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에 관한 시 모음> 나태주의 '폭설' 외
+ 폭설
무슨 할 말이 저리도 많았던 겔까?
무슨 슬픔이 그리도 쌓였던 겔까?
누군가 돌아앉아 퍽퍽 울음 쏟고 있는 사람,
비어가는 가슴이여 휘어지는 나뭇가지여.
(나태주·시인, 1945-)
+ 폭설
눈은
눈이 아니다
미친
춤사위
흔들리는
시선
몇 겁의 두께로 쌓이는
고독
하얀 정적을 깨는
광시곡
(공석진·시인)
+ 폭설
안개일까
구름일까
바람 몰리는 벌판
버려야 할 기억
한동안 씻지 않은 비늘이다
눈부신 영혼 위해
떨어져 나가는 살점이다
굳어진 교만함
잘게 부순 뼈 가루다
휘몰아치는 눈 속
양팔 벌리고 빙빙 돌아
갖은 것 모두 날려보내고
나 아닌 내가
눈 속에 떠오른다
(장미숙·시인, 1957-)
+ 폭설
첫눈은 무장 무장 쌓여서
빈 들녘은 그대 이름으로 숨죽인다
무장 무장 또 흩날리는 저 춤들 뜨거운데
열리지 않는 길들은 가로눕는다
(김은숙·시인)
* 무장: 갈수록 더.
+ 폭설
질서를 모르는 반란군
정이품송 가지를 부러뜨린다
고속도로 한복판에 바리케이드를 친다
딸기 상추를 심은 비닐하우스에도 달려간다
지붕을 무너뜨리는 저 힘도
알고 보면 물이다
2004년 3월5일
백년만에 내리는 봄눈
백년 동안 묶여있던 포로들
저 속에서
눈사람이 나온다
나뭇가지로 골격을 세우고
하얀 얼굴 검고 큰 눈의 옛 소년 뒤뜰에 세운다
구름 사이로 나온 햇살
햇빛화살을 쏘아낸다
저 거대한 힘
단단한 힘이 무너진다
(송연우·시인, 경남 진해 출생)
+ 폭설(暴雪)·1
눈부신 아침볕과
눈 쌓인 겨울숲이 마주하면
간밤의 꿈이란
이다지도 부질없어지는구나
아, 절망보다도 더 인간적인
이 황홀한 폭력
인간이기가 이토록
버거워지는구나
(구재기·시인, 1950-)
+ 폭설(暴雪)·2
신(神)이
겨울숲에
자리하던 날
살아있는 것이란
모두
움직임이 없었다
흰꽃과
흰꽃으로만, 하나
열매를 빚어
세상은
가난을 즐기는
부자일 뿐
바람도 구름도
겨울숲에 그냥
떠 있었다
(구재기·시인, 1950-)
+ 폭설
아주 낯설고 기이함으로
살며시 창을 흔드는 작은 숨결
내게 다가온 화려한 정적
소리 없이 함몰되어 잦아드는 의식 속
떨쳐버리고 싶은 애증의 질곡에서
더운 피 흩뿌리며 지난날들
한 점 티끌로 부끄럽게 떠돌다
깨끗한 순백의 낯선 세상에
파묻히고 싶은 어제 또 오늘
사랑을 하며하며 살아야 할 날들이
우리에게 백년이 있다해도
미워하며 산 하루보다 짧아
천근 무게로 내려오는 하늘을
하루의 오만으로 저울질하며
파묻히는 추녀 끝에 발자국을 묻는다
(심지향·시인)
+ 폭설이 내리는 또 다른 이유
입춘이 훨씬 지나
우수를 바라볼 즈음
서울 등지에 큰 눈이 내렸다
이상한 기후의
그럴만한 까닭이야 따로 있지만
기습적으로 폭설이 내린
또 다른 숨겨진 이유가 있다
백설에 민감한 시인들
다정다감한 저들의 손끝을 통하여
아름다운 시들을 쏟아내기 위함이다
헬 수 없도록 많이
신작 설경 시문들
이로 인하여 문학은 즐겁고
이로 인하여
인생은 살만하지 않은가
(오정방·미국 거주 시인, 1941-)
+ 폭설부暴雪賦
