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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고넬료 개종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변론 및 안디옥 교회의 설립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8-12장까지 이어지는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 일련 기사는 초대 교회의 선교 사역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일단 유대와 사마리아 등 팔레스틴 전역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빌립의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 안디옥 교회의 설립 등이 이루어지고 특히 후에 이방 선교의 기수(旗手)로 가히 이방인의 사도라 할 수 있는 바울의 회심(回心) 사건 등이 발생하여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초대 교회의 선교 사역이 당시의 세계라 할 수 있는 전 로마 제국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는 과정도 보여 준다.
이런 문맥 하의 본장은 전·후반부로 크게 나뉘어진다. 전반부 1-18절은 전장에서 발생한 이방인 고넬료(Cornelius)의 개종 사건을 두고 고넬료의 사건이 있기 전의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이방인 선교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를 미처 갖고 있지 못하던 유대인 출신 성도들이 반발하자 이에 대하여 베드로가 그 전 과정을 소상히 밝히면서 그것이 성령으로부터 기인한 사건임을 변론한 사실을 보도한다. 그리고 후반부 19-30절은 이제 마침내 이방 땅 안디옥(the Antioch)에 이방인들을 주축으로 한 교회가 건립되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송된 바나바와 바나바가 초빙한 바울사도의 협동 사역으로 크게 성장한 과정(19-26절)과 후에는 안디옥 교회가 유대 성도들이 경제적 위기에 빠졌을 때 구제 운동을 벌임으로써 예루살렘 교회와 주 안에서 교제를 유지하였음을 보도한다(27-30절).
전반부에 보도된, 유대인 출신 성도들이 고넬료의 개종(改宗) 사건에 대하여 고넬료가 유대인 또는 유대인처럼 할례 받지 않은 자라는 이유로 반발한 일과 이에 대하여 베드로가 행한 변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대 교회가 유대교(the Judaism)와 이방인 그리고 구약 율법과 신약복음의 관계 문제에 대하여 처해있던 역사적, 신학적 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의 변론 사건이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이 된 고넬료의 개종 사건을 보도한 전장 제 10장의 개관을 참조하라.
한편 우리는 전반부의 베드로의 변론 기사 자체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대할 때 다음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첫째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개종 사건이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의 주도로 진행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증거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하는 자는 언제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앞세워야 함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겸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은 도구일 뿐이며 그 주체와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이라는 진리에서 나온 필연적 요청이다. 또한 하나님의 종들은 때로 당장은 주의 섭리가 이해되지 않는다 하여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실행하고 또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함을 보여 준다. 그럴 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로 구속사의 섭리가 온전히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는 베드로나 예루살렘 초대 교회 성도들이나 모두 다 자신들의 견해나 판단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기준으로 이방인 개종의 타당성을 수납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이는 우리에게 성도는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특히 성경이 완성된 지금에는 성경을 유일한 객관적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함을 보여 준다. 그럴 때만이 구원의 진리의 객관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실로 성경이야말로 구속사가 끝나는 그 날까지 우리를 인도해 줄 유일한 빛이다(시 119:105).
후반부의 안디옥 교회의 설립과 성장 그리고 구제 기사는 근본적으로는 이제 교회가 단순히 지역적 측면에서 이방 땅으로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그 구성원의 측면에서도 이방인 출신 성도들이 주축이 되어 교회를 설립함으로써 초대 교회가 마침내 전 이방 세계로 향하여 뻗어나갈 전진 기지를 마련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이를 믿는 교회는 살아 성장하는 생명력과 역동성을 가졌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리고 전날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명령 (commision)과 동시에 약속(promise)으로 주셨던 말씀 곧 유대와 사마리아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행 1:8)이 실천 내지 성취됨을 목격하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으로 필히 성취됨을 거듭 확인한다.
그리고 특히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 불리우기 시작한 사실(26절)은 이제 구약과 구약 전체를 계승 확장한 신약을 믿음으로 태초 하나님에게까지 이르른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기독교와 바벨론 포로기(B.C. 586-539) 이후 구약의 일부 내용에다 인본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 전통까지 가미한 유대교가 본격적으로 구분된 사실을 보여 준다. 또한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명명된 것은 실로 기독교는 유대교처럼 인본주의적이고도 민족주의적인 율법과 전승(tradition)을 믿거나 그 당시의 헬라 종교들처럼 사람의 지식을 맹신하는 종교가 아니라 살아계신 성삼위 하나님 모두를 성육신(成肉身)하셔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참 신앙임을 깨닫게 된다.
끝으로 우리는 그 옛날 예루살렘 교회 등의 선교와 후원을 받아 건립된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 등이 경제적 위기를 당했을 때 구제함으로써 서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던 사실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는 각 지역 교회는 서로 독립된 별개의 개체들이 아니라 결국은 전 우주적 보편 교회(universal catholic church)의 일원으로서 다만 지역별로 나뉘어 세워진 것인바 서로 주안에서 긴밀한 유대와 교제를 나누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럴 때만이 온 땅의 곳곳에 세워진 지역 교회와 그 지역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주 안에서 유기적(有機的) 단일체를 이룰 수 있으며 또한 이런 유기적 연합을 통해 주의 복음이 땅 끝까지 더욱 빨리 그리고 더욱 강력히 이르게 될 것이다.
외울 말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가 하니라(행 11:18)
고넬료의 개종에 대한 베드로의 변론
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행 10 : 45
3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눅 1:3
4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아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요 16:13; 행 10:23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것과 같이 하는지라 행 2:4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마 3:11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 15:8,9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5:3
안디옥 교회의 설립
19 〇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행 6:1; 9:29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눅 1:66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행 13:43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행 2:41,47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 62:2; 65:15
안디옥 교회의 구제 활동
27 〇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요 16:13; 21:10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扶助)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1:7-18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이방인에게도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베드로의 증거
1.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심(5-10절)
2. 하나님이 환상을 통해 이방인에게도 구원주심을 보여 주심(5-10절)
3.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꺼려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책망하심(5-10절)
4. 이방인에게 전도할 때 성령께서 분명한증거로 인도하심(12-14절)
5. 유대인과 동일하게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음(15절)
6.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 세례를 받음(15,16절)
7.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사람이 감히 막을 수 없음(17절)
지리배경- 11:19-30 안디옥(Syrian Antioch)
1. 지리적 배경
안디옥은 시리아 북서쪽, 지중해로부터 약 19km 떨어진 도시로서 오늘날 터어키의 '안타키아'(Antaka)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도시는 오른테스(Orontes) 강의 하구에 위치해 있고 근처에 실피우스 산이 있어서 자연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지리적 위치의 특성상 안디옥은 일찍부터 지중해와 시리아 그리고 근동 국가들 간의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한편, 이 안디옥은 남서 소아시아에 위치한 '비시디아 안디옥'(Antioch of Pisidia)과는 구별되어 그냥 '안디옥'이라고만 불린다.
2. 역사적 배경
안디옥은 B.C. 300년에 알렉산더 대왕 사후(死後), 스스로 왕이 된 셀류쿠스 1세(Seleucus 1. B.C. 323-282)에 의해 시리아 지역의 중심 성읍으로 건립되었다. 그리고 건립자의 아버지인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서 '안디옥'이라 명명되었다. 이 도시는 정치적으로 시리아 왕국의 통치자 셀류쿠스가 헬라와 마게도냐에 대한 지배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B.C. 63년경에 시리아 왕국이 로마에 의해 멸망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안디옥은 정치 ․ 경제 ․ 문화 ․ 종교적으로 발전한 부유한 도시로서 명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이는 안디옥이 동지중해 지방을 군사적 ․ 상업적으로 장악하려던 로마의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부유하고 주요한 도시였던 안디옥은 A.D. 7세기경의 대지진과 페르시아군의 공격으로 점차 쇠퇴해 가고 말았다.
