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또 하나의 道家
"저 사람이 누군지 아나요?"
딱! 딱!
꺾여 나가는 것은 꽃가지다.
매화(梅花).
한설(寒雪)을 이기고 냉풍(冷風)을 업(業)으로 하여 꽃을 피우는 煉 프痔텝꽃은 지금 잘 정돈되어 화병에 꽂히고 있었다.
꽂힌 꽃으로부터 일종의 기(氣)가 느껴지는 것은 꽂는 이의 수양 탓일까!
연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꽃가지를 쳐나가는 난난의 희고 가는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들리는 그녀의 말은 마치 꽃에서 풍기는 향기 같았다.
"저 사람이 누군지 아나요?"
물론 저 사람이란 침상에 누운 운룡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연비는 힐끗 그를 바라본 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안다고 생각했으나 그 말을 들으니 또 모르겠소."
난난은 담담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이 꽂은 꽃이 잘 꽂혀졌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시선을 요리조리 갸우뚱해 보고는 흡족하게 웃었다.
미처 다 못 꽂은 매화가지 하나를 들고 그녀는 천천히 창가로 가 섰다.
창밖은 분주했다.
검회결선의 최종일을 위해 주객(主客) 모두가 서두르는 모습이 완연했다.
"그는 바로 대봉황천, 아니 화북(華北) 만룡가(萬龍家)의 적통후계자예요
."
느닷없는 말에 연비는 잠시 얼떨떨해졌다.
그녀의 말은 느닷없긴 했으나 실로 엄청난 말이었다.
하지만 난난의 어조는 그런 엄청난 말이라고 여기기엔 너무 담담했 것이다.
그녀는 그런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말이 실감이 안 나나요? 운룡, 그는 바로 진천우도의 이자(二子)인 화천상의 몸에서 태어난 화운룡(華雲龍)이에요. 즉, 만룡가의 장손(長孫)이며 소녀의 사촌 오라비입니다."
비로소 연비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나 곧 급격한 경악지색으로 변했다.
그것은 그와 함께 난난의 소취거(素翠居)를 방문한 화독 혜혜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부릅뜨고 난난과 운룡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잠시, 억겁처럼 무거운 침묵이 좌중을 자욱이 감돌았다.
그리고 연비의 일성 장탄식이 그 침묵을 깨뜨렸다.
"그랬었나……?"
"뜻밖인가요?"
"확실히."
"그럼 이제 당신의 신분을 설명해 주실 차례로군요."
난난은 불꽃처럼 화사한 웃음을 만면에 띤 채 말을 이었다.
"하류급 삼류무사에 불과한 운룡 오라버니를 단숨에 일류급 검도고인(劍道高人)으로 끌어올리고, 사실상 단 한 번의 승리도 불가능했던 그를 불패의 승부사로 조련해낸 당신이에요. 그 몸에서 풍기는 기질과 숨은 무예, 그리고 초연한 기풍을 보고 오래 전부터 당신의 신분이 궁금했어요."
연비는 또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설마 이 괴상한 소녀가 이런 질문까지 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직접 말을 안하시겠다면 제가 하겠어요. 그건 원치 않겠지요?"
연비의 시선이 무거운 암갈빛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난난의 물처럼 고요한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연비는 침중한 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봉황천이 오십 년 동안 이 무림을 영도해온 것은 과연 우연한 이 아니오. 소저 한 사람만 가지고도 그 신화는 계속 이어질 수 있 것이오."
"과찬의 말씀."
"나는 그전에 하나 물어볼 것이 있소."
"그게 뭔가요?"
연비는 힐끗 침상의 운룡을 바라보았다.
"소저는 운룡에 대한 안배를 가지고 계시오?"
"어느 정도까지를 말하나요?"
"최소한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명예와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는 범위이오."
난난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안심해도 좋아요."
"소저라면 믿을 수 있소."
연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듯하더니 이윽고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중주(中州) 신선도(神仙道)에서 파유된 사람이오."
오오…… 중주 신선도라니?
이는 바로 십사계파 중 중원사계(中原四系)의 하나가 아닌가?
