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크투어리즘 여순사건
전남문화관광해설사 최 정 탁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남문화관광해설사로써 전남동부권일부와 여수문화관광해설를 비롯하여, 여수문화관광해설사협회에서 주관하는 여순사건 동네강좌와 여수시청에서 주최하고, (사)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 주관한 여순사건전문가양성교육에 참여하여 수료하고 합격하여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속으로 여순사건에 대하여 강의(프레젠테이션)와 현장해설활동하고 있는 최정탁 입니다
목 차
⃟여순사건 당시 국내 상황 요약 -------------------------------------1-
⃟여순사건개요 --------------------------------------------------2-
⃟14연대 주둔지---------------------------------------------------2-
⃟중앙동 인민대회개최 ---------------------------------------------4-
⃟인구부(잉구부)전투-----------------------------------------------5-
⃟서국민학교(현,서초등학교)학살지------------------------------------6-
⃟종산국민학교(현,중앙초등학교)학살지 군법회의 터----------------------6-
⃟신항과 함포사격-------------------------------------------------7-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만성리학살지)-------------------------------8-
⃟만성리 형제묘 학살지 --------------------------------------------8-
⃟오동도 학살지---------------------------------------------------9-
⃟구봉산 학살지---------------------------------------------------9-
⃟국 동 학살지--------------------------------------------------10-
⃟오림동 학살지--------------------------------------------------10-
⃟애기섬 학살지--------------------------------------------------10-
⃟호명동 암매장지------------------------------------------------11-
⃟여순사건 희생자의 묘 앞 (봉두리 시립묘지)--------------------------11-
여수 오동도 동백꽃 의 시, 진 혼(鎭 魂) 의 시
⃟안도 선창 학살지-----------------------------------------------12-
⃟거문도 학살지 / 검등여 학살지------------------------------------13-
⃟손양원 목사 순교지---------------------------------------------13-
⃟미평 심상소학교와 김영준 (현,미평초등학교)-------------------------14-
○여순사건이후 군부변화 ------------------------------------------14-
○여순사건 희생자에 관하여----------------------------------------15-
⃟여순사건 당시 국내상황 요약
여순사건 당시 여수와 전남동부지역의 정세는 해방이 되어 해외에서 들어온 여수지역 귀환동포들의 급작스러운 증가와 미군정은 일제시대 보다 더 심한 보리쌀까지 미곡 수집령으로 인해 군정당국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행정당국의 실정과 더불어 1948년 7월의 수해로 각 지방에 이재민들이 무더기로 발생하여 많은 재산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사회의 경제적 상황은 1945년 8월부터 1948년 1월까지 약 2년 5개월 동안 서울의 생필품가격은 평균 25,2배 (도매물가 상승률은 73,2배)로 급등하였다. 1948년의 미곡 수집은 미군정이 500만석을 수집하였는데 전체 총생산량의 36%에 달하는 양이었다. 게다가 수집가격은 한가마당 660원이었는데 반해 당시 시장가가 6,000원이 넘었다고 하니 이를 고려하면 불과 1/10정도의 가격을 받고 미군정에 쌀을 팔아야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1948년 5월4일에 광주의 4연대 1개 대대가 여수에 14연대로 창설되었다는 점이다. 여순사건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대응은 유엔의 한국승인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허약한 정부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고 이를 은폐시키려는 시도는 필요했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의 주체에 대해 우익과 공산주의자의 연합이라 초기발표에서 두 번째로 민간인 공산주의자가 주동 되고 군인 일부가 일으킨 것으로 변화되었고 마지막에는 북한으로 그 화살을 돌려 소련, 북한, 남한의 공산주의자을 연계한 그 책임의 화살을 해당 지역민으로 바꾸어 발표했다. 당시 민간인 학살은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기 때문에 군인이 아닌 모든 민간인은 3심 제도를 적용해야 됨에도 불법으로 즉결처분을 하였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21일부터 시작된 정부군의 진압작전에는 총5개연대의 10개 대대와 1개 비행대(경비행기 10대) 해안경비대 함정 등이 동원되었다. 진압작전에는 당시 전 병력의 약1/10인 140명의 장교와 4,732명의 사병 총 4,872명으 군인이 참가하였고, 진압군의 작전은 “압박 섬멸전”으로 총공격하였다.
미군은 작전지휘권을 이용하여 사건발생 직후 미 군사고문단장이 대책회의를 소집하고 반군토벌전투사령부설치 사령관을 임명하는 등 사실상의 사령부역할을 하였다. 그렇다면 미군은 민간인 학살의 책임은 없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순사건 발생 후 미군은 조건 없는 군수물자 지원을 약속하여 무한정의 탄약, 신형무기, 식량을 지원하였다.
미군은 진압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침묵함으로써 학살을 방조하였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여순사건 당시 시민들의 집단학살을 보면서 전 선기자로 취재했던 칼 마이던스 기자는 이를 “침묵” “강요된 침묵”이라고 표현했을까, 총살되기 위해 끌러가면서도 항변도 없고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이나 슬프고 애처로운 애원의 소리도 없는 공포스러운 침묵의 광경을 칼 마이던스는 그 의 저서 More than meets the eye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것)에서 침묵, 강요된 침묵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 1 -
⃟여순사건 개요
여순사건이란 여수, 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정의에 의하면 “여수, 순천 10,19사건이란 정부수립의 초기단계에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 4.3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인하여, 1948년 10월 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1일까지 여수 순천지역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혼란과 무력 충돌 및 이의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1948년 10월19일 전남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제주4.3사건 진압 파병을 부당한 명령이라는 이유로 항명하여 봉기를 일으킨 뒤, 그 사태가 순천 등을 거쳐 전남 동부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봉기군과 좌익세력에 의해 경찰. 우익인사 등이 불법으로 학살되었고, 군인,경찰의 봉기군 진압과정 및 진압 후 “봉기군 협력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 역시 불법으로 학살되었으며, 봉기군과 좌익세력이 백운산, 지라산 등지로 입산한 후 토별대가 이들 빨지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산간지역의 민간인이 집단적으로 학살된 사건을 말합니다.
