 그리고 유대인들은 신 12:5의 말씀에 입각하여 예루살렘을 하나님께 예배할 유일한 중앙 성전을 세울 곳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유대인에게는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 외에 다른 성소를 갖는 것은 말씀의 위배일 뿐 아니라 여호와 종교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이었으므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의 그리심 산을 중심한 종교 행위를 혐오했던 것이다.
4: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이 명령은 그가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라 신적 권위를 지닌 메시야이심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가 장소와 의식의 제한을 초월할 때가 온다는 놀라운 진리를 선포하고 계신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깊이 내재되어 있던 장소주의(Localism)와 더불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적의도 해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시므로 예배의 대상에 대한 참다운 본질이 충분히 알려지면 모든 장소가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말씀은 구약 성경에도 이미 언급된 것이었으나(습 2:11; 말 1:11), 본절에서는 미래의 일로 언급하므로 이것 역시 메시야의 사역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 예배의 대상을 강조하셨던 예수께서 이제 예배의 대상의 정체(正體)에 대해 말씀하신다. 볼트만(Bultman)은 '너희'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을 가리키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을 존중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너희'를 사마리아인들로, '우리'는 예수와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본다(Godet, Bernard, Lenski, Meyer, Morris). 사마리아인들은 예언서, 성문서, 역사서 등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고 모세 오경만을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보다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즉 그들은 '예배할 대상은 알지만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Westcott)고 볼 수 있다. 사실 그들은 '계시'(啓示)에 의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제한함으로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선택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충만한 계시를 받았다(시 147:19; 롬 9:35). 본문은 이처럼 유대인들이 성경을 통해 비교적 완전한 계시를 소유했음을 밝힘으로 그들이 '아는 것을 예배'하는 자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 여기서 '구원'(헤 소테리아)은 관사를 사용함으로써, 선택된 백성들이 오랫동안 희망하던 메시야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눅 1:69,71,77; 행 13:26,47). 이 구원은 모든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올 것이지만, 특별히 유대인에게서 나올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구약의 초반부부터 예언된 것이다(창 19:10).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 본절은 '때'에 강조점이 있다. 즉 과거의 예배는 성전을 중심으로 드려지는 것이었으나 '이때'는 보다 새로운 다른 방법의 예배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처럼 때를 강조하는 것은 성육신하심으로 구속사의 획기적 분기점이 되신 예수 자신이 근본적 변화가 주어지는 이 '때'의 주체이심을 밝히기 위함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 유대인의 예배는 형식적이며 신령한 것이 아니었고, 사마리아의 예배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서 벗어났으므로 진정이 아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가장 근접해있던 이들 조차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처지에 있었으나 성육신(成肉身)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인류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비로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Westcott). 한편 '신령'(프뉴마티)은 ‘성령'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나 여기서는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간의 물질적 요소인 육체와 구분되는, 영(靈)을 가리킨다(Godet, Meyer, Bernard, Morris). 또한 '진정'(알레데이아)도 '성실'이나 '정직'으로도 번역되나 여기서는 단순히 인간의 미덕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명백하고 뚜렷한 지식을 말한다. 결국 사마리아 여인이 제기했던 바와 같이 예배는 '어디에서'가 아니라 '무엇으로'(영으로) 또는 '어떻게'(계시에 따라)드리느냐가 문제이다. 즉 예배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느냐에 따라 참과 거짓으로 구별된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찾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제테오'에는 '원한다' 또는 '요구한다'의 뜻도 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이런 예배를 스스로 행한 사람들이 있다거나, 아버지께서 그들을 찾고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그와 같은 예배자가 될 것을 열망(熱望)하신다는 뜻이다.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 원어에서는 '프뉴마 호데오스'로 나와 있는 바 주어인 하나님(데오스) 앞에 정관사(호)가 선행되어 있으며 보어(語)인 '영'(프뉴마)이 오히려 맨 앞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문장 배열이다. 특히 '영' 앞에 관사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많은 영들 가운데 하나의 영이심이 아니라 '영' 자체이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 1:5), 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라는 하나님의 존재를 규정하는 다른 문장에서도 보인다. 한편 본절의 언급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獨存) 영으로서 형체가 없으시나(無形) 완전한 인격적 실존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나(왕상 8:27; 사 31:3) 사마리아인에게나 이미 알려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런 존재이신 하나님께 형식적으로만 예배드리면 될 줄로 잘못 생각하였다.