화독 혜혜는 얼마나 놀랐던지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난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침착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엄청난 밀계(密戒)가 이루어져 있는 탓으로 신선도의 내력은 말할 없소. 나도 신선도의 후계자는 아니오. 바로 그 후계자를 찾기 위 무림에 나왔소."
그렇다면 중주 신선도도 아직 그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난난이 말했다.
"그렇다면 귀 공이 택한 후계자가 바로 운룡 오라버니인가요?"
"그렇소."
"단순히 그 재질 때문에?"
"재질도 재질이려니와 그의 사문(師門)은 본 계파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소. 즉,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는 중주 신선도의 제일서열 후계자인 것이오."
난난은 피식 웃었다.
"세상에, 운룡 오라버니는 정말 운도 좋군요. 세상 사람들은 평생점 〉넵그 이름조차 듣기 힘든 십사계파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그후계자로 정해 놓았을 줄이야……."
그렇다. 그것은 확실히 보기 힘든 기연(奇緣)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귀 공은 어찌하실 생각인가요? 보다시피 운룡 오라버니는 이미 만룡가의 후계자예요."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오."
"그렇다고는 해도…… 설마 귀 공은 이번 검회참가자 중 운룡 오라버니를 능가할 만한 재질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
연비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곧 긍정의 의미이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 침묵을 이어가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다고 합시다."
"그럼 어떡하실 생각인가요?"
"기다리겠소."
"두 계파의 공동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제일서열의 후계자를 젖혀 두고 다른 후계자를 옹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또한 십사연방천하검회가 두 계파의 한 후계자 인정하지 않는다는 규약은 없소."
연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난난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요. 이제 말이 좀 통하는 것 같군요. 그럼 우선 눈앞에 닥친 만룡가의 일부터 얘기하도록 해요."
"그러시오."
"연대협은 이미 이번 사해대검회의 목적을 알고 계시리라고 믿어요
"바로 지금까지 얘기한 이유가 아니오?"그래요. 후계자의 옹립, 그것이죠. 그러나 저희 할아버지는 그 기 모든 이에게 균등하게 부여했어요. 즉, 검회에서 선발되는 팔대고수 누구나가 만룡가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진천노웅(震天老雄)다운 생각이오."
"그래서 비록 운룡 오라버니가 제일의 적통후계자이긴 하지만 그 역시 팔대고수에 들어야 해요. 그리고 그러자면 오늘의 결선비무에 반드시 참가해야 해요."
연비가 가장 묻고 싶은 것 또한, 바로 그 점이었다.
그는 운룡이 반드시 팔대고수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난난의 견해와는 또 다른 의미로써, 뻗어나는 성장기의 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감(自信感)이라고 그는 생각하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자면 이 자신감이 무예나 초식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굶고 있는 자에게 물고기 한 마리를 주면 하루를 살지만,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면 일생을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까?도대체 이 괴상한 소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운룡은 지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의식도 없는 상태가 아닌가…….'
그의 궁금증에 답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난난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 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본 건데…… 오늘의 비무에는 운룡 오라버니 대신 제가 참가하는 거예요. 물론 그와 똑같이 역용(易容)을 하구요."
무슨 천지개벽의 요술이라도 있는가 기대했던 연비는 순간 입을 쩍 벌렸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똑같이 역용을 한다고 해도 우선 그 체격부터가 판이하게 차이가 난다.
조금만 관찰력이 있는 고수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운룡의 무예는 특이하오. 그것은 어떤 형식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요인들을 스스로 소화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낸 것이오. 그무예는 도저히 흉내낼 수조차 없소."
난난은 그의 놀란 외침에 생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저에게 다 생각이 있어요."
* * *
결선비무 최종일!
드디어 대륙 전체로부터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일만의 정예 중에서 팔대고수를 선발해내는 날이었다.
이 하루를 위해 영욕의 땀과 분루(憤淚)를 삼켜온 이는 그 얼마이팔대고수라는 제한된 보좌에 앉기 위해 부나방처럼 명멸해 갔던 고수 또 얼마인가?
사해대검회는 방대한 규모에 어울리게 무수한 화제와 숱한 진기록남겼다.
