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원교 지관법의 특징
원교의 진리 내용에 따르면, 원교는 용수의 공사상에 근거하는 대승불교이다. 지의는 화법사교 중 원교 이외에도 통교, 별교도 대승불교로 분류했다. 그러나 이들은 용수의 공사상에 근거하면서도 공, 가, 중 삼제에 대한 이해에서 원교와 차이를 보인다. 이는 진리를 통찰하기 위한 지관법에서도 차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지의는 지관을 통해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포섭한 뒤, 원교를 기준으로 해서 다른 가르침들을 편교로 분류하고 원교에 근거하는 지관법의 특징을 설명했다. 그는 원교에 근거하는 지관법의 특징을 대소(大小), 반만(半滿), 편원(偏圓), 점돈(漸頓), 권실(權實)의 다섯 가지 기준을 통해 설명했다. 여기서는 그 특징을 대승지관법, 돈의 지관법, 진실의 지관법 세 가지로 정리했다. 이는 지의가 대소와 반만, 편원과 점돈은 동일한 외연을 갖는다고 설명했던 것에 따른다.
치우친 관법과 원만한 관법에 대해 밝히겠다. […] 대개 구극의 진리는 대(大)도 아니고 소(小)도 아니며, 방편[權]도 아니고 진실[實]도 아니다. 대와 소, 방편과 진실로 분별할 수 없다. 조건에 근거해서 대와 소 등을 말할 수 있다. 소승을 위한 방편력에 근거해서 다섯 비구를 위해 소승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대승을 위한 방편력에 근거해서 모든 보살을 위해 대승의 가르침을 설명한다. 이와 같이 대승과 소승은 모두 방편을 갖추고 있는데, [방편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하기 때문에, 위의 다섯 가지 상대적인 개념을 통해 혼란을 없애고자 한다.
1.대승의 체법관(體法觀)이다
불교에서의 구극의 진리는 모든 존재[諸法]가 조건에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참된 모습[實相]은 어떠한 고정된 실체도 없다는 무아(無我), 공(空)이다. 제법실상에 대한 가르침은 이 가르침을 듣는 중생이 어떠한 견해에 사로잡혀 있는가에 따라 석법(析法)과 체법(體法)으로 크게 나뉜다. 제법실상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제법실상을 통찰하기 위한 관법의 차이를 낳는다. 석법관과 체법관이 이것이다.
①소승 관법
소승의 관법은 석법관이다. 석법은 현상의 모든 존재[諸法]가 실재한다고 이해하기 때문에 이를 최소 단위까지 분석해 들어감으로써 어떠한 존재도 실재하지 않다[공]고 가르치는 방법이다. 이는 소승의 가르침으로서, 소승은 실상이 제법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이해하기 때문에 분석적인 관법을 실천한다. 소승은 이와 같은 관법을 통해, 외도가 잘못된 분석을 통해 상견, 단견을 일으키는 것을 올바른 분석법을 통해 몸과 마음의 실상을 분석하고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해 생겨나 실체가 없음을 통찰한다.
소란 소승으로 지혜의 힘이 약하다. 현상을 분석해서 그 실상을 관찰하는 관법[석법지관]만을 감당할 수 있어, 몸과 마음에 대해서 분석한다. <대지도론>은 보시바라밀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도의 가르침을 부수었다. "이 티끌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만약 극미(極微)에 형체가 있다면, 모든 것에도 형체가 있다. 극미에 형체가 없다면 모든 것에도 형체는 없다." 만약 극미의 형체를 끝까지 분석할 수 없다면 상견(常見)이나 유견(有見)을 낳고, 극미를 끝까지 분석할 수 있다면 단견이나 무견을 낳는다. 이는 외도가 형체에 대해 분석하는 방법이다. 마음을 분석하는 방법도 동일하다. […] <대지도론>은 삼장교의 석법관을 "거친 색이나, 미세한 색에 대해 관찰하여 모두 무상이고 무아이다."라고 설명했다. […] 어떤 경전은 "한순간의 마음에 300억의 찰나가 있다."고 한다. 찰나는 머무름이 없으므로, 한 순간의 마음은 무상하다. 무상하고 실체가 없기 때문에 번뇌는 허물어져, 업도 없고 괴로움도 없다. 이와 같이 생사의 괴로움은 소멸하고, 괴로움이 소멸[한 뒤]를 열반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을 분석하는 관찰법을 의미한다.