3. 관련 성경 기사
내 용 관련 성구
1) 예루살렘 교회 박해로 흩어진 자들이 이곳까지 와서 전도함 행 11:19
2) 이방인들이 중심이 되어 최초의 교회가 세워짐 행 11:20, 21
3) 바나바와 바울이 이곳 교회에서 1년간 말씀을 가르침 행 11:25,26
4) 이곳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 받음 행 11:26
5) 이곳의 성도들이 흉년이 든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부조를 보냄 행 11:27-30
6) 바울과 바나바가 이곳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파송됨 행 13:1-3
7) 할례 문제로 바울 및 바나바와 유대주의 성도들 간에 다툼 생김 행 15:1-3
8) 바울이 베드로의 외식에 대해 이곳에서 책망함 갈 2:11-14
4. 의의
초대 교회사에 있어서 이방인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최초의 교회인 '안디옥 교회'가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기 전에도 로마 제국 중 교회가 세워진 곳은 여러 곳 있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은 모두 팔레스틴에서 유대교인들의 핍박을 피해 흩어졌던 유대인 성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이며 순수하게 이방인 성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안디옥 교회가 최초이다. 뿐만 아니라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세계 선교를 위해 파송한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된 교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안디옥 교회의 역할은 A.D. 6세기경 콘스탄티노플이 세계 교회의 중심지로 등장하기까지 계속되었다. 또 안디옥교인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워짐으로써 그 이전까지 일반인들에 의해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식되던 것이 기독교가 유대교와 전혀 다른 것으로 확실히 인식되게 되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서 특별자료 참조하라.
주요 주제-11:2-18 초대 교회의 할레 논쟁
갈 2장 자료 노트 참조
지도-11:22-30 바나바와 사울의 안디옥 여행과 예루살렘 귀환 경로
원어연구-11:23 굳은 마음으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테 프로데세이 테스 카르디아스'이다. 여기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프로데세이'와 '카르디아스'이다.
먼저 '프로데세이'는 '앞에 두다' 또는 '진열하다'라는 뜻의 명사 '프로티데미'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특별히 성전에 진열된 '진설병'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마 12:4; 히9:2). 그러나 다른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마음을 정하다'라는 의미로서 '의도'나 '의향'(딤후 3:10) 또는 '뜻'(롬 8:28)으로 번역된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바로 이런 뜻으로 쓰였다.
한편 '카르디아스'는 '마음' 혹은 '중심'을 뜻하는 '카르디아'의 단수 소유격 명사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의미들을 종합해서 본문의 '굳은 마음으로'를 직역하면 '그 마음의 대로'가 된다. 이는 '강제적인 압박에 의한 결정'과 아주 대조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바나바는 안디옥 성도들을 향해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응답하여 주께 붙어 있을 것을 권고한 것이다.
11:1-18 베드로의 변론
지난 장(행 10장)에서는 이방 선교를 위한 가교적 역할을 한 고넬료의 회심과 그의 가정에 성령이 강림한 사건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장은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방인에 대한 선교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방 선교의 센터(center) 역할을 할 안디옥 교회가 세워짐으로써 본격적으로 이방 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본문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을 방문한 사건(행10:24-48)이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 의해 문제로 제기되어(1-3절) 베드로가 자신이 본 환상과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을 설명함으로 이방인의 구원이 하나님의 뜻임을 변론하고(4-17절) 이에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에 대한 선교를 인정하는 모습이다(18절). 사실 개종한 유대인들은 베드로가 이전에 이방인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듯이(행 10:14),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면서도 전통적 구습에 젖어 여전히 민족적, 종교적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과 성령의 강림을 인정할 수 없었으며 이방인의 집에서 교제한 베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1-3절). 이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와 성령의 강림을 설명함으로 힐난하던 자들을 이해시키고 이방인의 구원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실히 한 것이다(4-17절).
이러한 본문에서 누가는 본서의 중심 주제인 이방 선교(행1:8)의 당위성을 두 가지 특징 있는 내용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베드로의 변론을 통하여 고넬료 회심 사건을 반복하여 강조한다(4-17절). 전장의 사건이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된 것은 고넬료의 회심과 성령 강림이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방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일반 성도에 의한 것이고 더욱이 환난으로 인해 흩어져서 전해진 수동적인 전파였다. 그러나 이제 사도를 통하여 이방인에게 공식적으로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도 확인된 것이다. 누가는 이렇게 고넬료의 회심 사건이 이방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시 반복하고 있다.
둘째는 베드로의 변론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에 대한 선교가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18절). 초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적 전통을 버리지 못하고 율법 안에서 복음을 인정하는 편협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단순히 베드로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과 교제하였다는 사실만을 힐난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전통적 선민의식을 가지고 부정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었던 것이다. 즉 이들은 복음을 영접하기는 하였지만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가 고백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듣고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섭리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인정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예루살렘 교인들의 반응과 다음에 나타날 이방인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될 안디옥 교회의 설립은 본서의 핵심인 세계 선교의 방향이 점차 구체화되어 간다는 사실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편 이상의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원히 보수하고 지켜야 하지만 교회의 잘못된 전통이나 형식은 과감한 개혁을 통해 고쳐나가야 할 것을 교훈해 준다.
11:1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 여기서 '사도들'이란 베드로를 제외한 나머지 11사도들을 지칭하며, '형제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기독교인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본서의 저자 누가가 이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로 칭하지 않고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라고 칭하는 데 있다. 당시 사도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있었다(행 8:1). 그리고 베드로를 힐문한 이들도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이었다(2절). 그럼에도 누가가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 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의도 때문으로 보인다. 첫째는 고넬료 사건이 온 유대의 기독교 공동체에 알려졌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함이다. 둘째는 고넬료 사건을 이방과 유대로 대조시켜 놓음으로써 이방 선교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말하기 위한 전제를 깔고자 함이다.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 - 가이사랴의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행 10:24)이 베드로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행 10:34-43) 또한 성령 부음을 받은 사건을 지칭한다(행 10:44-46). 그런데 유대의 사도들과 형제들은 이 사건에 대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와 보고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2절). 이로 보아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머무는 동안에(행 10:48) 유대 지역 내로 그 사건의 소식이 전해진 것 같다.
11: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 일가, 친구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세례를 베푼 후 그들의 간청에 못 이겨 그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행 10:48). 그리고 거기서 다른 곳을 들르지 않고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직행한 것 같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올라오자마자 그는 고넬료 사건으로 인해 힐난을 받게되었다.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 베드로를 힐난한 사람들은 할례자들이었다. 이 '할례자들'은 유대교도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 중에서도 특히 유대주의적성향이 강한 바리새파였던 자들일 것이다. 이 사람들은 본토 유대 지방을 떠나서 살다가 돌아온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인 '헬라파 유대인'들을 차별할 정도로(행 6:1) 배타성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도를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의 전통을 고집하여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을 위법으로 여기는'(행 10:28) 율법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노하여 그에게 따지기를 서슴지 않은 것이다(3절). 한편 여기서 '힐난하여'에 해당하는 '디아크리노'( )는 비난의 차원을 넘어서 남을 정죄하는 것을 가리킨다. 갈 2장 자료노트 '초대교회의 할례 논쟁' 참조.
