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발표문) 합천, 그 선비정신과 문학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합천의 지형 및 산수 개황 합천(陜川)은 경상남도의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남으로는 창녕군, 의령군과 서쪽에는 거창, 산청군과 접하며, 북으로는 경상북도 고령, 성주군에 접하고 있다. 동부를 제외하고는 높고 험한 산지가 중첩하며, 동부는 낙동강이 인접하여 흐르고 북쪽에는 경남과 경북 도계에는 유명한 가야산(伽倻山-1,430m) 줄기를 본맥으로 하여 매화산과 거창군계의 비계산, 두무산, 오도산 그리고 산청군계의 황매산(黃梅山-1,108m)이 위치하고 있으며 악견산, 금성산, 허굴산, 의룡산과 북부의 가점산, 미숭산, 남쪽 군계의 자굴산, 미타산 등의 준봉이 제각기 정기를 자랑하고 있다. 이와 같이 크고 작은 수많은 지맥이 북부에서 동남으로 향하여 경사는 완만하나 높고 낮은 산맥이 첩첩으로 이어져 들판은 협소하다. 합천의 주요 수계 중 직할 하천 황강(黃江-연장 111km, 유역면적 1,332km²)은 낙동강의 지류로서 거창군 덕유산에서 발원, 여러 계수를 합하여 봉산면에서 남으로 꼬부라져 합천읍에 이르러서는 군 중심부를 관류하면서 율곡면에서 사행한 뒤 청덕면 적포리에서 낙동강 본류에 합류한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황강은 17개읍면 중 6개면을 남북으로 관통하므로 강의 흐름에 따라 행정지역과 생활권이 분할되어 있는 곳이 많으며 강폭은 넓으나 수심은 얕은 편이다. 합천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신라 초기까지 대가야국(大伽倻國)에 속했는데 대가야국에서도 가장 큰 고을이라는 뜻으로 대야주(大倻州)라 불렀다고 한다. 대가야국이 신라와 합병 후에도 지명은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도독부를 두고 백제를 견제했다고 한다. 신라 후기 제35대 경덕왕(757년)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현 합천군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는 황강의 바른 쪽에 위치한 지역이라는 이유로 강양군이라 지칭하였다. 그리고 고려 때는 현종 9년(1018년)에 현종의 생모 효숙왕후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군을 주로 승격 시켰는데 그때는 거창, 함양, 산음, 가조, 신반, 초계, 야로, 가수, 삼지, 단계, 함음, 이안 등 12개 현을 합주(陜州)에 소속으로 하여 효숙왕후의 친정부모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현재의 합천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합주를 합천군으로 강등하고 협천(俠川)이라 하였으며 협천은 좁은 내라는 뜻으로 이 지역이 산이 많고 들판이 없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계곡이 많다는 뜻과 부합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1914년 3월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분지를 이루고 있는 초계와 삼가가 합천군으로 편입되면서 좁은 계곡 또는 좁은 내라는 뜻에 맞지 않다하여 “세 개의 고을이 合하여 이루어진 곳”인 합천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한자식 표기방법은 그대로 존속하나 말할 때와 읽을 때는 “합천”이라고 했다. 현재 행정구역은 1979년 합천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1읍 16개면이 되었다. 또한 이곳은 내륙에 위치한 관계로 한서(寒暑)의 차가 심한 편인데 2010년도 기준 기상개황을 보면 연평균 기온은 13.2˚C, 최저기온은 -13.2˚C, 최고기온은 36.5˚C 라고 한다. 한편 자연경관과 사적(史蹟)을 살펴보면 가야산 국립공원은 경관이 수려하고 웅장할 뿐만 아니라 해인사와 영내의 많은 문화유산을 안고 있어서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가야산은 면적이 79,235km²이며 용문폭포, 농산정, 낙화암, 홍류동 용기폭포 등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그리고 황매산 군립공원은 기암절벽의 비경 속에는 사적 131호인 영암사지와 3층 석탑, 국사당의 문화유산이 있으며 해마다 열리는 ‘황매산 철쭉제’는 이제 전국 규모의 잔치로 변모한 대축제이다. 최근에 와서 이곳의 명물로 등장한 인공호수 합천댐이 있다. 첩첩산중에 바다와 같은 호수가 있어서 ‘황강의 기적’이니 ‘산중 바다’, ‘젖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란 수식어가 있을 정도의 댐으로서 홍수 조절 기능과 함께 연간 10만kw의 전력을 생산하는 대규모의 발전소로서 자연경관도 수려해서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2. 