그 후 제14연대가 해산되고 봉기군에서 이탈한 다수의 군인들이 귀향 도중 또는 고향에 은거하던 중에 봉기군으로 지목되어 전투와는 무관한 현장에서 학살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당시 어렵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대전형무소를 비롯해 전국의 형무소에 수감되거나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는데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하자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서 군경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학살을 당했습니다. 이를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 국민보도연맹희생사건이라고 하며, 이 역시 여,
순사건의 유형 중 하나입니다.
⃟14연대 주둔지 (여순사건의 발원지: 신월동 805번지)
여순사건의 발원지는 해방 이전 이곳 신월리로 원래 신근(新根)정, 물구미(勿九味), 봉양(鳳陽) 의 3개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1940년 통계에 따르면 230가구, 1,339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어 동정과 서정, 봉산리에 이은 큰 마을이었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 1942년 8월경 가막만과 구봉산 뒷산의 지형이 천연요새이고, 앞바다가 ㄷ자 모양으로 천연의 만(灣)을 이루고 있는 지형을 이용해 일본은 해군202부대의 수상비행장을 만들고, 군수품공장과 미평역에서 신월리까지 철도를 놓기 위해 평화롭게 살던 신월리 주민 3개 마을을 일제에 의해 강제 이주시켰다,
비행장공사는 일본 토목 회사들이 맡아서 진행했으나 직접 노동하는 사람들은 여수를 비롯해 전남 동부 6군에서 끌려온 근로 보국 대원들이 두 달씩 교대로 일해야 했었다고 합니다,
- 2 -
90% 가까이 공사 진행이 되었으나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중단 되었던 곳 입니다.
지금도 신월리에는 그 흔적이 있는 데 일제말기에 일본해군의 항공기지가 있던 곳이기도 하여 바다가에는 일본 해군들이 수상비행기 이착륙장으로 활용하기위해 만든 콘크리트로 된 활주대의 흔적이 있으며, 공장 내에는 비행기 격납고, 14연대 군인들의 음식을 장만했던 식당의 굴뚝과 방공호 등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해방이 된 뒤 제헌국회의원선거를 불과 몇일 앞둔 1948년 5월 4일 신월리는 다시 군사 용지로 편입되어 미군의 주도 아래 안영길(安永吉)대위가 부대장을 맡은 1개 대대 병력이 광주 4연대에서 차출되어 온 군인들이 14연대를 창설하였다.
이영순(李永純)소령, 김익열(金益烈)중렬, 오동기(吳東起)소령을 거쳐 박승훈(朴勝勳)중령이 연대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48년 10월 19일 지창수(池昌洙)상사를 중심으로 다수의 사병들에 의해 봉기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미군은 이곳을 “앤더슨기지(Camp Anderson)”라고 이름을 짓고 14연대의 주둔지로
사용했다고 하며, 1950년 7월 25일 군대가 완전 철수되고, 1952년 12월 31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제15육군병원이 설치되었으며, 1962년 6월 26일부터 1976년 2월 20일까지는 보사부 결핵환자 자활촌으로 지정 사용하였다고 한다,
1976년 7월 23일부터 현재까지 한화여수공장이 입주하여 가동 중인데, 옛부터 평화로운 원주민 마을을 강제로 이주시킨 후 일제와 미군에 이어 한국군의 병영지로 쓰이다가 급기야는 시민의 안전을 볼모로 하는 화약공장이 들어서기까지 민족 현대사의 아픔과 질곡을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여순사건은 제주도 출병을 위한 준비로 하루 종일 분주했던 1948년 10월 19일 19시 50분경 지창수 등의 하사관 세력은 제주도 파병반대를 주장하여 신월동에서 봉기하여, 회식 중이던 장교들을 사살하고 비상 나팔을 불어 연병장에 모이게 한 후,
지창수 상사는 연단에 올라가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남한 단독선거 반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선거일: 1948. 05. 10.)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등 의
선전연설을 했으며, 사병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건인데, 나중에 김지회, 홍순석 등 장교들이 동참하여 일으킨 사건입니다.
[애국인민에게 호소함]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
- 3 -
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 궐기하였다.
다음이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 제주토벌 출동거부 병사위원회 -
(출처 : 여수인민보, 1948년 10월 24일 / 동아일보, 1948년 11월 30일)
10월 20일 새벽에 여수시내에 진입하고, 오전에는 순천을 점령했다
군인 봉기에 여수, 순천의 지역 주민들이 대거 합세하면서 이 사건은 “군인반란”을 넘어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대중봉기” 로 발전하게 되었다.
여수에서는 10월 20일 중앙동 로터리에서 인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여수와 순천을 점령한 14연대는 부대를 재편성하여 주력은 구례. 곡성. 남원. 등 북쪽으로, 일부는 벌교, 보성, 화순, 등 서쪽으로, 일부는 광양, 하동 등 동쪽으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구례. 보성 등지에서는 14연대가 진격하기도 전에 이미 지방 좌익세력에 의해 점령되어 무혈 입성하였다.
