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탑>
국토의 정중앙에 세워진 중앙탑은 서울의 동쪽의 정동진, 육지의 끝 해남 땅끝마을, 육지 남쪽 장흥의 정남진 등등과 더불어 우리 국토의 이정표가 되는 지역의 탑이다. 나머지는 현대적 지형 척도의 좌표로 지정된 곳이지만, 이곳은 오랜 역사의 무게가 실린 유적이다. 국토의 좌표이자 역사의 좌표인 중앙탑, 공간적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넘어, 시민들의 생활 휴식 공간이어서 현재적 공간으로서의 의미도 더해지는 곳이다.
1. 방문지 대강
명칭 : 중앙탑평리 7층석탑
위치 :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방문일 : 2023.10.2.
입장료 : 없음
2. 둘러보기
충주시 박물관과 남한강을 끼고 있는 중앙탑공원의 중앙에 중앙탑이 있다. 너른 공간에는 여러 조각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공원 둘레 남한강둑으로는 무지개길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이 끝나는 곳에는 충주체험관광센터가 있고 그 안에는 무지개길게스트하우스가 있다. 그곳을 더 지나면 탄금호 유람선 승선장이 있다. 강, 역사, 여행, 휴식 등 모든 것을 한곳에서 체험할 수 있다. 더구나 이곳은 신라 백제 고구려가 모두 차지했던 적이 있는 삼국 국토지이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한국의 모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바다가 강으로 대치되고, 공간적 평면 이동이 강 유람선으로 하는 선상 이동으로 확산된다. 대단한 지역이다. 단지 지역적인 강점만 가진 것이 아니라 그런 강점을 최대한 발현해주는 행정도 대단하다. 숨은 보석같은 지역이다.
1) 중앙탑 소개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남한강 옆 강가 언덕 위에 위치한, 전체 높이 14.5 m 화강암제 칠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 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본 석탑은 일명 중앙탑(中央塔)이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통일신라 전국토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사람이 동시에 출발하여 같은 보폭으로 걸어 만난 국토의 중앙지점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남한의 정중앙이 충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한 듯 싶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1962년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중앙탑 소재지인 중앙탑면의 명칭은 본래 가금면(可金面)이었는데, 이 탑에서 이름을 따서 2014년에 지명을 중앙탑면(中央塔面)으로 바꿨다. 평택제천고속도로에 있는 졸음쉼터 이름도 중앙탑에서 따와 중앙탑 졸음쉼터다. 나무위키
남한강은 계명산을 지나며 ‘S’자로 굽이친다. 완만한 나선을 그리며 충주 시가지를 품은 뒤에는 다시 반대로 굽이치며 목계나루를 향해 나간다. 〈용비어천가〉에 ‘쇠벼라’라고 기록된 지형이다. 탄금대의 서쪽 옛 가금면 일대다. 당시 백성들은 이 일대를 연천(淵遷)이라 쓰고, 쇠벼라라고 불렀다. 연(淵)과 같은 의미인 소(沼)와 벼랑을 의미하는 벼라를 합한 말이다. 쇠[沼]를 쇠[金]로 오인해 금천이라는 지명이 나왔고, 가금면이 생겨났다. 그 가운데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이 자리한 마을은 탑평리라 불렸다. 탑평리 칠층석탑이 그 물길을 굽어보는 평지에 자리한 까닭이다. 가금면은 2013년 중앙탑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충주 사람들이 탑평리 칠층석탑을 부르는 이름이다. 소를 따라 자리한 아름다운 벼랑보다는 여전한 중원의 자존심이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언제부터 중앙탑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연유를 추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이다. 탑평리 칠층석탑이 세워졌다고 여기는 신라 원성왕(재위 785~798년)때부터일 수도 있다. 그와 관련해서 재미난 전설이 있다. 원성왕이 국토의 중앙을 알아보기 위해 남과 북의 끝 지점에서 보폭이 똑같고 잘 걷는 사람을 한날한시에 출발시켰더니, 탑평리 칠층석탑에서 만났다. 이에 그 자리에 탑을 세우고 국토의 정중앙임을 표시했다. 중앙탑면에는 안반내[半川]라는 곳이 있는데, 이 또한 남북의 반이 되는 내라는 뜻이다.
탑평리 칠층석탑에는 신라의 김생과 관련한 일화도 전해진다. 그가 반송산에 사찰을 세운 뒤 서적을 보관하려고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다. 탑평리에 왕이 태어날 기운이 있어 탑을 세워 제거했다는 씁쓸한 설도 있다. 삼국의 격전지로 늘 세계의 중심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세계의 변방이어야 했던 슬픔이다. 북서쪽으로 장수왕의 충주 고구려비가, 남쪽으로 진흥황이 신라 귀족을 이주 시켰다는 충주 누암리 고분군이 그 증거처럼 자리한다.
새로 신라에 편입된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제도하기 위함이라고도 하고, 육로와 수로의 교차점으로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로도 해석한다. 사찰과 무관하게 탑으로만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다. 모든사연은 중원의 의미와 역할에 일정 부분 기댄다.(충주시 홈피)
탑돌이 행사를 위해 준비가 한창이다
근사한 곳은 언제나 드라마 촬영지가 된다. ㅏ
충주박물관
공원 내 조각품
박물관
#충주중앙탑 #중앙탑공원 #국토정중앙 #충주관광 #관광조건 #충주관광장점 #중앙탑공원둘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