가야산 해인사와 팔만대장경 합천에서는 전국에서 유명한 국보 제32호인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가야산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중인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도 하며, 또한 판수가 8만여 판에 이르고 팔만 사천 번뇌에 대치하는 8만4천 법문을 수록하였다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의 침입으로 현종 때의 초조대장경판이 불타버려 다시 새긴 대장경이므로 재조대장경판이라고 하며,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해인사 대장경판이라 불리고 있다. 이 대장경판의 수는 일제 때 조사한 81,258장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대장경판이 아닌 조선조 때 판각된 것도 포함된 통계이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24cm내외, 가로70cm 내외이고 두께는 2.6cm 내지 4cm이다. 무게는 3kg내지 4kg이다. 대장경의 판각을 위해서는 국가에서 대장도감이란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총괄하고 실제적인 판각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이러한 것은 경판의 간기(刊記)와 경판에 새겨져 있는 각수(刻手)를 조사하여 얻어낸 결론이다. 대장경판의 권말에는 을묘해 고려국가대장도감봉칙조조 등으로 간기가 기록되어 있고 각 경판의 권두제(卷頭題)나 권미제(卷尾題) 아래에 각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대장경판의 간행기록을 보면 고려 고종 24년(1237)부터 35년 (1248년)까지 12년 동안 새겼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 16년이 걸린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준비기간을 합산한 것이며, 고려대장경판각 사업은 초조(初造)대장경이 불타버린 이듬해인 고종 20년(1233)경에는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새긴 대장경판은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대장경판의 특징은 무엇보다 이 사업을 주관했던 당시 개태사 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 등을 참고하여 내용을 비교하여 오류를 바로 잡은 데에 있다. 이때 수정한 내용은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 대장경판은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다가 신원사를 거쳐 태조7년 (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져 오늘까지 보관되고 있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판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일 뿐 아니라,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대장경판이다. 또한 이 대장경은 대장경 간행 역사에 있어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판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1614년에 이 대장경을 바탕으로 하여 대장경 <종존판>을 새기다가 중도에서 포기한 일이 있고 그 후 신연활자로 대일본교정숙쇄판대장경(1880~1885), 대일본속장(1902~1912), 대정신수대장경(1924~1934)의 바탕이 되었으며 중국에서 불교대장경(1979)과 현재 간행하고 있는 불광대장경(1983~현재)의 바탕을 삼고 있을 정도로 그 내용이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대장경판은 수 천 만개의 글자가 하나같이 그 새김이 고르고 정밀한 서각 예술품으로 우리 민족이 남긴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이 대장경을 보관하는 해인사는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법보종찰이다. 신라시대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802년 10월)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우러져 연출하는 설경(雪景)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부속암자로서 원당암(願堂庵)을 비롯하여 홍제암(弘濟庵), 용탑선원(龍塔禪院), 삼선암(三仙庵), 약수암(藥水庵), 국일암(國一庵), 지족암(知足庵), 희랑대(希郞臺), 청량사(淸凉寺) 등이 산의 계곡 곳곳에 산재해 있다. 문화재로는 해인사대장경판(海印寺大藏經板, 국보 제32호), 해인사장경판전(海印寺藏經板殿, 국보 제52호), 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 보물 제128호), 치인리마애불입상(緇仁里磨崖佛立像, 보물 제222호), 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願堂庵多層石塔및石燈, 보물 제518호)등이 남아 있다. 