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밀교 전래와 신라승의 역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8세기 초반 인도로부터 새로운 밀교의 흐름으로써 중국에 전해진 중기밀교의 사상과 실천체계는 신라에도 전해졌다. 특히 불가사의의 『공양차제법소』의 저술은 이후 밀교교학에 대한 신라승들의 학습 의욕을 북돋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불가사의 이후 중국에 유학하여 선무외와 금강지의 계통을 잇는 승려들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가사의의 활약 이외에도 『대일경』을 한역한 선무외가 『허공장보살능만제원최승심다라니구문지법경』을 한역할 때 철문(綴文)과 필수(筆受)를 신라 출신의 무착(無着)이 담당했던 것을 보면 당에서 유학하고 있던 신라 출신 승려들이 밀교의 흐름의 중심부에서 활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금강지의 제자 불공은 자신의 여러 제자들 중 손꼽은 6명 중 한명에 신라 승려 혜초(慧超)를 들었다. 한편, 밀교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전법(傳法)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 계보를 알 수 있는 자료 및 저술에도 신라 승려들이 언급되고 있다. 이장에서는 각종 자료에서 선무외와 금강지를 중심으로 하는 문하에 신라 승려들이 있었던 모습을 확인하고 그 중 일부는 신라로의 전법활동을 하였던 흔적들을 찾아봄으로써 8세기 이후 신라 사회 내에서의 밀교의 양상을 추론해 보고자 한다.
8세기 이후 중국의 대표적인 밀교 승려는 선무외와 금강지, 그리고 불공을 들 수 있다. 선무외의 제자로는 『대일경소』를 찬술한 일행이 대표적이지만 그는 『대일경소』 찬술 직후 45세의 나이로 입적하였고, 밀교만이 아니라 선‧천태, 도교, 천문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밀교만을 선양하지는 않았다.
당대 밀교를 체계적으로 알리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불공이었다. 그는 금강지의 제자로, 직접 인도에 가서 다수의 밀교경전을 구하여 중국으로 돌아와 이후 이 경전들을 한역하여 새로운 밀교경전이 다량으로 유통되는데 기여하였다. 그런데 그가 귀국한지 얼마 있지 않아 안록산‧사사명의 난(755~763)이 일어나게 된다. 안사‧사사명의 난은 당 황실에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인데, 불공은 장안에 남아 밀교 의례를 설행하면서 안사의 난의 해소를 기원했던 것을 계기로 숙종과 대종의 깊은 신뢰를 얻게 된다. 불공은 궁중의 내도량에서 국가 안녕을 기원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수대부터 국가 차원의 진호(鎭護)를 위해 『인왕경』 등을 중심으로 한 의례를 개설해오던 양상을 밀교의 체계 안에 재구성하였을 뿐 아니라 산서성 오대산을 밀교화한 것으로 상징하듯이 밀교 유포에 힘썼다. 불공의 사실상의 후계인 혜과(惠果, 746~805)는 『대일경』과 『금강정경』의 가르침 모두를 이어받아 이후 금‧태 양계가 융합된 밀교 전승의 선구자가 된다.
그런데 선무외, 금강지, 불공의 역경을 통해 밀교경전들이 다수 전해지고 난 후 더 이 상 새로운 경전의 도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며, 기존의 경전의 교리에 대한 주석서 저술도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리확립은 연구자의 주석서로 대표되는데, 일본에서 공해가 『십주심론』 등의 저작으로 진언밀교의 교의를 확립한 것과 비교하면 중국의 경우 일행의 『대일경소』와 불공이 금강정경계의 경전을 번역하면서 독자적인 주장을 서술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주석서가 없다. 밀교 승려들은 그보다는 삼밀행(三密行)을 실천하고 관정(灌頂)을 통한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의례를 통해 확장시켜 나갔다.
밀교 전법 양상을 정리하는 경향은 9세기 이후 나타났다. 해운이 각각 834년과 884년에 작성한 『금태양계사상승』및 『양부대법상승사자부법기』 2권은 동시대의 자료인데다가 전승 계보 중 외국 유학승인 경우 출신국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신라 승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또 비슷한 시기인 865년 조현(造玄)이 작성한 태금양계혈맥(胎金兩界血脈)은 해운의 것과 거의 유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비슷한 인식이 공유되고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뿐만 아니라 해운의 자료에 기록되지 않은 기타 승려들의 존재도 확인할 수 있다. 해운과 조현은 스스로를 현법사(玄法寺) 법전(法全)의 동문 또는 제자로 표기하고 있는데, 당시 밀교 승려로서 자신의 계보를 재차 확인하기 위하여 이 글을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 자료는 당시 중기밀교의 전승 계보를 확인하는 1차 자료로서 즐겨 활용된다.
