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란 시인
우리 시대의 큰 시인, 큰 스승
허형만 시인
몇 해 전에 나는 『문병란 시 연구』(시와 사람사, 2002)를 펴낸 바 있다. 2001년 8월에 모교인 조선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하신 선생님의 시 세계에 대해 여러 평자들이 쓴 글과 선생님의 문학관, 세계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표적인 글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선생님에 대한 연구의 자료로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 책을 펴낸 더 깊은 속내는 내 나름대로 딴 데 있었다. 다시 말해서 선생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광주․전남을 대표하는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자 큰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중앙이 아닌, 지역에서 평생 동안 교단을 지키시고 문단 활동을 하시다 보니 선생님에 대한 연구가 지극히 미미한 점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 시 문학 사에서 문학을 민주화 운동에 연결 시키고 동시에 교단에서 제자들에게 시대적 양심을 일깨워 주는 영양소로 문학적 삶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신 분이 곧 문병란 선생님이다.
평생을 무등산과 함께 광주를 지키며 문학을 통한 민주화 운동에 몸 바쳐 오시면서 오늘도 우리 곁에 청청한 젊음으로 계시는 선생님. 어두운 시대에 그 시대를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고 오히려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희망과 사랑을 목 놓아 부르신 선생님.
그러한 선생님을 ‘뉴욕 타임즈’는 “화염병 대신 시를 던진 한국의 저항 시인”이라고 불렀으며, 선생님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함께 문학의 길을 걷거나 함께 민주화 투쟁의 길을 걸었던 동지들은 “무등산의 등신대(等身大)”, “무등산의 파수꾼”, “영원히 늙지 않는 끈질긴 대지의 시인”, “거리의 교사” 라고 불렀다.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은 내가 순천 고등학교 학생 때 부터다.
당시 선생님은 조선대학교 문리대 문학과를 졸업하시고 곧바로 순천 고등학교에 부임하셨다. 우리 앞에 나타나신 홍안의 선생님은 이미 시인이셨다. 대학 재학 중 『현대문학』에 김현승 시인의 추천을 받으셨던 것이다.
문예 부장인 나는 『씨크라멘』이라는 문학 동아리를 만들어 선생님을 지도 교사로 모시면서 부터 오직 시 쓰는 일에 몰두했다. 습작이 되었다 싶으면 시도 때도 없이 교무실을 드나들었다. 원지에 철필로 시를 쓰고 등사판에 밀어 묶어낸 동인지를 보신 선생님은 우리들의 정성을 퍽 기특해 하셨다.
순천고에서 순하디 순한 순천 여자와 결혼하신 선생님은 남진의 노래처럼 교문 오른 편 언덕 배기 그림 같은 집에서 살고 계셨는데 습작을 갖고 한 번씩 놀러가면 어린 공주 명아와 정아 곁에서 마냥 행복해 하셨다. 손수 기타를 치며 노래도 불러 주셨다.
그때 나에겐 선생님의 시들을 외우는 즐거움이 있었다. 등단 작인 「가로수」는 물론 「조롱의 새」, 「화병」 등을 외우며 집까지 10리 길을 걸어 다니곤 했다.
“향수는 끝나고/그리하여 우리들은 오후의 강변에서/돌아와 섰다.”―아하, 저 가로수들이 강변에서 돌아와 저렇게 서 있구나―, “시방 너의 타는 듯한 눈에는/마구 일렁이는 푸른 숲 그늘이며/빛나는 강물의 비늘 돋힌 미소가 어린다.”―새가 날아다니며 본 것을 이렇게 쓰는구나―하면서, 나도 그렇게 써야지,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1965년, 중앙대 국문과에 진학한 나는 선생님과 헤어졌다. 선생님이 1년 후 광주 제일 고등학교로 전근 가셨다는 소식을 서울에서 들었다. 그리고 1967년 대학 2학년을 수료한 나는 고향인 순천에 내려가 농사일을 거들다가 시내 ‘청맥다방’에서 개인 시화전을 가진 뒤 곧장 입대했고 병장 시절에야 선생님이 모교인 조선대 교수로 계신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1970년 제대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나는 다시 선생님을 찾아뵐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선생님의 처녀 시집 『문병란 시집』은 선생님의 초기 시들이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었으며 나는 그 시집을 잠시도 손에 서 놓치를 않고 나의 시 수업의 교본으로 삼았다. 선생님의 당시 시 세계는 스승이신 다형 김현승 시인의 시적 영향을 받았으되 나름대로의 순수한 남도 서정이 물씬 녹아든 독자적 신 서정, 생명성을 갖고 있어 상당히 매혹적이었음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후 1972년에 복학 후 방학이 되어 광주로 내려와 선생님을 찾아뵌 어느 날, 시인이라는 이름 하나를 더 보탠 제자에게 술을 사주시며 격려해 주시던 그 모습이 선하다. 특히 다형 김현승 선생님과의 인연을 맺어주신 고마우신 배려는 내 결혼식 때 주례를 서주신 것과 함께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이다.