최하급의 고수라 해도 최소한 이십 년 이상의 내력을 지닌 고수들혤 活霑沽눼쩝侈樽사실상 단 한 시합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시합이 없었고, 매 시합마다 신기(神技)에 가까운 묘기가 속출되어 오래간만 군웅들이 중원무학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었던 대회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대회 최종일의 막은 올랐다.
"와아……!"
"와……!"
아침부터 싸락눈이 안개처럼 흩날리는 속에서 시작된 여덟 쌍의 군朱ゴ잔오후 신시(申時) 현재, 일곱 쌍의 우승자를 가려놓고 마벙 堀쌍의 대결을 남기고 있는 참이었다.
이때까지 선발된 영광의 우승자들은 다음과 같았다.
제일조 용조, 곤륜의 운연.
제이조 호조, 무애공자 이환명.
제삼조 표조, 녹림총수 묵비향.
제사조 학조, 점창의 수일평(首一平).
제오조 사조, 빙인 엽상의.
제육조 낭조, 귀곡 혈기자.
제칠조 응조, 능파선녀 예소벽.
이들은 모두 공작이 화려한 깃을 활짝 펴듯 지니고 있는 무예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뭇 군웅들을 감탄하게 만든 희대의 기남아들이었모炘
그리고 이 중에는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었다.
우선, 제육조 낭조의 귀곡 혈기자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십대나이십대의 청년고수라는 점이다.
둘째, 빙인 엽상의, 쌍비연 운연, 능파선녀 예소벽 등 소녀고수들숯 諛탕萍銖臼 여성무예의 새로운 차원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셋째, 오대문파의 고수자 중 소림, 화산, 아미의 삼대문파 정예들모조리 탈락하여 비(非)명문계열 고수들이 우세를 보였다는 점이다. 分 칠대고수의 무예가 나이를 막론하고 거의 신검합일(身劍合一 이기어검(以氣馭劍)의 경지에 이르러 전반적인 무예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 등이었다.
특히, 무애공자 이환명의 일종의 예(藝)와도 같은 무술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감탄을 그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제팔조 마조(馬組)의 대결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초검 백리천 대(對) 무불검 운룡의 대결!
이 시합이야말로 단연 오늘의 화제이며, 초점이라 할 수 있었다.
한쪽은 전 시합 내내 일초를 넘기지 않았던 불세출의 검도고수요, 다른 한쪽은 파란만장한 승부를 펼쳐내서 불패의 승부사라는 아호(雅號)를 지니게 된 젊은 기인이었다.
무불검 운룡의 모습이 먼저 대 위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천지가 떠나갈 듯한 환호를 터뜨리며 그를 성원했다.
"이번 대회에선 오직 당신만을 응원하고 있소! 멋지게 하시오! 무불검"
"무당파의 이름이 다시 빛나고 있소. 최후까지 멋진 승부를!"
"와아……!"
"와……!"
아무것도 모르는 현청노도사는 그저 벙글벙글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는 대 위의 늠름한 애제자가 못내 자랑스러웠다.
나이 십육 세의 몸으로 패망한 문파의 이름을 이토록 드날리는 그묀 틈璣 말이다.
물론 가람노사부가 살아 계셔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더욱 좋아하셨 테지만…….
"좋아, 좋아…… 최고다. 우리 제자 최고다……."
반면에 대회 최강의 특수조련인 조(組)라는 별칭을 얻게 된 연비 은 종내 심각한 표정이었고, 두자상, 운연, 예소벽, 혜공 등은 이연비로부터 이 기상천외한 역용술에 대해 귀띔으로 들었는지라 얼굴끝은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저 난난이란 소녀가 운룡의 무예를 제대로 펼쳐낼 수 있을까
'그녀가 원래 늘씬한 키였는지라 높이는 그런대로 속일 수 있다고 도, 옷에다 솜뭉치 등을 적당히 쑤셔 넣어 애써 비슷하게 꾸민 채 군웅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까?'
그들의 이러한 우려와는 달리 대 위의 운룡, 아니 난난은 자못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그녀는 대 위에 올라 심인노선사와 가벼운 인사말을 능청스럽게 주고받은 후, 턱하니 팔짱을 끼고는 태연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다 조마조마하군.""아닐 말이오? 나는 저 소녀가 과연 팔십 근 한철검을 제대로 들었는지 의문스럽소이다."
