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의 증인들 / 사 30:18-26, 막 16:1-8
밤에 보면 십자가의 붉은 네온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십자가가 많아서 공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끼 때문이다. 교회가 제 역할만 한다면 십자가는 많을수록 좋다. 나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자화자찬하여 부요한 자 같으나 실상은 가난한 자는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여러분이 예수님께 부름을 받고 주님의 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돌과 같고 막대기 같은 우리를 성령의 감화로 예수 믿게 하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구원이다.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대신 죄값을 지불하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의를 받아들임으로 구원받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골고다(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토요일 무덤 속 에 계시다가 주일 새벽에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도 눈이 열리지 않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님의 제자인 도마도 믿지 못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도 눈이 열리기까지 믿지 못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끊임없이 이런 은혜로 여러분의 가정, 교회, 사회와 불신자의 세계 속에도 찾아오고 계신다. 그런데 이런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엠마오 도상에 찾아오신 것처럼 오늘도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필리핌 마닐라의 뀌아보라는 곳에 서민들을 위한 큰 시장이 있고, 그 시장 한 가운데 바실리카성당이 있다. 그곳은 필리핀 사람들의 삶의 현실을 매우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이다. 특별히 바실리카성당에는 매일 미사가 진행되는데, 미사 시간이면 성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이 성당에서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성당 출입문 오른쪽의 큰 유리관 속에 누워있는 흑인 예수의 상이다.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 예수 상에 가까이 와서 손을 합장하고 간절히 묵례도 하고, 그 예수의 상을 깊이 바라보기도 한다. 필리핀은 카톨릭 국가인데 이들 성도들에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마음에 간직하지 못하고 무덤에 누워있는 그리스도상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유리관 속에 있는 예수의 상이 무덤이 돌문을 굴리고 살아난 예수가 아니라 무덤 속에 누워있는 예수 상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가 어떤 예수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삶 전체와 관련된 문제이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가 아닌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무덤에 누워있는 예수의 몸에 향료를 발라드리려고 무덤으로 찾아가는 세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이다. 이 여인들이 어떤 동기에서 예수의 무덤으로 가게 되었을까요? 유대인이 안식일, 곧 토요일 해가 지고 유대인의 새 날인 일요일(주일)이 시작되었다. 예수의 죽음과 매장을 목격했던 여인들은 그 다음날 아침 예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 향료를 샀다. 향료는 시신에서 풍기는 악취를 막기 위해서 시신 위에 뿌리기도 하지만 사랑과 헌신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 여인들은 예수를 극진히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 이 여인들은 아주 이른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예측을 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여인들은 무덤 입구가 큰 돌로 막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땨문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그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염려하면서 무덤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하여 무덤을 쳐다보니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은 이미 굴려져 있었다. 곧바로 여인들은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는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여인들은 한 청년이 그들의 우편, 곧 묘실의 정면 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인들의 두려움을 눈치 챈 청년은 그들에게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라고 빈무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 주었다. 주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은 열두 제자도, 어떤 훌륭한 사람도 아닌 나약하기 그지없는 여자들이었다. 여러분은 자신이 나약한 여자라는 이유로 신앙에서마저도 뒷전에서 소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는 않은가? 이 여인들을 보라.
110여년 전 언더우드 목사는 부활주일 아침에 한국에 첫 발을 내디디면서 어둠에 잠겨 있는 한민족의 가슴 속에 복음의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이처러 부활절은 새로운 출발이요, 거듭남이요,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 부활주일 아침에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새 생명이 새롭게 부활되어 나왔듯이 내 삶이 새롭게 부활되어야 한다. 새로운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 새 출발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음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구체적으로 내 안에 모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사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살면서 부활의 승리를 드러내고 사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가 지난 2천년 동안 진리를 외치고 정의를 실현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워 온 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만 알고 있거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내 자신의 삶 속에서도 부활의 승리를 매일매일 드러내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나운 폭풍우가 세차게 몰아치는 칠흑같이 어둔 밤이었다. 커다란 여객선 하나가 클리브랜드 항구를 향하여 필사적으로 풍랑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배의 키잡이(조타수, 항해사?)는 사나운 풍랑이 이는 캄캄한 상황에서 해안의 작은 두 등대의 불빛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항구에는 커다란 등대 하나만이 켜져 있을 뿐, 작은 등대의 불빛들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선장은 항해사에게 황급히 물어보았다. ‘작은 등대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다 꺼져 버린 것 같군요.’ ‘그러면 저 큰 등대 불 하나로도 항구를 찾아낼 수 있는가?’ ‘어떻게든 찾아야지요. 아니면 죽는데요.’ 항해사는 온 힘을 다하여 키를 조정했다. 그러나 하나 밖에 켜져 있지 않은 불빛만으로 항로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여객선은 방향을 잃고 암초에 부딪쳤으며,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처럼 그리스도라는 큰 등대 밑에 작은 등불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 작은 빛들을 통해 사람들이 쉽게 하나님께로 온전히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작은 등불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혹 등불이 꺼지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여러분, 우리는 무덤 속에 누어 있는 예수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옛날에 살았던 위대한 성인을 숭배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우리는 환상에서 본 예수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무덤에 안장된 후 사흘만에 죽음 가운데서 분명히 살아나신 예수를 믿는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계시며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살아있는 예수를 믿는다. 십자가를 거부감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교회가 제 역할을 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살아간다. 큰 빛이신 예수와 함께 작은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다짐이 있어야겠다.