○점령지에서의 인민행정 실시
해방 후 만들어졌던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가 재건되어 행정기구로 활동하였고
보안서 을 조직하여 악질경찰을 체포하였고, 친일파 모리배의 은행예금을 동결하거나 재산을 몰수하고, 식량영단 창고를 개방하여 쌀과 물자를 시민들에게 배급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이나 우익인사에 대한 인민재판을 실시하였다.
⃟중앙동 인민대회 개최(중앙동 680번지, 중앙동 291번지 일대)
1945년 8월15일 중앙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발족하고, 여수에서는 8월 20일부터
여수건국준비위원회가 진남관에서 발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던 분들이 1946년 4월에는 여수인민위원회라고 명칭을 변경하여 위원장 정재완, 부위원장 이우현이 활동했었다고 한다.
그 뒤 14연대에서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봉기군과 지방좌익은 1948년 10월20일 오후 3시경 중앙동 로터리 광장(중앙동 680, 중앙동 291번지 일대)에서 수많은 시민들
이 참여하여 인민대회를 개최하고, 인민대회 장소에서 - 38선이 무너졌다, - 제주 출병을 거부한다. - 동포가 동포를 죽일 수 없다고 선전한 뒤 인민위원회를 조직
할 것을 결의하고 추도가, 해방의 노래 등으로 시작하여 이용기의 사회로 봉기군대
- 4 -
표와 좌익의 축사에 이어 6개항의 결정서를 채택하고 인민대회에서는 이용기, 박채명, 김귀명, 문성휘, 유목윤 등 5명이 의장이 되어 대회를 진행하였고, 대회를 끝낸 오후 5시경부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고, 21일 여수시의 각 읍면 지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인민대회가 열렸는데, 여수가 진압되고 부역 협의자를 색출하면서 인민대회장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압송되어 즉결 처형되거나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6개항의 결의안
1.오늘부터 인민위원회가 모든 행정기구를 접수한다.
2.우리는 유일하며 통일된 민족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을 보위하고 충성을 맹세한다.
3.우리는 조국을 미 제국주의에 팔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분쇄할 것을 맹세한다.
4.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민주주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5.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모든 비민주적인 법령을 무효로 한다.
6.모든 친일 민족 반역자와 악질 경찰관 등을 철저히 처단한다.
-실천사항
-친일파 모리상간배 등 악질적인 간부를 엄정 조사.
-인민의 고혈인 은행예금동결 재산 몰수.
-적산가옥, 관권을 이용 억지로 빼앗은 집은 연고자 돌려준다.
-매판자본가가 세운 사업장 운영권은 종업원에게.
-식량영단의 문을 열어 인민 대중에게 쌀을 배급.
-금융기관의 문을 열어 대중에게 자금 대출.
⃟인구부(잉구부)전투:(연등동 443번지 일대)
여순사건이 일어난 후 1948년 10월24일 진압군과 봉기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
었던 대표적인 격전지로서 당시 반군토벌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송호성 준장이 지
방 좌익에게 저격당해 차에서 떨어지며 고막이 터지는 등 진압군 대열이 무너지며 후퇴한 사건이 있었으며, 송호성 사령관의 장갑차 대열은 시내 중심부인 충무동 미곡창고(전, 시민극장 자리) 앞까지 깊숙이 진격해 왔으나 , 인구부(왼쪽으로 구부러진 지형)의 협곡능선에 매복 해 있던 지창수의 봉기군과 유목윤 보안서장의 지방좌익 무장대에게 기습을 당하는 등 봉기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여수탈환작전에 실패를 거듭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수에 남아있던 지창수를 포함한 14연대 봉기군들은 야음을 틈타 묘도를 거쳐 광양 백운산으로 입산하였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때 여수지역의 진압작전을 이끈 것은 백선엽. 김백일, 박기병,
백인엽 등 주로 만주군 출신, 이들은 만주군에서 익힌 임진격살(臨津擊殺)을 여수
진압 작전에서 그대로 사용했는데 임진격살이란 군인과 경찰의 재량으로 적대하는
- 5 -
세력을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고 합니다.
⃟서국민학교(현,서초등학교) 서교1길 29번지(서교동)
여순사건 진압이 완료되자 진압군과 경찰은 10월 27일부터 시민들을 가까운 학교나
운동장으로 모이게 하였다. 강제집결지로는 서초등학교(서교동) 외에도 동정공설운동장(옛, 여수역앞 시장터), 동국민학교(현,동초등학교), 종산국민학교(현,중앙초등학교), 진남관 및 미평과 국동의 넓은 공지로 집결시켜놓고, 우익과 경찰은 전 시민을 대상으로 여순사건 동조자를 심사한다면서 길게 늘어선 인간터널을 통과하게 하여 누구라도 손가락질에 걸리게 되면 따로 분류되었다.
이를 일명 손가락 총이라 부르는데 일부는 학교 뒤에 파놓은 구덩이로 끌려가 즉결 총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손가락 총 분류 및 부역협의자 심사 대상자는 –교전중인자 – 총을 가지고 있는 자 -“ 지까다비(地下足袋, 일할때 신는 일본식운동화)를 신고 있는 사람,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사람, -미군용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깍은 자,” 등이었다,
분류된 이들 중 일부는 즉결 처형으로 죽임을 당하고 부역협의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종산국민학교로 압송되어 풀려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형무소로 보내지기도 하고 학살되기도 하였다,
○진압군은 계엄법 없는 계엄령을 발동하여 무법과 불법적인 상태의 계엄령과 국방경비법을 1948년 10월21일 발동했다.