이외의 자료로는 일본 승려 최징이 『내증불법상승혈맥보』에서 그의 스승인 순효(順曉)와 관련한 기록인 『순효아사리부법기』를 인용하면서 신라의 의림을 선무외의 제자로서 소개한 자료가 있으며, 유사한 내용이 담긴 『순효아사리부법문』도 있다. 또 해운과 조현의 기록에 이름만 등장하는 혜일에 대해서는 그의 스승인 혜과의 행장인 『대당청룡사삼조공봉대덕행장』을 통해 조금 더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행장에는 기타 자료에 기록되지 않은 신라의 오진(悟眞)의 중천축 구법(求法) 행적을 전하고 있다. 『일본대장경』 41에는 『대일경』과 『금강정경』의 가르침이 전해진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도시한 『대비로자나대교왕상승사자혈맥도』가 있다. 이상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신라승려를 중심으로 사자상승 관계를 도시하면 다음 표Ⅲ-5와 같다.
이와 같이 위의 자료들은 신라 승려들이 선무외와 금강지 문하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먼저 선무외의 직접 제자로 신라 승려 현초(玄超)가 있었다. 『양부부법기』와 『금태양계사상승』에 따르면 태장계로는 선무외의 제자로 2명을 들었는데 바로 일행과 현초라고 하였다. 해운은 "일행은 현종과 국사를 논하고 번경(飜經)에 참여하느라 실제로 전법(傳法)을 할 틈이 없었다."고 하였는데, 반면 현초에 대해서는 "현초는 대비로차나대교왕과 소실지교(蘇悉地教)를 전해 받고 청룡사 동탑(東塔)(혜과)에게 전법했다."고 하였다. 이 같은 내용은 혜과의 행장을 기록한 『대당청룡사삼조공봉대덕행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초는 대비태장비로자나대유가대교과 소실지대유가법과 함께 제존유가등법을 손수 하나씩 혜과에게 전했다고 한다.
최근 일본의 진복사 대수(大須)문고에서 '보수사삼장현초찬(保壽寺三藏玄超撰)'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초의 저작으로 추정되는 『도발천왕호마기(都鉢天王護摩記)』의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저작은 도발천왕, 즉 도발비사문천(兜跋毘沙門天) 공양과 관련된 것으로 금강지의 『우가타야의궤(吽迦陀野儀軌)』를 전거로 현초 본인의 견해를 전개하여 호마공양을 장려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고 한다. 현초의 저술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현초의 사상을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다만 이 책의 마지막에 대당정관원년(618)이라고 하였는데, 이때는 선무외 활동 기간에 크게 앞서는 시기이다. 따라서 이 의궤의 저자가 현초인지 확정할 수 없는 등의 논란이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향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혜과(惠果, 746~805)의 제자 중에는 신라 승려 혜일과 오진이 포함되어 있다. 혜과의 저작 중 교학에 관련한 것이 없어서 사상적 특징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항상 『유마경』을 외웠고, 열반‧화엄‧반야‧능가‧사익을 읽었으며, 불공에게 금강계의 가르침을 받게 됨으로써 대승의 심지(心地)에도, 금강계의 법문에도 지극지묘(至極至妙)하고 최상이 되어 일념에도 정각에 상응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혜과는 불공의 밀교를 계승하면서도 대승 경전도 널리 배웠던 것을 알 수 있다. 혜과는 17세에 처음 불공을 사사(師事)하게 되는데 이때 대불정진언과 수구등진언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금강계와 제존 유가법을 받았으며, 22세에는 현초로부터 태장법과 소실지법을 받게 됨으로써 중기밀교의 두 계통을 모두 이어 장안의 청룡사를 거점으로 활약하였다.
이러한 성격은 제자들에게도 전해졌을 텐데, 그가 대승 경전에도 능통했으며 태장법과 소실지법을 신라 출신의 현초에게 받았다고 하는 점은 신라 승려들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의미있다고 생각된다. 8세기 중반 이후 신라에서는 『화엄경』에 근거한 교학적 의미를 금강계 밀교 도상을 채용하여 여래형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이 조성되며 나아가 광배와 대좌에도 중기밀교의 금강계 5불 등의 표현이 나타나게 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밀교와 화엄의 상호 교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 오대산신앙의 구조 확립과 관련 있는 보천은 수구다라니를 염송했는데, 신라에 『수구다라니경(隨求陀羅尼經)』이 언제 어떻게 전래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혜과가 불공에게 수구진언을 받았던 것을 시작으로 불공에게 사사했다는 기록은 하나의 단서가 된다. 실제로 불공이나 금강지는 수구다라니 수지와 염송으로 해난(海難)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불공이 황제에게 수구다라니 염송을 권한 사실이 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상 중기밀교 전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라에도 『수구다라니경』과 경에서 설한 수구다라니 염송이 알려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혜과는 전법시 태장계와 금강계를 구별하였던 것 같다. 혜일은 태‧금 모두를 받았으나 오진은 태장계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진은 혜과에게 건중2년(781 성덕왕2)에 태장비로자나와 제존에 대한 지념교법(持念教法)을 받은 후, 정원5년(789 원성왕5)에는 중천축으로 가서 『대비로자나경』 범본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대일경』 계통의 태장계의 가르침에 전념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귀국하지 못하고 토번국(土蕃國)에서 입적하고 말았다.