지난 고난주간에 새벽기도를 하는 중에 가슴에 이런 말씀이 부딪혀왔다. 매달 교회 수입의 50%를 선교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교회 경상비로 사용한 후 남은 것으로 생활을 하라. 남은 것이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가라는 말씀이었다. 앞으로 교회는 우리 교회 뿐아니라 모든 교회가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선교에 힘써야 한다. 이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다. 초대교회가 매일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했기에 그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키며 복음을 땅끝끼지 전할 수 있었다. 우리도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밀씀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올해 우리 교회 목표는 ‘말씀으로 무장하여 새출발하는 성도’이다. 영혼을 사랑하는 성도(내 영혼을 사랑하려면 열심히 말씀보고 기도해야 한다), 말씀 전파에 힘쓰는 성도(다른 사람의 영혼도 사랑해야겠지요? 그러러면 북음을 전파해야 한다. 신앙이 성숙한 자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군사로 훈련받는 성도(신앙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 교회는 제자훈련, 성경공부, 성서대학 등 다양한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려고 한다. 성경공부를 하고 싶은데 교회 올 시간이 없다면, 어느 곳이라도 달려가서 성경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하겠다. 이런 모임에 참여하여 훈련을 받기를 바란다. 군사가 훈련을 받지 않으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우리를 유혹하는 시험을 이겨나갈 수가 없다. 이를 위해 기도하기 바란다), 열심히 봉사하는 교회(훈련받은 내용을 삶에 적용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으면 베풀어야한다. 안 보이는 곳에서 선을 행햐야 한다. 내가 가진 은사로 헌신해야지요.)
또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다. 교회에서 부모를 잘 공경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나이 드신 노인들을 위한 노인대학(은혜대학)을 개설하여야 한다. 이뿐 아니라 교회가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각자의 은사를 따라 활동부서를 만들어 헌신 봉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소년소녀 가장 돕기나 결식아동돕기, 고아원(보육원), 재활원, 장학사업 등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꼭 필요한 일들을 찾아서 해야 한다. 이 외에도 교회가 할 일이 많다. 교회가 제 역할을 감당해야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잇다. 이 일을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협조없이는 불가능하다. 기도하면서 준비하자.
미국 시카고 어느 거리를 거닐고 있던 사람이 창문에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그린 매우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 그는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 그림을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그의 곁에 개구쟁이 소년이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소년도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나타난 강렬한 표정으로 ‘십자가 상의 예수’가 그의 작은 영혼을 정말로 사로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얘야, 저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니?’ ‘무엇인지 모르세요?’ ‘저기 있는 사람이 예수님이구요, 다른 사람은 로마 군인이지요. 그리고 울고 있는 여자는 그의 어머니구요, 그리고 그들이 그를 죽였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그 창가를 떠나기가 싫었지만 언제까지나 지체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돌아서서 조용히 거리를 따라 내려갔다. 곧 그의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거기에는 그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아저씨!’ 소년은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씀드리는 것을 잊었어요.’ 여러분, 이 소년이 가진 믿음을 보세요. 부활하신 예수를 마음 속에 모시고 살기에 이 예수를 만나는 자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 사회를 밝게 빛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 부활의 증인들이다. 부활의 증인으로, 그리스도의 작은 빛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2000-17, 부활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