○국가보안법 제정 1948년 11월 20일 국회통과하여 12월 01일 공포했으니 제정 공
포하기 전에 발동했으니 불법이다.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 제정되었으니, 말하자면 계엄법이 제정되지도 않았는데 불법계엄령이 선포된 것입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선포한 제주 4. 3 계엄령도 불법이고, 10월에 선포된 여순 10.19 계엄령도 불법이었습니다.
⃟종산국민학교 (현,중앙초등학교 학살지및 재판장소; 하멜로 35 (종화동)
여순사건이 진압되자 여수경찰서와 가깝다는 이유로 수도경찰과 전남경찰 및 여수
경찰서 특수대가 국방경비대 군인들과 함께 종산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10월28일부
터는 소위 부역 협의자 색출이라는 이름으로 여수읍과 인근 읍면 지역에서 끌려온
협의자를 10명씩 포승줄로 묶어 1949년 01월 중순까지 수용하였다.
서국민학교에서 부역협의자로 분류되어 압송되어온 일부사람들도 같이 수용하였다
가담자라고 판단된 사람들은 학교건물 뒤쪽에 마련된 즉결처분장에서 개머리판 참
나무 뭉둥이, 자전거체인 등으로 죽이거나 총살하였으며 “백두산 호랑이” 로 악명을 떨쳤던 부산의 5연대대 1대대장이었던 김종원은 여려 차례 시도했던 여수 상륙작전
- 6 -
실패에 대한 분풀이를 하듯 재판 없이 중앙초등학교 버드나무 밑(현,미끄름틀 터)에서 일본도로 목을 치는 광란적인 학살 만행을 자행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 증언에 따르면 지금의 중앙초등학교인 종산국민학교에 끌려운 협의자들은 약식 심사을 거치면서 군사재판을 받았으며, 당시 군법회의는 여수여자중학교의 교사(校舍)를 징발하여 진행하였으며, 민간인 희생자의 즉결처분을 진행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군사재판은 군인과 군속에게 적용되는 단심제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치국가에서 3심제도를 적용받아야 하는 민간인을 단심제도인 군사재판을 적용하여 수많은 시민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사형수 통계에도 빠져있어 “죽임조차죽인사회”에 죽어서도 민족 구성원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법무관 4명이 재판을 하였는데 협의자가 한명씩 법무관 앞에 나와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부역협의자 심사방법은 봉기군으로 활동했다는 확실한 증거보다는 경찰, 우익청년단원등이 협의자를 손가락으로 지목,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를 신은 자, 군용팬티입은자, 군용물품소지자, 머리를 짭게 깍은자를 비롯해 개인적인 감정까지 포함된 손가락 총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 당 하였다고 합니다.
학살되어 암매장되거나 만성리, 민드래미골짜기, 호명과 봉계동 등지에서 학살된 사람 모두가 이 학교에 수용되었던 협의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아직까지 그 규모와 내용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통한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중앙초등학교는 1917년 진남관에서 시작한 여수수산학교(현,여수대학교) 1944년 11월 국동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처음 학교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해방되면서 1940년 설립되었던 봉산동의 서국민학교로 부설 구봉간이학교가 교사(校舍)가 비좁고 부족
하여 잠시 진남관을 학교로 사용해 오다가 1946년 9월1일 여수시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학교 명칭을 종산국민학교로 바꾸었다.
이 학교의 현재의 이름인 중앙초등학교는 여순사건 후인 1951년 9월 1일부터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신항과 함포사격(수정동 774-4번지 주변)
여수 신항지역은 여순사건발생 4일후인 1948년 10월22일 백두산 호랑이로 악명을
떨쳤던 일본군 하사관 출신인 김종원 대위가 부산의 5연대 1대대를 이끌고 해군 LST(상륙함)에 승선하여 10월23일 아침 9시40분경에 여수상륙을 시도 했던 곳 입니다.
하나 대개 한국군 지휘관은 즉각 상륙을 주장했고, 미군고문관은 상륙보류를 요구했는데 김종원 대위 단독으로 박격포사격 및 상륙작전을 시작했지만 부정확성과 반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많은 사상자를 냄으로써 오후에는 공격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상륙작전은 실패하였고 해군 LST(상륙함)로 다시 후퇴하였다
- 7 -
최후의 본격적인 여수 탈환작전은 사방을 포위한 “압박섬멸작전”으로 10월26일 정오경에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곳 신항지역은 이때까지도 반군의 저항이 치열하여 LST에 승선한 5연대
1대대는 아직 상륙은 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조급해진 5연대는 81mm박격포 2문을 갑판위에 설치 해 놓고 사격을 시작하면서 상륙을 재시도 했으나 갑판의 변동으로
탄착점이 제대로 조정되지 않아 여수시가지에 화재가 발생하여 더욱 초토화시켰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진압군 측의 사상자까지 냈다.
결국 김종원 대위 5연대는 진압이 완료된 후 무혈상륙을 하게 되었다
상륙하지 못한 분풀이로 종산국민학교에서 만행을 자행했다,
이후 한국전쟁 중에는 거창 양민 학살사건 조사와 관련된 국회의 방문조사때 국군을 빨치산으로 가장하여 습격해 조사활동을 중단시켜 1951년 9월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재판결과 징역 3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대통령 특사로 사면 받고 풀려났으며, 1956년 5월15일 대통령선거 뒤 부정선거의 공을 인정받아 내무부 치안국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5월 혁명 뒤 임흥순과 이익홍 등과 함께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에 연루돼 징
역 15년을 받고 서울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62년 9월7일 검찰의 형집행 정지지시
로 출감하였고, 1963년 “5.16 혁명기념특사”로 석방되었으나 1964년 1월30일 지병인 당뇨병으로 사망하였다.