11:3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 할례자들이 베드로에게 따져 물은 것은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단지 이방인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식사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할례자들은 분명히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었다. 2절 주석 참조.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는 데에는 이의를 달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배타적인 선민(選民)의식의 벽 속에 갇혀 있던 그들은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선교 그 자체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이방인들을 접촉했다는 것으로 베드로를 힐난했다. 즉 할례자들은 우회적인 교활한 방법으로 이방인 선교 행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모든 민족에게 개방된(마 28:19) 복음마저도 자신들의 전유물화하려는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실로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다(마 9:17; 막 2:22; 눅 5:37-39). 즉 그들은 어리석게도 주께서 말씀하신 '땅 끝까지 이르러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한 명령을 잊어버렸거나 애써 외면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며 수가 많아지자 주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선교 사명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교회만 살찌우려는 개 교회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그런즉 오늘날 교회는 대오(大悟) 각성하는 가운데 한시 바삐 본연의 사명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11:4 베드로가…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 이미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과 성령의 인도하심 그리고 고넬료 일가와 친구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사건을 통해 이방 선교에 대한 정당성과 당위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베드로는(행 10:15,34,47) 할례자들의 어리석고 교활한 힐난에 당황하거나 노하지 않고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고넬료 사건에 대하여 차분하게 순차대로 설명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베드로는 자신을 힐난하던 자들을 설득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시켰던 것이다(18절).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은 실로 사도 중의 사도로서 손색이 없는 모습으로, 점점 베드로는 자신의 인간적인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무장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5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 본절에서부터 10절까지는 베드로가 욥바의 시몬이라는 피장(皮匠)의 집 지붕에서 본 환상에 관한 내용(행 10:9-16)이다. 베드로는 이 내용을 거의 글자 그대로 자신을 힐난하는 할례자들에게(2절) 설명하고 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룻다를 거쳐(행 9:32) 욥바에 이르렀고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라는 성도를 다시 살리고 시몬이라는 피장의 집에 머무르면서(행 9:36-43) 어느 날 제 6시에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갔다가 본 절에서부터 언급되는 환상을 보았다. 여기서 베드로가 '욥바'에서 기도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은 그가 가이사랴에 우연히, 또는 자신의 의지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남의 인도하심으로 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환상을 보니. - 행 10:10에는 환상을 보았다는 설명이 없고 단지 '비몽사몽'에 해당하는 '엑스타시스'라는 용어만 사용되어 행 10:3의 '환상'(호라마)과는 다른 주관적인 황홀경의 뉘앙스를 나타내주고 있다(행 10:10 주석 참조). 그러나 본절에서는 자신이 본 것이 착각이나 망상이 아니라고 못 박는 의미에서 '환상', 즉 객관적인 비젼(vis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1:6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 - 행 10:12에는 단순히 '각색 네 발 가진 짐승'으로 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이처럼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으로 되어 있다. 이는 베드로가 자신이 본 것들을 묘사하면서 보다 자세히 언급하고 있으며, 동시에 '들짐승'이라 함으로써 자신이 본 것 속에 유대인들이 꺼려하는 부정한 짐승들(레 11장; 신 14:3-20)이 들어 있었음을 암시하기 위함인듯하다.
11: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 행 10:13에는 '또 소리가 있으되'로 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이처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로 되어 있다. 이는 전절인 6절에 '보이더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베드로가 자신의 체험을 직접 말하기 때문에 생기는 표현상의 차이이다. 다음 절인 8절에서도 '베드로가 가로되'(행 10:14)가 '내가 가로되'라고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바뀌어 있음을 주목하라.
11:8 속되거나 깨끗지…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 행 10:14에는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으로 되어 있으나 본절에는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으로 되어 있다. 또 행 10:14 후반부의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 하였삽나이다'가 본절에는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로 되어 있다. 전자에는 약간의 문법적 차이가 있고, 후자에는 표현상의 차이가 있으나 의미상에는 변화가 없으므로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이처럼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짐승 먹기를 꺼려한 이유에 대해서는 행 10:14 주석을 참조하라.
11:9 하늘로부터…내게 대답하되. - 이 말은 행 10:15을 보충하고 있는 말이다.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이 들은 말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이며, 그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자신에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언급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11:10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 행 10:16에는 '그 그릇이 곧 하늘로'라고 묘사되어 있으나 본절에는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라고 되어 있다. 이는 곧 제 3자의 입장인 본서 저자 누가가 '보자기 같은 그릇'에 중점을 둔 반면, 본인인 베드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음에 중점을 둔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표현한 '모든 것이 그 '보자기 같은 그릇' 속에 있었으므로(행 10:11,12) 양자는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11:11 본절과 12절은 행 10:17-29을 아주 간략하게 재 언급한 것이다.
세 사람. - 행 10:19에는 '두 사람'으로 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세 사람'이라 하고 있다. 이는 행 10:19의 경우 바티칸(B) 사본을 따라 번역한 것이나, 다른 사본들, 즉 시내 사본(N), 알렉산드리아 사본(A), 에브라임 사본(C), 바질 사본(E)에는 '세 사람'으로 되어 있는 데서 비롯된 차이이다. 그러나 행 10:7을 보면 '세 사람'임을 알 수 있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행 10:19 주석을 참조하라.
11:12 이 여섯 형제. - 행 10:23에 의하면 베드로는 욥바의 두어 형제를 동행시켰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여섯 형제와 가이사랴로 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먼저, 행 10:23대로 욥바의 두어 형제, 즉 세 형제와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11절; 행 10:7)을 합친 여섯 명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행 10:23의 '두어'에 해당하는 '티네스'가 실제로는 두어라는 수효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적은 수를 지칭하는 단어이므로 본절의 베드로의 증언대로 여섯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중 만일 후자의 견해를 취한다면 베드로와 함께 가이사랴로 간 사람의 총수는 이 여섯과 고넬료가 보낸 사람 셋 그리고 베드로 자신을 합쳐 열 명이 된다.
11: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 본절과 다음 절인 14절은 행 10:30-33의 내용을 재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14절의 내용은 실상 고넬료가 언급한 내용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본서 저자 누가가 동일 내용의 똑같은 중복을 피하기 위해 행 10:30-33에서는 생략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본절에서 베드로는 고넬료가 '우리에게 말했다'고 함으로써 욥바에서 동행한 형제들(12절; 행 10:23)을 '우리'란 개념 속에 포함시켜 자신의 말에 더욱 신빙성을 가하고 있다.
11:14 그가…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 이 말은 행 10:30-33에서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다. 그러나 이는 천사가 고넬료에게 한 말씀 중 한 부분임이 분명하다(행 10:3-6). 다만 그것이 행 10장에서는 생략되었으나 실상 고넬료는 그러한 얘기를 다시금 베드로에게 고하였을 것이다(행 10:33). 때문에 베드로는 그 내용을 본절에서 상세히 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 행 10:44에는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자들에게 내려오셨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성령께서 임재한 시기가 베드로가 말을 끝마친 때이거나 적어도 어느 정도 말이 진행된 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임하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양자를 어떻게 조화시켜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가 유력시 된다. 즉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할 때부터 성령께선 이미 역사하사 청중들의 마음을 감동 감화하셨으며 마침내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처럼 설교를 듣던 모든 자들에게 임하셨다는 것이다.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 베드로의 말을 듣던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구들(행 10:24)에게 성령이 임한 현상은 오순절 때의 성령 강림 현상과 유사했다(행 2:1-4). 즉 여기서 '처음'이란 말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지칭한다. 한편 처음 오순절의 성령 강림으로 인해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하여 그곳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늘었다면(행 9:31), 이제 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한 사건은 복음이 팔레스틴 지경을 벗어나 땅 끝까지 전파되고 말 것임을 예시해 주는 것이라는 의의를 지닌다(행 1:8). 이러한 실례로서 우리는 사도 바울에 의한 이방 전도 여행이 본서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본다(행 13-28장).