여기 해인사에는 동방문학의 종조(宗祖)로 모시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솔처자 입가야산(率妻子入伽倻山)하여 둔세불출(遁世不出)하고 마침내 신선이 되어 지금도 청학(靑鶴)을 타고 가야산 아래로, 해인사로 오르락한다고 사서(史書)에서 전하고 있다. 고운은 일입청산 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이라는 입산시(入山詩)와 같이 가야산 해인사를 최후 종언지처(終焉之處)로 삼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3. 고고(孤高)한 선비 정신과 남명(南冥) 합천에서 선비를 논한다는 것은 남명 조식(曺植-1501~1571) 선생을 배제하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본관 창녕(昌寧). 자 건중(楗仲). 호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김우옹(金宇翁) ·곽재우(郭再祐)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이다. 삼가현(三嘉縣:지금의 합천) 토골(兎洞)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20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고, 25세 때 『性理大全』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짖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45세 때 고향 삼가현에 돌아온 후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살면서 제자들 교육에도 힘썼다. 1548~1559년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단성현감,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단성현감 사직 때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국왕 명종과 대비(大妃) 문정왕후(文貞王后)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렇게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處士)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1551년 오건(吳健)에 이어 정인홍(鄭仁弘), 하항(河沆), 김우옹, 최영경(崔永慶), 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德山洞-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講學)에 힘썼다. 1566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받고 왕을 만나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즉위한 선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에는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후인 1576년 그의 제자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천서원을 건립한 데 이어 그의 고향 삼가현에 회현서원(晦峴書院-뒤에 龍巖書院)을, 1578년에는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대에 대북(大北) 세력이 집권하자 조남명의 문인들이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세 서원들이 모두 사액되었고 남명에게는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만큼 사화가 자주 일어난 시기로서 훈척(勳戚)정치의 폐해가 극심했던 때였다. 그는 성년기에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老莊的)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하였다. 즉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하여 경으로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외부 사물을 처리해 나간다는 생활철학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초학자에게 『心經』 『太極圖說』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心性)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李滉)의 교육방법을 비판하고 『小學』 『大學』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우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겨놓은 기록 곳곳에서 당시 폐정(弊政)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 ·합천 등지에 모여 