⃟여순사건희생자 위령비(만성리 학살지(만흥동 149-6번지)
여순사건희생자 위령비가 있는 만성리학살지는 1948년 11월 초순 (현)중앙초등학교
인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여순사건 부역협의자 중 일부를 이곳에서 학살하고 협곡과 같은 골짜기 속으로 던져 넣은 후 흙, 모래와 돌로 암매장한 곳이다.
이후에도 종산국민학교에서 포승즐에 끌러온 사람들을 이 골짜기에서 계속 학살하여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가득하였고 그래서 시내를 가고자 했던 만성, 오천 주민들은 공포의 땅이 된 이 지름길을 두고 일부러 먼 거리를 돌아가기까지 했다는 증언
이 있다.
사건 이후 이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위하여 작은 돌
을 계곡에 던져 넣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풍속이 한동안 오래 지속되어 돌무덤처럼 솟아 오랐다고 합니다.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는 2009년 건립되었다.
⃟만성리 형제묘 학살지(만흥동 162-2번지)
만성리 형제묘가 있는 곳은 여순사건의 부역 협의자가 되어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
었던 사람들 가운데 진압군이 생각하기에 적극 가담자로 분류된 125명이 처음으로 1949년 01월13일 이 자리에서 집단 학살된 곳이다.
- 8 -
처형은 헌병들이 주도하였으며 처형된 가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보초를 세우고
접근을 못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들은 총살당한 뒤 5명씩 장작더미위에 묶었으며
그 위에 다시장작더미를 올려 시체를 다섯묶음의 5층을 만든 후 시체장작더미위에
기름를 붓고 불을 지름으로써 3일 동안이나 불이 꺼지지 않았으며, 죽은 사람이 누
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시체와 기름타는 불쾌한 냄새는 몇 개월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형제묘는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이름이 붙여진 곳이며, 마치 제주의 백조 일손 지묘 (白祖一孫之墓)를 연상케 한다.
⃟오동도 학살지(오동도로 222번지 (수정동)일대
서국민학교 (현,서초등학교) 운동장 등 여수시내 넓은 공공장소에 집결되어 수용된 여수시민들은 하룻밤을 꼬박 세우고 다음날인 28일에야 풀려났지만 진압군은 40세 미만의 시민들을 부역협의자로 간주하고 젊은 남자들 600여명을 따로 색출하였습니
다. 이들 협의자는 오동도에 제수용되거나 종산국민학교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일부 언론의 보도(조선일보 1948. 11. 02자)에 의하면 이곳 오동도 학살지에는 학생 약 200명, 일반인 6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고 보도 했고. 경향신문 1948. 11. 02.자에 의하면 1,063명으로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오동도에서 수용되었다가 풀려난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오동도로 끌고 간 후 대층 질문을 한 뒤에 오동도 입구의 바위 위에서 총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동도로 여려차례에 걸쳐 사람들을 끌고 갔고 희생자에 대한 규모도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여순사건 기간 중 오동도에서 70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용된 시민들이 얼마나 학살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수용된 인원 중 수백명이 집단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입니다.
⃟구봉산 학살지 (국동 89번지 부근)
구봉산(386m)은 국동, 신월동, 여서동, 봉산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여수 (구) 도심지를 에워싸고 있는 장군산, 종고산, 중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이곳 구봉산은 여순사
건 당시 여수수산학교, 종산국민학교, 서국민학교, 등지에서 부역협의로 연행되거나
억류된 주민들이 진압군에 의해 이곳으로 끌러와 처형당한 집단 학살 현장입니다.
진압군은 구봉산 중턱으로 부역 협의자들을 끌고 와 처형하였는데 1948. 10. 28일은 5연대 1대대 군인들에 의해 8명, 1949. 11. 03일은 15연대 군인들에 의해 4명. 같은 날 30여명의 젊은이들을 트럭에 실려 끌려왔습니다.
진압군은 이들에게 장작을 지고 산에 오르게 한 뒤 5∼6명 단위로 총살한 후 시체를 불에 태워 유족들이 시신조차 찾기 어렵게 학살현장을 은폐하는 만행을 자행하
- 9 -
였다.
당시 주민들은 이들이 장작을 지고 가는 장면을 함께 지켜보았다고 증언하고 있습
니다.
⃟국동 학살지(신월로 627번지 부근)
진압군경은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된 사람 중에서 적극 가담자라는 이유로 1948년 11월 03일(음력,10. 03.) 30명을 트럭으로 싣고 신월로 627번지 부근에 와서 학살하고 암매장했습니다, 훗날 이곳에는 여수보육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형이 학살된 전 여순사건유족회장 김천우의 증언)
⃟오림동 학살지(오림동 104번지 시립테니스장 뒷산)
오림동은 여순사건 당시 여수 도심권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진압 작전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948년 10월25일 오전 10시경 마을 뒷산인 호암산을 넘어온 국군 12연대소속 군인
들이 총을 쏘며 이곳 오림동 내동으로 진입해 왔습니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전부 손들고 나오라며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들을 마을회관 앞으로 전부 집결시켰습니다. 마을 앞으로 집결된 주민들은 1차로 돌산에서 놀러온 여수수산학교 학생을 즉결 처형하고, 2차로 마을 청장년 9명도 옷을 벗겨 팬티만 입힌 채 현 오림동 104번지, 체육공원 시립테니스장 뒷산, 왼쪽 선바위 아래로 끌고 가 집단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당시 이를 목격한 주민들은 “신체가 건장한 청년들은 좌,우익을 가리지않고 총살시킨 것이라며, 진압군이 젊은 남자라면 무조건 죽이려했다” 고 그들의 만행을 증언했습니다. 이후 마을 주민들은 이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공동묘지에 매장하였습니다.