11:16 주의 말씀에…생각났노라. - 이 말씀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한 말이며(마 3:11),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나타나셔서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내용이다(행 1:5). 그런데 베드로는 이 약속을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시킴으로써 먼저는 자신이 이방인에게 물세례를 준 것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있으며(행 10:47,48), 그 다음으로는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이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방인의 집에서 이방인과 함께 먹었다는 힐난에 대한 부당성을 일깨우고 있다(3절). 즉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행위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음 절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11:17 하나님이…주신…선물. - '우리가 믿을 때에 주신 선물'은 '성령의 임재하심'이다. 예수께서는 믿는 이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거니와(요 14:26; 16:13; 행 1:8) 그 성령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요 3:34). 이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의 임재하심이 먼저 유대인들에게 허락된 것과 동일하게 이제 이방인에게도 주어진 것은 하나님이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을 잘 증거해 준다(롬 3:29).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 베드로는 성령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역사하시는데 감히 그 어느 피조물이 하나님을 막을 수 있겠느냐고 함으로써 첫째로는 자신을 힐난하는 할례자들(2절)을 논박하여 그들의 입을 봉쇄하고,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이방 선교의 정당성과 당위성,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필연성마저도 강력하게 주장한다. 실로 베드로는 비록 처음에는 자신도 하나님의 큰 뜻을 알지 못하였으나(행 10:17) 깨달은 뒤에는 곧 그 뜻에 순종하였다(행 10:34,47).
11:18 저희가…잠잠하여. - 이방인들과 함께 하며 같이 먹었다고 베드로를 힐난함으로써 은연 중 이방선교에 이의를 제기하던 할례자들은(3절 주석 참조) 베드로의 차분하고 논리 정연한 설명에 이처럼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 더욱이 잠시 잠잠한 후에 그들은 그리스도인답게 하나님의 역사(役事) 앞에 순종하고 그 뜻을 받아들이는 표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물론 사도 베드로의 권위 있는 논박(17절)을 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두려워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가능성도 있으나, 뒤따르는 고백으로 보아 그들은 정말로 하나님이 이방과의 담을 무너뜨렸음을 받아들이고 그 뜻에 순종하였음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베드로가 말을 할 그때에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사 듣는 할례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을 것이니 이러한 추정이 확실시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고집하는 유대인들의 의식은 뿌리 깊게 내려져 있어 이후에도 할례 문제로 논란이 일어났고(행 15:1-11), 바울 서신에도 종종 그러한 논란이 언급되고 있다(롬 2:25-29; 4:9-13; 고전 7:18,19; 갈 6:11-16; 엡 2:14-17 등). 이로 보건대 할례 문제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의식은 단시일 내에 해결되지 못하고 오랜 세월 초대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문제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실로 잘못된 종교적 의식과 관습은 진리를 가리고, 진리의 걸림돌이 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면…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 '그러면'이란 말은 그 전의 어떤 말을 전적으로 수긍하는 말이다. 적어도 본장에 등장하는 할례자들은 베드로의 말에 순복했다. 이것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믿는 자들의 차이이다. 즉 비록 믿는 자들도 어리석거나 죄된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있으나 깨달은 뒤에는 그것을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는 데에 믿는 자들의 특징이 있다. 한편 본문의 내용처럼 예루살렘교회의 제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함으로 이제 이방 선교는 그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를 보다 확고하게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으로 가결하게 된 것이 곧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의이다(행 15:1-29).
11:19-26 안디옥 교회의 설립
앞 단락(1-8절)에서는 베드로의 변론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된 안디옥 교회의 설립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있은 대 박해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각지로 흩어지게 했고 결과적으로 복음이 이방 지역으로 확산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행 8:1-3). 안디옥 교회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는데(19-21절) 안디옥 교회의 소문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바나바 파송(22-24절)과 바나바와 사울의 동역은 안디옥 교회가 질적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안디옥 교회는 성도들이 뭇사람들에 의해 '그리스도인'이라 처음 불리우기까지 부흥하게 된다(25,26절).
한편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이방의 선교를 위한 성령의 역사적인 섭리를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환난과 핍박이 여러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이다(19절). 이는 이미 빌립 집사의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 전도에서 나타난 섭리이지만(행 8:4-8) 본문을 통하여 곳곳으로 확산되고 전파되는 복음의 능력이 더욱 확실하게 나타난다. 둘째는 핍박받아 흩어진 성도들이 율법을 준수하던 히브리파 유대인들보다는 헬라파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스데반 집사의 설교(행 6:8-7:6)에서도 나타나듯이 율법이나 성전의 전통보다, 그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의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20절). 즉 성령께서는 이방인에게 배타적인 히브리파 유대인보다는 이방인들에게 보다 우호적이고 친밀감을 갖고 있던 헬라파 유대인들을 흩어지게 함으로써 이방인들에게 쉽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물론 흩어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는 같은 동족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들이 점차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했을 것은 세계, 비록 흩어진 유대인들이 전통에 따라 복음을 유대인들에게만 전하지만 복음을 들은 자들이 다시 이것을 친숙한 안디옥의 이방 헬라인에게도 전하였고, 성령께서 이 헬라인들의 심장을 감동시켜 복음의 급속적으로 전파된 것이다(20,21절), 이렇게 인간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역사하시고 섭리하신다. 넷째,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하였는데(22-24절) 이것은 전 단락에 있었던 베드로의 변론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을 향하신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18절). 다섯째, 바나바는 사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가르치고 성장시킴으로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로 만들게 된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인구 50만의 대도시였는데 이곳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짐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 교회의 중심이 된 것같이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고 바울의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의 출발지요 선교 기지가 된 것이다. 본장 자료노트, '안디옥' 참조.
따라서 본문은 행 1:8의 지상 명령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이어 땅 끝으로 복음이 전파되기 위한 이방 선교의 시작이 본격적인 궤도에 접어들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곧 베드로의 예비적인 이방 선교에 이어 파울의 본격적인 이방 선교로 전환되는 역사적 순간인 것이다.
11:19 스데반의 일. - 18절로써 고넬료의 사건은 일단락 매듭지어지고 이제 본절에서부터는 상황이 전환되고 있다. 그 전환된 상황은 안디옥 교회의 설립 이야기로 들어간다. 그런데 안디옥 교회 설립 이야기로 들어가면서 저자인 누가는 행 8:1과 시간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 죽임을 당하고(행 7장) 곧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있었으니 그로 인해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였다. (행 8:1).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스데반의 일로 본격화된 박해를 피해 흩어진 자들이 이방 지역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도들이 유대 지경에만 머물러 있자 하나님께서 '박해'란 수단을 사용해 강제로 저들을 각처에 분산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행 8:1 주석 참조.