이때다. 돌연 서쪽 차일 부근으로부터 하늘이 허물어져 내릴 듯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아……!"
"백리천이다!"
"드디어 등장이신가?"
무심히 그쪽을 바라보던 연비 등은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특유의 조용한 걸음걸이로 걸어나오고 있는 그는 분명 백리천은 백리천이었는데…….
보라! 늘 입던 초의, 초혜, 초립은 어디다 팽개치고 엉뚱하게도 도복(道服) 차림이 아닌가?
당건도관(唐巾道冠)에 초리종선(草履棕扇).
우수에는 건곤편괴(乾坤 拐)요, 좌수에는 고신표발(孤身飄鉢)이니, 이는 두 눈을 뜨고 봐도 어김없는 도사(道士)의 복장이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또, 그는 매우 준수했다.
이제 겨우 십칠팔 세 정도로 보이는 그는 한 쌍의 호목(虎目)과 관 같은 피부에 붉은 입술 등을 갖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소년이었벙炘
그는 군웅들의 의아한 표정엔 아랑곳없이 고요하게 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이어, 저 멀리 공증인석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혀 보인 후 사방으로부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본인은 오늘 결선비무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표할까 하오."
그는 수중의 표발, 편괴를 번쩍 들어 보이더니 우렁찬 소리로 말했
"빈도는 일백 년 전 이 땅에서 사라졌던 청성(靑城), 공동(), 공래( 崍), 전진(全進), 이들 사대도가(四大道家)의 공동전인으로서 오늘의 이 일전을 삼가 사대도가의 조사(祖師)들께 바치고자 하오이이다"
목소리는 우렁찼지만 그 눈에는 찰랑찰랑 눈물이 고여들었다.
일만의 경쟁자를 한 자루 초검으로 물리치는 신위를 사해에 떨쳤던 초검 백리천.
아아…… 그랬던가?
그 또한 무당의 운룡처럼 사라진 도가의 후예였단 말인가?
공증인석에 앉아 있던 노고수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으며, 그 박수는 이내 전 군웅을 잇는 대환호성으로 번져갔다.
와르르―
도가(道家)!
백 년의 긴 세월을 이어 이 한 자리에 다시 구현된 위대한 도가의 혼(魂)!
그들은 만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조리 모인 자리에서, 그것도 단징 ㈃玄명만을 뽑는 바늘귀 같은 구멍을 뚫고 두 명이나 최후 결선에 올랐던 것이다.
이후로 누가 감히 도가가 멸망했다고 말하랴…….
백리천은 난난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할 듯 감개에 찬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리다가는 이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정중히 손을 모아 보였다.
"무량수불……."
멋진 승부를 바란다는 뜻이었겠지만 감정이 벅차오르는 듯 그의 도호(道號)는 채 다 이어지지도 못한 채 끝구절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 * *
쿠쿵!
최후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심인노선사가 대 아래로 내려가고 초검 백리천이 칠의삼재(七衣三財)를 정돈한 후 느릿하게 초검을 빼들자 군웅들의 시선은 대 위로 집중되었다.
초검 백리천은 고수자답게 이미 특유의 정세(靜勢)를 완연하게 회복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 대의 중앙에 우뚝 몸을 세웠으며, 그런 그의 일신에서는 칼끝처럼 예리한 예기(銳氣)가 폭사되어 나왔다.
"반드시 회복되기를 빌었소. 이렇게 도우(道友)의 건강한 모습을 되니 다행이오."
난난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는 영락없는 운룡 그대로였다.
"반갑소, 백리도우. 한데 나는 비무에 앞서 한 가지 청할 것이 있소이다."
"그게 무엇이오?"
"논검(論劍), 우리 논검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논검?"
논검이란 입으로 구술(口述)하여 대결하는 비무의 형식을 말한다.