시대를 지고 가는 사람도 있지만
시대가 덧니처럼 박힌 삶도 있다
어느 날 문득 길 떠난 사랑도 있지만
떠돌던 길에서 돌아와 쿨럭이는 그리움도 있다
겨울이 깊고
별은 멀다
(박재화·시인, 1951-)
+ 폭설
당신은 폭설입니다
첫눈인 줄 방심할 때면
예기치 못한 폭설로 세상을 뒤덮고 마는
첫눈보다 더 설레는
감동입니다
그렇게 당신은 나를 위해
밤새 눈으로 부서지고
나는 수시로 당신에게 덮여
봄, 여름, 가을 없이 하얗게 바래갑니다
그렇게 꽁꽁 갇혀서
당신보다 더 새하얀 당신이 됩니다
(도혜숙·시인)
+ 폭설의 도시를 거닐며
얼마나 사무쳤기에
그대
허공 뒤엎는 꽃보라로 내려와
영혼의 가루로 흩날리다
못다 태운 기다림마저
투명한 꽃잎으로 녹아들며
시린 사랑을 고백하는가
고작 자국눈의 낭만에나 물들다
기울어진 어깨 끌며
고개 숙인 가로수처럼
일상의 깊은 농 번진 무릎
여지없이 꺾어 놓고
그대
얼음으로 살아나는 선연한 물빛이
게으른 세포의 구석구석
뜨겁게 파고들며
지친 그리움 쓰러뜨리는가
(현상길·교사 시인)
+ 폭설이 내리면
폭설이 내리면
아무도 찾지 않는
장작불 지핀 초가집에 가서
아랫목에 배 붙이고 군고구마 까먹으며
시를 써야겠다
오늘 내리는 눈이
내일도 내리고 한 댓새 내려
그리움만 날아드는 산골짝
경계가 사라진 논, 밭두렁에
강아지처럼 뒹굴어 보고 싶다
어스름 녘에는
처마 밑에 허기진 새떼가 올 테고
내 어린 시절 가난의 추억이
새록새록 날아들 거다
간혹 들리는 산짐승 울음에
생의 의미를 깨달으며
꺼져가는 촛불의
심지를 돋우며 시를 쓰는 거다
눈밭에 사슴 같이
기진맥진해 돌아오면 아내가
김치 볶음밥 지질 것이고
수심에 찬 아내, 그늘진 아내의 얼굴이
더 예쁘게 보일 거다
폭설이 내리면
삶을 잠시 놓고
나는 방랑 길에 올라볼 거다.
(최홍윤·시인)
+ 폭설 피해
소리 없이 왔으면
소리 없이
갈 일이지
한숨을 남기고
눈물을 남기고
무너지는 억장 소리
무슨 죄던가
죄라면
고향 땅 지키자고
팽개치지 못한 죄
못할 일
못 볼 일
눈뜨고는 못 볼 가슴 아픈
상처투성이
(하영순·시인)
+ 폭설
하루 동안 쉬지 않고
쏟아져 내리는 눈을 본 적이 있는가
사상 최대의 폭설로 호남 고속도로와
나들목 부근이 완전히 통행 차단이 되었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밤새 내린 눈 속에
비닐하우스가 폭삭 내려 않고
수천 마리 양계장도 주저 않고
돈사도 우사도 눈 속에 묻혀 버렸다.
주름진 정읍댁 억장도 무너져 내렸다.
소리 없이 내린 눈 속에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린 것들이
처참하게 흰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다.
천사의 눈빛처럼 하얀 너에게
검은 마귀의 괴력이 있었다니....
첫눈을 보며
첫사랑이 생각난다고
눈부신 사랑을 나누자고 수작을 부리던
詩를 쓰던 손이 부끄럽구나.
하얀 너울이 숨막히게 내려앉은 땅 위에서.
(유응교·건축가 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