⃟애기섬 학살지(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산 444번지)
1949년 6월 5일부터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좌익 활동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켰는데, 정식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으나 통상 보도연맹으로 불렀으며, 여수의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여순사건 관련자들과 그들의 가족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여수를 비롯한 시 외곽 지역인 율촌, 소라, 삼일, 쌍봉의 보도
연맹원들을 여수경찰서 무덕관에 집결시킨 후에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산
444. 남해도 남단에 있는 애기섬으로 끌고 가 총살 수장하였다.
그 외에도 남면, 화정면, 삼산면,의 섬 지역은 주변 무인도나 바다에서 처형 후 수
장하였으며, 당시 특무대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애기섬 희생자는 약 120명 이내로 추정하며,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된 인원은 약 35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 10 -
⃟호명동 암매장지(호명도 산 140-5번지 일대)
진압군은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부역협의자 중 일부를 야음을 틈타 인적이 없고 후미진 호명동 야산으로 끌고 가서 몇일에 걸쳐 학살을 자행하였다.
사건 후에 이 일대를 지나는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
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1990년대 초 이 일대의 도로공사 중에 많은 유골이 발견되었고 둔덕동 용수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나간 트럭과 실려 간 사람들을 보았을 때 호명동 야산에서만 100여명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호명동 암매장 발굴을 1998년 10월 12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 여수KBS, 여수
MBC와 여순사건 50주기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함께 시작하여 총탄구멍이 선명하게 나있는 두개골을 포함한 5구 이상의 유골을 발굴했으며, 이 후 호명동 암매장지에
서 제2차 1999년 발굴을 시도하여 다량의 유골잔해를 발굴했으며, 발굴된 유골들은 여수시의 협조로 1999년 10월 18일 석천사에서 천혼제를 지내고 여수시립묘지에 장지를 마련하여 억울하게 죽었던 희생자의 넋을 달래 주었습니다.
⃟여순사건 희생자의 묘 앞(소라면 봉두리 1347-5번지)
여순사건 희생자의 묘지 앞에는 문병란 시인의 “여수 오동도 동백꽃”이라는 추모사와 조계수 시인의 “진혼”이라는 추모시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 여수 오동도 동백꽃 ]
문병란 시인, 조선대 교수
여수 오동도 동백꽃이 무슨 빛깔인가. 붉다 못하여 그 빛깔 사뭇 핏빛인 것을⋯
누구를 위하여 그는 50년간 피눈물 속 진한 핏빛으로 통곡해야 했는가,
我와 非我의 구분도 없이, 敵과 同志의 분별도 없이, 남의 총, 남의 칼 손에 들고,
형제의 가슴에 처절히 뿜었던, 민족분단의 눈먼 총소리, 옥과 돌이 구분 없이,
한꺼번에 마구 타버리고, 이념과 사상이, 눈 먼 애비가 된 깜깜한 밤,
길 잃은 심청이는, 애비의 지팡이보다, 칼을 쥐고 있었느니라, 하룻밤 폭풍에 찢긴, 여수 오동도 동백꽃은 어머니 가슴, 쪽빛 바다에 ,제 그림자 드리우고 갈기갈지 무너진 가슴, 잿더미 불바다 위에서, 어버이는 땅을 치며 통곡했느니라, 잘못 핀 동백꽃, 너무 일찍 핀 진달래, 그 눈먼 꽃을 위하여, 다시 봄바람 불어오고, 그
날의 심봉사를 위하여, 그날의 심청이를 위하여, 여기 부르지 못한 노래를 쓴다,
태우지 못한 향을 사르고, 흘리지 못한 눈물을 태운다, 원수고, 동지고, 한자리 볼러
모아, 역사여, 거꾸로 흐리지 못하는, 대하의 강물 줄기여, 오늘 이 자리 고개 숙이 고, 여수 오동도 동백꽃, 이름 없는 돌비 앞에,
늦어버린 속죄의 조가를 읊조린다, “오오 그 대들은, 이제 죽음속에 무죄이니라”
- 11 - 1998. 10. 19
[ 진 혼 (鎭 魂) ]
조 계 수 시인, 방송작가
- 통곡조차 죄가 되던 세상, 떠도는 혼령이여 -
세월이 오면, 어혈을 풀지 못한, 여수 앞 바다는, 급이급이 갈기를 세워 달려든다, 신월리에서, 만성리에서, 가막섬 애기섬을 돌아오는, 저 외치는 자의 소리여,
그 소리결에 천년을 두고도 늙지 않는 바람이, 오동도 시누대 숲을 흔들어 깨운다.