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방법에 대한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메시야를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이제 여인의 생각은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기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은 신 18:15에 의거해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가 와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시몬이라는 마술사는 사마리아에서 자칭 '큰 자'라 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행 8:9). 또한 빌라도는 사마리아에서 자신을 메시야로 선포한 한 열광자가 일으킨 소요를 진압한 적이 있었다(Josephus). 물론 사마리아인들의 메시야관은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 오신다는 유대인의 그것처럼 명백치는 않았으나,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 하나님께 대한 진리를 선포하여 참 신앙을 가지게 하며 참 예배를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마리아인은 이러한 메시야 사역 수행하실 분을 '다시 오실 분' 혹은 '회복시키시는 분'이라는 뜻을 가진 '타헤브'(Taheb)라고 부르면서 대망하였다. 한편 본절에서 메시야라는 히브리어와 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헬라어 그리스도란 말을 병행시킨 것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방인이 본서의 일차적인 독자란 사실을 보여 준다(Westcott, Godet, Vincent).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 드디어 예수께서는 분명하게 자기가 메시야되심을 직접 계시(啓示)하신다. 예수께서는 이적만을 추구하는 감각적인 갈릴리 사람들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에 대해 사사건건 흠을 잡는 서기관들에게 나타내지 않고 자기 자신에 관한 진리를 부정한 땅에 사는 부정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진정 메시야를 대망하는 예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사실과 더불어 자에게 저자 요한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이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첫째는, 공관복음에서는 공생애 초기에는 은폐되었던 예수의 메시야되심이(마 8:4; 12:15,16; 16:20) 본서에서는 처음부터 공개됨으로 예수의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나는…이다'의 뜻인 헬라어 '에고 에이미'( )가 공관복음서 전체에서 34회 나와 있는 반면 본서에는 177회나 나와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은 예수가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했던 양식과 유사하다(출 3:14).
4:27-42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마리아 여인
본문은 앞 단락(1-26절)에서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이 이제 동네사람들에게 달려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메시야를 발견한 여인은 벅차오르는 감격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즉시 마을로 달려갔고 힘차게 복음을 전했다(27-29절). 그 결과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30-39절), 또한 그들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께서 이틀 동안 수가 성에 머물면서 친히 복음을 증거해 주심으로써 더욱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40-42절). 이러한 사마리아인들의 태도는 예수로 하여금 그곳을 떠나 갈릴리로 향하게 만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와 배척(1-3절)과는 대조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는 사도 바울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이처럼 본문은 예수의 복음이 유대와 갈릴리뿐 아니라 소외된 땅이었던 사마리아에도 전파됨으로써 복음이 전 세계로 확장될 것을 예시하고 있다.
한편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떠난 사이에, 양식을 구하러 동네에 들어갔던 제자들(8절)이 돌아오자, 예수님께서는 잠시 그들에게 '참된 양식'에 대해 교훈하셨다(31-38절).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양식'이란 결코 먹고 마시는 육신의 양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림으로써 비롯되는 영적인 양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잃었던 영혼을 되찾는 구원 사역(34절)을 의미한다(요 6:39,40).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버림받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것이 육신을 위한 음식을 구하는 일보다 우선적으로 귀하고 또한 더 큰 즐거움임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교훈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마귀로부터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을 당하셨을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대답하신 것과 일맥상통한다(마 4:1-4).
따라서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자는 반드시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전도를 받아 초보적인 신앙을 갖게 된 사람은 자신이 직접 주님의 말씀을 더 자세히 배움으로써 보다 성숙한 신앙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② 우리는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애쓰는 것도 물론 중요하나 그보다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외의 모든 것을 친히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3). 바로 그것이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성육신(成肉身)하사 이 땅에 오신 목적이자 또한 당신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부여하는 사명이다.