다형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렇다. 등단 후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나의 손을 잡고 서울까지 가서 수색의 다형 선생님께 나를 인사 시키셨다. 그때 손수 차를 끓여 내놓으시며 다형 선생님은 환한 웃음으로 “병란이는 아들 시인이니 너는 손자 시인이다”고 하셨다. 그 후 서울에 있는 동안 종종 학교 뒤편의 상도동에 자리한 숭실대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거나 수색의 댁으로 찾아뵙곤 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양성우 시인이 앞서 떠나간 학다리 고등학교 국어 선생을 시작했고, 1979년 광주 대성 학원에서 선생님을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뵙게 되었다. 말하자면 사제지간에 함께 강단에 서게 된 셈인데, 당시 숭일고에서 국어 선생을 하고 있던 나를 선생님께서 월급이 나은 학원으로 부르신 것이었다.
그 시절 군사 독재 정권과 유신치하에서 선생님은 이미 ‘거리의 교사’로 표랑의 세월을 어깨에 걸치고 계셨고, 우리들을 가르치시던 시기의 시들을 묶은 『문병란 시집』(1971)의 시 세계는 두 번째 시집 『정당성』(1973)을 비롯, 『죽순 밭에서』(1977)로 와서는 민중 문학 쪽으로 기울어졌다. 시대의 고뇌와 아픔을 가슴에 품고 계셨음을 가까이서 보는 나는 감히 선생님을 경외의 눈초리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지산동 선생님 댁으로 청년Y운동을 함께 한 내자와 함께 찾아 뵈었을 때의 일이다. 서재에서 술을 마시며 당신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눈물겹게 들려주신 것이다.
“1965년 너희들을 졸업 시키고 1년 뒤 광주 일고로 옮겼지.”
“예. 그땐 명아와 정아가 어렸을 때였죠.”
“그럼. 일고에서 존경하는 선배 선생님을 만나 그분의 탁월한 민족 사관에 감명 받았지.”
“그게 뭔데요?”
“백성론이라는 거야. 근데 그때 일고의 지도부에 파벌이 있었어.”
“불의를 못 보시는 성미라 당연히 편치 않으셨겠네요.”
“그래, 마침 주위의 권고도 있고 해서 모교인 조선대 교수로 들어갔지.”
“그곳은 박철웅 공화국이잖아요.”
“그래, 박철웅이란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한테 아부 안 하고는 못 배기는 곳이지. 그래서 저항하다가 뛰쳐나왔다. 그리고 전남 고로 갔어. 전남 고에서도 학생들의 소요가 일었지. 교사들의 지도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는데 그때 주모자로 지목된 일봉이가 퇴학을 당한 거야.(황일봉은 그 후 전남대 총학생 회장을 지냈고, 초대 광주 시의원을 역임한 후 현재는 광주광역시 남구청장이다.) 그래서 나도 일봉이에 대한 책임감으로 사표를 던졌지. 말하자면 제도권교육이 이게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던 거지.”
“아, 그래서 그때부터 선생님을 ‘거리의 교사’라 했군요.”
“그랬는데 이곳 대성 학원 원장인 영중이가 나를 데려와 밥 먹게 해주고 있는 거야.”(김영중 원장은 선생님의 광주 일고 제자였다.)
선생님의 말씀이 계속되고 있는 사이 사모님께서 저녁 식사를 준비해 오셨고, 저녁 식사 후에도 선생님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민중문화운동, 농민운동, 양서보급운동, 교육운동, 앰네스티에 동참하신 이야기들로 그 동안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삶은 당시 내게 있어 생소하면서도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이야기는 소위 ‘농장다리’ 사건의 전말이었다.(광주의 동명동과 지산동을 잇는 다리가 곧 ‘농장다리’다. 지금 법원·검찰청 일대가 내가 서석 초등학교 시절 죄수들의 농장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1977년 어느 날 밤, 제자인 황일봉(현재 광주광역시 남구청장)과 함께 강의를 가시던 선생님은 농장 다리에서 정체불명의 사나이 네 명과 시비를 벌이다가 황일봉은 우산대에 눈이 찔려 실명하고, 선생님은 머리 정수리를 찔려 어려운 뇌 수술 끝에 다행히 목숨을 건지신 거였다. 완벽한 테러였던 것이다. 그날은 둘 다 어지간히 취했고, 나와 내자는 한밤에 선생님 댁을 나섰다.