살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 유학의 두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홍 등 남명의 문인들이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남명에 대한 폄하(貶下)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南冥學)은 그 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저서에 문집 『남명집』과 그가 독서 중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學記類編』이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 『勸善指路歌』 등이 있다. 남명의 학문은 경사자집 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위의방, 수학, 궁마, 행진, 진수에 이르기까지 광범했고, 실천궁행의 학풍을 이루었으며 그를 덕천서원과 용암서원에 배향하였다. 또한 정인홍(鄭仁弘) 선생이 있다. 내암(來菴) 정인홍(1535~1623)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의병장, 정치가로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이다. 삼가현감을 역임한 禧의 증손으로 가야면 사촌리(옛 야로현)에서 출생. 어릴 때 남을 압도하는 기상이 있었고 5, 6세 때 작문하는 영특함을 보였다. 해인사 등 인근 사찰에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갈천 임훈 문하에서 잠시 수학하기도 했다. 15살 때쯤 남명 조식이 그의 고향인 가야현 우동에 환거, 뇌룡정, 계복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자 그 문인이 되었다. 남명은 그의 비범함을 사랑하여 공부를 가르쳤으나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명리를 탐하는 길은 걷기 싫다하여 과거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31세 때 가을 김해 산해정에 있는 남명을 찾아뵙고 보름 동안 머물다가 돌아올 때 격치성정가, 대학입조가를 지어주어 받아온 그는 35세 때 문경호 등 인근 합천의 다수 사류들이 급문해 옴으로 그의 문인집단이 형성되기도 했고 36세 대 덕산의 사륜동에서 치병중인 남명을 찾아가 간병하고 임종을 지켜보았는데 이때 남명은 그에게 출처의 신중함과 경의에 진력할 것을 당부했다. 38세 때 독실한 효제와 뛰어난 인격으로 탁행지사에 발탁되어 황윤현감이 되고, 41, 42세 때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43세 때 영천군수가 되어 출사했으나 민을 우선으로 한 자신의 치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낙향했다. 45세 때 선조의 계속된 부름으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당쟁에 더 이상 휩쓸리기 싫어 낙향했다. 그는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함.)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당하였으며, 끝내 신원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일찍이 그를 평하여 ‘강직하나 식견이 밝지 못하니, 용병에 비유한다면 돌격장이 적격이다.’라고 하였다. 강경한 지조, 강려(剛戾)한 성품, 그리고 지나치게 경의(敬義)를 내세우는 행동으로 좌충우돌하는 대인관계를 맺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저서로는 『來菴集』이 있다. 이 밖에도 충절과 선비정신으로 합천을 위해 고고한 맥을 이어준 충신과 선비들은 이희안(조선 중기 학자, 호 황강黃江)), 무학대사(고려말 이조초 고승(高僧)) 그리고 신라 선덕왕 때 백제의 윤충과 결사 항전했다가 전사한 죽죽(竹竹)장군이 있다. 4. 합천 문인과 문학의 재조명 합천 출신 문인으로는 한국문단의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가, 아동문학가 이주홍(李周洪-1906~1987)선생을 먼저 꼽는다. 그의 호는 향파(向破). 1925년,『신소년』에 동화 「뱀새끼의 무도(舞蹈)」가,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가난과 사랑」이 입선되고 『女性之友』에 「결혼전날」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고 문학가로서의 검증을 받았다. 이후 그는 50여년 동안 소설을 비롯하여 수필, 시, 희곡, 동화, 동시, 중국 고전의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그의 소설은 노경(老境)에 접어들면서 더욱 완숙하고 관조의 깊이를 더해갔는데 역사적 체험에 대한 통찰과 현실문제에 대한 직시(直視), 인생 제반문제에 대한 관심 등이 결코 격양(擊攘)되지 않고 치밀한 구성이 논리적으로 정확한 문장, 객관적 묘사의 방법을 통해서 침착하고 세련되게 작품화하고 있다. 