반세기 가려진 햇빛이 비늘을 벗는다. 살아서 죽은 자나, 죽어서 산 자나,
이제는 입을 열어 말할 때, 오! 그날밤, 하늘마저 타버린 불길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다, 눈먼 총부리에 쓰러진 그 들은, 저 살 제 피 붙이였다,
밤 내 돌아오지 않은 아들을 찾아, 피 묻은 거적을 들추는 어미의 거친 손,
통곡조차 죄가되던 세상, 그 핏물 스며든 땅에, 씀바귀, 지칭개, 민들레, 들꽃들은 다투어 피어나는데, 아직도 어두운 흙속에 바람 속에, 두 손 묶어 서성이는 혼령이여, - 자유하라, 그대들을 단죄 할 자 누구도 없나니-
허물을 털고 일어서는 진실만이 용서와 사랑의 다리를 놓는 법,
그 다리를 건너오는 아침을 위해, 눈 감지 못하는 하늘이여, 다물지 못하는 바다여, 50년 바람 속에 떠도는 호곡을 그치게 하라,
2000, 10, 19
⃟안도 선창학살지(남면 안도 해변길 1번지)
남면 안도 해변길 1. 안도는 아름다운 비경을 안고 있는 비렁길로 잘 알려진 금오도의 동쪽에 있는 섬으로 5연대 1대대(대대장 김종원 대위)에 의해 주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곳입니다,
1948년 11월 1일 오전 3척의 선박에 분승하여 연도를 출발한 5연대 1대대는 안도
이야포에 접안하였다, 접안하면서부터 진압군은 안도 마을에 박격포를 발포하면서 섬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안도 축항 선착장에 배를 정박시킨 진압군들은 집에 불을 지르고 공포탄을 쏘면서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마을 주민 150여명 모두를 안도국민학교에 집결시킨
후, 집결된 주민들 가운데 청년들을 따로 분류하였는데 이중 한 청년이 무고한 사
람들을 끌고 간다고 항의하자 그 자리에서 총살 해 버렸습니다.
이때 사살 명령을 받은 사병이 총살을 주저하자 김종원 대위가 크게 화를 내면서 칼집으로 사병을 구타하며 독려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김종원 본인이 직접 총살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따로 분류된 청년들 40여명을 3열종대로 줄을 세우게 하고 몽둥이로 무차별 구타했으며 청년들
- 12 -
은 비명과 신음을 지르며 선착장으로 끌려갔으며, 이 중 12명을 아무런 재판 절차도 없이 즉결처형 했습니다.
⃟거문도 학살지 / 검등여 학살지(거문도 신사터 / 거문도 검등여)
삼산면 거문도는 여수 최남단에 위치한 도서지역으로 삼산지서의 경찰과 해군에 의해 주민들이 사살된 사건이 주를 이룹니다. 거문도 학살은 거문도 전 지역인 동도
와 서도 , 고도인 일제 신사터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1948년 11월5일에 덕촌리 사람, 1949년 7월26일에는 서도리에서 여순사건 부역협의자 120여명이 삼산지서 경찰과 의용경찰, 해군에 의해 여수로 끌려가 학살을 당 했습니다.
거문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학살을 당한 이유는 구한말 영국의 거문도 무단 점
령(거문도 사건)이후 한반도 개항 1번지인 이곳이 정치, 지리적 여건으로 사회주의자로 의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거문도 검등여 학살은 여순사건과 관련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인 박모씨 가족등을 삼산지서로 예비검속한 뒤 1950년 8월 10일 삼부도 방향에 있는 검등여로 싣고 가서 6명을 총으로 학살한 사건입니다. 박모씨는 청년단 활동을 지도했다하여 국민보도연맹원으로 가입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신청인들의 진술뿐 아니라 여수 경찰서 경찰의 진술, 여수지구 CIC대원의 증언, 15연대 헌병대원의 증언 및 진술과도 일치합니다.
⃟손양원 목사 순교지(둔덕동 617-10번지)
손양원(본명:손연준)목사는 1902년 06월03일에 경남 함양군 칠원읍 구성리에서 출생하신분이며,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전도사가 되어 1939년 여수 애양원 교회에 재직하면서 한센병환자들의 치료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으로 1950년 09월28일 한국전쟁 중 공산군에 의해 미평과수원 골짜기에서 순교하셨는데 1977년 11월26일 소천한 정양순 사모와 함께 신풍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앞 언덕 넘어 바로 아래에 합장하였으며,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의 묘는 그 앞쪽에 있어 삼부자 묘가 같이 있습니다. 참고로 양자인 안재선은 (1931∼1979) 손양원 목사와 같은 나이 48세에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주소: 율촌면 산돌길 70-62
1948년 여순사건 당시 좌익계열 학생들로 구성된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의 안재선에 의해 손양원 목사의 큰아들 동인(1924∼1948)과 작은 아들 동신(1930∼1948)이 10월21일 총살당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였지만,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공개 처형으로부터 지켜내고 양아들로 삼았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아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한 그의 행적을 두고 “사랑의 원자탄“ 이라고 하며 길이길이 기억되고 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는 가르침을 실천하신 목사입니다.
- 13 -
⃟미평심상소학교(현,미평초등학교 와 김영준(좌수영로 390번지)
김영준[호는 백하(白霞) 1900∼1948년]은 경남 의령에서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나 17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무공장에 취직해 기술을 배우고 부산으로 건너와 천일
고무신을 생산했지만 “유사상표“ 재판에 휘말려 공장을 뺏기는 실패를 겪었다.
그 후 1935년 여수 남산동에 천일고무공장를 설립했고, 공장을 세우면서 일약 고무신업계를 주름잡는 국내 굴지의 대회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 후에도 그의 사업은 날개 돋친 듯 뻗어나가 서울의 경성 고무공장 주식을 다량 매입했으며 구례에 천일제재, 광주에 호남화학공장 등 유수의 회사를 거느렸다.
한편 현 미평초동학교의 전신인 미평개량서당이 후원금 등의 부족으로 정식 사립학교 인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김영준이 (사재; 50,000원희사, 매년쌀 2,000가마
지원) 후원하여 새로부지를 사들이고 건물을 지으면서 공식명칭 사립 미평심상소학교로 1938년 4월1일 설립 개교하였다.