1980년 5월, 광주 사람이라면 누구든 잊을 수 없는 날. 5·17계엄은 확대되고 대성 학원에서 첫 시간 수업을 시작하려던 날이었다. 군인들이 금남로 쪽에서 몰려온다는 급보를 받은 우리는 학생들을 뒷골목을 통해 전부 빼돌리는 숨가쁜 시간이 진행되었다. 선생님은 이미 5·18민중항쟁 배후 내란 음모 선동자로 수배되어, 여수에 있는 순천고 동기동창 서충석의 집에 은신하고 계실 때였다.(서충석은 선생님이 순천고 담임 하실 적에 그 반의 실장이었다.)
그 뒤 7월 초순이었다. 선생님께서 구속되어 화정동 국군통합병원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사모님을 모시고 선생님이 수감되신 곳으로 면회를 갔다. 면회라고 해야 서로 마주 보는 게 아니었다. 철조망 담장 이쪽에서 우리는 수감된 병원 창문을 우러르며 기다려야 했다. 이윽고 선생님의 모습이 저만치 창문에 나타났고, 선생님은 환하신 웃음으로 손을 흔들고 계셨다. 나도 사모님도 힘껏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눈물을 훔치며 돌아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1980년 9월 중순 경 선생님은 기소 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 나오셨으나 소위 ‘요 사찰 인물’이 되셨고, 학원 교무실과 주변에 담당 형사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있었다. 그 형사와 식사도 함께, 차도 함께, 술도 함께 하시곤 하다가도 불쑥 선생님이 안 보이시면 나를 찾아 어디 가셨느냐고 되 잡곤 했다. 김영중 원장은 기관원으로부터 수차례 협박과 공갈을 당하기도 했다.
그 시절 선생님은 시집 『정당성』 이후 『죽순밭에서』를 재간(1979)하시고, 이어 『벼들의 속삭임』(1980), 『땅의 연가』(1981)를 출간하셨는데 공교롭게도 이 세 권 모두 판금 조치 당했다. 시집 『죽순밭에서』가 도서잡지 주간신문 윤리위원회로부터 판금되었을 당시 선생님은 ‘시집 『죽순밭에서』 판금에 대한 항의서’를 나에게 보여주시며 분개하신 적이 있다.
이 시집에 대한 판금 처분은 황당하게도 “외설스럽고 민족정신을 부정했으며 일본국기를 모독했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특히 시 「일본인」과 「시법」이 적시되었다. 선생님은 ‘항의서’에서 문학의 효용성, 문학작품의 평가성 등을 전제하고 적시된 작품에 대해 시적 정당성과 온당한 의미를 변호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1981년 9월, 나는 목포로 내려갔고 목포 대학교에서 강의하면서 목포 사람이 되어갈 무렵 선생님은 광주를 지키고 무등산을 오르시며 통일을 염원하셨다.
선생님은 6·29선언을 이끌어 내기까지 역사의 한가운데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5월정신 계승에 온 몸을 던지셨다. 각종 강연과 추모제에 선생님이 계셨다. 우리 대학에도 두 차례나 다녀가셨다. 이처럼 전국 어느 대학이든 노동현장이든 심지어 전사협, 국민운동본부, 민교협, 자유실천문인협회 등 재야단체에 이르기까지 민중이 고통받는 자리, 선생님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항상 함께 하셨다.
나는 여지껏 선생님처럼 열린 마음을 가지신 분은 보지 못했다. 아무리 낯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가진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당신의 그늘에 들어서면 따뜻한 웃음으로 품어 주셨다. 특히 제자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셨는데 제자들과 밤새워 술을 마시고 온갖 응석을 다 받아 주셨다. 그 대표적인 예로 김모 시인이 술에 취해 신발을 들고 선생님의 등짝을 두들기며 응석을 부려도 허허 웃으시며 맞고 만 계신 일화는 우리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이다.
‘부창부수’라는 말이 있다. 선생님의 인물이 이러하시니 사모님도 그 어려운 시절, 집에 찾아오는 수많은 제자들, 문청(文靑)들, 민주화 운동의 인사들까지 술 시중 밥 시중을 약하신 몸으로 끄떡 않고 해내시곤 했다. 큰딸 명아나 둘째딸 정아, 그리고 외아들까지 학교 앞에서 형사들의 감시를 받고 자랐지만 오히려 아이들을 격려하시곤 했다. 사실 선생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모님이 아니셨더라면 선생님은 이 시대 이 역사의 큰 시인, 큰 스승으로 우뚝 설 수 없으셨을 것 같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종 강연, 재야 단체 활동, 독일과 미국의 초청 방문 등 하루 24시간이 부족한데도 선생님은 매년 한두 권의 시집이나 산문집을 쏟아냈다. 세상에 철인이 따로 있는가. 나는 선생님처럼 열렬한 시 정신을 지키신 분을 달리 찾아보지 못했다. 그만큼 선생님의 시혼은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 광주의 등불이자 민주화의 화신이었는지 모른다.
