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천지위(不遷之位)" 또는 불천위, 다른 한편으로는 "부조위(不祧位)" 라고도 불리는 이 말은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사람에 대해 죽어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별도의 사당(祠堂)을 짓고 영구히 보존관리를 하면서 제사를 지내도록 왕이 허락/지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고경명 할아버님이 문과에 장원급제를 한 문인관직에 있었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현직 관직도 아니고 무과출신도 아닌데 자신뿐만 아니고 직접 동생과
가족들까지 데리고 의병을 일으켜 동생(고경형)과 장남과 차남, 딸(노상룡의 처), 손자(고부금)까지
전장터에서 순절한 것을 널리 알리고 기리기 위해 "불천지위" 인준을 해서 사액을 내리고 "포충사"라는
사당을 지어서 4대 봉제사가 지나도 계속적으로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이다
충렬공(고경명), 고경형(서자라서 왕의 포상 은전에서 제외), 효열공(고종후), 의열공(고인후)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조선왕조 시대 임금이 직접 한 가족에게 3번의 시호를 내리고 널리 알려지게 한
사례는 없었다
고경형 : 고경명 할아버지의 이복동생으로 금산전투에서 고경명형님과 조카인 고종후, 고인후와
같이 왜놈들과 싸우다가 형님과 조카 인후가 죽자 장조카인 종후가 말을 몰고 전장으로
돌진하자 뒤따르다가 조카 종후의 말이 장애물에 걸려 넘지지자 고씨 집안의 대가
끊어진다는 일념에 혼절한 장조카를 업고 피신시켰는데 뒤에 아버지와 동생은 순절하고
혼자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에 사로 잡혀 있던 장조카가 진주성 2차 전투가 벌어진다는
소식에 다시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 나서자 울면서 이왕이면 자신을 보좌관으로 따라
나서도록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자 그 때 종후할아버지는 "병든 어머니가 계시고
어린 아우가 있는데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원컨데 숙부님은 제발 참여하지지 마시라"고
했으나, 형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도 있지만 자신이라도 장조카를 가까이에 있으면서
잘못되면 시신이라도 수습해야지 하는 생각에 뒤따라 가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종후할아버지와 싸우다가 함께 순절했다 사후에 왕의 포상 은전에서는 서자출신이라는
신분상의 문제로 여러 대신들이 포상을 해야 한다는 상소도 있었다 고 한 문헌/자료들은
있으나 제외되었던 것으로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