혜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781년 신라의 신물(信物)을 혜과에게 올리며 태‧금뿐 아니라 소실지와 제존유가30법을 전해주기를 청하였는데, 이후 이 가르침에 정통하게 되자 신라로 돌아와 교화하였다고 한다. 혜일이 혜과에게 신라의 신물을 올렸다는 것은 그가 입당할 때부터 밀교를 배우겠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724~725년 『대일경』이 한역된 후 신라에 중기밀교 사상이 전해졌던 정황은 경덕왕 대에 진표(眞表)가 『공양차제비법』의 가르침을 받아 활동하고 있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혜일도 신라에 새롭게 전해진 중기밀교를 더욱 깊이 익히고자 하는 마음으로 당에 유학하여 당시 장안 밀교의 중심 인물이었던 혜과를 찾아갔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혜일이 혜과에게 태장계과 금강계 모두를 배웠을 뿐아니라 소실지와 제존유가법까지 통달하여 귀국했다는 기록은 신라에 불가사의와 이후 의림에 의해 태장계가 전해졌을 뿐 아니라 금강계도 전해졌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기록으로 주목된다.
혜일의 밀교 승려로서의 태도를 보여주는 기록도 이어진다. 그는 곡기를 끊고 지념(持念)하였고 그러자 실지(悉地)가 앞에 드러났다고 한다. 불가사의는 실지를 성취하는 것은 보리를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밀교에서는 진언 등을 지송함으로서 신‧구‧의가 상응하여 세간‧출세간의 묘과(妙果)를 얻는 것을 실지라고 표현한다. 『대일경』에서는 실지를 얻기 위해서는 오욕(五欲)의 덮개와 얽힘을 벗겨내어 한가지로 깊이 법 맛을 즐기며 그 마음을 기름으로써 실지를 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혜일이 곡기를 끊었던 것은 오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고, 지념했다는 것은 진언을 지송했음을 말한 것으로 혜일이 실지를 얻기 위해 진언 염송을 정성스럽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불공견삭다라니경』에 주인(呪印)을 추가하여 현재 유통본으로 완성시켰던 것도 이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혜과에게 양계 모두를 받았던 의조(義操)를 신라 출신의 균량(均亮)이 이어 금강계대법을 받았다. 균량과 함께 의조를 이었던 법윤(法潤)의 제자 법전(法全)은 태‧금 모두를 신라의 홍인(弘印)에게 전하였는데, 일본 출신의 원인(圓仁)‧원진(圓珍)‧종예(宗叡) 등이 홍인과 동문이다.
한편 『양부대법상승사자부법기』나 『금태양계사상승』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의림은 최징의 스승인 순효와 관련된 기록을 통해 그 행적을 추측할 수 있다. 순효는 의림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순효아사리부법문』 작성 당시인 805년에 의림의 나이가 103세라고 하였다. 또, 최징이 819년에 찬술한 『내증불법상승혈맥보』에서는 『순효아사리부법기』를 인용하여 의림이 선무외삼장으로부터 대비태장만다라의 묘법을 받았으며 진국도량(镇國道場)의 대덕아사리(大德阿闍梨)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선무외 『대일경』을 한역하던 725년부터 입적하기 전인 735년 사이 언제인가 의림은 20대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선무외에게 태장계의 묘법을 받았고 이후 신라로 돌아와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일경』의 사상이 8세기 신라에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의림에 대한 사료는 전하지 않아서 이외 자세한 의림의 행적과 사상 경향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선무외에게 직접 대비태장만다라의 가르침을 받은 의림이 신라에 귀국하였다는 사실의 의미는 크다.
금강지와 불공 아래에는 신라 승려 혜초가 있었다. 혜초는 신라로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당에서 인정을 받아 경전 번역에 참가하고 국가가 주관한 기우제를 지냈으며 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 내도량에 머무는 지송승(持誦僧)의 1인으로 거명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혜초의 생애 정확히 전하는 자료는 없기 때문에 『왕오천축국전』과 『불공표제집』의 산발적 기사를 통해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직접 작성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경』(이하 천발경)의 서문은 그의 사상적 계보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혜초는 이 서문에서 스스로를 금강지 삼장에게 8년간 배웠으며 현종의 명으로 금강지와 함께 이 경을 번역할 때 필수(筆受)를 맡았고, 이후 불공에게도 가르침을 받았음을 전하고 있다. 불공 또한 여러 제자 중에서도 혜초를 포함한 6명의 제자만을 꼽으며 만일 후학들 중 의문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면 이들에게 문의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가 금강지와 불공의 법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정을 다음 기록에서 추측해 볼 수 있다.