베니게. - 레바논 산맥과 지중해 연안을 사이로 하는 약 200km에 달하는 긴 평원 지역이다. 오늘날에는 레바논 지역이라 불리운다. 이 지역에는 유명한 같멜 산이 있으며, 주요 도시로는 두로와 시돈이 있다. 예수께서는 회개치 아니하는 유대의 고을들을 이 두 도시에 뎃대어 차라리 이 이방 도시가 더 빨리 회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20-22). 그리고 실제로 두 번이나 이곳을 방문하셨다(마 15:21; 막 7:31).
구브로. - 구약 시대에는 '깃딤'(민 24:24)이라 불리운 곳으로, 지중해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섬이다. 이 섬은 안디옥, 다소, 길리기아 지방과 마주하여 지중해의 요충지이며,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하다(행 4:36). 오늘날에는 '키프러스' 또는 '싸이프러스'(Cyprus)로 불리운다. 구브로의 위치와 역사에 대해서 행 13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안디옥. -지중해에서 내륙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위치하며, 예루살렘에서는 북쪽으로 약 480km 떨어져 있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로마에 속해 있었고 그 로마 행정구 중 수리아라는 주(州)의 수도였다. 뒤로는 오론테스 산이 있었고 옆으로는 오론테스 강이 흘렀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는 안디옥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많았는데 신약에는 그 중 비시디아 안디옥(행 13:14)과 본절의 수리아 안디옥 두 곳만이 언급되고 있다. 이 곳은 B.C. 300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인 '셀류쿠스 1세'(Seleucus Nicator)가 건설하였으며 그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 '안티오쿠스'(Antiochus)를 따라 이 도시의 이름을 명명하였다. 한 때는 폼페이(Pompey)가 이곳을 자유 무역 도시로 하였으나 후에 로마의 직할도시로 속하게 되었다. 이곳은 요충지로 번성하여 마카비 시대에 이미 그 인구가 12만명이 넘었으며(외경 마카비1서 11:14), A.D. 100년경에는 50만명을 넘어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세번째의 대도시였다고 한다(Josephus). 이 도시는 크고 장대하여 '동양의 로마'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다. 지정학상 이 도시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재되어 왔으며, 그래서 종교도 고대의 '아스타르테'(Astarte)와 로마의 '아폴로' 신을 숭배했으며 그 외에도 잡다한 각종 잡신 숭배가 성행했다. 도시민들은 대체로 부유했으며 향락을 즐겼다. 유대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으며 로마 황제 '칼리굴라'(Caligula)가 통치하던 A.D. 7-41년 사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이곳에 복음이 들어간 후에는 이방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A.D. 2세기 초에 유명한 순교자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감독으로 있었다. 그리고 루시안. 데오도르, 크리소스톰과 같은 식견 높은 지도자들이 뒤를 이어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견줄만한 신학의 요람지로 명성을 쌓았다. 이곳 안디옥 교회의 초대 감독이 베드로였다는 전설도 있으나 신빙성이 회박하다.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 스데반의 박해 당시 흩어진 신자들은 이방인의 지역에 갔지만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만 전하였다. 이처럼 이제까지 복음은 아직도 이방인들에게는 개방되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가 이렇게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전해졌다고 하는 것은 조만간 어떤 경위로든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질 것임을 암시하기 위해서 이다.
10:20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 구레네(Cyrene)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간 시몬의 출신지이다(눅 23:26). 구브로에 대해서는 본장 19절의 주석을, 구레네에 대해서는 행 2 10의 주석을 각기 참조하라. 한편 본절에 언급된 이 사람들은 디아스포라(Diaspora)유대인들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일 것이다.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 '헬라인'이 시내 사본(H), 알렉산드리아 사본(A), 베자 사본(D)에는 '헬레나스'로 되어 있고 본문 역시 이것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다른 바티칸 사본(B), 바질 사본(I), 풀피리안 사본(P)에는 '헬레니스타스'로 되어 있다. 본문이 따르고 있는 전자는 글자 그대로 이방인인 '헬라인'을 지칭하며. 후자는 행 6:1과 같이 '헬라계 유대인'을 지칭한다. 따라서 본절의 헬라인이 이방인인 헬라인인지, 아니면 헬라계 유대인을 지칭하는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본문의 취지가 이방 전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 '헬라인'은 이방인을 지칭하는 '헬레나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전절(19절)에서 '유대인에게만 전했다'는 것과 대조되어 '이방인에게도 전했다'는 것이 부각된다. 이것이 저자인 누가의 의도라고 여겨지는데 대다수의 학자들도 이 견해를 취하고 있다(Alford, Bruce, Knowling, Vincent). 한편 이처럼 구브로와 구레네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의 전통적 터부(taboo)를 깨고 이방인들에게 전도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골수적인 유대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방인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동안 배타적 선민(選民) 의식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받은 복음의 진리를 이방인들에게도 전하고자 마음먹게 된 것 같다.
10:21 주의 손. -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구약적 표현이다(출 9:3; 수 4:24;삼상 5:3,6; 삼하 3:12; 왕상 8:15; 사 59:1; 겔 1:3). 그리고 이 표현은 본서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행 4:30; 7:25; 13:11). 즉 누가는 말씀이 선포되고 교회가 성장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 특히 구약에서도 역사하신 여호와의 능력으로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주의 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본절에서는 이방 선교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룬어진다는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 여기서 '돌아오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스트렢센'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나 그러지 아니하였던 자들이 이제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 오게 된 것이다.
11:22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앞서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선교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낸 바 있다
(행 8:14). 이와 비슷하게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되고 그곳의 헬라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고 교인의 수가 증가했다는 소식을 듣자 바나바를 보냈다. 이는 사마리아의 경우처럼 소문의 사실성을 알아보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선교의 기틀을 더욱 확고히 다지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한편 안디옥에 파송된 바나바(Barnabas)는 구브로 출신으로 레위 지파의 후손이며 본명은 요셉(Joseph)이었고, 바나바라는 이름은 사도들이 지어준 이름이었다(행 4:36). 이 이름은 '권위자', 즉 '권면과 위로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고 헌신의 길에 들어섰으며(행 4:37), 사울이 회심한 후 예루살렘에 들어가 사도들을 만나고자 할 때에 중재 역할을 담당하였다(행 9:26,27). 그리고 바나바는 본장의 내용대로 안디옥에 파송된 것을 인연으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행 13:1) 바울과 함께 동역하며 많은 일들을 하였다(25,26절). 그러나 후에는 마가의 동행 여부 문제로 의견을 달리해 바울과 헤어졌다(행 15:36-41). 이러한 바나바의 활동을 미루어 볼 때 바나바는 12사도와 바울에 버금가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안디옥에 책임자로 파송된 것은 아마도 그가 충분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또한 안디옥에 전도한 구브로 사람들(20절)과 동향 사람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행 4:36).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적임자로 추대하고 파송한 것 같다. 바나바에 대해서는 행 15장 자료노트를, 바나바의 안디옥 및 다소 지방 여행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지도를 보다 참조하라.