백리천은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난난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핫하…… 백리도우의 검이나 나의 검이나 예리하기는 마찬가지요. 어느 누가 피를 보지 않는다고는 장담할 수 있겠소? 나는 도가중흥의 막대한 책임을 어깨에 진 우리가 그렇듯 유혈대결을 벌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문득 해보았을 뿐이오."
"……!"
"하나 백리도우께서 마다하신다면 기꺼이 진검(眞劍)의 승부를 하겠소이다."
한쪽으론 어르면서 한쪽으론 뺨을 친다.
도저히 상대로 하여금 거절할 수 없도록 만드는 교묘한 화술(話術)이었다.
대 아래의 연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실소를 흘렸다.
'머리, 미모, 말…… 그 모두가 뛰어나군. 어느 누구든 저 소녀를 敵)으로 삼게 된다면 그는 평생 두 다리 뻗고 잠잘 생각을 말아야 것이다. 보아하니 백리천은 승낙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군. 도가중흥 어쩌고 했으니 말이야…….'
과연 백리천은 자신의 초검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인가를 하는 눈치이더니, 이윽고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빈도는 운도우의 말씀을 따르기로 하겠소이다."
두 사람은 즉시 서로를 마주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회규정에도 비무를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법규는 없었다.
합법적인 대결인 것이다.
고요한 침묵 속으로 난난의 낭랑한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
"자, 나는 우선 자오(子午)의 보법을 밟고 낭당추암(狼撞槌岩)의 일식으로 백리도우의 화개혈(華蓋穴)을 노리겠소!"
백리천은 깊게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빈도는 홍궁(洪宮)을 밟아 피하는 동시에 천뢰신지(天雷迅至)의 일식으로 역습을 하오."
"좋은 수법…… 하오면 분수박룡(分水搏龍)의 신법으로 몸을 띄우혤 致嶺綢쭝手輝琵琶)의 공격을 가하오!"
"피하지 않소! 쌍봉관이(雙峯貫耳)의 일식으로 쳐올림과 동시에 비발(飛鉢)의 수법을 배가하오."
"그렇다면……."
군웅들은 논검이라 하기에 처음에는 대결이 싱거워지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들로서는 천금을 주고도 보지 못하는 황금대결이 무산된다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두 사람의 논검은 검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실제 시합보다 더욱 박진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수십여 초나 솟구쳐 나오는 기식절초(奇式絶招)의 행렬!
군웅들은 한쪽이 초식을 토할 때마다 자신 같으면 어떻게 막을지를 궁리해 봤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멋진 수비식이 나오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절초가 이어지면 탄식어린 감탄사를 내불기도 했다.
공증인석에 앉은 노고수들도 귀를 쫑긋 기울이는 눈치였고, 이미 보좌에 오른 칠대고수들도 신중히 경청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것은 연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난난의 무예가 어떤 것인지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초식을 귀기울여 듣자니 이는 자신조차 망설여지는 치밀하고 짜임새있는 수법들이 아닌가!
그는 내심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운연 등도 이미 초조 같은 것은 잊고 두 사람의 입에서 비롯되는 논검에 흠뻑 빠져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수파축류(隨波逐流)의 보법으로 일 장을 솟아 나가오! 동시에 사주칠성(斜走七星)의 검식에다 봉황삼점두(鳳凰三點頭)의 수법으로 양쪽 눈을 노리오!"
"좋구나! 대력천근추(大力千斤鎚)로 급히 몸을 기울이오! 활분음양(劃分陰陽)이 허리를 베어 가오이다!"
두 사람의 초식은 이미 백여 초를 넘기고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대결이었다.
"이보 후퇴 연후 금강서벽(金剛舒壁)!"
"맞받아치고! 만성만화(滿城萬花)!"
"타앗! 중궁(中宮)으로 정면대결이오. 천하도괘(天河倒卦)!"
"여전히 피할 수 없다. 개창망월(開窓望月)! 안에는 구소오악(九掃五嶽)이 갈무리되어 있소!"
순간 백리천의 몸이 흠칫했다.
'개창망월?'
자신의 천하도괘가 상대의 가슴 기문혈(奇門穴)을 노려가고 있으니 상대에게서는 응당 맞받아치는 수나 피하는 수가 나와야 했다.