(Ⅲ-13) 불공삼장에게 대교(大教)의 유가심지비밀법문에 관하여 여러 번 여쭈어 보았다. 於大興善寺大師大廣智三藏和尚邊 更重諮啟決擇 大教瑜伽心地祕密法門
혜초가 불공에게 여러 번 그 의미를 여쭈었다는 유가심지비밀은 금강지가 구술하고 불공이 받아 적은 『금강정경유가비밀심지법문의결』과 통한다고 생각된다. 이 저술은 금강정경 중 유가수행에 관한 내용을 가려 정리한 『금강정유가중략출염송경』에 대한 주석서로, 중국에서 이루어진 『금강정경』에 대한 주석서로 유일한 것이다. 이어서 혜초 『천발경』의 비의(秘義)를 서술하였는데, 이 경에 의거하여 깨닫고자 하려면 집착을 버리고 삼밀에 계합하고 유가(瑜伽)의 비밀요체의 법문을 참고하여 신‧구‧의 삼업을 궁구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아 여래지(如來地)를 증득해야 하는데 믿음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원측이나 승장과 같이 신라승려가 역장에 참여한 경전의 경우 신라에 전해졌던 정황이 확인된다는 면에서 혜초가 한역 과정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만년에 재차 살펴보고 추가로 서문을 남길만큼 의미 있게 생각했던 『천발경』에 도 당시 유학 와 있던 신라 승려들이 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천발경』은 초기밀교에서 중기밀교의 선구를 이루며 이행기적 사상을 담은 경전이다. 특히 『금강정경』의 선구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중 『금강정경』에서 말하는 5불에 유사한 비로자나여래‧아촉‧보생‧관자재‧불공성취를 문수보살과 동격으로 묘사하여 문수보살이 이들 5불이 갖고 있는 5지(五智)의 소유자로 설명한 점이 주목된다. 통일신라 시기에 등장하는 오방불이 『금강정경』계통의 5불의 도상을 따르고 있는 경향과 맞물려 이해할 수 있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시기의 불교 예술품에서 『다라니집경』‧『불공견삭신변진언경』 등의 과도기적 성격을 갖고 있는 초기밀교경전과 『금강정경』의 영향으로 오방불 도상이 만들어지고 여래형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이 제작되는 등 『금강정경』 계통의 경전의 전래를 확인할 수 있다.
금강계 5불은 아촉‧보생‧무량수‧불공성취‧비로자나이기 때문에 『천발경』에서 무량수 대신 관자재를 둔 것과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는 금강계 만다라로 전환이 시작되었다고 평가되는 보리류지의 『불공견삭신변진언경』에서도 같은 모습이다. 『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22 「무구광신통해탈단삼매야상품」에서는 가운데 비로자나불, 동쪽에 아촉, 남쪽에 보생, 서쪽에 관자재, 북쪽에 불공성취를 설하였다. 이는 금강계만다라의 전거가 되는 『진실섭경』의 3종 한역 중 불공역 및 시호역과 같은 내용이고, 나머지 하나인 금강지역도 권1에서는 관자재왕 대신 아미타라고 하였으나 권2에서는 관자재라고 한 것을 보면 『불공견삭신변진언경』 권22에서 설한 오불은 금강계만다라의 5불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을 갖고 있는 『천발경』의 한역에 신라 승려 혜초가 참여하고 서문을 작성했던 것은 의미가 있다.
중국에 처음으로 중기밀교를 전한 선무외의 문하에 의림, 불가사의, 현초가 있었고, 금강지와 불공의 제자인 혜과를 신라의 혜일이 잇고 있으며 이후로도 신라 출신 승려들이 태장계와 금강계 밀교 전승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밀교의 흐름을 접한 승려들 중 일부는 신라에 귀국하여 신라 사회에서 밀교에 대한 관심을 지속시켰다. 이와 같은 새로운 밀교의 전래가 즉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은 당시 신라불교계가 그런 사상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전래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즉, 7세기에 이미 전래되었던 초기밀교에 대한 이해는 새로운 사상경향으로서의 중기밀교가 자연스럽게 신라에도 전해질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후 신라 불교계의 중심 사상이었던 화엄과의 연결이나, 불교 미술 조성에 영향을 미쳤던 면에서 이와 같은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신라시대 밀교경전의 유통과 그 영향/ 옥나영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