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와 정견의 지혜
중도는 <전법륜경>에서 팔정도라고 말해지고, 팔정도는 다시 <교리문답의 짧은 경>에서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이라고 말해진다(대림스님 옮김, 2012, 제2권: 320-321).
삼학에 따라 팔정도를 분류하면, 정어(正語, sammā-vācā), 정업(正業, sammā-kammanto), 정명(正命, sammā-ājīvo)은 계율(戒律, sīla)에 포함되고, 정정진(正精進, sammā-vāyāmo), 정념(正念, sammā-sati), 정정(正定, sammā-samādhi)은 선정(禪定, samādhi)에 포함되고,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과 정사(正思, sammā-saṁkappo)는 지혜(智慧, paññā)에 포함된다(Thera Piyadassi 저, 한경수 역, 1996: 90).
이와 같은 팔정도와 삼학의 관계로부터 중도 즉, 팔정도는 정견의 지혜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불타는 <대념처경>에서 정견을 이렇게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정견인가? 비구들이여, 고통에 대해 아는 것, 고통의 발생에 대해 아는 것, 고통의 소멸에 대해 아는 것,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에 대해 아는 것, 비구들이여, 이것이 정견이라고 말해진다.
이처럼 불타는 <대념처경>에서 '사제를 아는 것'을 정견이라고 말한다. 이로부터 사제의 진리를 아는 지혜는 정견으로서 중도 즉 팔정도에 포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즐김의 멸진경>에 의하면 삼법인의 진리를 아는 지혜도 정견으로서 팔정도에 포함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무상한 색을 무상하다고 보면 그것이 정견이다. 올바르게 보면 염오한다. 즐김이 소멸하면 탐욕이 소멸하고, 탐욕이 소멸하면 즐김이 소멸한다. 즐김과 탐욕이 소멸하면, 마음은 해탈한다. [이것을] 올바른 해탈이라고 한다.[이하 수상행식에 대해서도 동일한 언급이 이어진다.]
이처럼 불타는 <즐김의 멸진경>에서 '무상한 오온을 무상하다고 보는 것이 정견'이라고 말한다. 삼법인은 오온의 무상함에 근거해서, 오온의 고(苦)와 오온의 무아를 설명하는 가르침이므로, '무상한 오온을 무상하다고 보는 것이 정견'이라고 하는 언급은 곧 삼법인을 보는 것이 정견이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된다.
여기서 삼법인의 진리를 아는 지혜도 중도 즉 팔정도에 포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전연경>에 의하면 12연기의 진리를 아는 지혜도 정견으로서 팔정도에 포함된다. 불타는 <가전연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전연이여, 실로 이 세간[의 사람들]은 대체로 취착과 집착과 탐착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그 [수행자]는 마음이 취착하고, 집착하고, 잠재하는 곳인 그와 같은 취착과 집착에 다가가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라고 확립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고통이 일어난다고 [알고], 고통이 소멸하고 있는 것은 고통이 소멸한다고 [알아서], 의심하지 않고, 망설이지 않는다. 실로 여기에 타에 의존하지 않는 그의 지혜가 있는 것이다. 가전연이여, 이런 점에서 정견이 있는 것이다.
즉, 세간의 여러 사람들은 대체로 취착과 집착과 탐착에 속박되어 있지만, 수행자는 그와 같은 취착과 집착에 다가가지 않고서, 고통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일어난다고 의심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알고, 고통이 소멸하고 있는 것은 소멸 한다고 의심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안다는 점에서, 타에 의존하지 않는 그의 지혜와 정견이 있다는 것이다. 불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가전연이여, '일체는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 그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가전연이여, 여래는 그 두 가지 극단에 다가가지 않고, 중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
무명을 연해서 행이, 행을 연해서 식이, 식을 연해서 명색이, 명색을 연해서 육입이, 육입을 연해서 접촉이, 접촉을 연해서 느낌이, 느낌을 연해서 갈애가, 갈애를 연해서 집착이, 집착을 연해서 유가, 유를 연해서 생이, 생을 연해서 노사 우비고뇌가 발생한다. 이렇게 해서 완전한 고통의 덩어리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의 남김 없는 이탐과 소멸로부터 행의 소멸이, 행의 소멸로부터 식의 소멸이, (중략) 이렇게 해서 완전한 고통덩어리의 소멸이 있다.
이처럼 불타는 <가전연경>에서 지혜와 정견을 언급한 후에 '여래는 [유와 무의] 두 가지 극단에 다가가지 않고, 중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라고 말하고 나서 12연기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을 설한다. 즉 무명을 연해서 행 내지 고통의 발생이 있고, 무명의 소멸을 연해서 행 내지 고통의 소멸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12연기는 지혜 및 정견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위의 인용문에서 '여래는 중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율장 대품에 의하면 12연기는 불타가 정각을 이룬 후에 깨달은 진리이다. 불타는 정각을 이룬 후 7일 동안 결가부좌의 한 자세로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앉아 있었으며, 7일째 되던 날 밤의 초야(初夜)에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사유함으로써, 12연기를 깨달았다고 한다. 율장 대품은 이렇게 말한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세존은 우루벨라 마을의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은 보리수 아래에서 7일 동안 결가부좌의 한 자세로 앉아서 해탈의 즐거움을 누렸다. 그때 세존은 밤의 초야에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사유하였다.
위의 인용문에서 불타가 7일 동안 결가부좌로 앉아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선정 속에 있었음을 의미하며(최봉수 옮김, 1998, 제1권: 40), 그가 행한 선정은 팔정도의 마지막 항목인 정정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율장 대품의 언급을 고려하면, <가전연경>에서 발견되는 '여래는 중에 의해서 법을 설한다.'라는 언급은 '여래는 중도 즉 팔정도에 의해서 깨달아진 진리를 설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로부터 그가 깨달은 12연기의 진리도 결국 정견의 지혜로서 중도 즉 팔정도에 포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불교의 중도 개념 재검토/ 남수영 동국대학교, 중앙승가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