11:23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 바나바가 안디옥에 도착하여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니 그것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안디옥이라는 이방 땅에 '하나님의 은혜'. 즉 구원의 역사가 넘적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방인들이 개종한 것을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로 보고 있음은 저자 누가가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21절)라고 언급한 것과 일치한다. 즉 복음을 전파한 것은 비록 사람들이나 열매 맺게 하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신 것이다.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가 안디윽 교회에 충만함을 보고 그 은혜를 더욱 다지기 위해 이처럼 권면의 말을 하였다. 바나바의 이 권면의 말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연상케 하는데 주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회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회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5). 아무튼 본절과 같은 가르침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특별히 강조된 말씀으로, 세상의 유혹과 환난에 대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결단코 신앙을 잃지 말라는 권면이다. 여기서 '굳은 마음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테 프로데세이 테스 카르디아스'로, '많은 사람 앞에 둔다' 또는 '확고한 의지'를 뜻한다. 그리고 '붙어 있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같이'라는 뜻의 '프로스'와 '머물다'는 뜻의 '메노'의 합성어인 '프로스메네인'으로 '함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는 말은 '모든 사람 앞에서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주와 함께 있으라'는 의미이다. 즉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의 자세를 주지시켜 주는 권면의 말이다.
11:24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 바나바의 인물됨이 본절에 나타나고 있다. 그는 '착한 사람'이라 했는데 이는 구제와 같은 선행을 일삼는 자라는 뜻이다. 또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확실한 주님의 제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행 6:5). 이와 같은 바나바의 됨됨이는 그가 수직적으로 하나님께나 수평적으로 사람에게나 진정한 신앙의 면목을 지닌 자였음을 보여 준다(행 10:2,22).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 바나바가 안디옥에 오기 전에도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으나(21절) 그가 오고 난 뒤에는 더욱 큰 무리가 주를 믿게 되었다. 그 원인은 바나바의 인간됨과 그의 신앙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바나바의 모범적 자세는 '이같이 너회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회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하신 예수의 말씀을 상기시켜 준다.
또한 '우리는‥‥그리스도의 향기니‥‥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한 사도 바울의 말씀도 기억나게 해준다.
11:25 사을을 찾으러. -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뵌 후, 어느 시기엔가 아라비아를 다녀온 뒤(행 9:3 주석 참조) 예루살렘에 있다가 거기서 유대인들의 위협을 피할 겸(행 9:29) 주님의 명령으로(행 22:17-18) 예루살렘을 떠나 그의 고향인 다소에 가서 은둔하고 있었다(행 9:30). 그렇게 은거하고 있는 사울을 부르기 위해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북서쪽으로 약 13km에 위치한 다소로 갔다. 여기서 '찾으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제테사이'는 '한 집 한 집 뒤져가며 세밀히 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바나바가 다소에 은거하고 있는 사울을 정성스럽게 힘을 들여 찾은 것은 이제 이방 선교의 문이 열렸고, 이방선교를 위해 부름 받았던(행 9:15) 사울을 찾아 내어 주의 사역자로 일하게 하기 위함이다. 바나바의 개인적 판단에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사울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으며(행 9:29,30), 유대에서는 또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길 정도로 신변이 위험하였으므로(행 9:23,29) 이방의 땅인 안디옥에서 사울이 활동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적 상황 판단과 아울러 여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이방 선교를 위한 뜻이 있었다. 즉 이제부터 사울이 아닌 사도 바울로 말미암아 놀라운 이방 전도의 역사가 펼쳐지는 것이며 바나바가 그 가교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11:26 둘이 교회에. - 바나바는 안디옥에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 파송되어(22절) 많은 무리를 믿게 한 후 다소에 있었던 사울을 불러와 둘이서 같이 안디옥에서 사역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저자인 누가가 벌써 안디옥에 교회가 성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미 많은 신자가 안디옥에 있었다는 증거이며, 또 이방 선교가 이미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일 년간 모여. 바울과 바나바는 이제 외형적으로 완전할 정도의 교회로 성립된 안디옥 교회에서 일 년간 같이 있으면서 교회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다. 즉 이 두 사람은 안디옥 교회의 외형에 걸맞는 내실을 다지기 위해 그곳의 큰 무리를 가르쳤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내가 너회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퍽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명령하셨거니와 실로 바울과 바나바는 그 모든 족속에 포함되는 안디옥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고 또 가르쳐 지키도록 사역하였다. 한편 이처럼 바울과 바나바가 사역한 일 년간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흑자에 의하면 A.D. 43-44년이라고도 한다(Lenski).
제자들이. - 여기서 '제자들'이란 예수의 도를 좇는 성도. 즉 기독교인을 지칭한다(행 6:1 주석 참조). 단 이제까지는 이 용어가 유대인 중의 기독교인들을 지칭하였는데, 본문에서는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지칭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구원의 장벽이 무너졌으므로(18절) 성도들을 일컫는 용어의 장벽도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 여기서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스티아누스'는 영어로는 '크리스찬'(Christian)으로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명칭은 신약에 단 세 번 사용되었다(행 26:28; 벧전 4:16). 그리고 이 명칭은 여러 면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먼저 이 명칭을 누가 붙였는가에 관해서, 첫째는 로마인들이 붙였다는 설이 있고(Meyer), 둘째는 당시에는 그 추종하는 대상의 이름을 따서 추종자들의 명칭을 붙이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그에 따라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무리라는 뜻에서 자연스럽게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Holtgmann. Knowling).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중 두번째 견해를 보다 타당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한편 이 명칭이 경멸적인 호칭이다 또는 아니다에 관한 논쟁이 있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나 신학자 '럼비'(Lumby), '가이로드'(Gaylord)와 같은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기독교인들을 경멸하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주장한다. 사실 아그립바 왕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약간의 경멸적인 뉘앙스가 풍겨지는 것은 사실이다(행 26:28). 그러나 이 용어가 안디옥에서 붙여졌고 또 당시 추종하는 대상의 이름을 따라 추종자들의 명칭을 붙이는 관례가 일반화되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는 경멸적인 호칭이었다기 보다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기독교인들을 지칭한 호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Meyer).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독교인들이 일반인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기독교의 특성이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항상 받아들였고, 저항보다는 순교의 길을 걸었으며, 또한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이유에서 무조건적으로 경멸시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나사렛인', 또는 '갈릴리인'이라 불리웠으나 안디옥에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이름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이는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종교로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한편 이 명칭은 점차 공식화되어 2세기 초에는 완전히 받아들여져 완전한 공식 명칭이 되었다(Ignatius).
11:27-30 안디옥 교회의 구제
앞단락(19-26절)에서는 이방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될 안디옥 교회의 설림과 부총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부흥한 안디옥 교회가 흥년을 당하여 어려옴 속에 있던 모교회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는 아름다온 장면을 소개하고 있는데 크게 다음 두 부분으로 나된다. 첫계는 아가보의 예언이다(27,8절).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안디옥 교회의 흥왕하는 소식을 듣고 몇 사람의 선지자를 보내었는데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가 글라우디오 황제(A.D. 41-54) 시대에 크게 흥년이 있을 것을 예언하었다. 이 예언은 성취되어 팔레스틴 지방에 약 4년간의 흉년이 거듭되었고 이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은 경제적으로 궁핍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방문한 선지자들은 안디윽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아가보는 후에 바울의 투옥도 예언하였는데 이 역시 성취되었다(행 21:10,11).