4:27 이 때에.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끝나고 새로운 장면이 펼쳐지는 연결 부위에 '이 때에'(에피 투토)라는 표현을 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전도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전도의 실례를 공부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시점에 등장한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방 여인과 대화하는 것을 보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랍비가 여자들과 공적으로 대화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랍비의 계율에는 '길거리에서 여자와 얘기해서는 안 된다. 설령 그 여자가 자기의 아내라고 해도 안된다'고 되어 있다(Lightfoot).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권위주의적이며 여성 차별적인 랍비의 전통에 규제 받으실 분이 아니며 모든 자에게 신적 권위를 베푸실 분이심을 제자들은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 여인이 물동이를 우물가에 그대로 버려두고 달려간 사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예수께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려고 물 항아리를 두고 갔다는 해석이며 둘째는 여인이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너무 놀라와 그것을 전하는데 몰두하여 물동이를 가져가는 것조차 순간적으로 잊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 중 두 번째의 해석이 당시의 상황을 보다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당시 사마리아 여인은 새로운 가르침에 열중하여 있었고 자신이 만났던 사람이 메시야란 사실에 너무나 놀랐기 때문에, 우물을 찾아왔던 그녀의 본래의 목적을 잊었던 것이다.
4: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 예수께서는 단지 사마리아 여인의 부정한 행실만을 지적했을 따름인데(18절), 그녀는 자신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이미 알고 계신 것을 보고는 예수께서 자신의 행한 '모든 일'을 말했다는 보다 과장된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당시 그 여자가 받은 놀라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과거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 말했던 '와 보라'(요 1:46)란 초청의 말을 동일하게 사용하여 사람들을 예수에게 이끌어 오고 있다. 이처럼 와서 그 놀라우신 분을 직접 확인해 보라는 이 말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메시야이신 예수를 자세히 소개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겸양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 '메티 후토스 에스틴 호 크리스토스'는 문법적으로는 가정형이나, 긍정적 회답을 기대한 가정형이다. 즉 사마리아 여인은 이미 마음 속에 예수께서 과연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였으나 매우 지혜롭게 백성들이 스스로 대답에 도달할 수 있게끔 질문하고 있다. 그녀는 평판이 좋지 않은 자신의 고백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직접적인 반대와 유대인에 대한 감정적 거리감을 피하기 위해 자기가 확신하는 바를 간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것이다(Robertson).
4: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원문을 통해 보면 '나와'(엑셀돈)는 '엑세르코마이'의 제 2부정 과거로서, 여인의 말을 듣고 즉시 몰려나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오더라'(에르콘토)는 미완료로서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오고 있음을 잘 드러낸다(Robertson). 이처럼 이 두 동사는 많은 사람이 예수께 나와 왔으며 또한 나아오고 있음을 보여준다(Morris). 본절은 특히 표적이나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만 의하여 일어난 결과를 보여 주기에 더욱 소중하다.
4: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탁쉬'(pera)는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나타내는 말로서 여인이 떠나고 여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오기까지의 시간적 간격을 말한다.
랍비여 잡수소서. - 제자들은 '나의 위대한 자'란 의미가 있는 '랍비'란 칭호를 사용하여 예수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 이는 제자들이나 당시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초기 호칭이었을 듯하다(요 1:18; 3:2).
4: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 여기서 양식은 앞절에서 제자들이 권한 육체를 위한 음식이 아니라 영을 살찌우는 영적 양식이다. 예수께서는 육적 양식에 집착해 있는 제자들에게 영적 양식의 중요성을 소개하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시는 것이다.