김영준은 이와같이 지역의 교육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그 외에도 여수청년회관의 건립에도 많은 후원을 하였는데, 여수청년회관은 여수시 관문동 303번지에 자리잡은 익공식 2층 기와집으로 식민지 시대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벗어 나기위한 이 지역 청년운동 및 항일운동의 구심이자 상징으로 주요한 역할을 한 곳입니다.
광복 이후 전라남도 상공회의소 대표, 조선상공회의소 부회장, 천일산업주식회사사
장, 한국자동차 사장 등을 역임하는 한편 천일고무 부산공장과 이리공장 경영에도
참여했다. 전라남도 상공회의소 회장, 여수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여순사건 발발 이후 좌익세력들에게 과거 친일행적 [태평양전쟁당시 일본군에 비행기 구입비를 기부 (1941년 “여수 김영준호“ 라는 군용기 구입을 위해 10만여원을 헌납하기로 결정한 후 이듬해 5만3천원을 조선군 애국부에 냈고, 또한 동년 방공 통신용 경찰전용전화가설비 1만원헌납)한 공로로 일제로부터 감수포장과 주요 우익인사 (한민당 여수지구당 위원장, 라는 이유로 붙잡혀 있다가 1948년 10월23일 오후 대판통 사거리에서 사형을 당해 둔덕동 산에 안장하였다, 1969년 여수 시민의 날 “시민의 상” 추서도 했다, 당시 주요인사로 희생된 사람들은 대한 노총 여수지구위원장 박귀환, 사찰계 형사 박찬길, 박기남, 경찰서 후원회장 연창희, 한민당 간부 차활언 등이었습니다.
○여순사건이후 군부변화는 “반공” 이념의 정착을 병사들에게 주입하고, 우익청년단체을 육군에 입대시키고, 1948년 12월 20일 200명의 서북청년단체들이 비밀리에 대전의 경비대에 입대한다.
1949년 7월 15일 국회에서 병역법이 통과되어 8월 6일부로 공포되어 과거의 모병이
아닌 20세이상 40세까지의 대상자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강요하였다.
- 14 -
○해방 후 정권기반이 약한 이승만 독재정권은 민중항쟁을 토벌하면서 무차별 학살
을 자행하고 불법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많은 민중을 증오와 협오로 무차별 공격하였으며 주거지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마을 어귀에 모아 무릎을 끓리고 손가락
총으로 무고한 사람을 지목하여 억울하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여순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이승만 정권의 실정에 저항한 국민의 저항운동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4,19혁명, 광주5,18 민주항쟁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어떤 법적절차도 지키지 않은 채 국민의 생사를 국가권력이 결정,
군대, 경찰, 우익청년단이 폭력으로 주민을 살해했다.
이승만 정부에게는 정권붕괴의 위기가 될 수 도 있었지만 미국의 지원으로 진압에성공했습니다.
○여순사건 희쟁자에 관하여
아직도 시신수습이 안된 행방불명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씻기지 않을 한(恨)을 세상에 남겨둔 채 유명을 달리하신 희생자 영령에 삼가 명복
을 빕니다.
또한 긴 세월동안 사회의 편견과 불명예에 떨면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픔마저
가슴에 담아 74년의 긴 세월을 고통 속에 살아 왔습니다
이는 과도한 이념의 대립이 얼마나 가혹한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경종입니다
여순사건 특별법이 2021년 6월 29일 국회의결 되어 7월 20일 공포되면서 이제 오명과 상처를 씻을 길이 열렸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제 여수의 오랜 염원이었던 여순사건 특별법이 2022년 1월 21일 시행되면서 우리는 여순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첫발을 내 디뎠습니다.
여순사건 희생자 수는 아직 불분명하나 전남 보건후생부의 1949년 11월 이재민 구호자료에는 당시 전남이 11,131명이 희생로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피해 실태조사를 통해 파악한 통계 추정치인 10,000여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수시는 여순사건 특별법 시행에 따라 2022년 01월21일부터 2023년 01월20일까지 1년간 여순사건 피해신고, 접수결과 희생자가 유족 2,032건과 진상규명 31건으로 총2,063건이 접수됐다고 밝혔다,
또한 접수마감을 앞두고 미 신고자 독려와 함께 (사) 여수지역사회연구소와 협업해 미 신청자 900여건에 대해 제3차 추진했다고 합니다.
유족 대부분이 고령이시고 상황을 진술 해 줄 보증인도 찾기 힘들어 신청 자체가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답답할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조속히 희생자 명예회복과 피해자 지원제도가 완료되어 지금까지의 상황을 점검하고 완전한 과거사 해결 공감과 화해 그리고 통합의 미래로 나아갈 준
- 15 -
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여순사건 특별법을 바탕으로 철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이 최우선시 되기를 기원 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합니다.
여순사건은 극심한 이념대립과 잘 못된 국가권력이 빚어낸 시대적 참극이였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건이후 74년이 지났음에도 회생자 유가족들이 지금도 눈치 보
니라 신청을 꺼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사이 희생자와 유족들은 한 평생 온몸으로 피해를 겪으며 죄 없는 죄인으로 숨 죽여 지내야 했습니다.
그 동안 갈등과 대립을 관용과 화합으로 승화시켜 미래를 향한 더 큰 발전의 디딤
돌이 되기를 기원 합니다.
따라서 74년 전 억울하게 희생되신 수많은 원혼들의 슬픔을 추모하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화합과 상생의 희망찬 미래가 되기를 바라고, 여순사건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께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머리 숙여 명복을 빌면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16 -
|