한데 엉뚱하게도 달을 우러러 창을 연다는, 즉 하늘을 향해 두 팔끝 릿잔개창망월의 초식이 나온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가슴이 텅 비어 자신의 천하도괘는 그의 기문혈을 강타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고개를 갸우뚱하던 백리천의 얼굴이 급변했다.
'오오……!'
그들은 지금 논검을 하고 있지만 진검승부라면 검에는 길이가 있다
그 검이 가슴 위를 향해 뻗어나가면 필시 자신의 천하도괘는 위세를 펴지 못하고 주춤하게 된다.
그때 개창망월 속에 숨은 구소오악의 수법이 자신의 머리를 쓸어오 된다면……?
'피할 수 없다! 멈칫하는 순간, 내 몸은 기울게 되고 기운 몸을 회복하는 동안 상대의 검은 이미 내 머리를 가르고 있을 것이다.'
백분지 일의 승부가 나는 것이 고수의 겨룸일진저, 비록 그것이 찰나를 스쳐 가는 수유(須臾)의 짧은 순간이라 해도 목숨과 결부되는 것이 아닌가.
거듭 안색이 변해가던 백리천은 다음 순간 땅이 꺼질 듯한 장탄식을 뱉어냈다.
"훌륭한 수였소. 졌소……."
순간 장내의 한쪽에서 터질 듯한 일성이 쏟아져 나왔다.
"해냈다!"
연비 등이 일제히 터뜨린 함성이었다.
하나 군웅들은 아직도 백리천이 왜 졌는지 그 영문을 모르는 사람 태반이었다.
그러나 귀에서 귀로, 패인(敗因)이 전해지고 전해져 한두 사람씩 고개가 끄덕여지는가 싶더니, 그 이후로는 장내가 떠내려갈 듯한 환호성이 전 군웅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훌륭하다!"
"최고다!"
"와아……!"
난난은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사방을 향해 가벼운 포권지례를 취해 보이고는 웅크려 앉은 백리천의 몸을 부축해 일으켰다.
"백리도우가 양보해 주신 덕이오."
백리천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심오한 검학(劍學)이었소. 정말 탄복했소, 운도우."
"헛허……."
눈[雪]이 내린다.
이로써 사십오 일간 화려하게 벌어졌던 대검회의 막도 내려지는가?
팔대고수의 선포식에 이어 화려하게 벌어진 소림승의 군무(群舞)와 색 무희(舞姬)들의 쌍검무(雙劍舞)에 이어, 연무장에서는 종회 연회가 푸짐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핫하……."
"으핫하……."
내리는 눈도 멈추었고 연무장에 앉아 술잔을 부딪치는 군웅들의 호기가 자욱이 사방으로 번지고 있었다.
* * *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요, 난난 소저?"
깊고깊은 계곡.
벌거벗은 괴목(魅木)은 하늘을 덮었고 땅에는 허리까지 빠져드는 눈이 잔뜩 쌓인 오지(奧地)였다.
삭풍의 계절이라 나뭇잎 하나 찾아볼 수 없건만 얼키고 설킨 덩쿨만으로도 이미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일신에 각각 백의와 홍의를 걸친 두 명의 미소녀.
백의소녀는 태연히 뒷짐을 진 자세로 구름 위를 걷기라도 하듯 미끄러져 나갔지만, 홍의소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홍의소녀의 등에는 축 늘어진 사람 하나가 단단히 동여매어진 채 업혀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난난과 화독 혜혜였다.
한데 무슨 일인가?
이들은 무슨 일로 이 오지까지 함께 온 것이란 말인가?
"힘들어요, 혜혜? 그러게 내가 그분을 업겠다고 했잖아요?"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는 난난의 태도에 혜혜는 말없이 웃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업겠어요. 저는 이분의 시녀입니다. 마땅히 제 업어야 해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우리는 운룡 오라버니를 반드시 사흘 후까지 다시 원래 자리에 데려다 놓아야만 해요. 그것도 멀쩡한 몸으로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아니라면 이 하늘 아래 그런 능력을 지닌 곳이란 아무 데도 없어요."
"도대체 그곳이 어딘가요, 소저?"