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 먹을 양식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상호 간에 부정의 부사 '메'를 사용한 문장으로써 부정적 의미가 담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즉 “우리가 없는 동안에 도대체 '누가 먹을 것을 선생님께 갖다 드렸는가?' 유대인을 적대시하는 이런 사마리아에서…”라는 아주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보건대 제자들은 아직도 육신의 일에 골몰하여 영적인 일을 생각할 여유와 통찰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食慾)마저도 소멸시키는 나의 가장 강렬한 욕망은…이것이니라'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예수의 사역의 의미 뿐 아니라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즉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예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요 행동의 동기이다. 이처럼 인간을 구원하려는 성부의 뜻이 그리스도의 생애의 최고 목표이며 그의 양식으로 표현될 수 있으므로(마 26:10; 요 5:39; 6:38) 방금 성취된 사마리아 여자의 구원 역시 주님의 양식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이루는'이란 말에 사용된 '텔레이오소'는 '온전히 이루다'라는 뜻의 동사로 사도 요한과 히브리서의 특징적 용어이다(요 5:36; 17:4; 19:28; 히 2:10; 5:9; 요일 2:5; 4:12). 또한 이 단어는 예수께서 당신의 생을 마치면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다 이루었다'(요 19:28,30)는 문구에서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예수에게 있어서 영구하고 숭고한 행위요, 지속적인 목적이며 또한 이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4:35 너희에게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첫째는 본문에서 예수님은 씨뿌리는 시기로부터 추수기까지는 넉 달이 걸린다는 사마리아 지방의 속담을 언급하신 것이라는 의견이다(Lightfoot, Godet). 그러나 그러한 속담을 다른 자료에서는 찾을 수 없고, 씨뿌리는 것과 추수하는 것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6개월의 기간이 소요되었으므로 이러한 해석은 적합치 않다. 둘째는 당시 예수께서 말씀하신 때로부터 실제로 추수하기까지가 넉 달이 걸린다는 설명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마리아 지역의 추수 시기는 태양력으로 4월경이므로 본절의 시점은 12월 중순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계산이 옳다면 본서에서 언급되는 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첫 유월절 때(요 2:23)부터 유대를 떠나신 이 시점까지(요 4:3), 예수께서는 약 8개월간 예루살렘에 계신 것이 된다. 두 번째 견해가 문맥으로 보아 보다 타당성이 있으며, 예수께서 사마리아의 들판을 보시며 실제적인 추수의 때는 4개월이나 남아 있지만 영적인 추수의 시기는 임박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보리 파종을 일반적으로 10월 중순에 한다. 그러므로 본 사건이 있었던 12월 경에는 온 들에 보리가 푸르러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밭이 희어진 것으로 말씀하시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본절의 밭이 보리를 심은 밭이 아니라, 구원 받아야 할 무리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예수는 메시야이신 자신으로 인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증거하신 것이다.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 일반적인 경우에 삯은 일이 끝났을 때에 받게 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아직 추수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이미 삯을 받았다고 묘사하는데 이는 추수하는 일이 너무나 급함을 알려주려는 목적에서이다. 한편 '거두는 자의 삯' 즉 영혼 구원을 위해 사역하는 자들의 삯이 이미 지불되었다는 것은 미래에 있을 궁극적인 상급과는 별개로 이 땅에서 이미 주님의 일에 동참하여 영생에 이르는 열매, 즉 구원 받은 사람을 모으는 일에 큰 기쁨을 누린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주의 일은 내세의 상급과 더불어 현세의 큰 기쁨을 준다.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 예수로부터 부름 받은 영적 일꾼이 구체적으로 해야할 일이 묘사되어 있다. 즉 이들은 썩어 없어질 육적인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히 있을 영혼을 위해 사역하는 것이므로 더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 하게 하려 함이니라. - 본절의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상호 다른 견해가 있다. 먼저 뿌리는 자를 구약의 선지자로, 거두는 자를 구원의 완성을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의 초점이었던 그리스도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Westcott)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 또한 뿌리는 자를 예수로 보아 그가 구약이란 밭에 복음을 뿌리신 것을 제자들, 또는 모든 주의 종들이 거두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Plummer). 마 13장에서도 예수께서는 자신을 씨뿌리는 자로, 그리고 제자들을 거두는 자로 비유하셨다. 따라서 후자가 보다 타당한 견해일 것 같다.
4: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 본절은 당시에 떠돌던 속담이나 실생활 가운데 발생하는 여러 사실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신이 직접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 추수할 수도 있는 반면(신 6:11; 수 24:13), 반대로 씨 뿌리는 자가 추수의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욥 31:8; 미 6:15). 변화무상(變化無常)한 인간사에서 이러한 일은 한편에겐 기쁨을, 또 다른 편에게는 슬픔을 주는 수도 있으나 영적 세계에 있어서는 이 양자가 모두 기쁨에 참여한다. 즉 거두는 기쁨을 누려야 하실 분은 주님이지만(마25:26), 예수님은 추수를 위임받아 이 일을 성실하게 마무리할 제자들과 더불어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누신다.