둘째는 안디옥 교회의 헌신적인 구제 모습이다(29,30절).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의 교회로 설림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바나바와 바을의 가르침을 통하여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것을 구제의 선행으로 실천하였다. 유대교적 전통에서 아직 벗어 나지 못했던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와 쉽사리 영적 일치감이나 주의 형제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었지만. 안디옥 교회는 사랑과 협력의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교회의 일체성과 형제애를 보여준 것이다(엡 1:22,23). 결국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의 안디윽 교회에 복음을 전하여 주고 이방의 안디옥 교회는 복음의 빚을 물질적인 사랑으로 보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여튼 안디옥 교회는 참된 구제의 모범을 보여 주는데 사실 교회의 사명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구제이다.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받게 된다.
① 우리는 모두 복음의 빚을 진 자들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아낍얼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롬 1:14).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교회는 모두 그리스도의 한 지체임을 깨닫고 서로 돕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고전 12:27; 엡 4:4).
③ 교회는 그 본래의 사명을 바로 인식하여 형제와 이웃의 구제에 최선의 노려을 다해야 한다.
11:27 그 때에. -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 공동 사역을 하고 있던 때인(26절) A.D. 43-44년경을 가리킨다.
선지자들. - 신약에서는 본서와(행 13:1; 15:32; 21:9,10) 바울 서신에서(롬 12:6: 고전 12:28; 13:2,8; 14:37; 딛 1:12)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타이'( )는 구약에서 말하는 '예언자'와 같은 용어이나, 신약에서는 사도들 나음으고 인정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고전 12:28; 엡 2:20; 4:1). 이들은 성경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고, 예언을 하기도 한 영감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구약의 선지자들이 대개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이나 오싶 메시야에 관하여 예언한 반면, 이들 초대 교회 당시의 선지자들은 대개 교회와 관련된 일을 예언하였다는 차이를 보인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 이 선지자들이 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갔는지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만 예루살렘 박해로(행 12:1) 인해 환난을 피해 안디옥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KnowlinB). 아니면 천하에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하기 위해 안디옥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28절). 또한 안디옥 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다.
11:28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 -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을 방문한 선지자들 중 한 사람인 아가보(Agabus)는 예루살렘 교회의 선지자로 일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본문에서는 천하에 흉년이 있을 것을 예언했고 행 21:10,11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손에 잡힐 것을 예언하였다. 이 사람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어 어떤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두 예언으로 보아 상당한 예언의 능력을 가졌던 인물인 것으로 여겨진다.
성령으로 말하되. - 선지자 아가보에 대한 이 묘사는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언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선지자 요엘은 그리스도의 시대에 성령이 임하시면 '예언을 하겠다'고 예언하였거니와(욜 2:28-32; 행 2:18) 실로 아가보는 그 예언의 말씀대로 성령의 감동, 감화하심에 의해 예언 하였다.
천하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렌 텐 오이쿠메넨'은 '인간이 있는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 이를 근거로 여기서 말하는 '천하'는 팔레스틴 전지역을 지칭한다는 견해(Torrey)와 로마 제국 전역을 지칭한다는 견해(Knowling, Bruce, Vincent)가 대두되고 있다. 그런데 행 24:5과 눅 2:1의 '천하'를 참조할 때 이 '천하'는 로마 제국 전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기서 '천하'란 어느 한 지역에 크게 흉년이 든 것을 과장해 나타낸 표현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크게 흉년 들리라. - 아가보가 이 예언을 한 시기는 27절에서 '그 때에'라고 한 것으로 보아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던 일 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 때는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의 재임 기간인 A.D. 41-54년 중 어느 한 때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황제의 재임 기간 중에는 역사상 네 번의 큰 흉년이 있었다. 첫번째는 그의 재위 2년에 있었으며. 두 번째는 그의 재위 4년에서 7년 사이에(A.D.44-47년) 팔레스틴에 큰 흉년이 있었다(Josephus). 세 번째는 제 9년에 헬라에 흉년이 있었다(Eusebius). 네 번째는 제 10년에 로마에 흉년이 있었다(Die Cassius, Tacitus). 이 가운데 연도상으로 따져볼 때 본절에서 말하는 흉년은 첫 번째이거나 두 번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두 번째일 가능성이 더 많다.
글라우디오. - 로마 제국 제 4대의 황제이다. 그의 재위 기간은 A.D. 41-54년이었다. 그는 폭군 칼리굴라(Caligula)의 숙부였다. 전숭에 의하면 야심많은 아내가 독버섯을 먹여 그를 죽였으며 그로 인해 전 남편의 아들인 네로가 제위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그는 초기에는 우호적으로 유대를 통치했으나 집권 말기에는 유대인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다(행 18:12).
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 아가보의 흉년에 대한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으며 그에 따라 팔레스틴 지역에도 큰 흉년이 들었다. 이에 다른 지역에 사는 제자들, 즉 이방인 성도들이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 구제 헌금을 거두어 보내 주었다. 여기서 '그 힘대로'에 해당하는 '카도스 유포레이토 티스'는 직역하면 '어떤 사람이 부유함을 따라서'라는 뜻이다. 즉 이는 자자의 능력에 따라 정성껏 성의를 표시한 것을 가리킨다. 이는 각자가 지니고 있던 물질을 제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인 줄로 알고 응당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사용한 아름다운 행위이다. 더욱이 이는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종족 간의 장벽을 깨고 주 안에서 상부 상조한 실로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아닐 수 없다.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 흉년의 피해는 주로 유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더 컸던 것 같다. 이에 이방에 사는 형제들이 유대에 있는 형제들을 도왔다. 유대의 교회는 먼저 영적인 구원의 은혜를 이방 교회에 나누어 주었는데 이제 이방의 교회는 그 유대의 교회가 어려움을 입자 물질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이다.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 여기서 '부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코니안으로 원래는 '봉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원래의 의미는 몸으로 도와 주는 것을 뜻하나 본문에서는 '구제 헌금'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방의 교회들은 예루살렘의 고통받는 형제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정신에 입각해서 구제 헌금을 보낸 것이다. 이 구제 헌금은 고린도 교회(고전 16:1)와 갈라디아 교회(갈 2:10), 그리고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성도들(롬 15:26)이 거두어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초대 교회는 이제 유대와 이방의 벽을 허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 총체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록 각 교회들은 민족과 사상과 언어가 달랐을지라도 그 장벽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영 ․ 육 간에 실천하며 살게 된 것이다.
11:30 이를 실행하여. - 이방의 교회 형제들은 자기 예루살렘의 어려운 형제들을 돕기로 작정한 즉시 그 작정한 내용을 실행하였다. 사도 야고보는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양식이 없을 때 말로만 위로하고 실제로 도와주는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했거니와(약 2:14-17) 이때의 교회들은 실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잊지 않는 살아있는 믿음을 보여 준 것이다.
바나바와 사울. - 각 교회가 모은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에 전달할 대표로 바나바와 사울이 선출되었다. 이로 보아 바나바와 사울은 당시 안디옥 교회의 공식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 당시에는 사울보다도 바나바의 이름이 앞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초기에는 바나바가 사울보다 더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울에게 있어서 이번의 예루살렘 방문은 그의 회심 이후로 행 9:26에 이어 두 번째이다. 바울이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때는 대체로 45년 또는 46년 경일 것으로 추정된다(Lightfoot, Ewald, Ramsay. Harnack).