선생님의 시 정신, 그것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남이야 뭐라 하든 나로서는 그 근거를 선생님의 제4시집 『뻘밭』(한마당, 1983)에 실린 「시인의 자기 말」에서 찾는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후꾸오까 감옥에서 윤동주 시인이 악형으로 숨질 때 세 번 지른 ‘고함’의 의미를 최고의 시로서 감상하고,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의 가슴에 민족의혈의 총탄을 먹일 때 읊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시’ 「보난대로 죽이리라」를 가장 아름다운 시로서 간직할 때, 나의 시적 변명과 정당성은 성립된다. 이 최상의 거작을 두고 그와 같은 참된 시를 쓸 수 있는 그날까지 열렬한 시 정신을 지킬 뿐······.
선생님은 1980년 농민시집 『벼들의 속삭임』이 계엄시에 압수되고, 1981년 시집 『땅의 연가』가 판매금지 당했어도 지속적으로 『뻘밭』(1983), 『새벽의 서』(1983), 『동소산의 머슴새』(1984),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1985), 『무산』(1985), 『못다 핀 그날의 꽃들이여』(1987), 『양키여 양키여』(1988), 『화염병 뒹구는 거리에서 나는 운다』(1989) 등 1980년대에 만도 자그마치 11권의 시집을 출간하셨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리의 시신(詩神)은 틀림없이 선생님과 술친구이거나 아니면 결의 형제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죽자 살자 선생님께 홀딱 반한 여성 일시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 서야 어찌 시대의 격랑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직설과 패러독스가 샘물처럼 솟아나온단 말인가. 민족 혼을 일깨우고 강력한 도덕적 저항을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힘, 그것은 아마도 선생님의 역사적 소명인지 모른다.
6월 항쟁이 끝난 1988년, 선생님은 다시금 모교의 강단에 서시었다. 조선대에서 박철웅 아성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덕분으로 선후배 동문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실로 15년 만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상아탑에 안주할 선생님은 아니셨기에 전국민주교수협의회(민교협) 공동의장으로 해직교수 문제와 전교조 문제 해결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 광주·전남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을 비롯 각종 단체에서 선생님이 필요한 곳은 회갑을 넘기시고도 지칠 줄 모르고 함께하신다.
문병란, 온 몸으로 시대를 끌어안은 큰 시인. 선생님은 유신체제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화염병 대신 시의 깃발을 높이 들고 싸운 우리 시대의 의병장이시다. 왜적이 우리네 안방을 짓밟던 시대에 만약 호남과 의병이 없었더라면 이 나라 사직이 무너졌듯이 군사독재의 총칼이 순진무구한 시민의 가슴을 도려내던 시대에 광주와 문병란의 시가 없었더라면 이 나라 민주화의 길은 영원히 막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선생님은 노래하신다. 통일의 그날을 그리워하며, 우리네 통일로를 발이 시리도록 내달려 백두산에 오를 그날을 위해, 선생님은 노래하신다. 그 증거가 모교에서 정년퇴임을 하신 이후에도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아무리 쩨쩨해도 사랑은 사랑이다』 등 23권의 시집이다.
끝으로 한 가지 문병란 시인에 대해 짚고 넘어갈 게 있다. 그것은 대부분 독자들이 ‘문병란’하면 오로지 참여 시인으로만 잘못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문병란 시인은 80년 광주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이자 민족. 시인임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문병란 시인의 시를 누구 못지않게 많이 읽었고 고등학교 때부터 가장 가까이서 지도를 받았던 나로선 문병란 시인은 단순한 참여 시인이 아니라 순수 서정 시인임을 더 강조하고 싶다.
가장 최근 시집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시집의 제2부는 바로 문병란 시인의 시적 본령인 자연과 사물 속에 투영된 서정적 시흥을 관조한 시편들로 묶여져 있다.
햇살 눈부신 6월 아침
아카시아 숲 사이에서
포르르 포르르
작은 콩새가 빛살을 쪼고 있다.