4:38 네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 여기서 '노력한 것'은 추수의 대상이 되는 '열매'를 말하며, 이 노력의 주체인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마음의 상태를 만들므로 영적 추수를 준비한 자들을 말한다. 복음의 전파와 이로 인한 구원의 성과는 이와 같이 많은 선배들의 노력의 터전 위에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자는 눈 앞의 많은 열매로 인해 교만하지 말고 앞서 노력한 자들의 공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그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일차적으로 문맥에 가장 일치하는 것은 예수 자신과 주께서 대화를 나누심으로 메시야 되심을 발견하여 이를 동네 사람들에게 전한 사마리아 여자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는 견해이다. 즉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자기 앞으로 몰려온 많은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 일하셨으므로 제자들도 그 노력에 참여하라는 촉구로 본문을해석하는 것이다(Hendriksen, Bernard). 그러나 이 견해는 예수의 비유를 당시 특수한 상황들만 관련시켜 너무 협소한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한편 혹자는 세례 요한과 그의 추종자들이라고 한다(Robinson). 그러나 이 견해는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하고 준비한 많은 구약의 인물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여 구약적 배경을 너무 무시하는 견해로 보여진다. 따라서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은 예수와 더불어 세례 요한과 구약의 선지자 모두가 신약의 교회를 준비하는 자였고 제자들과 그 이후에 등장할 복음의 사역자들은 영적 추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견해이다(Keil).
4: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 사마리아 여인의 증거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도를 전했으며 그러한 전도는 효과가 컸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게 거부당하신 주님께서(1절) 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던 사마리아인에게서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한편 여인의 증거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께 나와서 그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는 동기를 제공해 준 것이다(42절). 이것은 전도자의 역할을 잘 보여 주는데, 전도자는 사람들을 예수 앞에 이끌어 오는 것이 임무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예수 자신이다.
4: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예수께로 찾아와 그의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영적 친교와 생명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여 예수께 더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였으며 예수께서는 이틀을 더 머무셨다. 이것은 당시 만연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노골적이었던 상호 배타적인 감정(9절)을 생각할 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이러한 사마리아인들의 예수께 대한 대접과 유대인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예수에 대한 적의적 태도를 비교해 볼 때 큰 차이가 있으며 이는 후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게 된 하나의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들은 예수와의 이러한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더욱 성숙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4: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 이들이 믿게 된 이유가 다른 경우와는 달리 '말씀을 인하여' 라고 밝힌다. 이처럼 표적에 의한 신앙이 아니라 말씀으로 인한 신앙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감정이나 이해타산에 의한 신앙이 아니라 인격적 신앙임을 보여 준다(갈 2:20). 한편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된 자가 많았다는 이 일은 눅 9장에 기록된 사건과는 정면으로 대조된다. 눅 9장에서는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가는 예수를 사마리아인들이 배척하였던 별개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요 9:51-56). 이로 보아 믿음은 혈통이나 다른 외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 결단에 의해 되어짐을 알 수 있다.
4: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 본절에서 '말'은 복 관계 되어 흔히 사용되는 '로고스'( )가 아니라 '단순한 말소리'(마 26:73)나 '동물들의 분명치 않은 소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랄리안'이다. 그래서 혹자는 '네 말'을 다음에 언급되는 '예수의 말'과 구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Meyer). 그러나 저자 요한은 이 용어를 예수의 말씀에도 사용한 적이 있고(요 8:43), 39절에서는 여인의 증거가 '로고스'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는 적합한 설명이 아니다. 본문은 단지 사마리아인들이 여인의 말에 따라 예수께 왔으나, 믿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들었기 때문임을 나타낸다. 이는 한 가지 원리를 전해주는데, 신앙을 완전케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의 직접적 접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또한 복음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열매 맺는 믿음의 선결 조건이다(골 1:6). 이런 의미에서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구원을 위한 훌륭한 시발점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의 구주.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 용어를 요일 4:14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이 용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적용되었고(삿 3:9), 외경에는 메시야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며(I Esd. 13:26),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눅 1:47), 혹은 그리스도에게(눅 2:11)이 용어가 적용되었다. 그리고 헬라 세계에서는 황제가 신적인 지도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구주'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Deissmann).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를 보다 분명하게 구약의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지니신 메시야로서 온 세상을 구원할 자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틀 동안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유하면서 명백히 말씀하신 것은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26절)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과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에게도 역시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며 사마리아인들은 그 사실을 믿었던 것이다.