②대승 관법
대승의 관법은 체법관(體法觀)이다. 체법관이란 모든 존재가 조건에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실상이 바로 공이라고 통찰하는 방법이다. 이는 제법의 실상을 연기적 현상에 근거해서 공이라고 주장하는 대승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성립한다. 지의는 대승의 체법관을 통교, 별교, 원교의 공통적인 관법의 특징으로 설명했다.
대승의 체법관은 삼장교의 석법관과 다르다. 삼장교에서 언어는 임시적이지만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존재한다. 실재하는 것을 분석해서 공이라고 이해한다. 이는 기둥을 부수어 공으로 하는 것과 같다. 이에 반해 대승의 체법관에 따르면 언어뿐만 아니라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도 모두 임시적인 것이며, 그 자체가 공으로서 본래 아무 것도 없다. 이는 거울에 비친 기둥과 같다. 원래 스스로 존재하는 기둥이 아닌 것으로, 기둥이 없어지고 나서 비로소 공이 되는 것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기둥이 바로 공하므로, 불생불멸이고 실재하는 기둥과 다르다. 또 <대지도론>은 "불타는 한 개의 사각형 나무에서 여러 비구들에게 '비구가 선정에 들 때 흙이 변하여 금이 되고, 금이 변하여 흙이 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금과 토가 변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변화에 따라 만들어진다.'라고 말했다."를 인용하여 대승인의 체법관을 설명한다. 몸과 마음도 이와 같아서 생기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무명의 변화일 뿐이다. 원래 생기지 않으므로 지금 소멸하지도 않는다.
③소승 관법과 대승 관법의 비교
삼장교에서의 분석은 감정에 따라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며, 현상을 분석하는 관은 사관(事觀)이며, 통찰한 진리는 불성의 진리가 아니다. 실상의 진리와 만나지 못하면서 감정에 따라 진리라고 설정할 뿐이다. 대승의 체법관은 진리에 따라 몸과 마음을 관찰한다. 이는 마술을 좇아 마술사의 일을, 마술사를 좇아 마술의 진실을 아는 것과 같다. 또 꿈을 좇아 자고 있다는 것을, 자고 있다는 것을 좇아 그 마음에 이르는 것과 같다. 환술과 같은 몸과 마음을 좇아 무명을, 무명을 좇아 불성을 얻는다. 법을 체득하면 진리와 통하기 때문에 진리에 따른 관이라고 한다.
2.돈(頓)의 관법이다
돈의 관법은 단계적인 과정을 밟아서 깨달음에 이른다는 점(漸)에 대해 성립한다. 지의는 대승과 소승을 기준으로 하여, 장교를 소승으로 통교, 별교, 원교를 대승으로 분류했다. 이를 다시 치우침[偏]과 원만함[圓]에 기준해서 원교만을 완전한 가르침으로 분류하고 원교의 지관법의 특징을 돈으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원교를 제외한 모든 가르침은 치우친 가르침으로서, 점차적인 관법을 따른다.