그는 부산수산대학교 교수로 에서 재직하면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1972년 정년 퇴임하여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동인지『갈숲』을 창간하고 더욱 왕성한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단편「오나구상」「김노인」「늙은 체조교사」「유기품」「불시착과 중편」「어머니」「아버지」가 있으며 작품집으로는 『조춘(早春)』『해변』『풍마(風魔)』『어머니』등이 있고『진달래를 주제로 한 명상』등 5권의 수필집과 다수의 동화집, 고전소설의 번역 등이 있다. 그는 부산시문화상, 경남문화상과 대한민국예술원상, 대한민국문학상 본상, 한국불교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타계 11주기를 맞아 ‘98년 올해의 아동문학가’로 선정되어 지난 98년 5월 23일 서울 한글회관에서 시상식과 함께 ‘이주홍 문학’에 대한 심포지엄이 열려서 그의 문학성과 합천인의 긍지를 높혔다. 아아라이 푸르런 하늘을 이고 / 뫼 천 년 물 천 년에 터잡은 이곳 서으론 황매산성 동으론 낙동 / 쓰고 남아 쌓도록 기름지구나 내 고장은 합천땅 열일곱 집이 / 한 식구로 모여서 번연하는 집 이것은 이주홍 선생이 작사한 ‘합천군민의 노래’ 일절이다. 그의 고향 사랑이 듬뿍 배인 노래로 즐겁게 불렀던 일이 회상되며 지금도 군민들이 행사장에서나 기념식 때 부르고 있다. (1)그처럼 자기에게 고맙게 해주는 성녀가 또 이만큼 자신에게도 충실한 인간이었구나 생각이 되니, 황민은 갑자기 성녀가 소녀 같은 귀여운 생각이 들면서 그를 처음 해인사에서 만나던 때가 회상 되었다. (2)사자(死者)는 말이 없다. / 그는 성녀를 못다 사랑한 것을 미련으로 안고 갔을까. / 작지만은 인기 있다고 생각했던 미술교사 시절을 인생의 전 재산인 것으로 만족하고 갔을까. (3)황민은 장사를 지낸 뒤 집을 말끔히 팔고 행방을 감췄던 성녀가 해인사 문주암의 중이 됐다는 소식은... 이 작품 소설 「낙엽기」중에서 옮긴 것이다. 정 신 문학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1)에서는 소년적 환상의 확대, 이주홍의 문학적 지향에 하나의 신기원을 이룰만큼 자기적 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리라는 점을 시사하고 (2)의 상황은 소녀적 무책임과 노인적 허무욕과의 관계가 결코 평등할 수 없다는 점을 강변하고 있으며 (3)은 이를 통하여 확인되는 결론은 합리성의 순환’이라고 평하고 있다. 한편 신동한 평론가는 ‘동인지『갈숲』이 다른 동인지에 비겨 비교도 안 되게 장수를 누리고 읽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여러 글을 싣고 있는 것을 보면서 향파의 나이와 걸맞지 않은 무서운 정열을 나는 가끔 생각할 때가 있다. 이러한 힘이 오늘에 이르도록 작품에도 그대로 드러나 다른 연로 작가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경지를 가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로 그를 칭송하고 있다. 이주홍 선생은 1906년 5월 23일 경남 합천읍 금양리 사동마을에서 태어나셔서 1987년 1월 3일 부산에서 돌아가셨다. 2004년 5월 5에 부산 동래구 온천1동에 ‘이주홍문학관’이 개관되었으며, 2011년 12월 28일에는 이곳 고향 합천에 ‘이주홍어린이문학관’을 개관했다. 현재 합천읍 금양리 사동마을 고향집 터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이주홍 어린이문학관이 있는 보조댐 공원 내에 생가를 재현해 놓아서 문학관 관람과 함께 관광객이 체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읍내 근방 황강변 일해공원에는 향파의 시비(시집 : 風景)와 좌상이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최인욱(崔仁旭-1920~1972) 선생이 있다. 그는 본명이 상천(相天)이며 호는 하남 (河南)으로 해인불교전문학원을 거쳐 일본 니혼대학 종교과를 중퇴하고 1938년에 매일신보에 단편「시들은 마음」이 선외가작으로 입선하고 다음 해에「산신령」이 가작으로 입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이어서 산사의 정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두 남녀의 순정을 그리면서 자연과 인간과의 합일을 그린 비극적 낭만소설「월하취적도」를 발표하여 작가적 위치를 굳혔다. 그후 「멧돼지와 목탄」「개나리」「두 상인의 기록」「동자상」「속물」「인생의 그늘」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그는 초기에는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력의 신비와 환희를 찾아내려고 했으며 6. 25동란 이후에는「목숨」「정찰삽화」 등의 전란이 반영된 작품도 발표했다. 그러나 점차 역사적 복고주의의 경향으로 돌아가「임꺽정」「만리장성」등의 많은 역사소설을 남겼다. 작품집으로『저류(底流)』가 있다. 다음, 손동인(孫東仁-1924~) 선생은 시인이며 소설가, 아동문학가로서 호는 수평구 (秀平丘). 경성사범대학을 중퇴하고 1950년 『문예』에 시 「산골의 봄」「별리(別離)」가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에 김태홍 안장현 등과 동인지 『詩文』을 창간하여 향토적 자연과 생활을 서정적인 토착어로 표현한 많은 시들을 발표하였다. 