4:43-54 신하 아들을 치유한 예수의 두 번째 표적
앞 단락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 지방을 떠나 갈릴리지방으로 가시던 예수님께서는 도중에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친히 들어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곳에 이틀 동안 머무셨다(27-42절). 그에 이은 본문은 이제 갈릴리에 이른 예수께서 제 1차 갈릴리 사역을 행하신데 대한 언급이다.
본문은 먼저 예수께서 사마리아에서 고향 나사렛으로 가지 않고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오셨음과 그 이유를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43-45절). 그 이유는 고향 사람들조차도 예수를 오해하고 배척하였다는 점이다(44절; 마 13:56; 눅 4:24). 이는 다음 장에서부터 언급되는 '유대인들의 예수 배척'을 미리 선보여 주는 예고편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본문은 본서에 기록된 7대 표적 가운데서 예수께서 첫 번째 표적(요 2:1-11) 을 행하셨던 곳인 갈릴리가나에서 또다시 두 번째 표적을 행하셨음을 보여준다(46-54절). 이와 관련해서는 요 2장 연구 자료, '요한복음의 7대표적과 7대 선언'을 참조하라. 즉 예수께서는 당시의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던 헤롯왕의 신하 한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된 자기 아들을 살려 주도록 예수님께 간청하자(46,47절) 고쳐주신 것이다(48-54절). 그런데 본서에만 언급되어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유하신 사건은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신 이적(마 8:5-13; 눅 7:1-10) 과 매우 유사하다. 다시 말해서 환자의 거처가 가버나움이었고(46절; 눅 7:1), 예수님께서 직접 환자를 보시지도 않고 말씀으로 치유하셨으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축복의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거의 일치한다(50-53절; 눅 7:9,10). 그러나 '백부장의 종'(눅 7:2)과 '왕의 신하의 아들'(46절)이라는 환자의 신분이 분명히 틀리고, 특히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이적이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는데(눅 7:9) 비해서 본문에 기록된 표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두 사건을 동일한 사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한편 본격적인 갈릴리 사역의 시작과 더불어 행해진 바로 이 두 번째 표적을 통해 우리가 다시금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시야말로 모든 육체적 질병과 영적인 죄악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내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는 권능을 지니고 계신 전능자이자 구세주이시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심각한 위기나 죄악 가운데 처한 자라 할지라도 주님께 도움의 손길을 간구하고 주의 말씀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사실 문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만한 능력을 갖고 계시지 않거나 우리의 간구를 외면하시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확신치 못하거나 도움의 손길을 주님께 간구하지 않는 데에 있다(약 4:2).
그러므로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奇事)가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믿어 도무지 의심치 않게 하려는 것(48절) 이었음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 같은 표적을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저치 말고 주가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저를 의지해야 할 것이다(요 20:29; 히 11:1,2). 본서 저자인 사도 요한이 본서를 기록한 목적 중의 하나도 수신자들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여 믿고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지 않는가!
4: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 사마리아에서의 체류와 전도를 끝내시고 난 예수께서는 원래 목적하셨던(3절) 갈릴리로 가신다. 이것은 요 1:43에 기록된 첫 번째 갈릴리 방문에 이은 두 번째 갈릴리 방문이다.
