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의 진실 - 제1부
1. 아버님의 이북 노정
4) UN이 참전한 6·25 전쟁-하나님의 재림주 구출섭리
⑥ 평양 체류 40일간
중공군이 참전함에 따라 유엔군은 평양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란하기 시작하였다. 아버님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곧 남쪽으로 피란하시지 않았다. 80세가 넘은 노파에게 무사히 귀환했다는 말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3일 맥아더 원수는 유엔군에 평양을 포기하고 삼팔선까지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평양 방위선의 중앙부인 성천(成川)이 중공군에 탈취되어 이 돌파구로부터 대군이 밀려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시민은 아침 일찍부터 피란을 시작하였다. 다음 날 12월 4일에 유엔군은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이때 평양의 대동강에 걸려있던 철교가 유엔군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피란민들은 다리를 정상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파괴된 철골을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12월 4일 저녁부터 5일 낮까지 대동강을 건넌 피란민 수는 5만 명이 넘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의 후퇴에 따라 많은 북한 주민이 남하하기 시작하여 피란민의 대열은 남쪽으로 가는 도로를 메웠다. 피란민들은 추위와 질병과 배고픔과 싸우며 북한을 탈출하였다.
김원필 씨가 찾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을 때 그 노파는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상태였다. 김씨는 노파에게 아버님이 무사히 수용소로부터 나왔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 일을 아버님에게 전하니까 비로소 아버님은 “그러면 이제 피란 가자.”라고 말했다.
아버님은 왜 그 노인을 만날 때까지 피란할 수 없었는가. 그 노인은 아버님이 평양에 와서 전도할 때 교회에 와서 언제나 아버님 옆에 앉아 아버님의 옷을 만지고 싶어 했다. 그러한 노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공로를 쌓은 사람을 무시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참소 받는다고 말씀을 하신다. 아버님은 하늘과 땅 앞에 그리고 그들의 조상과 후손으로부터도 동정 받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 때문에 아버님 일행의 피란은 늦어졌다. 이때는 일각(一刻)을 다툴 때였다. 그것은 아버님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으로 곧 평양을 탈출하는가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아버님은 김원필 씨에게 박정화 씨(흥남수용소에서 총반장을 했던 제자)를 데려오라고 하셨다. 김씨가 박씨의 집을 찾아가니까 그만 혼자 남아있었다. 그것은 박씨가 발 골절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가족은 피란 가는 데 그가 큰 짐이 되기 때문에 자전거와 개를 남겨두고 먼저 가버리고 없었다.
그런 가운데 김씨가 찾아갔기 때문에 박씨의 기쁨은 한층 더 컸다. 박씨는 자기를 버리고 먼저 아버님도 피란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리어카에 그와 자전거를 싣고 아버님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 후 다시 아버님 일행은 박씨가 있던 집에 돌아왔다. 그 집은 높은 데 있었고, 평양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때 유엔군은 후퇴하면서 포탄을 폭발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박씨에 의하면, 동쪽 하늘이 밝기 시작할 때 아버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고 한다.
“내가 평양에 온 것은 평양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평양의 (기독교) 성도들이 나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장차 평양은 공산군의 소굴이 된다.”
이 말은 2000년 전에 예수가 불신하는 사람들에게 말한 다음 성구와 흡사하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 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태복음 23장 37~38절)
청년인 건장한 사람에게도 피란길은 극히 어려운 것인데, 아버님은 발이 골절된 박씨를 데리고 김씨와 세 사람이서 평양으로부터 부산을 목표로 떠났다. 주요 도로는 군인들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란민은 포장되어 있지 않은 논길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자전거에 탄 박씨가 핸들을 잡고 방향 조종을 했다. 그의 오른발은 페달에 닿지만, 깁스를 한 왼발은 페달에 닿지 않았다. 아버님이 그 자전거를 뒤로부터 밀었다. 김씨는 짐을 지고 그 뒤를 따랐다.
12월 4일 저녁 피란민 가운데서 늦게 대동강을 작은 배를 타고 건너 평양을 탈출하였다. 고난을 상징하는 것 같은 눈이 내리는 추운 날의 출발이었다. 이때 아버님의 결의는 흥남수용소에 들어갈 때 ‘제일 어려운 일을 내가 책임진다.’와 똑같이 ‘피란민 가운데서 제일 고생한다.’였다.
세 사람의 복장은 이러하였다. 아버님은 박씨의 낙타 오버를 한복 바지저고리 위에 입고, 머리에는 머플러로 둘둘 감았다. 김원필 씨는 박씨의 개털로 된 오버, 박씨는 스프링코트를 입었다.
피란할 때 아버님을 모시고 흥남수용소로부터 따라왔던 문정빈(文正彬) 씨는 길이 엇갈려서 함께 남하할 수가 없게 되었다. 흥남수용소로부터 신고 온 옥세현 씨의 머리카락으로 짠 버선을 가져오지 못하고 피란길에 나선 것은 그때의 혼란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옥씨는 후에 다시 자기 머리카락을 잘라서 버선을 짰다. 아버님이 너무나도 그 버선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