"신녀궁(神女宮)."
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길이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가지를 치고 나가는 곳이 곧 길이었으며, 난난이 한 번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나뭇가지들은 누가 쳐주기라도 한 듯 저절로 부러져 나가곤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눈앞이 뻥 뚫리는가 싶더니 지금까지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방대한 숲이 사라지고 아득한 계곡이 나타났다.
계곡 속의 또 계곡.
혜혜는 계곡 밑을 힐끗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놀란 빛을 떠올렸다.
아스라한 운무(雲霧)만이 용트림하듯 감돌고 있을 뿐, 계곡의 끝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다 왔어요. 바로 이 아래예요. 워낙 사람을 싫어하는 괴팍한 여자들이라 이런 외딴 곳에 살아요."
난난의 입에서 웃음띤 목소리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돌연 혜혜는 자신의 몸이 무엇인가에 이끌려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급히 시선을 들어 바라보니 난난은 담담한 웃음을 띤 채 우수(右手)을 약간 높이 들었을 뿐인데, 그녀와 자신은 어느새 허공에 떠서 서서히 밑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이었다.
'십사계파의 무예는 정말 끝이 없구나. 내 무예를 이 소녀에게 비한다면 그야말로 보름달에 반딧불을 비교하는 격이 될 것이다.'
혜혜의 가슴이 감탄으로 범벅이 되는 사이 자욱한 운무가 그녀의 몸을 휘감아 왔다.
찬바람은 섬세한 몸을 얼릴 듯 불어왔고, 계곡 밑바닥에서는 모골숯 謗?햄하는 괴음(怪音)이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웅―웅―
위에서 짐작했던 대로 과연 계곡은 깊고도 깊었다.
마치 이대로 계속가면 염왕의 유부(幽府)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일각, 또 일각.
그때 돌연, 혜혜의 귓전으로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굉음이 파고 들어왔다.
콰콰콰―
처음엔 미세하게 들렸으나 갈수록 점점 더 뚜렷해지고 분명해지는 소리는…….
'물소리!'
그렇다. 그것은 놀랍게도 물소리였다.
아니, 거대한 물줄기가 무엇인가에 부딪히는 소리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 되리라.
혜혜는 돌연 섬뜩한 물방울들이 자신의 얼굴에 부딪히는 것을 느꼈다.
바로 눈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했던 운무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언뜻 시야에 들어온 광경!
콰콰콰―
쿠쿠쿵!
오오…… 거대한 폭포.
그렇다. 아득한 곳으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그 물줄기는 바로 폭포모 틈璣
혜혜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지하로 삼백여 장(丈)은 충분히 내려왔으리라 짐작했더니, 그 아혤 肩링殷장엄한 폭포가 있을 줄이야…….'
계곡의 밑바닥은 그 색깔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무튀튀한 연못이었다.
'거대한 폭포가 이렇듯 쉴새없이 퍼부어 내리고 있는데도 수면의 양은 조금도 불어나지 않고 있으니…… 저 많은 물들이 다 어디로 가 것일까?'
혜혜의 의문이 채 다 가시기도 전에, 돌연 난난의 입에서 한소리 청아한 교갈이 터져나왔다.
"하앗!"
순간 혜혜는 자신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기라도 한 듯 정신없이 앞으로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눈앞으로는 장엄한 폭포 줄기가 화살처럼 쏘아져 다가왔다.
혜혜는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등의 운룡을 추스려 업었다.
촤악―
쿠당탕!
도대체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신법을 펼친다고 펼쳤는데도 워낙 폭포의 압력이 거세어 혜혜는 나뒹굴고 말았다.
그녀는 엉덩이에 둔한 통증을 느끼고는 부르르 몸을 떨며 눈을 떴
폭포의 뒤, 그곳은 놀랍게도 하나의 거대한 동굴이었다.
혜혜는 이 신기한 일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다가 어느새 저만큼 걸어가고 있는 난난을 발견하고는 급히 그 뒤를 따라 줄달음질쳤다.
바로 그때, 돌연 한소리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정지!"
외침과 더불어 두 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동굴의 아득한 천장으로부 바람처럼 날아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