한편 1950년대말부터 소설로 전향해서 단편 「인간경품」「교육칙어」「과부촌」등 항일 민족적 리얼리즘으로 현실의식이 농후한 저항적, 비판적인 작품들을 발표했다. 또한 동화에도 관심을 보여 지방의 전래동화를 채집한 『한국전레동화집』을 간행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단편집『인간경품』과 동화, 동시집이 다수 있으며 1961년에 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한편 현존하는 문인들의 면모는 한국문인협회 합천지부에서 활동하는 문인들과 출향문인으로 대별해서 생각하게 된다. 고향을 지키는 문인들은 역대 지부장인 윤한무(창립), 김해석(작고), 손국복, 김숙희(현재) 시인 외에 김옥란, 송영화, 심성희, 임재근, 임춘지, 최병태, 허숙자, 강석정, 등이 활동하고 있다. 합천문협은 1993년 1월에 창립하여 현재 『합천문학』제21집을 준비하고 있으며 지난 5월에는 ‘합천문학 콘서트’를 이주홍문학관에서 개최한 바 있고 매년 백일장과 시낭송회 등을 개최하여 문학적 업적을 쌓아가고 있다. 그리고 출향문인들은 서울에서 ‘재경합천문인회(초대 회장 김송배)’를 결성하고 작년에 『재경합천문학』을 창간하여 우리 문단에 관심이 집중된 바가 있다. 고향을 떠나서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생활하는 문인들이 모여 ‘우리는 남명 조식 선생의 대유학자 정신을 우리 합천인들에게 학문적, 정신적 지주로서 우리 합천의 귀감이 되’는 것을 이어받아서 ‘저마다의 문학을 위해서 분투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통섭(通涉)의 장을 마련하고 고향의 안부와 문학에 대한 정담을 나누고자’ 하는 여망이 결집되었다. 여기에는 이창년(삼가), 김송배(용주-현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안병국(적중), 이태기(초계), 송귀영(대병), 윤행원(초계), 문경자(율곡), 이자야(율곡), 진화자(합천), 김양화(삼가), 류상훈(용주), 류해춘(묘산), 박갑수(초계), 송향섭(대병), 여윤동(대병), 주영애(대양), 하영애(용주) 등의 문인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두 달에 한 번씩 월례회를 통해서 문학과 인생에 대한 담론으로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경상도 옛 대야성터에 올라보라 우리의 젖줄 황강 은빛 물결이 둥둥둥 죽죽(竹竹)의 북소리로 흐른다 대야벌 옥토 위에 물길을 트는 날 조상들 천년 슬기의 혼불을 지폈노니 영겁의 지혜 신비의 메아리는 가야산 영봉 서운(瑞雲)으로 감돌고 해인사 팔만대장경 은은한 독경 소리 홍류동 계곡 무지개로 어리어 오늘도 합천호반에서 영롱한데 아, 함벽루에 풍류를 새긴 시인 묵객들 고고한 선비의 흔적들만 유장한가 용주골 산중 황계폭포 안개 물보라 온유한 합천 사람 영혼으로 비상한다 백 리 벚꽃길따라 황강물로 흘러보라 열 일곱 골골마다 흥겨운 풍년가 풍요로워라. 번영하라. 영원하라 황매산 철쭉이 전설로 화사하다. --「합천」전문 이 작품은 한국시인협회에서 주최한 ‘<우리 마을 시집>-경상남도 합천군 편’에 수록한 작품이다. 문학성보다는 고향을 홍보하는 내용으로 고향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한국시협의 기획행사의 일환으로 청탁된 작품이다. 이밖에도 재부합천문인회의 활동이 박달수 회장과 강길환, 강영옥, 박태일, 이근대 등의 문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합천 문단과 문학의 전망은 지금까지 살펴본 선비정신과 접맥(接脈)하여 현대문학의 발전에 계승함으로써 긍지와 활로를 개척하는 근원으로 정진하면 장래는 밝으리라 생각된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인본주의의 실현과 진선미(眞善美)의 추구이므로 고향을 사랑하고 고향의 소중한 체험을 통한 이미지의 창출로 문학성의 구현을 위해 지적(知的)인 역량을 발현해야 한다는 명제(命題)를 충실하게 이행해야 하는 것은 재론(再論)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 밖에도 자료 수집의 불충분과 견문이 넓지 못해서 혹시 언급에서 누락된 문인들이나 게재에 착오가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차후에 보완하여 좀더 정확하고 명료(明瞭)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하면서 발표를 마친다. =참고문헌= * 합천문화원 『陜川郡史』 1995. * 합천문화원 『陜川의 濡脈』 1998. * 합천문화원 『陜川文化』 1999. * 한천석. 권영호 『陜川海印寺誌』 1994 * 어문각 『한국문예사전』1991. |
첫댓글 아래는 합천 대양 무곡의 유학자이신 저의 조부님이십니다. (추봉문집 국역이 2021년 5월에 편찬되었습니다)
(추봉 남승우 (1892.5.23~1964.2.25) 선생은 직제학공파이시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초명은 형우(亨祐)이고, 자(字)는 경진(敬眞)이며 호(號)가 추봉(秋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