편은 치우침을, 원은 완전함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소승을 편교라고 부른다. 이치에 맞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편교의 의미를 엄밀히 탐구해 보면, 이들은 분명히 다르다. 반과 소는 외연이 좁아 편과 같은 넓은 외연을 갖는 경우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편은 소승에서 대승을 망라하기 때문이다. 이는 반달이라고 하면 상현달과 하현달만 해당하지만, 보름달이라고 하면 [보름달을 제외한] 초승달부터 14일 밤의 달까지 모두 [반달에] 해당되는 것과 같다. 점월(漸月)은 반달보다 의미가 넓어서 보름달만을 완전한 달이라고 부른다. 소승과 반자교(半字敎)도 이와 같다. 석법은 반자교와 소승에 한정하므로 대승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편은 의미가 넓어 삼장교의 석법지관에서부터 별교의 유무의 양극단을 멈추고 중도에 드는 관법[去邊入中止觀]까지 포섭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전체가 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열반경>은 "이 이전에 대해 우리는 모두 사견인(邪見人)이라고 한다."고 했다. 원교의 일심삼제(一心三諦)의 수자의지관(隨自意止觀)만이 완전하다[圓]고 할 수 있다.
1)점(漸)의 관법
화법사교중 장교, 통교, 별교의 지관법이 갖는 특징이다. 열반을 생사 번뇌를 떠나서 존재한다고 이해하는 장교는 물론이고, 통교와 별교 또한 공, 가, 중 삼제를 원융의 관계로 이해하지 못하고 차제적인 관계로 이해하기 때문에 중도실상 또한 현상에 근거해서 현상의 실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십법계 중 지옥계나 인간계와 같은 중생계에서는 제법의 실상을 통찰할 수 없고 중생계의 번뇌를 다 제거한 뒤 불법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중도실상을 통찰할 수 있다고 이해한다. 그 결과 이들은 공, 가, 중 삼제를 차례로 닦아 나아가야 한다고 이해하여, 가에서 공으로, 공에서 가로, 마지막으로 공과 가에서 중으로 들어가는 차제적인 관법을 주장한다.
점이란 차제라는 의미로서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이른다는 의미이다. 돈이란 한 순간에 완전하게 구족된다[頓足], 한 순간에 구극의 진리를 통찰한다[頓極]는 의미이다. 점과 돈은 편과 원의 의미에 통하며, 특별한 의미는 없다. 앞의 삼교[장교, 통교, 별교]의 지관은 모두 점이고, 원교의 지관만이 돈이다. 이에 따라 해석하면, 그 의미는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2)돈(頓)의 관법
원교의 돈의 관법은 돈족, 돈극의 의미와 더불어 방편을 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의에 따르면, 별교는 장교, 통교와 달리 중도실상을 이해한다. 다시 말해 별교는 공, 가, 중을 즉공즉가즉중으로 이해하는 원교와 달리, 중도를 공과 가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있는 절대적 진리로 이해하기 때문에 점이지만, 중도실상을 처음부터 지향한다는 점에서 중도실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장교, 통교와 분명히 구분된다.
지의는 이러한 부분과 관련해서 교(敎), 관(觀), 행(行), 증(證)의 네 측면에서 화법사교의 지관법의 특징을 분석한 뒤, 중도실상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별교에도 증의 측면에서 돈의 의미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별교는 방편을 끼고서[帶] 중도실상에 이르기 때문에 점이라고 규정하고, 원교는 방편을 끼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돈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지의가 돈을 방편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로 규정했다는 보여준다.
