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금산조의 발원과 발전
Prologue
산조는 그 기원이 19-20세기에 출현한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속악에 속하는 기악독주곡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민속악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음악적 기교를 쉽게 연주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정악대금을 개량하여 산조대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산조의 기원
대금산조의 발원을 찾아가다 보니 그 시작점이 정악대금의 주요 연주목록인 가곡의 원류와 맞닿아 있다. 19세기 중후반 가객 안민영은 스승 박효관과 함께 1876년(고종13년)에 <가곡원류>라는 시조집을 편찬하였고, 1885년(고종 22년) 시조 180수를 수록하여 <금옥총부>라는 시조집을 편찬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가곡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금옥총부에 의하면 경기도 이천에서 김군식이 퉁소 심방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심방곡은 시나위의 별칭으로 산조의 모태가 되는 음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심방곡은 무속에서 연주되는 살풀이형 심방곡과는 다르며, 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김창조가 심방곡을 우조 계면조로 변작하여 가야금 산조를 만들었고 이후 각종 악기에 탄주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함화진 | 조선음악통론)
대금산조의 출현과 발전
가야금산조는 1890년경 김창조가 처음 연주했다고 하며 이것이 산조의 효시로 보고 있다. 이후 충남 강경태생의 거문고 연주자인 백낙준에 의해 거문고 산조가 만들어 졌고, 20세기초 대금 연주자인 박종기에 의해 대금산조가 만들어지고, 이어 해금산조, 아쟁산조, 피리산조, 단소산조 서양악기 및 기타 다른 악기 산조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대금산조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박종기(1879-1941)는 1929년에 대금독주로 중모리와 굿거리, 중중모리를 녹음했고, 이어서 1936년 산조라는 이름으로 진양, 중모리, 굿거리를 녹음하였다. 박종기와 같은시대에 활동했던 강백천(1898-1982)도 대금산조를 구성했다고 전한다. 강백천은 20대에 박종기와 만나 허튼가락이 산조로 발전할 가능성을 확인했고, 전용선(1888-1964)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산조를 만들었다고 한다. 전용선도 대금산조를 구성하여 편재준(1913-1976)에게 전했지만 그후로 전승이 끊겼다. 단소와 피리산조의 명인이었던 이숭선(1901-1989)도 대금산조를 구성하여 국악사양성소에서 대금산조를 가르쳤지만 역시 다음 세대로 전승되지 못하였다.
박종기 명인 대금산조 자진모리(장고:김종기) Jonggi Park: Daegeum-sanjo Jajin-mori(Korean classical improvisation)
1935년 녹음 |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현재 박종기 산조는 한주환을 거쳐 이생강,서용석에게, 강백천의 산조는 김동진을 거쳐 김동표 등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산조가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두사람의 음악은 서로 교차되었다. 박종기는 일찍 작고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박종기에게 직접 사사하지 못했고, 오랫동안 연주활동을 했던 강백천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백천은 만년에 박종기 가락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산조를 재구성하였다. 따라서 박종기와 강백천 이후 세대의 산조는 계파적으로 복잡하게 구성된다. 한주환(1904-1966)과 한범수(1911-1984)는 박종기의 산조를 음반으로 냈고, 김동식,한범수,이생강 등은 강백천에게 직접 배웠다. 이처럼 박종기와 강백천 산조의 개별적 특징은 각각이 별도로 다음 세대로 넘어가지 못했다. 한편 한범수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아쟁산조의 명인 한일섭(1929-1974)은 구음으로 원장현에게 대금산조를 가르쳤고 원장현은 이를 토대로 자신만의 대금산조를 만들었다. 이처럼 대금산조의 유파는 특정 중시조보다는 그 이후 세대 명인들의 창조적 기여가 두드러진다.
현재 연주되는 대금산조는 2세대 명인(한주환,한범수,편재준,이충선,김동진,김동식 등)의 음악과 3세대 명인(이생강,서용석,원장현 등)의 음악들이다. 박종기는 산조를 만들면서 한 장단 단위의 가락과 리듬패턴을 반복하기 보다는 새로운 선율로써 가락을 구성했다. 그리고 가야금 산조나 거문고 산조와 같이 우조(평조)와 계면조를 구분했고, 청의 변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2세대 산조에도 관철되었다. 1950년대에 한주환은 청의 이동을 보다 다양하게 했고, 조성 역시 청의 변화에 따라 고루 활용하였다. 즉, 보조청, 기본청, 보조엇청, 기본엇청 간의 변화가 가능해졌고, 보조청에 우조(평조)가, 기본청에 계면조가 구현될 수 있게 되었다. 대금산조는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45호로 지정되었으며, 지금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출처 및 재인용 : Benedicta’s Room | http://blog.naver.com/teresabenedic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