겠는가. 그가 제도될 수 있는 기틀이 있으면 이내 이 일을 보게 된다. |
또 이 참 성품을 관하여 관행즉(觀行卽)과 상사즉(相似卽)에 들을 수 있으면, 이로 인하여 반드시 여래의 멸도(滅度)를 얻게 되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여섯 감관[六根]의 청정함을 밝히면서 이르기를 “혼자만이 스스로 분명히 알며, 그 밖의 사람은 못 보는 바다”라고 했다. |
경에서 “또 4해의 큰 바닷물을 한 털구멍에다 거두어들인다”고 함은, 정보(正報)에서 자재함을 얻는 것이다. 만일 바닷물의 불가사의한 참 성품을 회통하면 바로 이것이 한 터럭의 부사의한 참 성품의 것으로서, 바닷물을 한 털구멍에 들이되 정보의 몸에서 방해하거나 손해하는 바가 없다. |
『보행기석(輔行記釋)』에서 이르기를 “또한 한 생각의 찰나 동안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바에 결합시키기 때문에 작다고 말한다”고 했다. 곧 이 한 생각은 법신과 온갖 불법을 두루 갖추었으며, 바로 이것이 수미산의 큰 것을 용납할 수 있고 크고 작은 것이 항상 두루하여 본체[理]와 현상[事]이 걸림 없으며 현상과 본체가 본래 상즉(相卽)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번뇌를 끊지 않으면서 열반에 든다. 다만 범부의 한 생각인 찰나의 마음에 생각하기 어려운 법신의 체성이 두루 갖추어졌음을 가리킬 뿐이니, 본래부터 서로가 존재[相在]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방편교(方便敎) 가운데 있는 사람은 서로가 존재한 부사의한 도에 미혹하므로 비록 듣는다 하더라도 언제나 해탈과 미혹의 갈래길에 머무르므로 별교(別敎)의 도중에는 예전 그대로 다른 알음알이를 둔다. 오직 원교(圓敎)에서만이 처음과 마지막이 한결같기 때문에 오분법신(五分法身)은 범부의 소질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
그런 까닭에 이르기를 “여래의 마음을 보고자 하거든 중생의 마음만을 자세히 살피라”고 했다. 곧 모든 부처와 중생은 이름이나 마음은 언제나 뜻[旨]에 계합되고, 유식(有識)과 무정(無情)은 바로 이름이지만 법은 본래 근원을 같이 한다. 명호(名號)를 인정하는 데도 세상 이치[世諦]는 차별을 이루고, 체성을 관(觀)하는데도 참된 문[眞門]은 동등하다. |
『법화경』의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에서 이르기를 “보살은 깨끗한 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