원교의 지관은 돈으로 점이 아니다. 커다랗고 똑바른 길을 가기 때문에 갓길로 가도 도달한다. 별교의 지관은 점이기도 하고 돈이기도 한다. 최초의 발심에서 중의 진리를 알기 때문에 돈이다. 그러나 방편에 의지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점이기도 하다. 또 앞의 두 교는 교, 관, 교, 행, 증이 모두 점이다. 별교는 교와 관, 행이 점이지만, 증은 돈이다. 원교는 교, 관, 행, 증이 모두 돈이다. […] 별교의 관은 방편을 갖고 설명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방편에 따라 수행한다. 먼저 통혹(通惑)을 부수기 때문에 교와 관, 행은 점이지만, 뒤에 무명을 부수고 불성을 보기 때문에 증은 돈에 해당한다. 원교의 관은 '바로 방편을 버리고 무상도만을 설명하며', '이 하나만 진실이고 다른 것은 진실이 아니며', '가장 진실한 것을 설한다.'는 것은 교가 진실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여래의 행을 실천하고', '여래의 방에 들어가며', '여래의 옷을 입고 자리에 앉는다.'고 말하고 또 '어떤 행위도 모두 여래의 행위이다.'고 하니 이러한 행은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보면 곧 중도로서 구경의 진리이며 여래가 얻은 법신과 동일하여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은 증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3.진실(眞實) 관법이다
원교의 지관법은 방편이 없는 순수한 돈의 관법이다. 다시 말해 중생의 행위 그대로가 곧 여래의 행위가 되는 관법이다. 그러나 이는 제법실상의 측면에서 그러하지만, 현상적으로 중생은 번뇌에 싸여 있어 여래의 행위를 드러내지 못한다. 여기서 수행이 필요하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여러 가지 수행방법으로서 방편이 요구된다. 곧 부처라는 중생즉불에 근거해서 원돈지관을 주장하지만, 지의는 중생이 여기서 곧 수행의 부정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는 그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사종삼매, 25방편(方便), 십경십승(十境十乘)의 관법과 같은 다양한 수행방법을 원돈지관의 실천방법으로 주장했던 것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중생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어떠한 수행방법도 필요 없다는 돈의 지관법을 확립하면서, 동시에 부처가 되기 위해 다양한 수행방법들을 주장하는 모순을 지의는 방편과 진실에 대한 논의를 통해 극복했다.
1)방편의 의미
용수의 불이론은 중생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은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열반을 생사현상을 떠나서 있다고 이해하고, 현상을 부정함으로써 열반을 추구했던 아비달마불교의 실체론을 부정하고, 중생의 번뇌를 부정하지 않고 번뇌에서 번뇌의 실상을 통찰하는 수행법을 요구했던 것이다. 여기서 수행의 목적은 번뇌의 제거가 아니라, 번뇌의 실상에 대한 통찰로서 재확립된다. 다시 말해 용수의 불이론은 깨달음이라는 수행의 목적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번뇌의 제거를 수행의 목적으로 두지 않을 뿐이다. 이는 불이론이 번뇌의 실상을 통찰하기 위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 즉 방편을 요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교는 용수의 불이론에 근거한다. 이는 원교에 근거하는 원돈지관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다양한 수행방법을 방편으로 주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권은 권모로서, 어떤 목적을 위해 잠시 쓰다가 버린다는 의미다. 실이란 진실의 가르침으로서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목적이라는 의미이다. 권에는 대략 세 가지의 의미를 세울 수 있다. 하나는 진실을 위해 권을 베푼다는 의미이다. 둘은 권을 사용해서 진실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셋은 권을 버리고 진실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법화현의>에서의 연꽃에 대한 세 개의 비유와 같다. "제불은 일대사 인연이 있어 이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이는 원돈의 하나의 진실지관을 위해 세 개의 방편지관을 베푼다는 의미이다. 이 방편은 본래의 목적이 아니지만 이 방편 외에 다른 의도가 있지도 않기 때문에 이 세 개의 방편지관을 열어 원돈의 하나의 진실지관을 드러낸다. 진실을 위해 방편을 베풀기 때문에 진실이 보이며, 방편을 열어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방편은 진실과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진실 외에 설명해야 할 방편은 없게 된다. 방편을 버리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에 따라 방편은 폐기되고 진실만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방편과 진실을 이해하면 충분하다.