4:44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 본절은 해석상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는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원어 성경에는 본절의 가장 앞에 나오는 접속사 '가르'에 대한 해석 문제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고향'이 어디를 가리키는지의 문제이고 세 번째는 왜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시면서 이러한 말씀 - 당시 유행하던 격언으로 생각됨-을 하셨을까 란 문제이다. 첫째 '가르'는 일반적으로 '왜냐하면'(for)으로 번역되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지만 본문에서는 이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어색하다. 따라서 혹자는 이 단어를 양보를 나타내는 '비록~할지라도'(though)로 해석하기도 하고(Ostervald, Kuinoel), '참으로'(indeed)를 의미하는 부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문맥으로 보아 마지막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아시고 이를 강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한편 고향이 가리키는 곳에 대해서 예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나사렛(Calvin) 혹은 남부 갈릴리 지역(Lange)이나 갈릴리 전 지역을 의미한다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다는 점에서 유대 지역(Origen) 혹은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Westcott)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의 고향을 유대로 말하지 않고 갈릴리로 말하므로 여기서도 갈릴리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마 13:54,57; 막 6:1; 눅 4:16).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에서 갈릴리인들이 예수를 영접하였으며(45절) 예수께서는 병든 자를 치유하는 표적을 보이셨고 그로 인해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겨났다는(53,54절) 내용과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조화가 되지 못하는 듯하는 문제점이 있다. 따라서 이 말은 갈릴리 지방으로 가시면서 예수께서 예언하셨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48절; 마 11:21; 막 6:4).
4: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에 예루살렘에서 하신 일을 보았음이더라. - 44절에 나타난 예수의 예언과는 달리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께서 유월절 기간 중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신적 권능에 대한 소문으로 인해 그를 믿고 영접한다. 그러나 이들의 영접은 사마리아인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즉 사마리아 사람들이 소유한 믿음은 그들이 어떠한 표적을 보지 않고서도 소유한 위대한 것이었고, 갈릴리 사람들의 믿음은 표적을 보고 예수의 권능을 인정한 일시적 현상이다(Hoskyns).
4: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이 들었더니. - '왕의 신하'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실리코스'는 혈연으로든 관직으로든 '왕'(바실류스)과 연결된 사람을 가리킨다(Robertson). 여기서는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의 신하인 구사(눅 8:3, Ligtfoot)나, 헤롯 안디바의 젖동생 마나엔(행 13:1)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추측에 지나지 않으면 48절로 보아 그는 아마도 이적을 행하는 자로서의 예수께 관심을 가진 유대인이었을 것이다(Hendriksen).
4: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 '가서 청하되'는 왕의 신하가 살던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서북 해안에 소재한 성읍으로서, 당시 예수께서 계셨던 '가나'까지는 34km 정도되는 먼 거리이다. 그가 귀족의 신분으로서 이처럼 먼 거리를 여행하여 직접 예수를 찾아가는 수고를 보인 것은 사정이 매우 다급함을 말해준다. 한편 원문에서 '아들'(톤 휘온)에 정관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독자일런지도 모른다(Bengel). 한편 이때 예수를 찾아온 왕의 신하는 뛰어난 열성은 있었지만 그의 믿음에는 한계가 있었다. 왜냐하면 '말씀만 하옵소서'(눅 7:1-10)라고 하였던 백부장과는 달리 예수께서 직접 찾아가서 안수와 같은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 '표적과 기사'는 예수께서는 눈에 보이는 이적만을 원하는 자들에 대해 실망을 표현하고 있다. 본서에는 이 두 단어가 이곳에서만 함께 사용되었으나 다른 곳에서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유사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다(행 2:22,43; 4:30; 5:12 등). 그러나 특히 '표적'(세메이온)은 예수의 신적 능력을 보여 주는 행위에 내재한 의미와 진리 등을 강조하는 말이며 '기사'(테라타)는 신적능력이 외부적 표출로 인해 나타나는 놀라운 일을 가리킨다(Westcott). 사람들은 '기사' 에 의해서 놀라움을 느낄 수 있으나 결코 진리나 계시는 깨달을 수 없다(Morris). 따라서 이것만을 구하는 믿음은 아직도 저급한 믿음인 것이다.
4: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 오소서. - '아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온'은 신약 성경에서 '어린아이', '소년'의 뜻으로 쓰였으며 51절의 '파이스'와 동의어이다. 한편 본절은 애타는 부정(父情)을 그려주고 있으며 또한 그의 믿음의 한계도 보여주고 있다. 즉 왕의 신하는 예수께서 꼭 오셔야 기사와 표적이 일어날 줄 믿은 것이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권능이 있음을 간과한 것이었다(Bengel).