장로들. - 이 말은 헬라어로 '투스 프레스뷔테루스'이며 '연장자'라는 뜻이다. 이 '장로'란 명칭은 구약 성경에도 자주 나온다. 그러나 구약 시대의 장로와 신약의 초대 교회에서의 장로는 서로 차이가 있다. 구약 시대의 장로들은 가정이나 촌락, 또는 도시와 같은 사회에서 정신적 ․ 정치적 ․ 행정적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예수님 당시에도 장로들은 이러한 지위와 역할을 담당했으며, 지방의 장로들은 회당의 관리와 재판을 주관하였다(막 5:22). 삼하 3장 자료노트, '이스라엘의 장로' 참조. 그러나 초대 교회의 장로들은 교회를 다스리고(딤전 5:17), 가르치는 일을 하였으며(약 5:14; 벧전 5:1-4), 감독의 직분을 수행하였다(행 20:17; 딛 1: 5-7). 이 장로들은 장로의 회(會)를 구성하고 있었으며(딤전 4:14), 사도들보다 아래에 있었던 듯하나(행 21:18; 딛 1:5). 때로는 사도 자신들을 장로라 부르기도 한 것으로 보아(벧전 5:1; 요이․요삼 1절) 뚜렷한 구별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훗날 안디옥의 주교 이그나티우스(Ignatius)에 의해 감독과 장로, 집사가 구분되었으니 이로써 오늘날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직분 제도가 정립되었다. 아무튼 본절에 언급된 '장로들'은 '사도들'이 분명히 아니다. 왜냐하면 행 6:2에서 보듯 사도들은 이미 구제의 일에서 손을 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장로들은 행 6장에서처럼 구제의 일을 위해 선출된 집사 중 보다 덕망있고 믿음의 능력이 있어 장로로 추대된 사람들일 것이다. 혹자는 당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사도들이 핍박을 피해 피신하여 없었기 때문에 헌금이 장로들에게 전달되었다고 주장한다(Lightfoot). 그러나 사도들은 예루살렘 대핍박 때에도 피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아 받아들여지기 어렵다(행 8:2).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는 구제의 일을 전문으로 하는 장로들에게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구제 헌금을 보낸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Ramsay, Bruce).
연구자료
바나바-위안과 격려의 사도
1. 인적 사항
① 본명은 '요셉' 사도들에 의해 '권위자',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란 이름이
붙여짐(행 4:36).
② 구브로 섬 출신의 레위인(행 4:36).
③ 지주 출신.
④ 생질로는 마가가 있음(골 4:10).
⑤ 사도 바울의 초기 동역자임(행 11:25).
2. 시대적 배경
A.D. 30-68년경에 주로 활동합. 이 시기는 오순절 사건과 함께 교회가 태동되기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안디옥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제국 전역으로 복음이 확장되어 간 교회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바나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직접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중심한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으로서, 또 사도 바울과의 제 1차 전도 여행 및 자신의 세계 전도 여행을 통하여 이 시기의 교회의 역사를 누구보다 더 생생하게 목격하였으며 또 직접 체험한 인물이었다.
3. 성품
① 자신의 소유를 팔아 헌금으로 드릴 만픔 헌신적인 신앙을 소유한 자(행 4:7).
② 난처한 바울의 입장을 변호한 것을 볼 때 어려운 이웃의 편에 설 줄 아는 친절하고 인정많은 자(행 9:26,27).
③ 마가의 실수를 용서하고 자신의 선교에 동참시키고자 한 것으로 보아 관대하고 남을 격려할 줄 아는 자(행 15:39).
④ 자신을 신으로 오해하는 자들 앞에서 옷을 찢으며 신이 아님을 호소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겸손함을 지닌 자(행 14:14,15).
⑤ 숱한 핍박과 환난 중에도 끝까지 자신의 직무를 감당한 담대하고 성실한 자(행 11:20-14:21),
⑥ 환경과 여건을 초월하여 이방인에게까지도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보아 전도에 뜨거운 열심을 품은 자(행 14:19-28).
4. 주요 생애
1) 제 1차 전도 여행 이전
① 출생 - -
② 예수의 70인 제자 중의 1인으로 전해짐 - 눅 10:1
③ 예루살렘 교회의 이루원이 됨 AD. 30년 -
④ 밭을 팔아 헌금함 - 행 4:37
⑤ 사울의 회심을 사돋들에게 변호함 AD. 34년 행 9:26,27
⑥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으로 안디옥에 감 - 행 11:20-22
⑦ 바울과 안디옥에서 동역함 AD. 44년 행 11:26
⑧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전도 여행을 떠남 AD. 47년 행 13:1-3
2) 제 1차 전도 여행 이후
①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에 동행함 AD. 47-49년 행 13:4-14:21
② 제 1차 전도 여행 귀환과 안디옥에서의 선교 보고 AD. 49년 행 14:27
③ 개종한 이방인 할례 문제로 총회에서 변론함 AD. 49년 행 15:1-29
④ 총회 결과를 인디옥에서 보고함 AD. 49년 행 15:30-35
⑤ 마가로 인해 바울과 다툼 AD. 49년 행 15:36-38
⑥ 마가와 구브로로 감 AD. 49년 행 15:39
⑦ 바울과 마찬가지로 자비로 선교 AD. 49년 고전 9:6
⑧ 죽음 - -
5. 구속사적 지위
① 12사도 외에 사도로 불렸던 사람으로(행 14:1-14), 초대 교회 내에서 두드러질 정도로 헌신하고 수고한 자(행 4:36,37; 고전 9:6).
② 남을 위로하며 돕기 위해 부름받은 전형적인 평화의 중재자(행 9:27; 11:25,26).
③ 바울의 동역자로서 안디옥 등 이방 선교에 힘쓴 자(행 11:19-26; 13:1-14).
6. 주요 업적
① 자신의 전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고, 남을 돕는 데 앞장섬(행 4:37; 11:27-30).
② 어려움에 처한 바울을 변호하고 마가를 격려함(행 9:27; 15:39).
③ 바울의 동역자로서 제 1차 전도 여행시에 동행하며 사역함(행 13:2-14; 15:1-31).
7. 주요 실수
① 할례 받지 않은 개종한 이방인과의 식사시 외식적 행동을 함(갈 2:13).
8. 평가 및 교훈
① 바나바는 그 이름의 의미처럼 어느 곳에서든지 어려움당하고, 소외당한 자들의 편에 서서 위로와 격려자가 되어 주었다(행 9:26,27; 15:39). 이런 모습은 너무도 쉽게 다른 이의 잘잘못을 판단하고 비판해 버리는 경향이 팽배한 오늘날에 더욱 필요한 태도라 하겠다. 진정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사랑으로 다독거리며 권면하여 공동체 간의 신뢰를 도모하는 평화적 중재자가 필요한 이 때에 과연 당신은 이러한 평화적 중재자가 되고 있는가?
②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와 달란트, 자신의 생애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 주의 일에 헌신하었다(행 4:37; 13:1-15:39). 이같이 자신의 귀한 것을 모두 드리는 전적인 헌신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모습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이다.
③ 바나바는 바울과 자신을 신으로 오해하는 자들 앞에서 옷을 찢으며 애통해 하고 자신은 다만 청지기에 불과함을 피력하였다(행 14:14,15). 이같이 오직 주님만을 높이며 자신은 다만 도구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태도는 오늘날 복음을 전해야할 성도들에게도 꼭 필요한 모습이다.
④ 담대한 복음 전락자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며 권면의 은사가 뛰어났던 바나바도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문제로 시험을 받아 외식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갈 2:13). 이에 성도는 특히 우리를 쉽게 넘어뜨리는 바 '외식적인 신앙'에 대한 경계를 힘써야 하겠다(벧전 2:1,2).
9. 핵심 성구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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