2)방편과 진실의 관계
제법실상의 진리는 언어적 분별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부처는 모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다양한 가르침을 베풀었다. 언어로 드러난 부처의 가르침은 제법실상의 진리 자체[진실]은 아니지만, 부처의 지혜에 근거하기 때문에 거짓도 아니다. 오히려 중생을 진리로 이끄는 방법으로서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불교의 다양한 수행방법도 이와 같다. 수행방법을 진실로 오해하지 않고 진실로 이끄는 방편임을 알면 방편을 진실에 대한 거짓이라고 부정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중생은 언어로 표현된 부처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깨달음으로 나갈 수 있듯이,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이라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지의는 진실에 이르기 위해 방편을 포섭해야 한다는 것을 사실단과 오미(五味), 피접(被接) 등의 다양한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①사실단(四悉檀)과 관련해서
불타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성질이나 욕구를 알고 사실단을 통해, 이를 성숙시킨다. 올바른 인연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삼장교의 관을 설명하고, 인연은 공에 지나지 않는다고 듣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통교의 관을 설명하고, 억겁에 걸쳐 수행을 한다는 것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별교의 관을 설명하고, 중도를 듣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원교의 관을 설명한다. 이는 세계에 따른 실단이다. 또 사람의 욕구에 따른 것이며, 진실을 위해 권을 펼쳤고, 권과 실의 지관을 설명한 것이다. […] 이와 같이 여래는 교묘하게 사실단을 사용하여, 보이거나 버리는 것이 때에 부합하고 근기에 따라 교화하며, 사람들은 모두 이익을 얻는다. 여래는 아무 목적 없이 가르침을 설명하지 않고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보이고, 버리는 것이다.
②오미(五味)와 관련해서
오미교(五味敎)에 근거해서 교의 흥폐(興廢)를 설명하면, 화엄은 대승의 수행인을 위한 두 개의 권(權)을 폐하고 하나의 권과 하나의 진실을 일으킨다. 삼장교는 두 개의 권과 하나의 진실을 페하고 하나의 권만을 일으킨다. 방등은 네 가지 모두를 일으키고, 반야는 한 개의 권을 페하고 두 개의 권과 하나의 진실을 일으킨다. 법화는 세 개의 권을 폐하고 하나의 진실을 일으킨다. 열반은 다시 네 가지를 모두 일으켜 모두 불성으로 들어가 단절됨이 없다. 이와 같이 여래는 교묘하게 실단을 이용하여 시기에 적절하게 일으키고 폐하며, 근기에 따라 교화하여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한다. 그러므로 여래의 설법 중에는 무의미한 것이 없으며 모두 중생을 해탈로 이끌기 위하여 적절하게 일으키고 폐했던 것이다.
③사종지관과 관련해서
세 개의 권에 대해 하나의 진실을 설명한다. 진실이 성립하면 권은 폐기된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지만 다시 한 번 더 사종지관으로 분별하면 이들은 모두 진실로서 허망하지 않다. 결정적으로 열리지 않으면, 진리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성문의 가르침이 '제경전의 왕'임을 결정적으로 이해하면, 방편문을 열어 진실상을 보게 되어 각각의 지관이 모두 원교에 들어간다. 이는 준마가 채찍의 그림자를 보기만 해도 바른 길을 향해 달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장교, 통교, 별교, 원교의 지관인] 네 지관은 모두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④부사의의 의미와 관련해서
사종지관은 모두 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종지관에 해당하는 진리는 불가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권도 불가설이므로 권이 아니다. 진실도 불가설이므로 진실이 아니다. 권이 아닌데 억지로 권이라고 설명하고, 진실이 아닌데 억지로 진실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이 임의로 설정하여 설명한 것이라면, 왜 권을 진실이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말로 설명한 것은 모두 권이기 때문이다. 또 권과 진실은 모두 권도 진실도 아니다. 모두는 불가설이기 때문이다. […] 권도 아니고 실도 아니면서 항상 정적한 진리의 본성을 지(止)라고 하고,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면서 권이기도 하고 진실이기도 한 것을 관이라고 한다. 관이므로 불지(佛智)라고 하고, 반야라고도 하고, 지(止)이므로 불안(佛眼)이라고 하고 수능엄정(首能嚴定)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합산도 아닌 것을 불가사의지관이라고 한다. 이는 진실이 권도 아니고 진실도 아 님을 밝힐 뿐만 아니라 권도 권이 아니고 진실도 아님을 밝힌다. 이것도 개권현실의 의미에 속한다.
<지의 마하지관/ 김정희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