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만들어진 인간
사람이 되는 일은 내 삶의 큰 목표이다. 좋은 사람,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 그런 사람 말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고 이 욕구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한 듯싶다. 타인의 기분을 살피고 모임의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데, 그들을 위한 일이기도 동시에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갈망은 상대적이기도 하지만 절대적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잘 먹고 잘사는 일을 삶의 목표로 삼기에는(그럴 자신도 없었지만) 뭔가 부족해 보였다. 불공정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올곧게 살지는 못해도 그런 세상에 편승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직장에서 내 몫을 책임 있게 감당하고 싶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품 넓은 어른으로 익어가는 좋은 어른이고 싶다. 하지만 나의 이 거룩한 갈망이 그녀 앞에서는 쉬이 부서진다. 매번 나를 절망 속에 주저앉히는 그녀는 나의 보물 1호 중2 딸이다.
출발은 기대감에 가득했다. 딸도 자신의 인생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자신만의 길을 찾기를 원했다. 딸의 진로를 함께 고민하며 우리는 경쟁적 교육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행학습을 택하지 않기로 했다. 남들보다 일이 년 늦더라도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닌 진짜 공부를 해보기로 했다. 딸이 관심을 보인 음악 분야부터 시작해서 미술, 역사 등으로 공부의 영역을 넓혀가기로 했다. 주입식 교육이 아닌 자발적 교육, 경쟁의 교육이 아닌 상생의 교육을 가치로 삼았다. 첫걸음으로 노래 만들기를 시작했다. 비전공자들도 유튜브와 앱을 통해서 작곡을 직접 하는 경우가 많고, 나 역시도 최근에 지인의 도움을 받아 노래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어서 자신이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수고를 자처했다. 자료들을 선별하고 정리해서 강의안을 만들었다. 열의를 다해 준비한 첫 강의는 내 기대 같지 않았다. 딸의 자세부터 마음에 안들었다. 개의치 않고 딸을 위해 작곡 과정을 미리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결국 딸의 한마디에 폭발했다.
“졸리다”
삐딱하게 앉아 있는 것도 참고 있었는데, 누르고 있던 내 속의 용암이 폭발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노래 만들기 네가 하자고 했잖아. 그런데 네 자세가 지금 배움의 자세야“
아내는 옆에서 한숨을 내쉬고 딸은 대답도 없다.
오랜 역사 동안 인간은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왔다. 자신을 신격화한 일부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인류는 지구상의 다른 어떤 존재와는 비교될 수 없는 존재로 스스로를 여겨왔다. 아니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중심으로 여기며 만물이 인간을 중심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는 진리는 결코 깨질 수 없는 불변의 진리였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고작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진리를 우리 인간이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긴 역사만큼이나 꽤 길게 서술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 년이 넘도록 인정하지 않았다. 꽤나 오래된 이 착각은 결국 여러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기독교가 처음부터 이렇게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성경의 첫 번째 책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창조한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하나님이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명의 존재가 된다. 이 이야기를 과학적 명제로 받아들이는 어른들은 흔치 않을 것이다. 사실적 묘사보다는 시적 표현에 더 가까운 이 이야기는 인간이 쉽게 부서지고 해체되는 약한 존재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주재료 흙은 실상 먼지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번역이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우리 인간이 광활한 우주에서 고작 먼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기 3천 년 전에 성경은 이미 우리가 먼지처럼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고 또한 인정하기 싫은 일이 내 약함을 마주하는 일이다. 아이 앞에서만은 약함을 들키지 않고 싶은데, 오히려 더 바닥을 쉽게 드러낸다. 좋은 부모로서 부드럽게 “네가 이런 건 좀 고치면 좋겠어. 알았지?” 하고 끝내고 싶지만, 딸은 이제 절대 순순히 백기를 들지 않는다. 딸이 사춘기라는 시기를 마치 무슨 절대 반지처럼 쓰는가 싶어, 부모로서, 연장자로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휘두른다. 그렇게 한참을 대치하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약자일 수밖에 없는 딸은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쏟고, 그제야 난 정신이 돌아온다. “아빠가 미안해”라고 온 힘을 다해 뱉어내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그제야 깨닫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일을 뭘 그렇게 큰일로 만들었을까. 불같이 타올랐던 화는 혹여 딸에게 없어지지 않는 상흔이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으로 바뀐다. 내 염려를 아는지 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을 걸어주고 웃어준다.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는 먼지처럼 작다.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는 모두 흙으로 돌아갈 유한한 존재들이다. 칼 세이건의 딸 샤사 세이건은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책에서 ‘인간은 궁벽한 곳에 있는 작은 행성에서 눈 한 번 깜박할 순간 동안을 살아가는 아주 작은 존재’라고 배웠다고 했다. 하지만 또 그녀는 부모로부터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사실도 배웠다고 했다. 지금도 딸과 나는 어려운 대화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규칙을 몇 가지 정했다. 서로의 요청을 좀 더 존중해주기로 했다. 난 그녀만의 방법과 공간을 존중했고 그녀 역시 함께함의 의미를 인정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랑은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욕심은 아이에게만큼은 꼭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첫댓글 아이에게만큼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아내의 딸의 무응답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용암으로 흘러넘치는 이야기가 재미있었어요. 약간 교훈적인 느낌의 흙먼지와 우주 속 작은 지구의 비유보다 딸의 태도에서 내가 느낀 것, 생각의 변화 같은 일상 얘기에 조금 더 집중하면 더 이해가 잘 될 것 같아요.
백 교훈적인 느낌이라는 의견 감사해요. 조금 더 독자들이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수정해볼게요~^^
글의 도입과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부분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모르게) 비슷한 지향을 가진 사람으로써 첫번째와 두번째 단락에 많은 공감을 했어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딸 앞에서 '매번' 절망되는 다른 에피소드는 뭘까? 였어요. 그걸 조금 더 구체화해서 채우고 뒷 부분 '인간' '우주' '신앙' 부분은 조금 줄여주신다면 마지막 단락에 딸과의 화해(?)나 노력부분이 더 잘 다가올 거 같아요.
림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어떤 단락에서 조금 더 수정보완해야 될지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의견 참고해서 계속 글을 써볼게요~
일상과 성찰의 포착이 교차되는 지점이 재밌게 읽혔어요. 그런데 제목은 '흙으로 만든 인간' 즉,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미약한 존재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지점이 큰 문제의식처럼 보이는데 결말은 '아이한테만큼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로 마무리되어서 어딘가 연결이 매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발산적 욕구와 미약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수렴적 욕구에 대해서 한두문단 정도 좐님의 성찰이나 해석이 더 들어갔으면 어떨까 싶어요. 지금은 외부인용이 많아서, 다소 외부인용에 기대어서만 설명한다는 인상이 있거든요. 딸과의 에피소드는 독립적으로도 충분히 와닿는 지점이 있어서, 이와 관련한 해석에 대해, '서로의 요청을 좀 더 존중하기로 했다' '함께함의 의미를 인정했다'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등은 중요한 지점인데도 불구하고 단순 서술로만 남겨져 있어서 과정을 궁금하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