4: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 두어 안타까워하는 왕의 신하에게 예수께서는 마음에 확신을 줄 수 있는 어떠한 가시적인 표적을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살았다'란 한 마디의 말씀을 하고 계신다. 여기서 '살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제'는 현재 능동태이므로 '살아나려 한다'라든지 '살게 될 것이다'(Scofield) 등의 말로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말은 그 순간 전능자의 행위에 의하여 이 아이가 충분히 회복되었으며 그러므로 완전한 건강을 누리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 이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돌아갔다. 과거 그는 예수의 직접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유아적 신앙을 가졌으나 이제 그의 신앙은 한 단계 올라가서 행위를 보진 못했으나 말씀을 믿는 믿음이 된 것이다.
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났다 하거늘 . - 이의 아버지는 34km에 달하는 거리를 달려왔지만 아들이 살아났다는 기쁜 소식을 듣자 다시 쉬지 않고 또 길을 재촉한다. 한편 여기서 작은 촌락인 가나에서 큰 도시인 가버나움으로 가는 것에 '내려간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가버나움이 가나보다 예루살렘에서 더 멀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무엇이든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올라간다', '내려간다'는 표현도 보다 '남쪽인가 아니면 북쪽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지역이 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가에 따른다.
아이가. - 저자 요한은 같은 말을 연이어 반복할 때 비슷한 의미를 지닌 다른 단어를 번갈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도 예수와 아버지, 그리고 종들이 부르는 '아이'에 해당하는 단어가 각기 다르다. 아버지는 어린 아이의 연약함을 부각시키는 명사인 '파이디온'을 사용한 반면(49절)에, 예수께서는 보다 고상한 명칭인 '휘오스'를 사용하였다(50절). 그런데 본절에서 종들은 보다 가정적(domestic) 용어인 '파이스'를 사용하였다.
4:52 그 낫기를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시간 계산의 문제에 직면한다. 허나 이 사건 당대의 사람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로마식 계산법보다는 유대인의 시간 계산법에 익숙했을 것이고 이 기록도 그에 따른 것이다. 유대식 계산법에 의하면 '제 칠시'는 오후 1시 정도이다. 그리고 가나에서 가버나움은 34km 정도이므로 걸어서는 적어도 8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따라서 아이의 아버지와 종들이 만난 지점이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해가 진 이후인 7시로부터 10시 전후가 될 것이다. 이를 유대인들은 해가 지면 하루가 지나서 다음 날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계산하므로 그냥 '제칠 시'가 아니라 '어제 제칠 시'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로마식 시간 계산법에 의하여 본문을 해석한다면 아이가 나은 시간이 오후 7시이며, 아버지가 돌아오는 도중에 밤이 또 한 번 지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으나(Westcott, Moulton)이러한 주장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는 못하다.
4:53 아버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 종들이 '어제 제칠 시에'라고 말할 때 왕의 신하는 금방 그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다. 그래서 아마도 그는 집에 돌아온 후에 모든 가족에게 자신이 예수를 만났던 일이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전했을 것이다. 모든 가족들은 그 집의 아들이 병들어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기 때문에 근심과 불안에 싸여 있다가 급작스런 회복으로 큰 기쁨에 사로잡혔으며, 그 기쁨은 곧바로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물론 본절에서는 그 사람과 그의 가족들의 믿음이 예수를 구원의 주로 믿으며 인격적으로 믿고 따르는 성숙한 믿음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으나, 왕의 신하인 아버지가 여러 과정을 통하여 보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미루어 보아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본절은 가장(家長)이 믿으므로 온 가정이 믿게 된 여러 경우(행 16:15 참조)의 첫째이다.
4: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 예수께서는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두 번에 걸쳐 표적을 행하셨다. 첫째는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것이요, 둘째 표적은 죽어가는 아이를 말씀으로 치료한 것이다(Godet, Lange, Westcott).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 경우 모두를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데 사용하셨다. 첫째 표적은 물로 포도주를 변화시킴으로 자연계를 지배하시는 당신의 능력을 보이셨고, 둘째 표적은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었다. 또한 그는 이 두 가지 모두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켰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베푸신 이적들은 모두 이와 같은 목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표적만을 원하여 궁극적인 구원에는 이르지 못한 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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