찌- 찌- 찌- 예쁜 부리 끝에
모이처럼 쏟아지는 금빛 아침이
작은 깃에 묻어 향그러웁고
새 중에서 작은 새 콩새
산초 씨알만한 작은 눈망울로
당사실같이 고운 발톱으로 움켜잡은
큰 하늘 큰 산이 꽃잎 속에 꼼지락거린다.
작은 것은 아름답다
작은 것이 슬프다
콩새의 울음은 애잔하다
이 아침 신의 저울에 올라 앉은
아카시아 꽃잎보다 더 가벼운
향 묻은 나래짓 앙증스러운
너 작은 몸무게는 얼마쯤이냐.
꽁꽁 숨어라 꽁꽁 숨어라
어디선가 술래가 나를 부르는데
작은 콩새일 수가 없는
내 키는 173cm
내 몸무게는 68kg
아카시아 꽃이파리로는 감출 수 없는
산보다 더 무거운 슬픔을 안고
이 아침 나는
작은 콩새의 날개짓을 엿듣고 있다.
― 「콩새와 아카시아꽃」 전문
이 시는 문병란 시인의 시적 감수성을 가장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문병란 시인에 대해 현실적 저항성의 표징인 거시적 이미지와 시 세계만을 생각하는 독자는 이 시와 같은 미시적 이미지를 통해 서정시의 깊은 맛을 새로이 느끼리라 믿는다.
새 중에서도 작은 새에 속하는 ‘콩새’는 날개의 길이가 10cm, 꽁지가 5~6cm이며 부리가 2cm인 참새과에 딸린 새이다. 주로 초여름에 산기슭의 숲 속에 사는 이 작은 콩새가 6월 아침 아카시아 숲 사이에서 포르르 포르르 날며 눈부신 빛살을 쪼고 있는 모습은 마치 경쾌한 음악을 듣는 듯싶다. “산초 씨알만한 작은 눈망울”과 “당사실 같이 고운 발톱”까지의 미세한 묘사력, 청각과 시각의 절묘한 이미지의 배합, 그리고 콩새와 시인과의 비교를 통한 삶의 성찰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 안에서의 존재가치를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남쪽에는 파란 바람이
일찍 봄을 싣고 와서
밭고랑마다 따수운 안개로
겨울 보리의 긴 잠을 깨우고
울타리마다 동백꽃 망울을 툭툭 터뜨리는 곳
남쪽에는 눈이 고운 사람들이
밭두렁 가에 모여 앉아 들밥을 나누고
정겨운 사투리 오순도순 익어가며
종달새도 흥겹게 노래하는 하늘 아래
넉넉한 인정이 풋나물 향기처럼 싱그럽던 곳
슬픔과 고통 온갖 착취와 난리 속에
줄줄이 엮어가던 역적모의 떼죽음
숱한 흉년과 가뭄 상기 남은 가난까지도
새기고 다듬고 끈기로 삭히어
천 년 사무친 원한 예술의 향기로 꽃 피운 곳
이 곳을 이름하여
개땅쇠의 갯땅 마을 빛 고을
온 천하의 어둠 몰아내고
서로의 뜨거운 가슴 갈아 엎어
밭고랑마다 자유의 씨앗 심은 역사의 고장
그 남쪽에는 황토 무덤까지 살아 숨 쉬며
온 누리 밝은 빛 모여들어 새벽을 연다.
― 「남쪽」 전문
앞의 「콩새와 아카시아꽃」에서 “큰 하늘 큰 산이 꽃잎 속에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고, “작은 콩새의 날개짓”까지도 엿듣던 미시적 이미지의 섬세한 감각은 이제 「남쪽」에서 이미지의 선이 굵어지면서 깊은 역사의식과 애향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 에서의 ‘남쪽’은 ‘남도’이면서 동시에 ‘빛 고을’인 ‘광주’의 일컬음이다. 또한 시인의 탯줄이 묻히고 성장했으며 지금도 몸담고 있는 생 체험의 현장이다. 그러기에 이 시에는 ‘남쪽’의 각 연마다 제각각의 특성을 함축하고 있다. 먼저 1연은 따스한 풍광을 노래하고, 2연은 남도인의 넉넉한 인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3연은 역사적으로 소외 받고 착취 당하면서 생성된 원한을 예술의 향기로 꽃 피운 예향이라는 점, 그리고 마지막 4연은 빛고을 광주가 민주화 운동을 일으킨 역사의 고장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기에 ‘남쪽’은 “황토 무덤까지 살아 숨 쉬며/온 누리 밝은 빛 모여들어 새벽을” 연 땅이라고 찬양한다. 따라서 이 시는 시인의 삶의 역사, 남도 사람들의 삶의 역사를 서정적으로 보여준 표본이다.
직녀에게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남은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연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